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79화 (728/1,000)

00779  86. 1607년  =========================================================================

“운하 운영이라. 어차피 운하 운영에서 나오는 수익을 에스파냐와 나누기로 했으니까 국경은 파나마 운하로 하되, 앞으로도 운하 운영은 계속 에스파냐에서 맡으시오.”

“역시 배포가 크십니다. 그런데 운하를 국경으로 삼으면 파나마 시와 콜론 시가 모두 고산국 영역에 있게 됩니다. 두 항구도시를 고산국에 넘기고 반대쪽에 에스파냐 상선들을 위한 항구를 새로 건설할까요?”

대서양 쪽의 콜론, 태평양 쪽의 파나마 시는 운하에 진입하지 않는 배들의 하역과 물류를 위한 항구였다. 거의 운하에 부속된 항구도시라서 따로 떼어놓고 논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제 보니 철도도 운하 동쪽, 그러니까 고산국 영역에 있었다. 이민호는 운하 관련 시설들의 운영을 죄다 에스파냐에게 떠넘겼다. 에스파냐는 돈을 벌어서 좋고, 고산국은 인원을 아껴서 좋았다. 운하 주변에서 철저히 방역을 하고 예방 접종을 한다지만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극성인 곳에 고산국 백성들을 투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게 뭐 있겠소? 지금처럼 에스파냐가 두 도시를 관리하시오. 고산국은 유사시에 공동 관리권만 행사하겠소. 영토 할양은 아니고 일정한 기간마다 갱신하는 조차지 개념 정도로 합시다. 기차도 마찬가지로 에스파냐에서 계속 관리하시오.”

“그게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중요한 협의사항은 다 검토한 것 같습니다. 그럼 전체 가격은 어느 정도로 책정하시겠습니까?”

우세다 공작이 그 동안의 당당했던 태도는 어딜 가고 급히 비굴한 자세를 취했다. 어떤 상품이든 돈 가진 사람이 우위에 서기 마련이었다. 유럽 여러 나라에는 살 돈도 없고, 매입하기보다는 전쟁을 통해 빼앗으려 했기에 구매자는 고산국 하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에스파냐가 진 1,500만 에스쿠도에 달하는 채무를 변제한 것으로 하고, 브라질은 불확실하니 제외하고, 추가로 3천만 에스쿠도, 혹은 그에 상당하는 귀금속을 지급하겠소. 노른자인 포토시 은광이 빠진 이상 더 이상은 곤란하오.”

1535년부터 1537년에 발행된 에스쿠도 금화는 16레알의 가치를 갖고 있었고, 여러 가지 은화로 교환될 수 있었다. 고산국과 교역할 때 에스쿠도 금화는 그때그때 교환비율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략 은 한 냥을 살짝 넘는 정도에서 교환됐다.

“합해서 4,500만 에스쿠도입니까? 저는 브라질을 빼고 합계 6천만 에스쿠도 정도를 기대했습니다만.”

“6천만 에스쿠도도 가능하지요. 대신에 10년에 걸쳐 나눠서 드릴까요?”

“아닙니다! 4,500만 에스쿠도를 올해 안에 지급해주십시오.”

이민호와 우세다 공작이 대화하는데 예조 판서가 우물쭈물했다. 뭔가 물어보니 멕시코와 북미를 나누는 국경 문제였다. 현재는 동쪽은 리오그란데 강, 서쪽은 사막이 국경이었다.

“멕시코 북부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이 텍사스 남쪽 국경인 리오그란데 강을 계절에 따라 수시로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 전에도 그렇게 살아왔던 원주민들이고 텍사스의 목화 농장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아 딱히 막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강의 굴곡이 워낙 심하고 길어서 지키는데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그것도 문제가 되겠구려. 우세다 공작! 1,500만 에스쿠도를 버는 방법이 있소.”

“혹시 멕시코 북부입니까? 음. 내륙 탐험 단계인 남미와 달리 멕시코는 확고한 에스파냐의 영토인데 말입니다.”

멕시코는 고원지대가 대부분이라 강수량이 적은 대신 온화한 기후를 자랑했다. 농경은 물론 사람이 살기에도 좋은 지역이라는 뜻이었다.

에스파냐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멕시코 고원은 절대 내놓지 않을 거라고 이민호도 예상했다. 만에 하나 에스파냐가 망하기 직전에 급전이 필요해 판다 해도 현재 협상 중인 남미 매수 가액의 열 배로도 모자랄 것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이민호도 멕시코는 아예 돈으로 살 생각을 접었다.

“멕시코 북부 소노라와 치와와는 날씨가 덥고 사막도 있소. 게다가 인구가 적으며 그나마 있어봤자 주민 대다수가 말썽을 자주 피우는 원주민들이오. 국경선이 길수록 피차 지키느라 피곤해질 테니 남쪽으로 적당히 끌어 내리도록 합시다. 서쪽 길쭉한 반도, 바하칼리포르니아도 넘겨주시오.”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이 싫어하겠습니다만.”

