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90 88. 1609년 =========================================================================
총리 혜영 밑에서 교육을 관장하는 최 선생은 건국 초기의 혼란 속에서도 참으로 많은 일을 해왔다. 학교 설립과 교사 선발 및 교육은 물론 학교 운영이나 교육제도 발전에도 직접 관여했다. 그 외에 초중고 학생들이 사용하는 모든 교과서와 교사들이 수업 준비에 참고하는 교사용 지도서까지 일부는 직접 집필하고 나머지는 감수를 맡았다.
체육과 예술을 중시하고 인성 교육을 강조하는 이민호의 지침에 맞춰 학생들의 방과 후 활동에도 최 선생이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마치 근대 유럽처럼 한 가지 체육 종목에 집중하고 또한 한 가지 예술을 취미로 갖게 됐다. 요즘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청년들은 최 선생이 키워낸 인재들인 셈이었다.
그러나 최 선생은 물론 혜영도 총리라는 직급으로 함부로 지시를 내리기 곤란한 교직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대학 교수들이었다. 학자들의 자존심과 늙은 남성들이 젊은 여성을 무시하는 전근대적인 분위기가 뒤섞여서 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사회와 시대를 막론하고 나이 든 학자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라서 아직 젊은 혜영과 최 선생이 원하는 대로 다루기 몹시 곤란했다.
“오늘 역사 및 고고학, 민속학, 인류학 관련 학자 여러분들을 모신 이유는 본국의 천년 대계를 위함이오.”
“성심을 다해 봉명하겠습니다. 그저 하명만 해 주시옵소서, 전하!”
그러나 교수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권위를 누리는 만큼 더 강한 권위에는 지극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 상대는 국왕도 보통 국왕이 아니라 건국왕이며 세계 절반을 차지한 정복왕인 이민호였다. 그 앞에서 교수, 학자들은 일단 숙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민호는 뛰어난 기술과 지식으로 고산국을 단기간에 과학적, 학문적으로 매우 앞선 나라를 만들었고 지금도 끊임없이 발전을 주도했다. 유학에서 성인으로 존중받는 요순이나 다른 성왕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에 꼿꼿하던 학자들도 이민호 앞에서는 다들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부드러운 자리를 마련하려고 식사에 초대했는데 오히려 학자들이 너무 긴장해서 마치 체할 것 같은 인상들이었다. 그래서 식사 외에 가벼운 죽이나 시원한 국물을 가져오라고 조리장에게 일렀다.
학자들은 조선의 유학자 양반 가문 출신이 절반 이상이었고 민속학 계열에는 원주민 출신 학자들도 많았다. 유럽 대학에서 근무하다가 교수로 초빙돼 온 학자나 유학자 출신으로서 고산국 본토에 눌러앉은 유럽인 교수들도 있었다.
“내가 생각해보니까 개국 이래 도시를 건설하고 논밭을 활발히 개간하면서 혹시나 그 땅에 묻혀있을지 모를 옛 사람들의 발자취를 없애고 있지 않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오.”
“아! 역시 전하께서 세상에 없는 고고학을 만들어 연구하라 하명하신 이유가 계셨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서양에 고고학과 비슷한 다양한 학문들이 있었다. 특히 역사학과 깊이 연관됐지만 고고학은 역사학의 하부 학문이 아니었다. 과거 인류의 행동을 연구하는 것은 같아도 연구 방법이 다르며, 고고학은 아예 인간이 아닌 물질이나 동식물의 흔적도 연구했다. 지질고고학이라면 인간의 활동이라는 소재 자체가 완벽하게 실종해버렸다.
“고산국은 처음에 조선인들과 고산족들이 합세해서 나라를 세웠지만 그 동안 넓어진 영토 내에는 다양한 옛 민족들의 문화유물이 산재해 있소.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 고산국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소.”
“우리와 핏줄이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옛 사람들을 존중하는 전하의 높은 뜻을 잘 받들겠습니다.”
감동에 젖은 조선 출신 학자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찬동했다. 그러나 아타얄 족 출신으로서 왕립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고산족들의 풍습을 연구하는 젊은 민속학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민호의 발언으로 한껏 고조됐던 분위기가 원주민 학자들이 화를 내면서 갑자기 어색해졌다.
“다른 핏줄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저희 고산족은 조선 출신 이민자들에게 정복된 원주민에 불과합니까?”
“아니, 저, 오해요. 핏줄이 이어지든 말든 말이오. 몽골이나 북미 등 다른 지역 이야기요. 그리고 솔직히 그쪽 고산족 입장에서도 조선 출신은 핏줄이 이어지지 않았잖소?”
“고산족과 조선 출신 백성들은 비슷하게 생겨서 쉽게 통혼을 하고 있습니다. 두 민족을 분리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대합니다.”
“물론이오. 죄송하오. 이렇게 사과드리오.”
