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61화 (7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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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1606년 장강에서

새해에 들어선 다음에도 이민호와 고산국 왕실은 세 가지 일에 몰두했다. 하나는 루스 차르국의 볼가 강 수로를 이용해 흑해와 발트 해를 연결하는 대규모 토목건설 사업이었다.

모스크바에서 페트로그라드까지 철도를 연결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던 반면, 습지대인 페트로그라드의 지반을 다지는 것은 꽤나 난공사에 속했다. 근처의 돌산 몇 개가 화약 폭발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 대신 원래 역사보다 희생자가 훨씬 적게 발생해 페트로그라드가 해골 위의 도시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됐다.

스웨덴 국왕 카를 9세가 강제로 징집해 보낸 핀란드 노무자들을 잘 먹이고 따뜻하게 잘 재우고 잘 놀게 해주면서 일을 시켰다. 아직 멀었지만 페트로그라드의 도시 기반 공사와 발트-백해 수로 공사를 마치고 핀란드 노동자들을 돌려보낼 때는 은화와 더불어 선물을 잔뜩 안겨주어, 스웨덴 농민과 탄광 노동자들이 부러워하게 만들 계획이었다.

두 번째는 베네수엘라를 에스파냐보다 훨씬 믿음직한 동맹인 덴마크에 평화적으로 양도하는 일이었다. 에스파냐는 함대를 파견해 카리브 해를 보호해주는 고산국에 더해, 바다와 지상 양쪽에서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는 덴마크를 동맹국으로 신중하게 받아들였다. 자금이 부족해 카리브 해 동쪽 섬들을 포기했던 에스파냐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었다.

뜻밖에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이 정치력을 발휘해 카리브 해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카리브 해 동쪽 소 앤틸리스 제도 중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농민을 보내 개척한 몇몇 섬들에 대해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나머지 섬들 대부분이 덴마크령으로 넘어갔다.

그 대신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자국 출신의 해적들에 대한 토벌과 함선의 정기적인 순찰을 요청했고, 협상 끝에 관철시켰다. 그 덕택인지 최소한 카리브 해 근해에서는 에스파냐 보물선에 대한 약탈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국제 조약 몇 개가 맺어진 다음 에스파냐가 덴마크에 베네수엘라를 평화적으로 할양했다. 매입 가격은 북미 대륙 매매가의 절반보다 조금 적은 은 30만 파운드였고, 크리스티안 4세와 이민호가 개인 재산으로 반반씩 내서 매입했다. 금본위제에 가까운 새 화폐 발행 이후 고산국에 남아도는 은 70톤을 가뿐히 지급해서 에스파냐 왕실을 질리게 만들었다.

물론 외부적으로는 덴마크 국왕 혼자서 베네수엘라를 매입한 것으로 발표했다. 크리스티안 4세는 앞으로 석유가 날 지역을 제외한 모든 토지를 국가에 기부한다고 선포해 덴마크인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베네수엘라를 개척할 덴마크 농민들이 모집되고, 이들이 북미에서 예방 접종과 사탕수수 재배법 교육을 받은 다음 농지 개척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말라리아와 황열병 예방에 대한 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이로써 베네수엘라는 대부분이 덴마크 영토가 됐으며, 이민호는 베네수엘라 전 지역에 대한 석유 개발권을 취득했다. 물론 석유를 생산할 때 덴마크 국왕과 이익을 나누기로 이미 약속돼 있었다. 석유 대부분을 고산국에서 사용하므로 가격결정권은 이민호에게 있었지만, 덴마크에 적당히 이익을 나눠줄 생각이었다. 베네수엘라에 거주하는 주민이 극히 적었고, 특히 흑인 노예가 거의 없었기에 가능했다.

수리남 인근은 여전히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가 서로 싸우며 아우성이었다. 여기에 원주민들의 반란까지 겹쳐서 제대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민호는 세 나라가 그 지역을 평화적으로 국경선을 정하지 못하도록 배후에서 적당히 조종했다.

“국제은행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워요.”

“그래도 비올레타 덕택에 런던 롬바르드 거리의 은행가들과 손을 잡게 돼서 다행이오.”

