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81 86. 1607년 =========================================================================
“전하! 질문이 있습니다.”
“무슨 질문인지 겁부터 먹지 말고 편하게 말해보게.”
군인과 민간인을 합친 조직들 중에서 가장 용감하다는 평가를 받는 부대가 탐사대였다. 그런 부대를 맡은 지휘관이 즉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은 이민호도 처음 봤다.
“세계 모든 곳의 탐험을 마치면 탐사부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흠. 남미가 대륙 단위로서는 마지막 탐험 대상이군. 앞으로 100년으로도 부족하겠지만 말이야.”
“윽! 그렇게 어렵습니까?”
아마존 강 유역에서 현대 문명을 전혀 접하지 못했던 부족이 새로 발견됐다는 뉴스를 예전 21세기 한국에서 본 것 같았다. 평원 위주인 북미보다 열대우림이 무성한 남미가 탐사하는데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이민호는 탐사부대의 앞날을 걱정하는 지휘관들을 안심시켜주기로 했다. 탐사대 같은 정예부대를 당장 필요 없다고 없앤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모험을 즐기는 대원들이 원해서 입대한 무척 특별한 부대라서 군에서도 특별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남미가 워낙 넓고 험하니까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야. 북미나 시베리아처럼 결코 만만히 보면 안 돼. 그리고 북미 북부, 북극과 남극, 파푸아 섬도 탐사부대를 기다리고 있어.”
“잘 알겠습니다, 전하.”
“앞으로도 할 일이 많으니까 인원을 줄이거나 중요도가 떨어질 일은 없을 거야. 일반 부대를 격오지에 주둔시킨다면 몇 개 사단이 해야 할 일을 소수의 탐사대가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만약 옛 소련처럼 관구별로 부대를 배치시킨다면 인구가 별로 없는 시베리아에만 몇 십 개 사단이 필요했다. 그것도 기동성이 높은 자동차화보병사단 등 기계화보병 부대와 군단 규모인 군 직할의 스페츠나츠 연대처럼 항공수단에 기동력을 의존하는 경보병 부대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광대한 시베리아의 경비 임무를 시베리아 탐사단과 여진족 철도경비대만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무도 자기들이 시베리아를 군사적으로 방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베리아 탐사가 끝나더라도 이민호는 시베리아 탐사단을 해체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래도 만약 할 일이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인구가 충분히 많아지는 200년쯤 후에는 산악사단으로 개편되거나 하겠지. 그때는 배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다닐 거야. 헬리콥터가 어서 개발되면 좋겠지만 시간이 좀 걸리나봐.”
고산국 영토가 워낙 넓다 보니 현대 미군처럼 오지에서 싸울 부대가 필요했다. 만약 안데스 산맥에서 분쟁이 생긴다면 화력이 강하기로 소문난 기계화부대를 제 시간에 맞춰서 보낼 수는 없었다.
이럴 때는 부대를 전개하는데 시간이 적게 걸리고 보다 다양한 작전 환경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 경보병 부대가 훨씬 나았다. 탐사단은 탐험과 측량, 자원 발견뿐만 아니라 원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명백하게 점령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탐사단 지휘관들 30여 명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부인들도 왕궁 연회에 초청해서 탐사단이 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실감할 기회도 주었다. 일 년 중 절반이나 집을 비우는 남편이 알고 보면 매우 유능한 장교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었다.
그 전에 탐사전단장과 탐사단장을 준장으로, 탐사전대장과 탐사대장을 대령으로 승진시켜 그 동안 들인 희생과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했다. 탐사대원들도 진급 연한보다 빨리 승진시키고 모든 대원들에게 금일봉을 하사했다.
여름휴가 기간이 되면서 백성들이 휴가를 잘 보내는지 확인하러 다녔다. 사실은 그 핑계를 대며 눈요기하려고 해수욕장과 계곡을 돌아다녔다. 해변이나 계곡 유원지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여유를 즐기고 있어서 이민호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요즘에는 백성들이 과감하게 수영복을 입는구나.”
“학교에서 수영을 가르칠 때 수영복을 입히니까 젊은이들은 수영복에 익숙해요.”
그러나 같이 간 호위들은 물론 해변에서 노니는 여자들은 기다란 원피스형 수영복을 입어 맨몸을 꼭꼭 감쌌다. 나이 든 여자들은 노출도가 더 낮았다.
“남자 수영복은 간소한데 여자 수영복이 마치 무슬림들이 입는 부르카 같다. 거꾸로 되면 보기에 더 좋을 텐데.”
“여자들은 아직 부끄럼을 많이 타나 봐요.”
해수욕장을 살핀 이민호가 몹시 실망했다. 여성들이 옷을 벗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여성 전용 수영장을 만들까 하다가, 의미가 없어서 포기했다. 그런 곳은 여자들도 안 간다는 건의가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해수욕장에서 돌아와 혜영과 함께 백성들의 주거 상태를 살폈다. 한 달에 임대료 1원짜리 기숙사는 방 한 칸에 화장실 하나만 달려 있었다. 임시 거주 시설에 불과한데도 그리 나쁘지 않은 듯 주로 외국인 유학생들이 사용했다.
