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43화 (69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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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1604년

명나라가 말기적 증세를 보이는 것이 확실했다. 가뭄이나 홍수, 냉해로 인해 기근이 들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 입장에서는 반란에 가담해 싸우다 죽거나 굶어 죽거나 마찬가지였다. 2년 반이 넘는 냉해로 인해 명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그 숫자 이상으로 반란에 가담했다.

1604년 상반기 내내 명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 규모가 너무 커서 명나라 황제의 칙명에 의해 고산국에서 병력 파견을 세 번이나 해서 간신히 진압했다. 북경 남쪽에 고산국 중대 병력이 주둔한 기지는 올해만 다섯 번이나 포위를 당했다.

명나라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온 감불이 계복과 함께 국왕 집무실에 와서 보고하는 동안에도 진저리 쳤다. 명나라 군대의 소집 절차, 보급 능력, 지휘체계 등등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처음 두 번은 도련님이 항상 하셨던 것처럼 포격으로 반란군 지휘부를 초반에 날려 버리는 식으로 쉽게 진압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반란군에서도 우리 전술을 예상하고 위장 지휘부를 내세우더군요. 전투 중반쯤 가서야 반란군의 진짜 지휘부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반란군 수괴도 사람이라고 머리가 있겠지.”

그러나 수괴가 머리를 써서 목숨을 연명한 탓에 반란군 10만 중에서 3만이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다. 명나라 군사들도 1만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명나라가 건주 여진이나 몽골과 전쟁을 하고 있지 않는 기간에는 반란을 진압할 충분한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거기에 고산국 병력도 참가했으니 반란군에는 재앙이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관군이 농민 반란군을 흩뜨리는데 주력했으나 요즘에는 반란군을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명나라 관군이 반란군을 끝까지 추격해서 2만을 더 죽였다. 남방위 외에도 몇몇 총병이나 유격이 직위를 잃고 지방에서 수자리 서는 병사로 강등된 사례가 있어 명나라 장수들이 다들 악착같이 싸웠다.

“냉해니 환관이니 뭐니 하지만 모든 문제는 황제에게 있습니다. 황제는 안 죽습니까? 저번에 보니까 뒤룩뒤룩 살만 찐 노인이던데요.”

이민호가 잽싸게 집무실 안을 살폈다. 감불과 계복밖에 없었고 호위들은 처음부터 없는 셈 쳤다.

“평소에도 말을 조심해라. 황제폐하는 이제 겨우 마흔이시다.”

“예? 70 넘지 않았습니까?”

실제 역사에서 1563년에 태어나 1620년에 사망하는 만력제는 몸매가 영화 <스타워즈>의 자바 헛 수준을 이미 오래 전에 넘어섰다. 그러나 명나라 어의들이 필사적으로 노력을 기울인 덕택에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좋다는 보약을 쓰고 도사들이 큰 비용을 들여 제조한 환단을 복용한 것이 문제였다. 약효가 서로 상충작용을 일으켜 이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게 됐다.

“기름진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다가 혼자서 못 일어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런 인간을 돼지라고 부르죠. 돌아가는 꼴을 보면 도저히 답이 없습니다. 명나라 황제가 얼른 바뀌면 좋겠습니다. 황태자는 여전히 왕립 대학교에 다니죠?”

“대학원 석사 과정 중이다.”

황태자 주상락은 아직 북경에 돌아가지 못했다. 가끔 북경에 가서 태후를 만나는 모양이지만 여전히 3황자 주상순을 총애하는 황제는 황태자의 알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도련님! 황태자가 공부는 잘합니까? 공부보다는 왕립 대학에서 인재 영입에 열을 올린다고 들었습니다. 황제가 될 사람이면 차라리 그게 낫겠지요.”

“아무리 황태자가 거금으로 유혹해도 외국에서 평생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평생 호사를 누리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좀 있는 것 같다만.”

그래서 황태자는 왕립 대학에서 인재보다 후궁을 더 많이 구했다. 얼굴에 귀티가 흘러서 그런지 신분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여자가 꼬인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사실 황태자 입장에서는 소박하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복색과 보석 장신구가 문제였다.

