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47화 (696/1,000)

00747  84. 1605년 루스 동란  =========================================================================

84. 1605년 루스 동란

차르의 지원 요청은 없었지만 이민호는 3월 말까지 튜멘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장갑차 연대, 2개 기병연대, 구르카 제1 여단 외에도 토르구트 족과 노가이한국에서 기병 1만씩 차출해서 대기시켰다. 햇볕이 드는 곳마다 얼었던 땅이 녹아 진창으로 변해서 기병들이 이동에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내전은 싱겁게 끝날 것 같았다. 가짜 드미트리가 동원한 군대는 초반에 스몰렌스크를 함락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곧 루스 차르국 군대의 강력한 저항에 막혔다. 여기에 보리스 고두노프가 지휘하는 친정군이 모스크바를 떠나 전선에 접근하면서 반란군은 일패도지하기 직전이었다.

“별 일 없겠지?”

“예, 전하. 차르 친정군이 출동하면서 더욱 순조롭게 반란이 진압 중입니다. 돌발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3개월 내에 내전이 끝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참모본부는 육군과 해군 예하부대를 지휘할 권한이 없이 오직 국왕에 대한 군사자문 기능만 맡은 기관이었다. 군 정보부가 참모본부 소속이 되면서 육군 총사령관과 해군 총함장에게 군사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도 맡았다.

“돌발사태라면 뭐가 있을까?”

“차르의 갑작스러운 사망, 군 내부 반란, 차르가 자리를 비운 크렘린에서 보야르들이 일으킬 궁정 반란입니다.”

“차르가 50대 중반이지? 병이 있나?”

“크렘린 궁정에서 어의로 일하는 의사가 알려온 바에 따르면 차르는 갖가지 지병을 앓고 있습니다. 가족력을 추적한 결과 뇌졸중 위험도 높은 편입니다. 추운 곳에서 야영을 할 경우 갑작스럽게 뇌혈관 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는 1551년생이니 올해 54세였다. 농민들이 다른 영지로 여행하는 것을 금해 농노 수준으로 자유를 억제한 것 빼고는 섭정 때부터 정치를 잘한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3년 동안 냉해로 인한 흉년이 이어져 차르의 인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만약 고산국에서 도와주지 않아 대기근이 발생했다면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스웨덴과 전쟁을 벌이고 노가이 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전쟁을 지휘해 군대 지휘 경험도 풍부했다. 문제는 차르가 그 나이에 직접 친정을 실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황태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이 현 차르의 임무인데 말이야.”

“믿을 만한 부하가 드물어서 차르가 친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대대로 차르를 배출한 가문도 아니고 이반 4세의 손위 처남이며 사위인 표도르 1세의 섭정이었다가 차르로 선출된 인물이 보리스 고두노프였다. 게다가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를 암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어서 보야르와 루스인 민중들에게 미운 털이 박혀 있었다. 차르는 어린 황태자에게 모스크바를 맡기고 직접 대군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4월 중순까지 이민호는 여러 부대에 기동훈련을 시키고 광대한 평원 지형에 적응시켰다. 대지가 온통 진창으로 변하면서 기병 연대는 하루에 20km 이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장갑차 연대 병사들은 진창에 빠진 차량을 견인하고 무한궤도에 낀 진흙을 털어내느라 고생해야 했다.

제1 구르카 여단에게는 시가지 전투를 중점적으로 훈련시켰다. 몇 년 전까지 루스인 농민들이 거주했던 마을과 돈 코사크가 시비르한국을 공략할 때 지은 작은 요새는 구르카 여단의 시가지 훈련에 적격이었다.

그 사이 이민호는 타이지의 안내를 받으며 토르구트 족이 제대로 정착했는지 순시했다. 고산국에서 모직산업과 목양업의 일인자로 부상한 아이샤가 토르구트 족의 겨울 외양간을 꼼꼼히 살피더니 오줌길을 만들고 북풍을 확실히 막으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지시사항을 이행하도록 전하겠습니다. 하온데 전하.”

토르구트의 타이지 코오를룩이 우물쭈물하다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양을 키우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혹시 고향을 떠나서 조상들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닌지 부족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무슨 문제인지 말씀해보시오, 타이지.”

“이주한 다음부터 여자들이 임신을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 간신히 임신한 여자들도 초기에 유산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거 큰일이구려. 의사는 뭐라 하오?”

고산국에서 토르구트 족에 파견한 의사들도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염병을 예방하고 샤먼이 굿을 하든 말든 병을 고쳐줬지만 토르구트 족 여자들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샤먼들만 신이 나서 온갖 저주에 대해 떠들어댔다.

“여자들에게 털모자를 씌우세요.”