고산국 사회 분위기에서 항상 소수나 약한 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기에 조선 출신 학자들이 금방 사과했다. 새로운 영토에 대한 이야기를 원주민 출신들이 오해한 것에 불과했더라도 예민한 민족 문제는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예 고산국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어디 출신이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고북, 혹은 고남 출신이라고 하는 것으로 다 통했다. 그러나 지금은 건국하고도 겨우 20년이 갓 넘어서, 초기 개척시대의 유습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그만하면 됐소. 서로 이해를 하니 보기에 좋소. 저 분의 본뜻은 그게 아닐 듯하니 아타얄 족 출신 학자는 너무 불쾌해하지 마시오.”
“예, 전하. 저희 고산족 출신 학자들은 전하를 무조건 지지합니다. 전하께서 그렇다 말씀하시면 그런 것입니다.”
갑자기 웬 충성서약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산족이 아니더라도 유럽이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원주민이나 이민자 출신 등 인종적 소수 집단은 항상 왕실에 과도하게 충성하는 경향이 컸다.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 언제라도 있을지 모를 다수의 횡포로부터 자기들을 지켜줄 곳은 왕실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산족과 같은 원주민이면서도 파포라 족과 케타갈란 족 등 서부 평지에 살던 평포족들은 조선 출신 이민자들과 외모에서부터 별로 구별되지 않았다. 이들은 이름만 다를 뿐 조선 출신자들과 똑같은 생활을 했다. 건국 이전과 이후를 나눠서 볼 때 생활 차이가 너무나도 크게 난 탓에 조선과 평포족의 이전 생활습관 차이 정도는 쉽게 무시됐다. 그 정도로 고산국은 기존에 보지 못하던 의식주 문화를 향유했다.
“발언을 계속하겠소. 도로와 주택을 건설하거나 농지를 개간하기 전에 반드시 지표 조사를 통해 유물 발굴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아마도 고고학계나 민속학계에 유적 조사를 할 인원이 모자랄 테니 학부부터 대학원까지 더 많은 인원을 뽑고 교육도 강화해야 할 것이오. 그에 대한 예산 지원은 총리와 예조를 통해 충분히 해주겠소.”
“각골난망이옵니다, 전하.”
“역사학과 고고학이 골방에 틀어박힌 죽은 학문이 아니라,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를 열어갈 동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잘 홍보하도록 하시오. 혹시 아오?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 인디애나 존스나 마스터 키튼 같은, 아니, 유물을 찾는 동시에 모험을 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오.”
역사학이나 고고학 분야에서는 일반인에 불과한 이민호가 볼 때 보물 사냥꾼이 가장 재미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한국에서 살 때 그 분야를 다룬 영화나 만화도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났다.
“그런 학자 겸 모험가들이 이미 있었군요. 제가 10년 만 젊었더라도 직접 현장에서 뛰는 건데 말입니다.”
“노 교수님은 젊은 학자들이 가져온 유물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지도하는 편이 좀 나을 것 같소이다.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황공하옵니다, 전하.”
처음에는 체할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술을 준다고 하자 사양 않고 넙죽 받아 마시는 노 교수가 조금 얄미웠다. 국왕에게 술을 하사받은 것은 만백성이 군주의 신하인 왕조시대에 몹시 영광스런 일이었다.
임종 직후에 간략히 작성되는 졸기(卒記)나, 지와 명을 새겨 무덤에 같이 묻히는 묘지명(墓誌銘), 보통 한두 세대 지나서 편찬되는 행장과 행록 등에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될 만큼 술을 하사받은 사건이 중요하게 기록됐다.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국왕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전형적인 평가를 기대하는 탓이었다.
“이집트나 중동, 근동에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그쪽에도 연구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소. 중근동의 역사나 문화유물은 기독교 계통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있지만 특히 이집트는 길고 화려한 역사에 비해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소.”
“이집트 총독 대리께서 자주 연구원들을 초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까지 가서 연구하겠다는 지원자가 드문 편입니다.”
옥남은 이집트의 경제와 외교, 국방뿐만 아니라 세계사적 책임감을 가지고 이집트 유물과 유적을 강력히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땅을 파기만 하면 미라가 나오고 이집트인들이 그 미라를 태워 빵을 구워먹는 상황에서 유물 보호 정책을 시행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박물관은 건물을 세우는 족족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물들만으로 금방 가득 채워졌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옥남은 최소한 고대 유물들이 국외로 반출되는 것만은 철저히 막고 있었다. 덕택에 기다란 석조 기념물인 오벨리스크가 여전히 땅바닥에 굴러다녔다. 이것들을 제대로 세우는 것만 해도 엄청난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됐다.
오벨리스크는 과거 이교의 상징물이 아니라 전승 기념이나 어느 왕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치적 기념물이었다. 이 사실을 충분히 알려서 이슬람 과격파들이 오벨리스크를 무너뜨리거나 파괴하는 야만행위를 방지할 수 있었다. 물론 오벨리스크는 태양 숭배 사상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다.
“학자들이 언제까지나 헤로도토스나 옛적 그리스 학자들의 책을 기본으로 삼아야 하오? 역사학과 고고학 등이 발전이 더딘 학문이 되지 않도록 학자들이 분발해야 할 때요.”
