00792 88. 1609년 =========================================================================
경제계획과 화폐금융을 담당하는 김수공이 이민호를 찾아왔다. 그 동안 고민을 많이 했는지 볼 살이 쪽 빠져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지속적인 금 보유량 부족 현상을 약간이나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허하신다면 그 방법을 사용하겠습니다.”
“그게 뭔가? 남아프리카에서 금을 본격 생산하기까지 3개월 정도 남았네. 그런데 이런 식이면 매달 몇 백 톤씩 생산해도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이 없어. 빈 독에 물 붓기야. 제안이 있다면 어서 말해보게.”
“모순처럼 여겨지지만 현재 고산국 금화가 같은 무게의 순금에 비해서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금화는 불순물이 많고 순금 함량에서 그만큼 신뢰를 못 얻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순금은 어딜 가나 순금이지 무슨 소리야? 역시 화폐의 신용 문제가 핵심이었다는 뜻인가?”
10그램짜리 고산국 금화에서 순금 함유량은 9.9그램이며 이는 순도가 99퍼센트임을 뜻했다. 순금에 가까울수록 말랑말랑해서 연성이 높다는 금의 순도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매우 단단한 것은 이 시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금속인 티타늄 합금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화 열처리를 가해 강도와 경도를 높이고 연성을 더욱 낮췄다. 쇠로 된 끌 같은 걸로 아무리 긁어봐야 금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유럽에서 주조된 금화와 달리 고산국에서 주조한 금화는 품질이 매우 일정했다. 순금 함유량은 물론 무게도 동일해 유럽에서 가장 정밀한 저울로 재도 개별 금화의 차이를 구별하기 어려웠다. 같은 종류의 금화인데도 저마다 함량이 다르고 무게도 제각각인 유럽의 현실에서 이는 꽤나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의 귀족이나 부자들이 재산을 숨길 때 고산국 금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바로 이것이 근래에 지속적으로 유럽 은행을 지급 불능 위기로 몰아넣는 주요 원인입니다. 아무리 금화와 은화를 발행해도 시중에서 유통되는 양은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은 보관하고 나쁜 것을 먼저 쓰게 돼 있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 그대로 지나온 시대마다 여러 지역에서 저마다 주조한 옛 금화나 은화만 시중에 돌아다니고, 고산국에서 발행한 금화는 절반 이상이 장롱 깊숙한 곳, 혹은 지하 창고 바닥에 묻혔다. 뇌물로 바쳐진 금화도 그런 경로를 밟아 시장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유럽 은행에서 제때 금화로 지급하지 못해 쩔쩔 맸고, 대량 거래의 경우 예전처럼 금괴로 대신했다.
에스파냐 같으면 어느새 국왕의 은화 주조권을 위협할 정도로 고산국 금화가 점차 법정 통화의 지위를 차지하려는 추세였다. 에스파냐 국왕은 특권으로서 은화 주조업자에게서 일정 비율의 은을 받는 대신 은화 주조를 허용했는데, 고산국 금화와 은화가 시장에 범람하면서 자칫 국왕의 주요 수입원이 끊기게 생겼다.
프랑스 어느 부유한 귀족의 저택에서 도둑질을 당했을 때도, 독일 어느 농촌에서 돈 많은 과부가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을 때도 사람들은 10원짜리 고산국 금화의 숫자를 이야기했다. 이렇게 유럽인 모두가 고산국 금화를 돈의 기준으로 여기고 있는데 정작 시중에 유통되는 양은 극히 적었다.
이런 식이면 끊임없이 금화를 주조해도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오스만 제국과 동유럽, 폴란드와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과 정치적 혼란도 금화 수요를 부추겼다. 그런데 고산국 금화는 미국 종이돈 달러도 아니고 진짜 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화폐는 발행한 나라의 신용도에 따라 가치가 오르내립니다. 수십 년을 이어지는 전란의 시대에 고산국만큼 안정적인 대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흠. 유럽 상인들이 고산국 금화를 선호하다 보니까 값도 자연스럽게 올랐고, 품귀현상도 빚어진 것이로군. 그럼 해결 방법은 뭔가?”
“금 자체의 문제이기에 다른 방법은 거의 효과가 없습니다. 금화 부족 사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유럽의 금화를 걷어 들여 고산국 금화로 다시 주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조 비용을 제외하고도 많이 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그토록 노력했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나?”
고산국의 국고와 유럽 은행에 부족한 것은 지급 보증에 활용되는 금 또는 금으로 만든 금화지 재산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온갖 데에서 주조한 옛날 금화와 은화는 유럽 은행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다만 유럽 은행과 거래하는 고객들이 고산국 금화만 받으려 한다는 점에서 만성적인 지급 불능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옛 금화를 녹여 새 금화로 만드는 일이 이익이 될 수 있었다. 금화를 주조한 쪽에서 순금 함량과 무게를 속이거나 사람들이 저마다 금화 표면을 긁어내는 짓을 하는 현실에서, 유럽에서 발행된 수십 종류의 금화는 화폐로서 신용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국가들과 공존 공영하려는 전하의 높은 뜻을 이해합니다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고산국의 신용에 큰 타격이 올 수 있습니다.”