이민호가 지도에서 바하칼리포르니아 남단에 자 끝을 대고 오른쪽으로 쭉 그어 버렸다. 연필로 그은 선이 쿠바 북쪽, 플로리다 남쪽 바다를 지나고 바하마까지 이어졌다.

우세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이미 동의를 표시했다. 공작 입장에서는 멕시코 시 북쪽의 은광 지대만 안 건드리면 상관없는 듯했다.

“본국이 망할 판인데 부왕이 영토 면적으로 자부심을 내세울 일이오?”

“그건 그렇습니다. 다만 멕시코 영토는 본국에서 협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협상을 마치고 며칠에 걸쳐 영토 할양 조약문을 작성했다. 이것도 양국 실무자들에 의해 진행되는 또 다른 협상이었다. 실무자들은 조약문의 글자 한 자 한 자에 극도로 예민해졌다.

처음에 에스파냐는 브라질을 포함해 7천만 에스쿠도를 원했다가, 이민호가 브라질을 제외하고 멕시코 북부를 더해서 6천만 에스쿠도를 제안하자 쉽게 동의했다. 요즘 들어 부쩍 말을 안 듣는 포르투갈 귀족들과 다투는 것은 에스파냐 귀족들에게 짜증나는 일이었기에 차라리 잘 됐다 싶은 심리도 있었다.

이로써 페루 부왕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알토 페루, 즉 현대의 볼리비아 포토시로 영역이 줄어들게 됐다. 이마저도 30년 후에는 에스파냐가 물러나야 했다. 에스파냐가 국가 파산 위기에 몰린 이후 더 큰 재정 위기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미 대륙을 팔게 됐더라도 포토시 은광만은 어떻게든 채굴을 마치려 했다.

이것으로 조약이 완전히 체결된 것은 아니었다. 우세다 공작이 마드리드로 돌아가서 국왕이나 다른 귀족들과 협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비준해야 조약이 발효되는 식이었다.

그래서 아직은 멕시코 북부를 고산국에 넘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은을 실은 배가 항구에 도착할 때마다 모조리 피렌체 은행가들에게 차압당하는 마당에 에스파냐 왕실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남미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왜? 영토를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아서?”

혜영이 이민호에게 눈을 찡긋했다. 혜영이 눈을 찡긋한 것은 엄살을 부릴 테니 혼동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우세다 공작은 지금까지 통역 없이 조선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외국어 하나쯤 익히는 것은 귀족의 기본 교양이었고, 가장 잘 나가는 고산국의 말을 익히는 것이 최근 유럽 귀족들에게 유행이 됐다.

특히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건국 초부터 접촉했고 고산국이 급성장하면서 계속 에스파냐의 관심을 끌었으므로 조선말 구사자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선원들도 웬만한 조선말 문장 몇 개는 외우고 다녔다.

“그래요. 지상에서 국경을 접한 나라가 북서쪽으로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과 북쪽에 덴마크의 베네수엘라, 동쪽으로 포르투갈의 브라질과 북동쪽에 네덜란드의 수리남이 있어요. 어쩌면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수리남 인근의 땅을 요구할 수도 있어요.”

“신대륙의 유럽이나 다름없군.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영토 협정을 따로 맺어야겠어. 포르투갈은 기존 개척지를 최소한으로 인정해주고, 나머지 나라들은 해안지대만 살짝 떼어주는 방향으로 혜영이가 연구해봐.”

“잉글랜드는요?”

“당연히 쫓아내야지. 아직 남미 북동부에 잉글랜드 정착지가 없으니까 그래도 할 말이 없을 거야.”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이 시기 브라질은 남미 대륙의 동쪽 끝에 치우친 지역에 불과해 현대 브라질 영토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면적이었다. 포르투갈 식민 개척자들이 서경 43도 37에서 서쪽으로 넘어올 경우 고산국이 직접 단속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게 됐다.

아마도 가장 큰 문제가 될 곳은 포르투갈 식민세력이 16세기 중반부터 미리 선점한 상파울루 등 일부 해안 지대였다. 서경 46도 38분에 위치한 상파울루에는 이미 1554년부터 포르투갈 개척마을이 건설됐다.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맺어왔던 포르투갈과 땅을 두고 전쟁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협상이 결렬되면 전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방이라 해도 이유 없이 영토를 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어서 영토를 내주더라도 항구 주변 등 최소한의 면적에 그쳐야 했다.

“주인님. 에스파냐가 적의 침략이 아니라 채무 때문에 몰락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특정 국가가 아닌 피렌체를 비롯한 은행들이 고산국의 가장 큰 적이 될지도 몰라요.”

