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59화 (708/1,000)

00759  84. 1605년 루스 동란  =========================================================================

주말부부도 아니고 견우와 직녀처럼 일 년에 딱 한 번 만나는 부부가 이민호와 헤드비히였다. 일 년 내내 바쁘게 지내는 헤드비히는 오랜만에 만난 이민호와 하루 24시간 붙어서 지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과도한 애정공세를 퍼부었다.

“비키 누님이 이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민망하지만 요한 왕자가 이해를 하게.”

헤드비히의 막냇동생이며 덴마크의 왕자 요한은 이번에 차르의 경호대장으로 임명됐다. 요한 왕자는 크렘린 궁 외곽을 지키는 스트렐치와 왕궁 호위대는 물론, 이민호와 차르로부터 구르카 중대의 지휘권까지 위임받았다. 요한 왕자는 덴마크에서 슐레스비히-홀스타인 공작 작위를 받은데 이어 조만간 바실리 슈이스키나 다른 몇몇 대귀족들처럼 루스 차르국의 공(prince) 작위를 받기로 예정돼 있었다.

“크렘린과 모스크바를 방어하는 실질적인 주력은 고산국의 시베리아 철도 경비대인 것 같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모스크바 철도역에 전화를 하겠습니다.”

“그래. 전화교환수는 24시간 교대 체제니까 반란이 일어나면 언제든 전화해.”

구한말 경운궁처럼 크렘린에 전기가 들어왔고 전화도 놓았다. 외국 궁전에 전화와 전기를 가설한 것은 크렘린이 처음이었다. 사실 모스크바 철도역에서 전기선과 전화선을 끌어온 것에 불과했다.

“지금은 조심하고 있지만 슈이스키 가문이 제위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가짜 드미트리 때도 사실 반란을 일으키려 했었다는 증거를 수집해 놓았습니다.”

“맞아. 대귀족들은 죄다 예비 찬탈자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지금 체포할 수는 없겠지.”

“차르도 슈이스키 가문이 반성하고 성의를 보이면 눈감아줄 생각인 것 같습니다. 섣불리 건드리기에는 너무 큰 가문입니다.”

“나중에 차르가 처리하기로 했어. 그 전까지 주의해야겠지만. 타타르인들이 얼마 전에도 모스크바 근교까지 약탈했다니까 철도 경비대를 모스크바에 자주 진입시키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고산국 병력이 모스크바에서 자주 보이면 대귀족이나 보야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구르카 중대와 시베리아 철도 경비대가 거의 식민지 주둔군 역할을 맡게 됐다. 그러나 철도 종점과 크렘린, 그리고 새로 철도 공사하는 곳만으로 활동지역을 제한시켰다.

지금은 아니라도 조만간 모스크바가 평온해지면 보야르들이 외국군의 주둔 문제를 차르에게 따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발트 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수로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철도가 고산국 소유로 남아있는 한 철도 경비대를 국경 밖으로 몰아낼 수 없게 됐다. 바로 이것이 타타르의 멍에에 버금가는 고산국의 족쇄였다.

“경호대장이라는 게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거야.”

“최선을 다할 작정입니다. 차르를 지키는 것이 저와 크세니아 공주의 목숨을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훌륭한 각오야. 경비대가 대관식 예행연습을 여러 번 했다고 했지? 언제든 돌발사태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 잘 지켜보도록 해.”

“예. 국내에서는 잠잠하겠지만 폴란드에서 암살자가 방문할지도 모릅니다. 위험 요소를 철저히 차단하고 유사시에는 차르를 몸으로 막아 지키겠습니다.”

“요한 왕자는 덴마크 왕국에서 계승 서열이 높아. 왕자가 그럴 일은 없어야 해.”

“몸을 던져 차르를 지킬 부하들이 없다면 저라도 차르를 지켜야지요.”

“와! 우리 동생 어른 다 됐다.”

한참 무게를 잡던 요한 왕자의 뺨을 헤드비히 공주가 두 손으로 잡아 양쪽으로 쭉 늘렸다.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된 듯 스물두 살 청년이 꼼짝 못하고 당했다.

류리크 왕실 혈통이 단절된 이후 외척으로 분류됐던 고두노프 가문의 두 번째 차르로 표도르 2세가 즉위하게 됐다. 어린 표도르에게 생길지도 모를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덴마크의 요한 왕자가 크세니아와 결혼했지만, 표도르가 워낙 건강해서 요한이 제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낮았다.

“그래도 차분히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생길 거야.”

“아닙니다, 누님. 괜히 제가 차르에 오르려 했다간 내분이 생길 겁니다. 이대로가 좋습니다.”

“그럼 예쁜 딸을 낳아서 다음 차르가 될 황태자와 결혼시키는 길이 최선이겠다.”

“사촌끼리 결혼시킨단 말이오? 음. 그럴 수도 있겠소.”

이민호에게는 당혹스런 관습이었지만 유럽 귀족 사회나 중동에서 사촌은 바람직한 배우자감이었다. 혈족의 재산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상해요?”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계자들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말이오. 자식들이 어린 시기에 대다수가 죽는 것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소.”