은행 설립은 비올레타가 베네치아 시녀들의 도움을 받고 헤드비히 여왕과 협의해서 추진 중이었다. 말이 국제은행이지 사실은 발트 해 연안 위주의 북유럽 은행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내륙지방에 영업 점포를 개설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이때 피에몬테와 아스티를 비롯해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 출신의 자본가들이 참가해 점포 개척 업무를 맡기로 해서 조만간 문제가 풀릴 것 같았다.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영주들을 설득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유럽에서 은행, 즉 뱅크(bank)는 영어의 둑이나 제방, 혹은 대륙붕에서 나온 말이 전혀 아니었다. 롬바르디아 대부업자들이 벤치에 앉아서 대부업을 했던 역사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자(interest)도 원금과 원금에 위약금을 더한 금액의 차액을 뜻하는 라틴어 inter est에서 비롯됐다.

“은행 지분은 우리가 압도적으로 많이 보유했지만 각 지역 지점장으로 일할 롬바르드 환전상들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면 안 돼요.”

“물론이오. 스위스 용병들이 호위병 역할을 한다지만 사실은 감시병들이오. 지점장이 금화를 마차에 싣고 도주하려 할 경우 처단권까지 부여했소.”

로마에 주둔한 스위스 용병연대와 훈련소에 대한 지휘권을 달라고 로마교황청에서 요구하기에 아예 연대 전체를 베네치아로 이동시켜 버렸다. 공동 지휘권이라면 참을까 했는데 고산국의 지휘권을 배제한 단독 지휘권을 요구한 것은 지나쳤기 때문이다.

로마의 방어에 큰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아차 싶었던 교황이 사죄 사절단을 보내왔지만 이민호는 알았으니 돌아가라고만 했다. 그 뒤로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 다음 정치적 위기에 빠졌던 베네치아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스위스 용병 일부를 이렇게 독일 지역에 파견할 수 있었다.

“설마 스위스 용병이 뇌물을 받고 지점장의 비리를 눈감아주지는 않겠지요?”

“음. 전쟁이라면 스위스 용병들이 배반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지만, 솔직히 이 문제는 조금 자신이 없소. 그래도 동포들을 먼저 생각하는 스위스 용병들이 헛된 욕심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오.”

비리가 걱정됐으나 롬바르드를 비롯한 이탈리아 은행가들의 신용도는 매우 높은 편이었다. 특히 피렌체 은행가들은 밀라노와 베네치아, 로마와 바르셀로나에서 은행 영업을 하는 것은 물론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실에 대한 대부업도 맡고 있었다. 런던에서는 아예 한 지역을 이탈리아 은행가들의 거리로 만들어 롬바르드 스트리트로 이름을 지었다.

제네바에 이미 롬바르드 은행가들이 진출해 있기에 이들도 국제은행의 지점으로 합병했다. 스위스 용병의 가족들이 고향의 은행에서 봉급 절반을 매달 수령할 수 있게 했다.

“왜? 대화가 재미없니?”

“아니에요, 아바마마. 두 분은 어쩌면 북유럽 사람들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계시는지도 몰라요.”

비올레타를 따라온 마르그레타가 자그마한 입술을 열면서 조곤조곤 대답했다. 이민호는 마르그레타가 예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오! 마르그레타,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옆에서 장사하는 것만 보여주다가 이렇게 됐어요. 중국 철학자 멘셔스의 어머님이 하신 것처럼 애들 교육에 나빠요.”

“비올레타! 상업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소? 농업과 공업만큼 중요한 산업이오.”

이민호가 마르그레타가 예쁘다고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비올레타는 불평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

“요즘 무슨 책을 읽니?”

“교과서 말고는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과 소학언해를 읽고 있어요.”

“대단하다. 하지만 둘 다 워낙 옛날 사람들의 글이니 이해가 안 되면 대충 넘겨도 된단다.”

“그래도 궁금한 게 많은 걸요?”

1587년에 조선에서 번역한 <소학언해>를 다시 고산국 한글 표기법에 맞춘 책은 한자가 아닌 한글만 읽는다면 어린이용으로 어렵지는 않았다. 플라톤의 저작은 형이상학적이긴 하나 각주에 나온 설명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술술 넘길 수도 있었다.

“차르를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나중에 마르그레타나 다른 공주들의 선택에 맡기세요.”

“쳇! 내 뒤통수를 친 놈이오. 절대로 우리 예쁜 마르그레타를 그런 놈에게 내줄 수 없소.”

이민호가 표도르 2세에게 실망한 것은 다른 것도 아닌 다이아몬드 때문이었다. 비록 표도르에게서 다이아몬드 대금으로 40만 플로린을 받아 토르구트의 도시 건설 자금으로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그 동안 돈 없다고 징징거리던 표도르를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물론 전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가 자금을 숨겨놓았을 것으로 이민호도 예상했으나, 대기근 동안 다 소모한 것으로 잘못 예상한 이민호의 실수였다. 원래는 차르에게 큰 빚을 지우려 획책했다가 실패한 셈이었다.

