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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753화 (702/1,000)

00753  84. 1605년 루스 동란  =========================================================================

하는 말을 들어보니 진짜로 가짜 드미트리가 맞았다. 가짜 드미트리는 자기가 진짜 드미트리라고 믿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는 드미트리가 차르에 즉위한 후 바실리 슈이스키가 가짜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는데도 이를 헛소리로 치부했다. 슈이스키를 체포한 후 처형하지 않고 모스크바 밖으로 추방하는데 그친 이유였다.

“저를 모스크바에 데려가 주십시오. 모후와 보야르들이 저를 정당한 차르의 계승권자로 인정할 것입니다.”

“정말? 자신 있어?”

“신이 아시듯이 저는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가 맞습니다. 모후가 저를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후를 모셔와 확인해보십시오.”

가짜 드미트리가 워낙 진지하게 이야기하니까 이민호도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이반 4세의 여덟 번째 부인, 드미트리의 어머니인 마리아 나가야는 권력을 잃은 루스 차르국의 왕실 여자들이 그렇듯 현재 수녀원에 유폐돼 강제로 수녀가 돼 있었다.

“교회법에 의하면 진짜 드미트리조차도 차르 계승권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

“세 번째 결혼까지만 정식 결혼으로 인정하는 것이 교회법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계승자가 없고 찬탈자 보리스 고두노프도 죽었으므로 제가 계승자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어서 모후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너 말고 내가 진짜 드미트리라고 우기더라도 모후는 인정할 걸? 죽이겠다는 위협 앞에서는 겁을 내는 게 인간이니까.”

마리아 나가야는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와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아들로 인정했다가 나중에는 부인했다. 폴란드 마그나트의 딸 마리나 므니제치는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가 죽은 후, 체구도 얼굴도 다른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전하는 이반 4세의 아들인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머니는 위대해서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어도 자기 자식을 알아보는 법입니다.”

스스로를 진짜 드미트리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므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민호는 미친 사람과 말다툼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참모본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가짜 드미트리를 처형할 것을 권했다. 나중에 나타날 가짜 드미트리들도 고산국 수중에 들어올 경우 운명은 결정돼 있었다.

“네가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다. 내 입장에서 너는 가짜가 되어야 하고, 살아서는 모스크바에 입성하지 못한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오직 진실을 원합니다아~”

이민호가 가짜 드미트리를 남자 호위병들에게 넘겼다. 수많은 포로들, 루스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 집행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보야르들이 필사적으로 이민호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전하! 저 자가 진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스크바로 데려가서 사실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차르는 이미 정해져 있소. 가짜 드미트리를 모스크바에 데려갈 수 없소.”

“만약 진짜 드미트리라면 루스인들이 전하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야르들도 진실을 알고 있지 않소? 저 가짜는 루스인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미트리의 얼굴을 알고 장례식에 참가해서 죽은 것을 확인한 보야르들도 많았다. 그러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입을 다물고 가짜 드미트리를 지지하거나, 이 기회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차르가 될 기회를 노린 자들이 이들 보야르였다.

“하지만 삶에 지친 루스인들은 드미트리가 나타나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와봤자 가짜요. 차라리 구세주가 오길 바라시오.”

가짜 드미트리가 기둥에 묶이는 동안 일부러 눈가리개도 안 하고 입을 막지도 않았다. 호위들이 총을 겨누는 사이 가짜 드미트리가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진짜란 말이야! 루스인들이여! 고산국의 압제를 거부하고 지금 즉시 궐기하라! 씨발! 지금 당장 나를 구해달란 말이야! 국왕전하! 제발 살려주세요. 으흑흑! 신은 내게 왜 이 따위 운명을 주는 거야? 고산국 군대만 아니었으면 류리크 왕조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는데!”

- 타타탕!