“녹여서 주조해봤겠지?”
“예. 덴마크 서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서 100kg 정도를 시험해봤는데 괜찮았습니다. 부자들이 고산국 금화를 사들이기 위해 기존 금화를 내놓고 있어서 양은 충분하고 가격도 저렴합니다. 순금 함량이 기준보다 떨어지거나 금화 표면을 긁어낸 경우가 흔하더라도 금화의 가치에 충분히 반영되기에 우리가 손해 볼 염려는 없습니다.”
오히려 감정가가 비용으로 처리되기에 옛 금화의 가치는 그 안에 함유된 순금의 가치보다 못했다. 상품 화폐의 한계였다.
“하지만 에스파냐에서 좋아하지 않을 것 같군. 거긴 사적으로 은화를 주조하는 대신 국왕에게 세금을 바치잖아?”
“은화는 상관없고 기준 통화인 금화 문제입니다. 에스파냐에서 금화를 발행한 사례는 1550년대 이후 없으며, 그 금화도 지금은 거의 유통되지 않습니다.”
“좋아. 그럼 은화는 빼고, 유럽 금화를 모아서 10원짜리 금화 위주로 재 주조하도록 하세. 불편해도 할 수 없지.”
고산국의 기준 화폐는 10원짜리 금화였다. 1원 주화는 시장에서 10원 금화의 10분의 1 가치로 통용되긴 했지만 이것은 금과 은의 합금이며 금의 순도가 적어서 선호도가 낮았다.
10원 금화의 일반적인 가치가 금화에 함유된 순금의 가치와 비슷하다면 1원 주화는 그 자체에 함유된 귀금속의 가치보다 높게 통용돼서 신용화폐의 성격이 어느 정도 반영돼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컸다. 그러나 1원 주화 열 개를 유럽 은행에 가져가면 언제든 10원 금화로 바꿔주기에, 액면가에 비해 재료의 가치가 떨어지더라도 1원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다.
고산국에 고용된 스위스 용병들의 경우 1원짜리 주화로 봉급을 받았다. 만약 1원 주화의 가치가 요동칠 경우 용병들이 고용주를 상대로 들고 일어날지도 몰랐다. 구르카 용병들은 예전에 은의 무게로 봉급을 받다가 최근 1원짜리 주화로 받게 돼서 고개를 갸웃하는 정도였다.
용병들도 주화에 함유된 귀금속의 가치가 실제 시장 가치보다 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1원이 10원의 10분의 1 가치로 통용됐기에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10원 금화와 달리 1원 주화는 자연스럽게 신용 화폐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맡았다.
“아직은 괜찮더라도 조만간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백성들이 기본 소득을 받아 절반 이상을 은행에 그대로 저축했기에 망정이지, 자칫 대량 인출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걷잡을 수 없을 뻔했습니다.”
“백성들이 돈을 쓸 곳이 별로 없는 탓이기도 해. 사는 게 별로 재미가 없지.”
신용 화폐가 도입된 다음이라면 모자라는 지폐를 찍으면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된다. 원래 금 본위제나 금태환제를 기반으로 한 지폐 시대는 경제 규모가 커지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완전한 신용화폐 시대로 흐르게 돼 있었다.
그러나 신용 화폐 시대가 되면 전반적이며 지속적인 물가 상승, 즉 일상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지폐를 대량 인쇄하는 것이 귀찮아져서 은행 단말기나 기록 장치에 전자적인 숫자로만 남을 수도 있었다.
“백성들이 돈을 쓸 필요가 별로 없는 탓이기도 합니다. 고산국에서는 누구나 쪼들리지 않고 여유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전하께서 백성들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아부하지 말게. 은행 수신 이자가 요즘 얼마나 하나?”
“연리 1.2퍼센트입니다. 고산국 금화 수요가 왕성한 유럽 때문에 북미와 본토에서 이자율을 많이 올렸습니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이렇게 높은 이자율은 오래 유지 못합니다.”
“그렇겠지. 나중에는 돌려줄 돈이 없어.”
정확히는 금이 부족하다는 말이었다. 신용 규모는 얼마든지 부풀릴 수 있어도 지구에서 금의 산출량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발행했던 금화를 녹여 새로 10원짜리 금화를 만드는 것을 승인하겠네. 하지만 조만간 남아프리카에서 본격적인 생산에 나서면 새 금으로 금화를 발행하게.”
“유럽 여러 나라 정부나 귀족들의 이익을 보장해주기 위해서입니까?”