“합스부르크 가문만 그래요. 다른 왕족 가문들은 사촌끼리 맺어지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그건 그렇소만.”

명확한 증거도 없이 유럽의 관습을 나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고산국 혼인법에서는 사촌 이내는 결혼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본인 출신 1세대는 예외였고, 모리스코인 등 무슬림들에게도 예외를 적용했다.

- 펑! 퍼벙!

“와! 불꽃놀이가 시작됐어요.”

“전하, 누님!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녁이 되면서 모스크바 강변 하늘에 폭죽이 연속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대관식 전날부터 축제가 시작됐다.

요한 왕자가 크세니아와 불꽃놀이를 같이 보기로 약속했는지 서둘러 방을 빠져 나갔다. 이민호는 헤드비히와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폭죽이 터질 때마다 화려한 불꽃이 분홍빛 하늘을 수놓았다.

“발트 해에 평화를 이뤄주셔서 고마워요.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훨씬 힘들 거라고 예상했어요.”

“우연과 행운이 겹쳐서 비키가 원한 대로 됐을 뿐이오.”

“전쟁에서 승리해도 효과는 얼마 못 가요. 전쟁에서 패한 국가가 절치부심해서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돼 있어요. 덴마크와 스웨덴의 역사가 그래요.”

“나중에 다시 전쟁을 할 바에는 아예 철저히 패망시키고 말겠소.”

“전하께서 이렇게 무서운 분인 걸 다른 나라에서 알아야 하는데 말이에요.”

헤드비히가 다시 깡충깡충 뛰더니 이민호의 목을 감았다.

6월 10일, 차르 대관식이 테트리스 게임 배경화면처럼 생긴 성 바실리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대성당 밖에는 모스크바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대관식이 무사히 끝나길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모스크바 관구장 주교 겸 ‘모든 루스인들의 총대주교’가 대관식을 주관했다. 총대주교는 이스탄불에서 열린 4대 원시 교회 총대주교들이 합의한 이래 1589년 1월부터 초대 루스인 정교회의 수장을 맡은 이요프, 세속 이름 이요안이었다. 총대주교가 표도르 고두노프와 대관식 참석자들 앞에서 선언했다.

“우리는 황태자였던 표도르 2세 보리소비치 고두노프가 신의 은총을 받아 루스 차르국 전체와 모스크바, 키에프, 블라디미르, 노브고로드의 차르이며, 로마제국의 후계자이자 루스 정교회의 보호자로서 카잔의 차르, 아스트라한의 차르, 프스코프의 영주, 스몰렌스크의 대공 외에도 법에 규정되고 역사가 증명한 여러 가지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의 지위를 획득했음을 선언합니다.”

“차르 만세!”

참석자 일부가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총대주교가 고개를 젓자 만세 소리는 금방 잦아들었다.

원래는 모든 루스인들의 차르라는 칭호가 가장 중요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외교적인 문제를 제기할 것을 우려해 루스 차르국 전체의 차르로 칭호를 축소했다. 벨로루스와 우크라이나 슬라브인들까지 루스인으로 여긴다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카잔과 아스트라한은 루스 차르국이 정복한 지역의 지배자를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원래는 칸이라 칭해야 했으나 이슬람 지역이라 칭호까지 칸으로 칭하기 어려웠기에 차르로 대체했다. 기타 루스인들이 정복하거나 거주하는 여러 지역의 군주 칭호가 차르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여러 가지 칭호를 생략한 ‘기타 등등’은 차르의 칭호를 아무리 짧게 줄여서 발표하더라도 반드시 세 번 반복하는 것이 법도였다.

다시 총대주교가 엄숙한 표정으로 표도르 2세의 머리에 모노마흐의 황금 왕관을 씌웠다. 바로 그 순간 참석자들이 일제히 차르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일부 보야르나 시민 대표들은 눈물까지 흘렸다.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가 급서한 다음 황태자가 어려서 정식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위험한 기간을 잘 넘기고 드디어 대관식까지 무사히 마치게 됐다. 1598년부터 이어져 왔던 동란의 시대가 드디어 끝났다. 힘겨웠던 시절의 종말 뒤에 행복이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나의 차르시여.”

“고맙소, 총대주교.”

차르가 쥔 홀, 황금막대의 머리 부분을 장식한 것은 20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라서 외국 사절단들이 몹시 부러워했다. 이것은 고산국 국왕이 선물한 것이라고 외부에 공표됐지만 사실은 차르가 전 재산을 털어 40만 플로린에 매입한 것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예카테리나 여제가 소유했던 오를로프의 다이아몬드보다 살짝 더 컸고, 고산국에서 세공한 만큼 훨씬 화려했다.

차르의 문장은 류리크 왕조에서 사용하던 쌍두 독수리의 머리 위에 정교회 십자가가 달린 것 그대로였다. 아직은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알리는 것보다는 이전 왕조의 후계자 이미지가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쌍두 독수리는 동로마제국의 문장이었고 루스 차르국은 그 후계를 자칭했기에 전통적으로 같은 문장을 사용했다.