호위병들은 이민호에게서 다른 명령이 없자 총살형 절차를 그대로 진행했다. 보야르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가짜 드미트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웅성거리던 루스인 병사, 혹은 포로들이 갑자기 침묵에 잠겼다. 놀라거나 비명을 지르는 자도 없었다. 가짜 드미트리를 사형시킨 사건이 루스 차르국에 어떤 의미가 될지 곱씹는 분위기였다.

“민지야. 확성기 준비해. 에바가 통역을 맡아줘.”

“장갑차 확성기에 연결했어요.”

이민호가 장갑차 위에 올라가서 루스인, 폴란드인, 코사크인, 유럽인 용병 등 십여 만에 이르는 사람들 앞에 우뚝 섰다. 멀리서 총성이 울리는 동안 군인들이 이민호를 주시했다.

아직도 남쪽 평원에서는 병참선을 기습했던 코사크 기병들을 여진족 기병들이 추격하는 중이었다.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으나, 실제로는 고산국과 루스 차르국의 승리로 끝났다.

“세상이 어지럽고 삶이 힘들지라도, 아니. 다시 하겠다.”

방금 사형당한 자가 진짜 드미트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인들이 이민호에게 분노하거나 할 이유는 없었다. 가짜는 살아있는 동안 고달픈 현실을 뒤엎거나 백성들에게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 역할이지, 죽고 나면 아무런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모본부에서 가짜 드미트리가 생포된 즉시 처형할 것을 권한 것도 그런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에게 속은 루스인들이 두 번째 드미트리를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심지어 세 번째 드미트리에게 지지를 보내다가도, 가짜가 죽는 순간 그때까지 보냈던 열렬한 지지를 즉시 거둬들였다. 드미트리가 진짜냐 가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루스인들의 불안과 불만이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나게 만드는 토양이었다. 가짜 드미트리가 꾸준히 나타나는 것은 힘든 삶을 이어가는 루스인들이 절실히 원하기 때문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멋져요, 주인님.”

에바가 진심으로 감동하며 사람들 앞에서 러시아어로 통역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를 표절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나, 이 분위기에서 가장 어울릴 것 같아서 써먹었다.

“류리크 왕조가 사라지고 새 왕조가 열렸다. 루스인들은 정치적 혼란과 외국군의 침공, 3년 동안 이어진 극심한 냉해로 인한 기근과 타타르인들의 약탈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크흑! 그렇습니다. 살아가는 게 몹시 힘듭니다.”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가 루스인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와중에도 외국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타타르인들에게 보복을 가하고 사재를 풀어 사들인 식량을 나눠줘서 기근을 해결했다. 여기 고산국 생산품이라고 포대 겉면에 적힌 밀가루를 안 먹어본 사람 있나?”

“없습니다. 물론 밀가루를 팔아 귀리와 바꾼 자들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차르가 사서 나눠준 식량이다. 보리스 고두노프 전 차르가 모든 루스인들을 기근에서 구해냈다. 나는 전 차르가 모든 루스인들을 기근에서 구하려는 진정한 마음을 알았기에 그를 도와 반값에 식량을 넘겼다.”

“도와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국왕전하는 외국의 왕이십니다.”

다른 루스인들은 조용히 듣고 있는데 보야르들이 반발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설득하려는 사람은 보야르들이 아니라 루스인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차르 표도르 2세로부터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가짜 드미트리나 보야르들, 폴란드가 루스인들을 위해줄 것 같은가?”

“그건 아닙니다만,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앞줄에 선 루스인 병사들이 대꾸했다. 최근 들어서 소작농들이 농노로 신분이 하락해서 그렇지, 루스인들은 얼마 전까지 자유농민의 전통이 강한 자들이었다. 몽골의 지배를 받아 소극적인 피지배자로 변했다면 농지에서 벗어나 코사크가 될 사람들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해온 것으로 미루어 나는 절대 그들을 믿지 않는다. 전체 루스인들을 전쟁과 고통으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너희들은 보리스 고두노프와 내가 크게 손해를 보면서도 루스인들을 도왔음을 잊지 말라.”