아이샤가 말하자 타이지가 어리둥절했고, 이민호는 박수를 한 번 쳤다. 이민호는 현대 수영복이나 란제리 패션쇼에서 비키니를 입고 하이힐만 신은 늘씬한 러시아 모델이 윤기 나는 두터운 털모자를 쓴 것이 아주 잠시 기억났다.

“아이샤의 말이 맞다! 타이지! 토르구트 족 여자들 전체에게 여름 한낮을 제외하고 항상 털모자를 쓰고 다니게 하시오.”

“전하! 저희들은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서 몽골 지역에서 살아왔기에 토르구트 여자들은 추위에 충분히 강합니다. 정말로 모자를 안 쓴 때문인지요?”

유목민 남자들은 항상 전투에 대비해야 해서 평시에는 투구 대신 털모자라도 쓰고 다녔다. 그러나 토르구트 여자들은 아주 춥지만 않으면 모자를 쓰지 않거나, 천으로 만든 얇은 모자를 썼다. 털모자를 쓰더라도 머리와 얼굴 전체를 감싸지 않고 머리 일부분만 가리고 위로 솟는 형식의 모자를 썼다.

“타이지 같은 남자들에게는 몽골 서부나 여기나 비슷하게 여겨지겠지만 이곳이 좀 더 춥고 습기가 많소. 서 몽골에서 데려온 양보다 현지의 양이 같은 기간에 살이 더 많이 찌는 것으로 기후 차이를 알 수 있지 않소? 토르구트 여자들이 몸을 항상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시오.”

털모자를 쓰지 않으면 머리를 통해 신체의 열 대부분이 발산되며 체온을 낮춘다. 털모자는 러시아나 이 지역 여자들에게 단순한 패션 아이템이 아니라 한 집단의 생존과 유지를 보장하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기껏 좋은 초지를 찾아 힘겹게 이주했는데 만약 후대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 집단은 곧 절멸하고 만다.

일본이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을 때 식민정책에 따라 이주한 일본 여자들은 초기에 임신을 하지 못했다. 난방과 보온에 대한 개념이 약한 일본 여자들은 모자도 거의 쓰지 않고 살아왔었다. 차가운 공기에 드러난 머리를 통해 체열을 다 빼앗기면 임신과 임신상태 유지에 쓸 에너지가 부족했다.

중국이 티베트를 무력 점령한 다음 이주민 수십만을 보내 티베트 전역을 한족화하려고 기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착을 시켰는데도 아기를 낳아 인구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자기 땅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티베트에서는 기온 외에도 고산증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모자라는 게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군요. 토르구트 족이 이 지역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매사에 좀 더 신중히 생각하겠습니다.”

“타이지는 훌륭한 지도자요. 토르구트 족에게 모피를 내줄 테니 모자를 만들도록 하시오. 아니, 아이샤! 토르구트 족 여자들을 위한 예쁘고 실용적인 털모자를 만들어라.”

“네! 주인님! 아주 따뜻하게 만들게요.”

아이샤는 바쁜 와중에도 일거리가 생긴 것을 기뻐하며 경쾌하게 대답했다. 이민호가 시켰기 때문이었다.

양가죽은 외투에는 적합하지만 털모자를 만들려면 여러 가지 기술이 많이 필요했다. 나중에는 토르구트 족이 직접 양가죽 털모자를 만들어서 사용하겠지만 일단 급한 대로 고산국에서 보유한 모피를 풀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황송하오나 모자 값은 가을에 가축을 팔아서 마련하겠습니다. 매번 신세를 지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천천히 갚아도 되오. 아직 정착 초기 아니오?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지원해드릴 테니 조급해하지 마시오.”

사람을 쉽게 다루기 위해 빚을 지운다는 개념은 국가 혹은 세력 간에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현대 한국도 IMF에서 지원을 받는 동안 IMF에서 시키는 대로 외환과 경제정책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은혜를 베풀었으면 나중에 토르구트 족이 고산국에 웬만큼 불만이 쌓이더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다. 서 시베리아 국경지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이민호도 신경을 많이 썼다.

“전하! 지난달에 크림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전하께서 하사해주신 밀과 술을 항구에서 인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덕택에 크림한국과 노가이한국 등 주변 나라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타이지 혼자 간 것은 아닐 테고, 몇 명이나 데리고 갔소?”

“전사도 아닌 일꾼 2천여 명이 말을 타고 갔는데 타타르 무슬림들이 무척 겁먹은 것 같아 민망했습니다.”

얼마 전까지 루스 차르국을 타타르의 노예 사냥터로 만들었던 유목민들은 이반 4세 이후 루스인들이 결집하고부터 점차 밀리는 추세였다. 그러나 이번에 진짜 몽골인들이 초원에 몰려오자 큰 충격을 받았다. 약탈이 아니라 교역을 위해 왔다기에 안심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보호를 받는 크림한국이 더 이상 흑해 북쪽 지역에서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앞으로 바다를 통해 물건을 받아야 할 때도 있을 테니 주변 세력들과 친하게 지내시오. 물론 응징해야 할 일이 생기면 타이지의 판단에 따라서 마땅히 응징하시오. 다만 오스만 제국이 상대일 때는 먼저 내게 의견을 구하도록 하시오.”