“고산국 국왕전하, 아이슬란드의 여왕폐하, 덴마크 국왕폐하, 스웨덴 국왕폐하, 토르구트의 타이지께서는 단상에 올라와 주십시오.”

총대주교에게 호명된 타이지 코오를룩이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이민호 뒤에 옹위하듯이 똑바로 섰다. 토르구트는 실질적으로 고산국에 복속한 세력이었으나 아직 오이라트의 일원이라서 외부적으로는 독립된 군주로 대우받았다. 오이라트 통일, 혹은 몽골 초원 전체의 통일에 이용할 수도 있기에 형식적으로 토르구트와 고산국이 대등한 지위의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총대주교가 그 외에도 크림한국의 사신단 대표, 노가이한국의 군 사령관인 케이쿠바트, 가짜 드미트리의 패전이 알려진 직후 황급히 선물을 준비해 모스크바로 달려온 여러 코사크 수령들을 호명해 단상 아래에 자리를 잡게 했다. 100년 넘게 루스인들을 약탈하던 타타르와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키던 코사크 수령들이 함께 자리하자 대관식 참석자들이 몹시 술렁거렸다.

“이분들은 새로운 차르의 대관식에 참가하신 증인들이시며 차르의 보호자, 친우, 혹은 동맹국 군주들이십니다. 루스 차르국과 우방들의 우호와 친선이 앞으로 영원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혼자서도 나폴레옹의 침략을 막아내고 나치 독일군을 패퇴시켜 이차대전의 종결을 가져온 러시아지만, 동란의 시기에는 참으로 약했다. 이민호는 러시아가 앞으로 유럽 침략자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동시에 침략자가 되지 않는 길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기도를 마친 다음 여러 나라와 세력들의 군주, 혹은 대리인들이 차르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섰다. 이민호와 군주들은 여러 나라의 궁정 화가들이 열심히 스케치를 하는 동안 뻘쭘하게 그대로 서 있어야 했다.

- 펑!

사진기의 조명이 터지는 순간 대관식 참석자들이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그러나 군주들은 표정만 잠시 일그러졌을 뿐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제 크렘린으로 돌아가시지요.”

잠시 후 총대주교가 차르에게 권하자, 차르가 이민호를 바라봤다. 차르는 이민호와 함께 선두에 서서 행진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차르의 의도를 이해하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다.

“차르가 선두에 서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대성당 내부를 가득 메운 보야르들과 시민 대표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차르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차르가 선두에 서고 그 다음 총대주교와 주교들, 그 뒤로 이민호와 군주들이 따라 걸었다. 맨 뒤를 따르는 코사크 수령들의 얼굴이 어쩐지 절망에 빠진 듯했다.

“차르 만세에~ 만세~ 만세에~”

차르가 이끄는 행렬이 성 바실리 대성당에서 크렘린까지의 짧은 거리를 행진했다. 몰려나온 시민들이 차르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스트렐치 병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시민들을 막아 힘겹게 길을 트는 동안, 구르카 병사들이 태엽 인형처럼 행진하는 것만으로도 길이 훤히 열렸다.

가짜 드미트리가 패한 뒤에도 여전히 차르를 못 미더워하던 모스크바 시민들의 여론이 대관식을 앞두고 단 며칠 사이에 완전히 차르에게 돌아섰다. 그리고 대관식 당일에는 그 동안 쥐꼬리만 하던 충성심이 갑자기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났다. 표도르가 이왕 차르가 됐으니 앞으로 루스 차르국이 평화롭길 바라는 길밖에 없었다.

크렘린에 돌아온 다음에도 차르와 군주들 사이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지속됐다. 여러 나라의 군주와 사절단들이 차르에게 갖가지 보화를 선물했다. 이민호는 손잡이가 상아로 되어 있고 커다란 보석들이 박힌 검을 선물했다. 루스 차르국의 국보가 되어도 손색없을 만한 화려한 검이었다.

고산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군주나 사절단에서 차르의 가족들과 대귀족, 보야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다. 그것 말고도 여러 나라에서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갖가지 음식이나 돈을 나눠주고, 혹은 서커스단 같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덕택에 가난한 모스크바 시민들이 풍족한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됐다.

토르구트가 정착한 지 얼마 안 됐어도 약간 무리해서 어린 양 1만 마리를 선물로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제공했다. 남의 것을 빼앗는 일에만 익숙했던 유목민들이라 선물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 몰라 실수가 속출했으나, 모스크바 시민 대표들이 잘 받아서 도축장으로 끌고 갔다. 모스크바 곳곳에서 공짜 양고기 파티가 며칠이나 계속됐다.

고산국 본국에서는 음식이 아니라 조리법과 음식 재료를 제공했다. 치즈 케이크, 브라우니, 사과 파이 등을 거리에 나온 모스크바 시민들이 마음껏 먹게 해줬다.

동란의 시대와 대기근 동안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온 모스크바 시민들은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민호 말고는 다른 군주나 귀족들이 절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 작품 후기 ============================

러시아는 앞으로 1회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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