“그런 면이 있다네. 그리고 고산국은 세계 정부가 아니야. 그렇지?”
“물론입니다, 전하. 다른 나라의 화폐 문제를 고산국이 비용을 들여서 해결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지금이 신용화폐 시대라면 고산국 화폐가 기축 통화가 될 경우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현대 미국처럼 정책적으로 무역 적자를 내면서 다른 나라들에게 외환, 즉 달러를 보유하게 해주어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미국 화폐인 달러의 신용으로 그들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한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고산국은 금본위제였고, 금화의 지속적인 유출을 겪고 있었다. 사실 새 금화를 지급하고 옛 금화를 받았으므로 순금의 양으로 따지면 오히려 이익이었다.
오랜만에 눈 밑에 작은 점을 하나 찍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미행(微行)에 나섰다. 평소에는 호위들과 함께 시내에서 군것질하러 나간 적이 많았으나, 이번에는 백성들이 즐기는 각종 취미생활을 살펴봤다.
산악자전거나 등산 등 힘든 것은 빼고, 건국 이후에 학교를 다닌 젊은이들이 즐기는 체육이나 음악, 미술 등도 제외했다. 그러다 보니 낚시와 산책, 바둑 같은 조용한 취미밖에 남지 않았다. 이민호는 오랜만에 야외로 나가 바람을 쐬기로 했고, 이를 위해서는 바다낚시가 가장 잘 어울렸다.
“양어장 낚시터도 아니고 그냥 방파제나 갯바위에서 낚시하겠다는데 입장료를 받는다는 말입니까?”
“나라에서 정한 것이오. 그리고 일행 중에 낚시 면허증을 가진 사람이 없으면 낚시를 할 수 없으니 이만 돌아가시오.”
입장료를 받겠다는 어촌 마을 노인에게 국가 정책의 부당함을 역설하는 국왕 되시겠다. 외 호위대장 민정은 고개를 돌려서 쿡쿡 웃고 토요일 오후에 갑자기 끌려 나온 감불은 안절부절못했다.
“도련님! 제가 낚시 면허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입장료는 형수님, 아니 총리님이 시행한 정책입니다.”
“낚시꾼들이 문제를 일으켰는지 모르겠지만 취미생활에 대한 제재가 너무 심한 것 같다. 그리고 한나절에 10전이라니! 한 끼 거하게 식사할 수 있는 돈이잖아? 너무 비싸.”
이민호가 툴툴거리면서도 결국 지갑을 열었다. 어부 노인이 감불이 내민 낚시 면허증을 보고 이름과 주소를 책에 적어 넣고 몇 가지 주의사항과 명당자리를 알려주었다.
“요즘은 감성돔 낚시가 마릿수도 많고 조과가 괜찮소. 방파제 전반적으로 찌 띄울 낚시를 하면 손바닥만 한 놈들이 잡아당기는 힘이 만만치 않을 것이오. 만약 대어를 노린다면 저기 조류가 도는 곳에 봉돌 없이 흘림낚시를 해보시오. 쓰레기는 이곳에 버리시고, 가실 때는 반드시 마을회관에 통보해주시오.”
노인이 하는 조언은 이민호에게 들리지도 않았다. 감불에게 면허증 만드는데 얼마나 들었냐고 물으니까 무료라고 했다. 교육 두 시간을 받고 시험에 통과해야 면허증이 나온다고 했다. 국가에서 받는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다른 어느 취미가 시설 하나 없이 입장료를 받나?”
“산골마을에서도 등산객에게 입장료를 받는 모양입니다. 대신 등산객들을 위해 길을 관리하고 실족해서 부상자가 생기면 병원으로 후송하는 역할도 합니다. 고산족에서 돈이 생기는 것보다는 일거리가 생겼다고 기뻐하는 모양입니다.”
“여기는?”
“입장료는 쓰레기를 치우는데 드는 비용이거나 일종의 정보 제공료겠지요. 어촌 노인들이 심심풀이 소일거리로 낚시 안내를 하는 모양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손만 내미는 사람들이 제일 밉더라.”
투덜거리면서 낚시 준비를 하는데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함께 마을에서 아이들이 여럿 몰려왔다. 구경꾼이 아니라 나름대로 낚시꾼이며 미래의 어부들이었다. 그러나 가게에서 파는 낚싯대가 아니라 대나무에 줄을 매달아 대충 만든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낚싯대로 뭘 낚을지 알 수 없었다.
“아저씨! 한 수 하셨어요?”
“우리도 금방 왔답니다.”
아이는 이민호에게 물어봤지만 감불이 대신 대답했다. 괜히 말을 내렸다가 벌금을 물면 창피 당할까 걱정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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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채 졸았습니다.
7월의 마지막 회입니다. 심기일전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ㅜ.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