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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757화 (706/1,000)

00757  84. 1605년 루스 동란  =========================================================================

“전하! 북미 여공작 비올레타 님의 따님인 마르그레타 공주가 그렇게 미인이라는데요.”

“이 인간 참 집요하네. 이봐, 차르! 혹시 북미에 욕심을 내는 거야? 고산국의 다른 지역들처럼 북미도 어느 개인의 상속 재산이 아니야.”

“북미는 전혀 생각도 안 했습니다.”

“다음 차르도 루스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하나?”

이민호는 딸들의 아버지로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차르의 조언자로서 한 마디 해주었다. 강력한 고산국과 국혼을 맺어 권력 기반을 탄탄히 다지려는 새 차르의 의도는 알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제 자식이면 당연히 루스인이 아닙니까?”

“마르그레타도 혼혈이라서 만약 차르의 자식을 낳으면 일반 루스인들과 생긴 게 달라져. 그렇잖아도 지금 차르를 배출하는 고두노프 가문이 아주 옛날에 타타르 계열의 선조로부터 비롯됐다고 루스인들이 인식하고 있잖아?”

“그건 사실입니다만, 그 동안 타타르 혈통이 많이 희석됐습니다.”

“앞으로도 대대로 루스인과 혼인을 해서 용모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꾸준히 반란이 일어날지도 몰라.”

초상화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는 루스인보다는 타타르인과 흡사하게 생겼다. 그러나 장녀 크세니아는 루스인들 사이에서 미인으로 소문났으며 스웨덴 왕족과 약혼했다가 파혼하고 덴마크 왕자 요한과 결혼했다. 아들 표도르도 그림에 따라서 다르지만 전형적인 러시아 청년처럼 생겼다.

한때 잘 나가던 합스부르크 가문과 혼맥을 맺었다가 검은 머리로 바뀌고 주걱턱이 생긴 북유럽 왕실들과 비슷한 전철을 밟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국가가 가문의 재산에 불과하던 중세시대와 달리 이 시기부터는 가능하면 왕실 구성원들과 백성들이 비슷하게 생길수록 왕실의 생존에 유리했다. 근대 국가에 이를수록 외국인이 국왕이 됐다가 쫓겨나는 경우가 흔해진다.

“국내 대귀족들보다는 고산국에 기대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앞으로 루스 차르국에서 대귀족이나 보야르들의 영향력이 줄어들 거야. 그러니 보야르보다는 백성들에게 같은 민족에 같은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서 권력을 다지는 게 좋아. 정치를 잘하면 백성들에게 인기가 좋은 왕실이 돼서 암살당할 걱정도 줄어들 거야. 그게 차르와 후손들이 사는 길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후유~”

이민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표도르 2세가 이민호의 사위가 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이민호는 고산국 왕궁에서 편하게 살아가는 공주들을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 시집보낼 생각이 별로 없었다. 괜히 시집생활이 불편하다고, 친정에 가고 싶다고 철없이 불평을 늘어놓다가 자칫 정치적 핍박을 받거나 불행해질 것 같아 걱정이었다.

이민호가 차르에게 말한 것은 고스란히 고산국에도 적용됐다. 고산국 왕실이 순혈주의를 강조할 필요는 없더라도 왕실 구성원들이 주요 백성들과 용모가 많이 다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정책적으로 혼혈을 권장하더라도 현대 미국처럼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끼리 지역 공동체를 유지해나가기 십상이었다.

“전하! 나중에 제가 후계자가 아닌 딸을 낳으면 고산국 왕실에서 혼처를 찾아도 되겠습니까?”

“참 집요하다. 알았다, 알았어. 내 아들이나 손자 대에서 연결시켜보자.”

이민호는 표도르 2세의 집요함에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다. 그러나 미적 감각이 다른 이 시대 동양 남자들이 루스인 처녀의 용모에 반할 것 같지 않았다.

고산국 왕실 사람들은 지금도 비올레타나 갈라티아 궁녀들은 물론,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이민호가 몹시 예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카오의 포르투갈 남자들에게 가차 없이 딱지를 놓은 명나라 남부 한족 처녀들처럼 배우자감으로서 이국적인 용모의 이성에 대한 거부감이 심할 때였다.

즉위 축하 사절단을 보낸 다른 나라들과 달리 스웨덴에서는 국왕 카를 9세가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지난번 칼마르에서 만나고 덴마크에서 결혼할 때도 만났던 카를 9세는 어찌된 셈인지 이민호와 자주 만나게 됐다. 스웨덴은 수시로 루스 차르국과 싸우면서도 지금은 공동의 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전쟁 중이라서 안심하고 온 듯했다.