“차르 입장에서는 투자한 것으로 봐도 돼요. 귀한 보석인데다 차르의 홀에 붙어있는 것이라면 나중에 급할 때 아주 비싸게 팔 수 있잖아요. 마르그레타는 차르를 어떻게 생각하니?”

“차르께서는 아직 젊은데도 루스인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훌륭한 군주라는 소문을 들었어요. 하지만 아바마마가 훨씬 더 성군이래요. 아바마마는 고산국 백성들뿐만 아니라 속국의 백성들과 다른 나라 백성들의 생활까지 돌봐주시니 저도 아바마마가 더 훌륭하신 군주라고 생각해요.”

“아유~ 우리 마르그레타는 또박또박 의견을 말하면서도 어찌 그리 예쁜 소리만 골라서 하니?”

이민호가 마르그레타의 얼굴에 뺨을 마구 비볐다. 대신들이 수염을 기르라고 권하는데도 꼬박꼬박 면도하는 것은 자식들과 조금이라도 오래 스킨십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자식들이 피하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이민호도 알고 있었다.

“플라톤의 글에서 정의와 윤리, 군주의 의무를 배웠어요. 매우 공감하지만 그분이 노예제를 찬성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도 노예제는 반대한다만, 당시 그리스의 시대 상황에 따르면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생산을 노예에게 맡긴 시기였으니까.”

“고산국에도 한때 노예가 있었다면서요? 마카오에서 흑인 노예들을 사서 일본과 전쟁할 때 병사로 썼다고 들었어요.”

“흑인들을 사들인 즉시 노예에서 해방했고, 병사가 되기 싫은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단다. 지금도 고중 시에는 흑인 마을이 있잖니? 노예를 사는 것이 노예제를 유지하는 한 축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노예들 입장에서는 목숨을 구한 셈이 됐어.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오면 너도 고민하게 될 거야.”

초등학교 4학년 딸의 질문에 대답하느라 이민호가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이민호는 조선에서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했기에 이공계 출신이라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마르그레타를 보니 왕립학교 북미 분교도 잘 운영되는 것 같소.”

“교수님들도 마르그레타의 영민함에 놀란답니다.”

“그래도 어릴 때는 마음껏 뛰어놀게 해주시오. 학생 수는 좀 늘어났소?”

“네. 지금은 친구가 많아요. 교수님들의 자녀분들이나 원주민 추장의 자식들도 입학했으니까요.”

어머니들이 똑똑해서 자식 교육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장남이 워낙 빨빨거리며 싸돌아다녀서 조금 걱정이었으나 그래도 사고를 치고 다니지는 않았다.

장남 개똥이는 축구, 농구에 이어 이번에는 산악자전거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항공대장 이면을 형이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다. 일요일에 가볍게 옥산이나 설산을 올랐다고 해서 혜영이 아주 기겁하게 만들기도 했다. 씩씩하게만 자라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긴 하지만, 이면을 멘토로 두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그런데 주상아 공주가 요즘 우울해 보였다. 아무래도 짚이는 게 있어서 이민호가 직접 별궁에 찾아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왕명명이 왕궁에 거의 못 돌아오고 강남 지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내게 말하시오.”

“전하께서는 워낙 바쁘신 분이라 어떻게든 제가 해결하려고 했었는데 이제 도저히 안 되겠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빈민 구제 사업을 누가 방해한단 말이오?”

주상아 공주는 명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얻는 이익 절반 정도를 명나라 여러 지방의 빈민 구제 사업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무역에서 얻는 이익은 점점 줄어들고 지출은 많아져서 화장품 사업에서 얻는 이익의 절반까지 투입했다. 그래도 모자라는 것 같아 이민호가 새 화폐 발행 후 남는 은을 혜영 몰래 갖다 주었다.

재작년에 눈치 없는 명나라 관리와 환관들이 중간에서 빼먹다 걸려서 황제의 칙령으로 참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빈민 구제 사업에 투입된 식량 수송 마차들을 노리는 여러 산적과 수적 집단들이 문제였다.

쌀도 아닌 잡곡을 빈민들에게 나눠주기에 표국의 표사를 많이 고용하지 못했는데, 도적들은 바로 이 틈을 노렸다. 왕명명이 수하들 몇 명을 데리고 수채와 산채를 치고 돌아다녔지만 명나라 땅은 너무 넓었고, 도적들은 지나치게 많았다. 이들 중 일부는 단체로 반란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 작품 후기 ============================

이어질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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