기숙사 층마다 공용 세탁실이 있고 기숙사 건물마다 공중목욕탕이 따로 있어서 그나마 사람답게 살 수 있었다. 방이 넓어서 이민호가 대학 때 살던 원룸보다 훨씬 나았고 고시원에 비하면 운동장이었다.
같은 방 한 칸짜리라도 한 달 방세 2원짜리부터는 방이 아니라 집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제법 넓은 거실에 주방을 갖추고 테라스에는 화분도 몇 개 놓을 수 있었다. 대학생들이 혼자 혹은 둘이서 사는 곳이었다. 시내에 건축된 연립주택은 예외 없이 3층 건물에 적의 침략에 대비한 사각형 구조였다.
“요즘 본토 쪽 기본 소득이 얼마지?”
“15원이에요. 은 4냥일 때에 비해 조금 올랐어요.”
10그램 금화가 3.75분의 1냥이고 현재 고산국에 통용되는 금과 은 교환비율이 14대 1 정도였다. 그래서 은으로 5.6냥인데 쌀을 제외한 물가가 그 이상으로 많이 올라서 예전에 비해 오히려 줄어든 셈이었다. 혜영이 꼼꼼하게 계산했다는데 평소 너무 알뜰해서 조금 걱정이 들었다.
“물가에 비해 너무 낮지 않나?”
“절약해서 쓰면 매달 일인당 생활비가 집세 포함해서 5원을 안 넘어요. 나머지 10원은 책값으로 쓰고 남으면 저축해요. 불안하세요?”
“조금 그렇다.”
“요즘에는 방 한 개짜리 집은 잘 안 만들어요. 방 두 개나 세 개짜리 집을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여요.”
혜영을 따라 옆집으로 옮겼다. 이곳도 역시 빈집이라서 예전에 비해 주거사정이 나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널찍한 거실과 주방이 있고, 화장실은 깨끗했으며, 방 두 개는 꽤나 넓었다.
“방 두 개짜리는 보통 4원이나 5원이에요.”
“방 한 칸에 비해 너무 비싸잖아.”
“대신 신혼부부가 살거나, 독신자 여러 명이 함께 살 수 있어요. 같은 지방 출신이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경우가 흔해요. 오히려 방세도 아끼고 생활비도 더 아낄 수 있어요.”
“다들 알아서 잘 사는구나.”
그러나 고산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연립주택은 방 세 개 혹은 네 개짜리였다. 노부부와 젊은 부모,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 사는 대가족에게 적당한 공간이었다. 조선과 다른 이유지만 고산국에서도 식구가 많을수록 유리했다. 6인 가족 정도면 일 안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더라도 성인들은 일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었다.
시내에 위치한 주택답게 건물 자체는 에스파냐의 도시처럼 역시나 정사각형이었고 가운데 공간에는 작은 정원이 위치했다. 모서리에 위치한 집은 그럴 듯한 풍경을 집안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어째 셋집이 더 인기가 좋은 것 같다. 요즘도 자기 집 가지는 사람이 드물다면서?”
“농민과 유대인들을 빼면 거의 없어요. 아! 한옥을 지어 살다가 불편해서 여름을 제외한 계절에는 연립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철에 따라 두 집 살림해도 된다면 상관없겠지.”
농민들은 창고 시설이나 외양간 때문에 다양하게 집을 지으면서 집을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몇 가지 표준 설계가 유행한 이후에는 농민들도 시청에서 지어주는 집에 들어가 집세를 내며 살았다.
유대인의 경우 부동산 투기 목적 내지는 정부 자체를 믿지 않는 경향 때문에 집을 소유했다. 혹은 비상탈출구를 몰래 만드느라 직접 집을 지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부동산 투기는 거의 불가능했고, 감가상각이 적용돼 매년 집값을 떨어뜨렸다.
일반 주택은 사용 연한이 50년인데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경우 거주 기간을 연장할 수도 있었다. 한옥도 일정한 기간마다 개조를 거쳐 사용 연장이 가능했다.
교외로 나가 단독 주택 몇 곳을 살폈다. 농민이 아니더라도 넓은 단층 혹은 2층집에 사는 도시 노동자들도 흔했다.
앞마당에는 꽃밭, 뒷마당에는 텃밭, 울타리는 장미넝쿨로 된 전형적인 집 앞에서 잠시 쉬었다. 일반 백성들이 큰 어려움 없이 이런 좋은 집에 산다는 것에 이민호는 높은 자부심을 느꼈다.
“역시 단독주택이 나아.”
“월세가 조금 비싸고 직장에서 거리가 멀잖아요. 집이 커서 관리하기도 힘들어요.”
“그래도 기차나 마차가 자주 다니니까.”
이민호가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리자 놀라서 개집에 들어앉은 작은 개가 컹컹 짖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견종인데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최소한 조선이나 고산국 본토 종은 아니었다.
“저 다리 짧은 강아지는 혹시 웨일스에서 사온 거야?”
“예. 웨일스의 난쟁이라 해서 웰시 코기래요. 왕실의 공주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강아지래요.”
