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40화 (689/1,000)

00740  82. 1603년  =========================================================================

초겨울, 겨울방학 직전에 실시되는 왕립 사관학교의 산악 행군 훈련을 이민호가 직접 참관했다. 다리가 풀리고 혀를 길게 내민 사관생도들이 헉헉대면서도 악착같이 뛰었다. 악귀 같은 교관들이 욕을 퍼부으며 이미 지친 생도들을 독촉했다.

“뛰어! 뛰란 말이야, 이 약골들아! 고산국 군대에서 장교가 되겠다는 놈들이 고작 원주민이나 자그마한 구르카 용병들보다 못해? 그런 체력으로는 글러먹었어. 포기해!”

“장교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럼 뛰란 말이야! 종합순위 100위 안에 들면 평가 수를 주겠다. 임관 후 처음 근무할 부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특권도 주겠다. 탐사대나 특전대에 가는 것은 오직 너희들의 다리와 허파에 달렸다. 뛰어! 악!”

“악! 악! 악!”

사관생도들이 다시 억지로 힘을 내어 나무들 사이에 난 오솔길을 달렸다. 교관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며 이민호가 고개를 저었다. 순전히 사기였기 때문이다.

3, 4학년으로 이루어진 사관생도 400명 외에 구르카 용병 50명, 고산족 사냥꾼 50명이 포함된 산악행군이었다. 현역 특전대나 탐사대 요원들도 100명 안에 간신히 몇 명만 낄 수 있을 정도인데 이제 겨우 몇 년 단련된 사관생도들이 수를 받을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영국군 장교와 부사관들이 구르카 용병들과 산악행군을 했을 때 100위 안에 영국군은 겨우 한두 명 들어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교장! 산악행군에서 수를 받은 생도가 지금까지 있긴 있었소?”

“없습니다, 전하. 만약 있다면 그 생도를 소위가 아닌 중위로 임관시키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주 단언을 하는군요.”

“만약 있다면 그 생도가 아주 대단하거나, 산악행군 훈련에 투입된 구르카와 고산족을 잘못 뽑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곳 고산족 출신 생도도 있지 않소?”

“그래봤자 스무 살 간신히 넘은 나이입니다. 다리에 근육이 아직 덜 붙었기 때문에 100위 안에 절대 못 듭니다.”

왕립 사관학교 김학 교장은 임진왜란 때 울산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싸우다가 고산국으로 영입된 사람이었다. 주로 사관학교장으로 지내다가 때때로 부대장을 맡으면서 실전 감각을 익히고 원정에 참가하면서 고산국의 전술을 다듬어나갔다.

“생도들이 불쌍해 보이오. 구르카나 고산족들은 자존심 때문에 저리 열심히 뛰는 것이오?”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만약 저들이 100위 안에 못 들면 훈련수당 3원을 주지 않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잔인하군요.”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전하.”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체력적으로 우월하고 전술과 지휘능력, 전공 등 지적으로 우수한 것은 사관학교장과 교수부의 노력 덕택이었다. 일반 대학 출신 장교들 중에도 우수한 자원이 있었지만 체력만큼은 못 따라왔다.

“이면 항공대장은 어땠소?”

“이면 생도는 산악부 활동을 하면서 생도들 중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래봤자 산악행군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 101위였습니다.”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하고 직접 비교하기 어렵겠구려.”

축구 강국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국가대표 축구팀이 월드컵 예선 때 남미 고지대 원정경기에서 패하거나 구토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적응 문제라서 장기간 주둔시키고 나면 한결 나아질 수 있었다. 1962년 인도와 중국이 국경분쟁을 벌였을 때 티베트에 1년 이상 주둔했던 중국 인민해방군이 인도군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이겼다.

“하온데 전하. 생도들에게 수업과 훈련 외에 과외 활동 시간을 지나치게 보장해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자유 시간을 늘려주거나 외출, 외박을 활성화하면 어떨까 합니다.”

“문제가 있소?”