“내가 이래서 은행을 싫어하는 거야. 책임은 절대 지지 않고 권리만 누리려 하지. 앞으로 하나씩 잡아먹도록 하자.”

고산국은 이탈리아 은행 자본 세력에 대항할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가고 있었다. 유럽은행을 비롯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덴마크 서인도회사도 앞으로 있을 자본 전쟁에 도구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언젠가는 이탈리아의 은행 자본을 고산국에, 혹은 이민호 개인에게 복속시키는 계획을 조만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국왕전하! 고산국에 남미 대륙을 완전히 인계하기까지 3년쯤 걸릴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개척민들을 멕시코로 이주시키겠습니다.”

“고산국에서는 즉시 탐사단을 남미에 보내겠소. 그리고 현재 남미에 거주하는 자들 중에서 앞으로도 남미에 정착하길 원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받아들이겠다고 알려주시오. 정착민에게 일정한 면적의 농경지를 무료로 배분하겠소. 다만 세금은 바쳐야겠지요.”

“혼혈들에게 아주 좋은 조건이겠습니다.”

식민지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혈통상 혼혈이 아니더라도 혼혈로 취급되며 에스파냐의 공민권이 제한된 자들은 불만이 많았다. 물론 이민호는 이들보다는 아직 많이 남아있는 원주민들을 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백신을 제조하는 제약회사가 당분간 아주 바쁘게 돌아갈 것 같았다.

“금화 4,500만 에스쿠도라. 에스쿠도 금화 무게가 3.3그램이니까 곱하고 백만으로 나누면 148.5톤이네. 에게?”

“금 비중으로 다시 나눠야 되잖아요.”

“됐어. 금괴 150톤을 넘겨줘. 에스파냐 범선으로는 위험할 테니 우리 배로 직접 운송해줘야겠다.”

구아노 광산을 1,500만 에스쿠도에 매입했고 채권도 있었으니 다 합해서 7,500만 에스쿠도에 남미 대륙 대부분을 매입한 셈이었다. 브라질이 살짝 아쉽고 수리남 지역에 정착촌을 건설한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살짝 얄미웠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재정상황이 급박하고 남미 대부분 지역을 개발하지 못한 현 시점에서 남미를 매입한 것은 이민호에게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해군과 탐사단은 앞으로 몹시 피곤하게 될 것 같았다. 해군을 미리 증강해둬서 다행이었고, 마침 북미와 시베리아에 대한 탐사가 거의 끝나가는 것도 행운이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하. 피렌체의 은행가들이 세비야에 몰려나와 눈에 불을 키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번 남미 매입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쪽은 이탈리아의 은행가들일지도 몰랐다. 그 동안 이민호는 유대인 은행가만 조심했다가 이번에 이탈리아 자본의 힘을 제대로 알고 속으로 많이 놀랐다.

“10만 에스쿠도를 공작께 드릴 테니 사절단의 여비로 쓰시오. 그리고 이번 조약이 정상적으로 비준된다면 백만 에스쿠도를 보수로 공작 개인에게 드리겠소. 우방국 에스파냐의 전도양양한 정치가를 후원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주시오.”

“진실로 감사합니다, 전하!”

이민호는 펠리페 3세에게 ‘친애하는 벗’ 운운하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쓰기로 했다. 여기서 우세다 공작이 똑똑하고 펠리페 3세에게 충성스럽다는 칭찬을 잔뜩 써줄 예정이었다.

개인적 치부에만 신경 쓰는 레르마 공작보다는 정치적 영달을 우선하는 우세다 공작이 총신에 오르는 편이 훨씬 나았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보다 많은 기회가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세다 공작이 조만간 왕실 포도주와 외양간을 관리하길 바라겠소.”

“아아! 국왕전하께서 밀어주신다면 조만간 기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밀어드려야지요. 열심히 하시오.”

공식 명칭으로 에스파냐 왕국 왕실의 수밀러, 불어로 소믈리에는 에스파냐 궁정의 2인자인 총신의 공식적인 직함이었다. 현재 레르마 공작이 맡은 관직이기도 했다.

총신이 맡는 또 다른 중요한 직책은 국왕의 여행, 말 관리, 사냥 등의 업무를 맡은 수석 시종무관이었다. 동양에서 왕의 사위로서 왕이 탄 말의 고삐를 잡는 부마의 직위처럼, 국왕으로부터 전적인 신뢰를 받고 국왕 주변에서 일한다는 의미에서 총신에게 가장 적당한 직책이었다.

야심이 큰 우세다 공작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이민호는 몹시 기대가 됐다. 당연히 에스파냐를 나락으로 내몰 것이 틀림없었지만, 미래는 알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남미 대륙 매입이 끝났습니다. 나머지는 해군이나 탐사단이 먼저 고생하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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