“과연 그러하옵니다, 전하.”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본국이 통치를 위임받은 지역이오. 그래서 이집트의 문화 유적을 지키기 위해 본국 정부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이쯤 해서 요구사항이 나온다는 것을 학자들은 직감적으로 눈치를 챘다. 역시나 이민호가 학계에 요구하는 것은 예상한 대로였다.
“매년 이집트 총독 대리 오크남이 연구 인원과 예산을 요구하고 있는데 예산을 두 배로 증액해주고 있더라도 사람이 없어서 연구와 유적 보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소. 나는 고산국 학자들이 주도하고 중동이나 유럽의 대학들과 연계해서 이집트의 유물과 유적 보호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오. 이는 이미 8년 전부터 관련 학계에 적극적인 참여를 주문했던 사안이오.”
“험.”
“고산국은 이미 대국이 되었소. 대국이 됐으면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하는 법이오. 학문이라 해서 그 국제적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씀이오.”
갑자기 학자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이민호도 현실을 알고 있었지만 학자들에게 강요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민호가 차례로 눈을 마주치자 학자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핑계를 댔다.
“조선과 명나라, 일본에 파견돼 연구 중인 젊은 학자들이 많습니다. 학자라 해도 사람인데,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을 중시하기 마련입니다.”
“더운 지역이고 문화적으로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집트 근무를 기피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한창 키우는 젊은 학자들은 외국의 치안 문제 때문에 더더욱 집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고산국 본토만큼 안전한 곳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집트학이라고 할 만한 고고학의 하부 학문은 나폴레옹 시대 이후 제대로 시작됐다. 그 전에는 이집트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자가 드물었다. 고산국 학자들도 유럽과 중근동을 비롯한 국제 학계의 흐름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기에 이집트학을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민호부터가 관심이 없었으나 책임감 때문에 억지로 추진하는 것에 불과했다.
특히 이집트를 대리 통치하고 있는 고산국 입장에서 이집트의 유물과 유적 연구 분야에서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지나간다는 것은 자존심 상할 만한 일이었다. 이민호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이 아니더라도 고산국이 문화 분야의 강국으로 세계에 이름이 나길 원했다. 문화선진국이 될 좋은 기회인데 이런 식으로 학자들이 부정적이라면 야만적인 문화재 약탈 국가로 낙인찍힐 수 있게 됐다.
“학문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연구해야 발전하는 법이오.”
“유, 윤당하옵니다, 전하.”
“하지만 적당한 자극과 경쟁을 통해 더욱 발전하기도 하는 법이오.”
이민호는 다만 변죽을 울렸을 뿐이었으나 그 발언이 진의가 무엇인지 학자들이 한참 생각한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안타깝지만 학문도 국가 정책에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학교 운영 예산 전체를 정부에 의지하는 국립대학들은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려 때문에 몇몇 종교단체에서 교육재단을 창립해서 성직자들이 주도하는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교육 수준 차이가 커서 성직 희망자나 어지간히 신실한 신도가 아닌 한 국립대학이나 왕립대학을 선호했다.
“고남 국립대학에서 역사학과 고고학이 결합된 이집트학과를 새로 창설할 예정입니다. 전부터 추진하던 사안인데 전하께서 내리신 용단으로 인해 더욱 추진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북 왕립대학에서는 기존 이집트학과의 인원을 증설하는 것은 물론 학부부터 대학원까지 모든 전공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더욱 훌륭한 인재들을 끌어 모으겠습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대응하는 것이 좋겠소.”
급하다고 아무나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분야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일생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집트학은 수백 년을 연구해도 부족한 분야라서 이민호는 과감히 추진하기로 했다.
이집트 총독 대리인 옥남이 의외로 왕재였다. 너무 꼿꼿해서 반역자로 몰렸을 때 변명도 못한 부친 정여립과 달리, 옥남은 이익이 상충하는 여러 세력들을 차분히 설득하는 방법으로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옥남 이 인간은 잘 생긴 주제에 늙지도 않아서 얼굴을 아는 자들이 많은 본토에서 가급적 떨어져 지내도록 배려했다. 옥남이 너무 잘 생긴 남자라서 불안해서, 혹은 미워서 외국에 내돌리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신탁통치 기간을 아직 십여 년이나 남기고 오스만 제국에서는 계속 고산국이 이집트를 통치해주길 원했다. 예전과 달리 돈이나 군사력이 들어가는 것 없이 세금 일부를 공짜로 받고 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내부에서는 거대한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다. 옥남은 교육과 경제발전을 통해 이집트 민중의 이런 움직임에 더욱 거세게 불을 지폈다. 이민호가 길게 내다보고 지시한 일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일부 이집트인들은 고산국이 기존에 국가를 형성한 지역을 합병한 적이 없는데도 고산국을 침략자 내지 지배자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이를 불식하기 위한 것이 이집트 유물과 유적의 보호조치였다. 전쟁뿐만 아니라 학문도 이렇게 정치의 수단일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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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도 아닌 특정 학문 분야를 다룬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결국은 정치의 수단이 돼버렸지만 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