조선에서 중앙군 역할을 맡은 오위도총부 등 경군 소속 군인들 중 다수는 지방에서 상경하는 정병이었다. 이들은 현대 군부대처럼 막사나 숙소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한양 민가에 하숙을 하거나 세를 얻어서 생활했다.

조정에서 한때 정병들을 군부대 숙소에서 지내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전이나 진무가 정병의 재산을 훔치고 빼앗는 등 온갖 비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정병들이 필사적으로 호소해서 민가에서 지내게 됐다.

내무생활이 끔찍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왕립 사관생도들은 바로 그런 끔찍한 내무생활을 하고 있기에 과외 활동이 생도들의 정서를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됐다.

“예, 전하. 산악부가 이번에 히말라야 산맥의 최고봉 사가르마타 산을 등정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신비생물탐사부에서는 아프리카 콩고 강 하류 유역에서 이상하게 생긴 생물이 발견됐다는 소문을 듣고 아프리카 여행을 신청했습니다.”

사가르마타 산은 네팔어, 초모랑마는 티베트어 이름이었다. 즉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 산이었다. 사관학교 산악부는 실로 엄청난 것에 도전하고 있었다. 신비생물탐사부는 뭐하는 인간들인지 이름에서 대충 예상이 됐다.

“교장. 사관학교는 명령만 잘 듣는 군인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요. 장교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스스로 가장 적합한 판단을 내리고 추진해야 하는 지휘관들이오. 생도들이 과외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지도력을 습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소. 그리고 항공대가 사관학교 산악부에서 출발했음을 잊지 마시오.”

“그래도 사가르마타 산은 너무 높습니다. 위험합니다.”

“교장이 결정하시오.”

“사가르마타 산에 오르기 전에 그보다 적당히 낮은 설산을 먼저 등정하라고 권하겠습니다. 산악부에 경험이 충분히 쌓인 다음에는 사가르마타 산 등정에 도전하더라도 허가하겠습니다.”

“좋은 방법이오, 교장.”

다음 날 이면 중령이 쪼르륵 달려와서 히말라야에 등정하겠다고 요청했다. 이면은 아직도 사관학교 산악부에 적을 두고 가끔 주말에 사관생도들과 함께 옥산이나 설산에 등반하고 있었다.

“나는 상관없어. 항공대장의 부친께서 허락하신다면 언제든 허가하겠네.”

이면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갔다. 총함장 이순신이 아들이 위험한 산에 오르도록 허용할 리가 없었다. 물론 말로는 관직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라는 엄명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리 이면이 뛰어난 산악인이라 해도 항공대장으로 바쁘게 근무하면서 히말라야 등반에 필요한 체력을 준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적당한 시기에 이면에게 1, 2년 휴가를 줄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등반 전에 자세한 지도와 등반로가 먼저 준비돼야 했다. 이민호는 이를 위해 히말라야에 비행기를 동원할 생각을 했다. 이순신에게 욕 좀 먹겠지만, 세계 최고봉의 첫 번째 등정을 반드시 고산국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다.

“오! 동 두아르테, 오랜만이오.”

“반갑습니다, 전하.”

건국 초부터 고산국에 들락거렸던 마카오 상인 두아르테는 한 동안 포르투갈 본국에서 거주했다. 고산국과 적극적인 교역을 하며 마카오와 포르투갈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준 그는 리스본에서 정식 세습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개인적으로도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 두아르테가 이번에는 사절단 대표 자격으로 왕궁을 방문했다. 이민호는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두아르테를 환영했다.

“동 두아르테께서는 본국 리스본에 계신 줄 알았소.”

“예, 전하. 오랜만에 고국에 들렀다가 집안일도 많고 해서 은퇴할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늙은이라도 나라가 어려울 때는 나서서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늙은이라뇨? 동 두아르테는 쉰 살도 안 됐으니 아직 한참 때 아니오?”