황태자는 명나라 황태자비와 후궁들을 빼고 고산국 왕도에서 새로 아일랜드,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조선 출신 후궁을 골고루 들였다. 이민호는 황태자가 자기를 흉내 낸다는 의심을 했는데, 계복과 감불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혜영 총리님이나 최 선생처럼 여자들도 교육을 받으면 문관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기회를 줘야 능력이 크지.”

혜영과 혜진은 스스로 큰 것이 아니라 이민호가 어렸을 때부터 시간 들여 가르치고 집안일과 상단 경영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성장시켰다. 최 선생은 예조에서 외교와 교육을 배우고 혜영 밑에서 실무를 익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인재가 아니라 다들 키워진 인재였다.

“그리고 명나라는 조만간 망할 것 같다. 황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개선의 여지가 아예 없어. 다음 대 황제에 누가 되더라도 마찬가지일 거야. 차라리 더 일찍 망하는 게 명나라 백성들 입장에서 더 나을지 몰라.”

“그래서 예전과 달리 출전비용을 최대한 받아내셨군요.”

“우리는 당분간 명분만 쌓으면 된다. 명나라 황실에 우호적이면서도 반란군에 동정심을 갖고 용서해주는 그런 자세를 계속 유지하자.”

계복이 한참 고민하다가 이민호에게 물었다.

“명나라가 망하면 영토 분할에 참가하실 겁니까?”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서 복건과 광동 정도는 욕심낼 만하지.”

“건주 여진이나 몽골이 약체화돼서 명나라 외부를 뒤흔들 만한 요소가 부족합니다. 명나라에 내란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게 문제다. 내분으로 분열되면 대의명분 싸움이 되기 쉬워. 차라리 외부의 적이 명나라를 무너뜨려주면 좋은데, 그게 쉽지 않겠지.”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여진족이 그렇게 오래 공격했는데도 이자성이 아니었다면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 명나라는 너무 큰 덩어리라서 웬만한 국가나 세력이 공격해도 버틸 역량이 있었다.

“해적 토벌하러 가신 총함장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습니까?”

“그쪽도 골치가 아프다. 명나라와 안남의 국경지대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섬이 많잖아. 게다가 불리하면 산으로 도망치고 우리 함대가 물러서면 다시 바다로 내려와서 해적질을 하고 있다.”

그 전까지 해적들은 명나라나 베트남 어느 쪽이든 토벌에 나서면 다른 나라 국경 너머로 간단히 도망가 버렸다. 그러나 총함장 이순신은 명나라와 베트남 수군과 협력해서 해안을 철저히 뒤져 배를 찾아 불태우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이제 지상전이 되면서 해군에 부족한 해병만으로는 지상에서 싸우기 곤란하게 됐다. 이순신은 안남과 명나라의 양광 총독을 압박해 지상군 병력을 차출하도록 해서 바다와 육지 양쪽 방향에서 포위망을 좁혀 나갔다.

“해적들이 포로가 된 남자를 덮쳐 신입 해적으로 충원한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그런 것 같다. 포로들을 자포자기하도록 만들어서 해적의 숫자를 불리는 목적이라고 들었다.”

세계 어딜 가나 해적은 잡히면 바로 사형이었다. 그러나 강제로 납치돼 어쩔 수 없이 해적에 가담했다는 변명으로 이런 관습이 흔히 이용되기도 했다.

안남과 중국의 국경지대는 해적이 자리 잡기 좋은 위치였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정일, 정일의 첩이라는 뜻의 여자 해적 두목 정일수, 정일의 남자 첩이었다가 정일수와 부부가 된 장보 등은 최대 5만까지 세력을 불리기도 했다.

이들의 직할 해적 외에 남중국의 해적연합 세력은 15만에 달해서 마카오를 포위하기도 했다. 감당하기 어려워진 청나라가 해적들을 회유해서 정착시킨다.

“여자들의 순결뿐만 아니라 남자들의 순결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해적을 소탕해야겠군요.”

“이번에 해남도에 오랜만에 해적들이 상륙했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혹시 무술을 배운 자들이 해적들을 때려잡았나요?”

“한족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해적들을 잡긴 했는데 관가에 안 넘기고 성노예로 활용하고 있다.”

“으윽!”

그리스나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중국에서도 동성애가 유행했다.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황실에서 유행했고 송, 명, 청대에는 민간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중국에서 여자 역을 맡은 경극 배우가 부자나 관료의 남창 역할을 했듯이 조선에서도 비슷했다.