국왕을 몰아내고 권좌를 차지하면서 루스 차르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덴마크 등 강국들과 싸워온 카를 9세가 회담장에서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소년 차르에 불과한 표도르 2세가 제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이라서 이번에도 이민호가 주로 대화에 나섰다. 차르에서 쫓겨날까봐 걱정돼서 일부러 섭정을 두지 말라고 차르에게 권한 탓에 귀찮은 일이 많이 생겼다.

“스웨덴 국왕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곳에서 전쟁 중이라서 말입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아예 차르의 섭정이 되신 것 같습니다.”

“루스 차르국이 안정을 되찾으면 곧 귀국할 예정입니다.”

“모스크바에 오래 계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스웨덴 입장에서도 루스 차르국이 안정돼야 이익이거든요.”

스웨덴의 카를 공작은 카를 9세로서 1604년에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1599년 내전에서 승리하고도 몇 년 동안 섭정 자리에 앉아 있다가 최종적으로 시기스문드의 퇴위를 선언한 다음에 즉위했다.

그 전에 폴란드 국왕 시기스문드는 스웨덴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그 동안 스웨덴과의 전쟁에 관심 없던 폴란드의 슐라흐타들을 끌어들였다. 당시 스웨덴의 영토였던 에스토니아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로 넘겨주는 조건으로 전쟁에 참가시킨 것이다. 스웨덴-폴란드 전쟁, 혹은 리보니아 전쟁은 간헐적으로 진행됐다.

폴란드와 스웨덴의 명목상 동군 연합 군주인 시기스문드의 입장에서는 오른쪽 주머니에 있는 것을 왼쪽 주머니에 옮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스웨덴 사람들 입장에서는 전 국왕이 스웨덴 영토를 팔아먹은 국가 반역자로 인식됐다.

“리보니아에서 몇 년째 전쟁을 하다 말다 하는 것 같더군요. 병력 동원도 소규모에 그치는 것 같소.”

“하하! 고산국 국왕께서 보시기에는 양쪽에서 겨우 몇 천 정도씩 동원하니까 우습게 보이겠지만, 그게 스웨덴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동원할 수 있는 전 병력입니다. 폴란드의 연방 헤트만과 리투아니아 야전 헤트만이 공동 지휘하고, 스웨덴에서는 제가 직접 지휘하고 있습니다.”

인구 천만에 달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인구 백만의 스웨덴을 압도적으로 이길 거라고 누구나 예상했지만 전쟁은 묘하게 꼬여갔다. 귀족들이 국가 권력 대부분을 차지한 폴란드와, 중앙집권적인 스웨덴의 군 동원력에는 차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1601년 6월에 리가 인근에서 벌어진 코켄하우젠 전투에서 스웨덴 군이 비록 패했지만 전체 병력은 물론, 심지어 기병과 야포도 폴란드 군보다 더 많았다. 실제 역사에서 1605년 9월에 벌어질 코르홀름 전투도 마찬가지로 스웨덴 병력이 세 배나 많았다. 물론 스웨덴이 또 패했다.

최근까지도 꾸준히 전투가 벌어지는데도 계속해서 보통 폴란드-리투아니아보다 오히려 스웨덴 군이 병력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스웨덴 군이 루스 차르국을 상대할 때는 세 배 병력도 곧잘 깨는데 반해 폴란드 상대로는 정반대였다. 스웨덴 군이 아무리 병력 세 배를 동원하고 극단적인 방어전술을 선택했어도 후사르의 기병돌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병 돌격으로 몇 배나 되는 적 기병이나 보병을 깨뜨리는 폴란드 후사르가 사기 유닛이 맞았다. 스웨덴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폴란드의 세임에서 리보니아 지역 폴란드 군에 대한 병력 지원과 군수품 보급을 등한히 하는 바람에 스웨덴이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

“폴란드 후사르는 다른 유럽에 퍼진 경기병과 달리 중기병이라서 감당하기 어렵겠습니다.”

“후사르 때문에 진절머리가 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가 직접 모스크바에 왔습니다. 아! 차르께 축하드립니다.”

“잘 오셨습니다. 며칠만이라도 푹 쉬다 가세요.”