“예,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 시기에 크림한국 영토 내에 요새와 직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드네프르 강 하구 북안에 위치하며 대포 수십 문으로 무장한 오차코프 요새에는 병력이 2천 명이나 주둔했다. 1538년에 코사크들이 기습 공격해 성벽 일부를 무너뜨린 적이 있었다.

고산국 본토에서 토르구트 족 거주지역이나 튜멘까지 수송비용이 철도와 항로에 따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비교한 적이 있었다. 동해국 아사달 남쪽 곰나루 항까지 배로 4일, 철도로는 7일, 합해서 10일 걸렸다. 그러나 배에서 밀을 하역하고 다시 기차에 싣는 시간이 3일 더 걸렸다.

배는 안정적이며 대규모 화물을 실을 수 있으나 속도가 느리고 꼬불꼬불한 항로를 돌아서 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남쪽 항로를 통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고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흑해 북쪽의 아조프 해 북쪽 해안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소모된 비용은 비슷했으나 시간은 철도 쪽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 나라 근해를 지나는 해로를 이용할 경우 필요한 정치적 비용도 감안해야 했다. 고산국과 관계가 나빠질 경우 당연히 그 주변 해로가 차단될 것을 예상해야 했다. 결국 물량이 많더라도 상식과 달리 상황에 따라서는 배보다 철도를 통해 수송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경제적이었다.

“제가 크림한국에 있는 동안 코사크 해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산국 배가 강하다고 하나 해적이라면 밤에 배에 넘어 와서 기습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코사크 해적들을 무작정 때려잡기는 어렵소. 지난 수백 년 동안 타타르인들이 우크라이나와 루스인들의 땅에서 농민들을 붙잡아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팔아먹었소. 그것 때문에 타타르와 대립하는 코사크 해적에게도 어느 정도 명분이 있소.”

“아하! 이 지역 역사를 몰라서 제가 실수할 뻔했습니다.”

토르구트 족이 아조프 해 북서쪽 초원을 지나다가 자포로제 코사크 일부를 발견했는데 마침 짐이 너무 많아서 추격하지 않았다고 했다. 코사크 족도 최소한 초원에서는 임자 만난 셈이었다.

“물론 저들이 먼저 공격해오면 강력하게 응징을 하시오.”

“물론입니다, 전하. 싸움을 걸어온다면 고마운 일이지요.”

타이지의 눈빛에서 강렬한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이민호가 가장 걱정을 많이 하는 세력이 바로 토르구트였다.

이 지역에서 칼미크라 불리게 될 토르구트는 이주 직후부터 타타르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시간만 나면 초원을 쓸고 다녔다. 결과만 놓고 보면 토르구트가 타타르를 만만하게 볼 만했다.

밤마다 이민호는 아이샤와 회족 시녀들, 여진 호위들, 그리고 루스인 궁녀들을 안았다. 루스인 궁녀 에바와 올가, 이리나와 율리아는 몹시 감격에 겨워했다. 이민호는 자기 몫으로 남겨둔 여자를 가만 내버려둘 인간이 결코 아니었다.

“에바! 너 털모자 한 번 써봐.”

“다 벗고 모자만 써요? 너무 부끄러워요.”

에바가 뒤에 꼬리가 양쪽으로 달린 새까만 담비 모자를 썼다. 이민호가 분기탱천해서 에바를 다시 끌어안았다.

“전하! 급보입니다. 차르가 사망했습니다.”

“전투에서 패했나?”

멀리 우랄산맥 너머에서 활동하는 정찰대에서 보낸 전령이 아침 일찍 튜멘에 도착했다. 전령은 말 다섯 마리를 끌고 사흘 연속 밤새도록 달려왔다고 했다.

“아닙니다. 숙영지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사흘 만에 죽었습니다.”

“제기랄! 루스 친정군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

“루스 군대 내부에서 논란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에게 붙자는 쪽과, 드미트리는 가짜가 분명하니 부대 편제를 유지한 채 모스크바로 후퇴하자는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루스 군을 장악해야 한다. 전령을 보내라.”

그러나 전령이 출발하기도 전에 다른 정찰대 전령이 달려왔다. 이 전령은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하루 만에 튜멘에 도착했다.

“전하! 가짜 드미트리와 루스 군이 접촉했습니다. 루스 군 대부분이 드미트리에게 붙었습니다. 반란군과 친정군이 합세해서 모스크바로 진군 중입니다!”

============================ 작품 후기 ============================

내전은 이래서 문제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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