명나라 만력제나 청나라 건륭제도 우회적인 동성애 기록이 있었다. 명나라 때는 처첩과 관계를 갖는 것을 내교, 남자 사이의 동성애를 외교(外交)라고 했다. 고산국 예조가 외교부로 이름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였다.

“자유 의지로 어떻게 붙어먹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포로나 어린애를 강제로 동성애 상대로 삼으면 쓰나. 그건 끔찍한 폭력이야. 우리 군대에서는 상관이 부하를 성폭행하는 경우가 없겠지?”

“우리 군대에는 없지요. 출퇴근하니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뭐, 원정 가서는 남자들끼리만 생활하니까 혹시 모릅니다. 공식적으로는 부하나 포로들에 대한 강간 사건이 일어난 적은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외진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왕궁에서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아부다비 주둔지나 알류산 열도의 측후소처럼 소부대가 장기 주둔하는 경우 불미스런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주둔기간이 석 달을 넘지 않기에 욕정을 못 참아서 남자에게 강제로 푸는 경우는 없었다.

명나라 황태자 주상락이 왕궁에 와서 알현을 신청했다. 이민호는 성문까지 나가서 황태자를 맞이했다.

나중을 생각해 황태자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고, 사소한 외교 관례 때문에 명나라와 큰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런 일이 밖에 알려지면 똑같은 인간이 어느 날에는 이민호가 명나라 황실에 불손하다고 까고, 다른 날에는 고산국 국왕으로서 자존심이 없다고 까기도 했다.

“국왕전하 덕택에 이제 곧 석사 과정을 마칩니다. 다만 여의치 못해서 제가 고산국에서 공부를 더 하게 됐습니다. 제가 어떤 학문을 배우면 좋겠습니까?”

“유럽인 친구들이 혹시 황태자 전하께 제왕학을 소개하지 않았습니까? 제위에 오르기 전에 미리 준비하셔야 할 것이 많습니다.”

“휴우~ 제가 제위에 오를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산국에서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황태자가 이제는 후회하는 듯했다. 부황의 눈밖에 벗어나 쫓겨나듯이 고산국에 왔는데, 이제는 황궁에 돌아가기 어렵게 됐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황궁에서 버티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준비한 사람이 원하는 것을 갖기 마련입니다.”

“위로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지난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럽인 참모나 새로 맞이한 후궁들의 지적 수준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앞으로 주상락이 제위에 오른 다음 현재 명나라 조정의 내각 대학사들처럼 각자 한 분야씩 맡아서 조언을 해주기로 했다.

지금은 그들도 열심히 공부하면서, 몇몇은 경험을 쌓기 위해 고산국 관료로 일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네덜란드 화가 겸 외교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외국인이 관리가 되는 경우가 흔했다.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군제를 개혁한 자들도 영국인들이었다.

동양에서는 원나라 이후 오랜만에 고산국에서 외국인들이 거의 제한 없이 관직을 맡았다. 기병 장교들 중에 조선 별시무과 급제자들이 흔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군권과 멀어진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황태자나 황자가 장군들과 가까워지면 탄핵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무관들과 인사를 나눠서 중요한 때에 지지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감시의 눈초리가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이민호는 주상락 황태자에게 박사 과정 틈틈이 고산국 군대에 종군할 것을 제안했다. 현재 감불이 주로 명나라 반란을 진압하는 파견부대 지휘관 역할을 맡았는데, 감불의 사령부에 동행하면 어떻겠냐고 의사를 물었다.

“제가 전쟁을 관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겠군요.”

“파견군에서 참모 역할을 하신다면 관전이 아니라 정식 참전입니다. 황제폐하께 충성심을 보일 기회도 되고, 명나라 장수들에게 호감을 얻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제게 지휘권을 주시지는 않겠지요?”

“사관학교나 장교 임용 절차에 따라 고산국 장교가 되시면 지휘권도 드리겠습니다.”

“소위부터 올라가야겠지요.”

주상락이 한참 고민했으나 정식 장교는 되지 않기로 했다. 언제든 황제가 붕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상락은 멀리 나가지 않으려 했다. 북경과의 거리가 떨어질수록 제위도 멀어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작품 후기 ============================

1605년부터 자세히 서술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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