표도르 2세가 모처럼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추운 지방에 사는 스웨덴 국왕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숙소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크렘린 궁 밖에 마련된 영빈관 중 한 곳을 고산국 철도 관계자들이 뜯어고쳐 온돌 시설과 사우나를 설치했다. 원래는 며칠에 걸쳐 시베리아 철도를 달려온 기관사나 역무원들의 휴양시설이었으나, 지난번 덴마크의 요한 왕자와 크세니아 공주의 결혼식 이후 외국 사절단을 접대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주로 북유럽 국가들에서 보낸 사절들과 사우나를 함께 이용한 고산국 혹은 유구국 기관사와 역무원들이 어쩐지 기가 죽어서 나왔다. 이들은 사우나 시설이 작아도 좋으니 기관사와 역무원 전용으로 따로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고산국 국왕전하! 대관식이 며칠 남았으니 가까운 교외에 함께 사냥이나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냥터에서 저를 암살하시려고요?”

“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대기근 때 식량을 지원해주신 일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빚은 천천히 갚으십시오.”

고위도에 치우친 스웨덴은 루스 차르국과 마찬가지로 3년 동안 대흉년을 겪었다. 덴마크 서인도회사에서 북미의 식량을 스톡홀름으로 실어 날라주지 않았더라면 큰 곤란을 겪을 뻔했다.

그런데 스웨덴에 당시 폭등한 시중가의 절반 가격으로 식량을 판매한 주체는 덴마크 왕실이나 서인도회사가 아니라 이민호 개인이었다. 만약 덴마크 왕실이나 서인도회사가 채권자였다면 덴마크와 전쟁을 하는 와중에 채무에 대한 디폴트를 선언하겠지만, 고산국 국왕이 채권자였으므로 스웨덴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스웨덴은 배후에 있는 고산국이 두려워 덴마크에 대한 선전포고도 하지 못했다.

“빚을 암살로 갚으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바이킹의 후예라 해도 지금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달라져야겠지요.”

이민호가 계속 카를 9세를 노려봤다. 덴마크 서인도회사에서 계산한 바에 따르면 스웨덴 왕실은 빚을 지고 있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용납했기에 스웨덴이 식량을 외상으로 매입할 수 있었다.

덴마크 서인도회사로부터 식량을 절반 가격에 사들인 왕실은 판매 과정을 독점해 국내에 그 이상 가격으로 판매해 큰 이익을 올렸다. 물론 기근이 심해 무료로 식량을 배분한 지역도 있었지만, 수입 대금의 절반을 빚으로 남길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카를 9세는 식량 수입 과정에서 남긴 돈으로 빚을 갚는 대신 용병을 대규모로 고용했다. 리보니아에서 폴란드와 전쟁 중이라 한 편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하라고 지원한 식량으로 장사를 하고 남는 자금을 전쟁에 사용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정책이었다.

“핀란드 만 안쪽의 루스 영토 저지대에 고산국에서 주도해 항구를 만들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곳은 루스 차르국의 숨통입니다. 물론 스웨덴 입장에서는 그 숨통을 틀어막아야 모피 교역에서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렇습니다. 스웨덴 입장에서는 절실합니다.”

“루스 차르국의 현재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고산국에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3국이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의 관계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민호도 루스 차르국의 시베리아 동진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발트 해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정책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루스 차르국이 동란 시기를 겪으며 내부로 움츠러든 동안에는 더 이상 루스 차르국을 봉쇄할 필요가 없었다.

“차르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독립국인 루스 차르국의 해상을 봉쇄해서 모피 교역의 이익을 독차지하려는 스웨덴의 시도 자체가 사실 몹시 부당합니다. 스웨덴은 다른 방식으로 루스 차르국과 교역의 이익을 나눠야 할 것입니다.”

이민호가 묻자 표도르 2세가 논리 정연하게 대답했다. 이민호가 가르쳐준 것을 잘 외워서 대답한 것이었다.

“현재의 모피 교역만으로는 그다지 큰 이익이 되지 못하오. 차르는 발트 해의 교역량을 늘릴 방안을 갖고 계시오?”

“제가 공부하면서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여기 지도를 보십시오. 아직은 발상에 불과하지만 몇 차례 조사 결과 충분히 경제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물론 이민호가 가르쳐준 내용이었다. 표도르 2세가 탁자에 올린 지도도 고산국에서 제작해 러시아어로 인쇄한 것이었다. 스웨덴 국왕과 회담을 하는 자리가 스웨덴 국왕과 신하들, 그리고 루스 차르국의 대신들에게 표도르 2세가 제안하는 정책설명회로 변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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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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