“귀엽게 생겼지만 개털이 많이 날릴 텐데.”
“그래서 집밖에서 키우나 봐요.”
왕실에서는 경호 문제 때문에 애완동물을 키우지 못했다. 개가 아기 왕자의 불알을 뜯어먹거나 고양이가 공주의 얼굴을 할퀼 것을 우려해서였다. 이민호는 여덟 살 넘은 왕자나 공주들에게 애완동물을 선택하게 해서 나눠주려 했다가 내외 호위대장들을 비롯한 후궁들의 단호한 반대로 무산됐다.
후원에 풀어놓은 극락조 종류 말고 왕실에서 키우는 유일한 예외가 민영이 키우는 카라칼이었다. 예루살렘에서 구한 이 살쾡이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암살자로부터 국왕을 지켜내 매달 녹봉까지 받는 호위대의 일원이었다.
민영이 매일 오후 산책에 나서면 늘씬한 카라칼의 우아한 움직임에 매료된 어린 공주들이 몰려와서 쓰다듬고 난리가 났다. 카라칼은 아이들의 손길을 귀찮아하면서도 화를 내지 않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린 공주들은 카라칼을 큰 고양이라 불렀으나,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런 귀여운 강아지들도 외출할 때 입마개를 씌우나?”
“당연하지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여요. 예외는 없어요.”
전에 혜영이 보고한 내용을 기억에 떠올렸다. 조금 심하다고 생각했으나 아이를 키우는 후궁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통과된 애완동물 관련 법안이었다.
태어난 지 두 달 넘은 개는 무조건 목걸이를 채우고, 목걸이에는 주인의 이름과 주소를 새겨야 했다. 광견병 예방접종을 하는 것은 견주의 기본 의무였다. 그리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주인이 목줄을 잡고 입마개를 쓰게 했다.
‘우리 개는 안 물어요.’라는 말은 경찰에게 절대 통하지 않았다. 목줄이나 입마개 없이 개가 돌아다니다가 적발될 경우 처음 한 번은 벌금, 두 번째는 살처분이었다. 그래서 고산국의 도시 지역에서는 개를 키우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농촌 지역이나 농장에서는 개를 풀어놓고 키웠다. 대신 개가 도둑이 아닌 자를 상대로 인명사고를 내면 즉시 살처분하고 주인에게 형사 및 민사 책임을 확실히 지웠다. 농장주, 탐사대원, 수의사 등은 정기적으로 광견병 예방접종을 받았다.
“나는 충성스런 개가 더 좋던데.”
“조선에서 환관들이 어떻게 해서 남성을 잃게 된 줄 아시죠?”
“그래, 그래. 대신 고양이라도 왕궁에서 키우게 하면 안 될까? 아이들의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될 거야. 특히 새끼를 낳고 아기 고양이가 커가는 것을 지켜본다면 생명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을 거야.”
“발정기 때 고양이가 내는 소리를 듣거나 싸움하는 것을 본 적 없으세요?”
“끙! 알았어.”
수의사들이 소처럼 고양이도 중성화 수술을 할 수 있었지만 사람 때문에 동물이 희생되는 것 같아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포기했다. 이민호에게는 가끔 탐사대 훈련소에 들러서 아이리시울프하운드를 보는 게 낙이었다. 이 커다란 개는 어느덧 북미 탐사단을 넘어 모든 탐사대원들에게 소중한 동료가 되었다.
“그런데 저 대궐은 뭐야? 상인의 집인가?”
좀 더 교외로 나왔을 때 농촌마을 옆에 새로 생긴 거대한 고루거각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기와집들 주변을 담으로 싼 것을 보니 한 집이 틀림없었다.
“기본적으로는 농가에요. 정확히 99칸이래요.”
“아무리 농민이 많이 벌어도 그렇지, 노비나 머슴도 없을 텐데 99칸이 필요한가?”
“바깥채를 전통 민박으로 활용한대요. 기둥도 아주 튼튼하기에 사용연한을 특별히 100년으로 내줬어요.”
조선에서 양반이 부러웠던 노비가 고산국으로 이민 와서 돈을 번 다음 대궐 같은 집을 지은 게 아니라, 주말에 교외에서 쉬려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내줄 방이었다. 몇 년 전에 이민호가 도시 주민들을 위한 주말농장을 신문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100칸 제한은 없잖아?”
“그래도 나랏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자제하나 봐요.”
“충성스러운지고.”
왕궁을 천 칸으로 하면 백성들이 999칸을 지을까 상상해봤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리 부농이나 상인이라도 99칸이 한계였다.
재산은 한 세대에 쉽게 모으기 어렵고, 세대가 이어질수록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고산국에서는 상속은 물론 부의 세습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건국 초부터 국가의 모든 정책이 재산 보유보다는 소득 증대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지어 임대를 놓는 식으로 돈이 돈을 버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정책을 비난하던 조선 양반 출신들도 요즘에는 조용했다. 아무리 따져 봐도 조선보다 훨씬 살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양반 체면만 조금 손상한다면 일자리 구하기도 쉬웠고, 일을 안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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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는 비교적 평온하게 지나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