“전 차르와 전하의 공을 인정하지만 새 차르가 정치를 잘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내가 보장하겠다. 새 차르 표도르 2세는 고산국 국왕인 내가 인정할 정도로 루스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모든 루스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꾸준히 준비를 해왔다.”

“아직 어려서 제대로 자리를 지킬 수나 있을지 걱정입니다. 제위를 보야르나 외국에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정치는 현실이었다. 아주 훌륭한 성군의 자질이 있다 해도 보야르나 친인척에게 암살당하거나 제위를 빼앗긴다면 소용이 없었다.

“루스인의 사나이로 태어나 16세면 이미 성인이다.”

표도르는 1589년 6월 10일생이라서 아직 16세 성인이 되려면 한 달 정도 남았다. 그래서 차르로 등극했어도 정식 대관식을 열지 못했다.

“만약 표도르 2세가 정치를 제대로 못하면 내가 도와주겠다. 고산국 국왕인 내가 루스인들의 나라를 지켜주고 도와주겠단 말이다! 만약 일 년 뒤에도 차르의 정치가 루스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섭정을 파견해서 3년 정도 대신 다스리도록 하겠다.”

“그렇게 도와주신다면 안심입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부자로 알려진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어째서 루스인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외국 지배자는 일단 침략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새 차르에게서 군사지휘권을 위임받았다지만 이를 이용해 나라를 집어삼키려는 시도를 한다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었다.

“이웃나라잖아.”

“예?”

“고산국과 루스 차르국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고산국과 국경을 접한 모든 나라에 해당하는 문제인데, 이웃나라의 안정은 고산국에게 국가적 관심사다. 루스 차르국의 정권이 바뀌거나 외국군이 침략하면 국경이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해 이번 일에 직접 관여했다. 그러나 너희들 말처럼 나는 외국 국왕이니까 나를 믿지 말고, 안심하지도 마라.”

고산국이 섬나라로 출발하고 아무렇게나 마구 확장하는 것을 지양해서 육지로 국경을 접한 나라는 몇 되지 않았다. 필리핀과 북미 대륙에서 에스파냐 식민지와 국경이 맞닿고, 속국인 동해국이 조선과 함경도 방면에서 두만강을 국경으로 두고 있을 뿐이었다.

시베리아 영토가 몽골과 오이라트, 그리고 토르구트 등 유목민들의 영역과 접했지만 오이라트를 제외하면 속국에 해당하는 세력들이었다. 그래서 고산국은 거의 유일하게 루스 차르국과 우랄산맥을 통해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강한 나라로 소문난 고산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것을 걱정했는데 오히려 행운이군요. 고산국 백성들이 몹시 부유하게 산다고 들었습니다. 차라리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직접 저희 루스인들을 지배하면 어떻습니까?”

“너희들이 감히 나를 떠보는 것이냐?”

루스인 병사들이 씩 웃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민호는 폴란드나 스웨덴, 오스만 제국 등과 국경을 직접 접할 마음이 없었고, 루스 차르국을 지배하는 것에 큰 이익이 없어서 합병하는 것은 아예 선택지에 두지 않았다.

실제 역사에서 루스인들은 1610년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패한 다음 폴란드 국왕의 아들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즉위시켰으나, 정교회 신자들에게 가톨릭교를 강요하던 시기스문드 3세가 직접 차르가 되려 하자 전쟁을 다시 재개했다. 결국 루스인들은 정규군이 아니라 의용군으로 폴란드 군을 몰아내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루스인들은 스스로 나라를 가질 충분한 인구와 군사력,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적 능력이 있다. 고산국은 루스 차르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할 것이며, 루스인들의 나라가 앞으로도 독립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고산국 국왕전하 만세!”

에바의 통역이 끝나자마자 루스인 병사들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군중 속에서 귀 기울이며 듣던 므스티슬라브스키 장군이 가장 기뻐하며 큰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농담으로라도 여자들이 예뻐서 나라가 존속해야 한다고 솔직히 말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 작품 후기 ============================

코사크 문제만 남았습니다.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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