“허허! 유럽 다른 나라 같으면 은퇴를 고려할 때입니다. 고산국도 본국처럼 인력문제가 심각한 모양입니다.”

고산국 건국 초에는 30대 중반의 팔팔한 장년이었던 두아르테가 벌써 50살 다 돼 갔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이후 심각한 인력부족난에 시달려서 귀족들은 죽을 때까지 외지에서 국가의 일에 부려 먹혀야 했다.

포르투갈 고위 귀족들은 국가에 더 많이 봉사했다. 멀리 인도나 말래카에서 부왕이나 총독을 하다가 70살을 넘기고 현지에서 노환으로 별세, 쉽게 말해서 늙어죽거나, 늙어죽기 직전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오랜 항해를 버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흔했다. 이 시대 유럽에서 50세면 은퇴를 고려할 나이였지만 포르투갈에서는 절대 은퇴할 수 없는 나이였다.

“요즘 포르투갈 귀족들이 현재 상황을 부정적으로 여긴다고 들었소.”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전하. 에스파냐와 협력하면 무역을 활성화시킬 줄 알았는데 오히려 외국과의 전쟁에 끌려 들어가면서 아주 곤란해졌습니다. 동군연합을 해체하고 다시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와 동군연합이 된 뒤에 전 세계적으로 포르투갈의 힘은 지속적으로 감퇴했다. 인도와 말래카에서는 주변 세력 혹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인해 방어비용이 커지면서 계속 적자를 봤고, 새로운 땅을 발견하기 위한 모험단을 지원할 여력이 없어졌다.

포르투갈의 식민지들 중에서 그 동안 오직 마카오만 번영했다. 포르투갈 국왕을 겸하는 펠리페 2세로부터 1587년에 ‘신의 이름의 도시’라는 칭호를 수여받을 정도로 크게 호황을 누렸다.

마카오는 그 후에도 고산국과 무역을 하면서 거주인원과 거래액 면에서 급팽창할 수 있었다. 광저우와 나가사키를 잇는 비단과 은 무역은 큐슈가 고산국 영토가 되면서 대폭 감소했으나, 고산국과의 교역으로 인한 이익은 그 열 배 이상이었다.

“두 나라가 여기서는 전혀 다른 나라로 행세하는데 유럽에서는 같은 나라로 인식되는 것 같소. 아무튼 그 일이 포르투갈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포르투갈 귀족들 사이에서 불만은 많았으나 아직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펠리페 2세에 이어 펠리페 3세가 포르투갈이 독립적인 사법체계와 정부를 유지하는 것을 허용하고 포르투갈 귀족들을 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펠리페 4세가 포르투갈을 동군연합이 아닌 에스파냐의 한 지방으로 통합하려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독립운동이 시작된다.

포르투갈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1640년부터 전쟁이 일어난다.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당연히 독립을 진압하려 하지만, 통과하기 어려운 산악지형의 통로 덕택에 포르투갈은 비교적 쉽게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포르투갈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던 에스파냐는 결국 1668년에 독립을 승인한다.

“마카오에 거주하는 탐험가와 군인들의 혼사 문제는 해결됐소?”

“예. 저희에게 협조적인 종족이 있어서 노총각과 홀아비들이 다행히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됐습니다.”

마카오에 거주하는 포르투갈 상인, 군인, 노무자, 선원, 모험가, 여행자 등이 가장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결혼문제였다. 포르투갈 본국에서 멀리 마카오까지 와서 결혼하려는 여자들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마카오에 거주하는 포르투갈 남성들은 그래서 그 다음으로 명나라 여자들을 신부 후보감에 올렸다. 명나라 남자들보다 부유하고 키도 크고 잘 생긴 포르투갈 남자들은 젊고 예쁜 부인을 고르려 했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착각이었고, 명나라 여자들은 이상하게 생긴 포르투갈 사람들을 남편감으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포르투갈 남자들은 탕카, 즉 명나라에서 수상인(水上人) 또는 남해인(南海人)이라 불리는 수상 거주자 출신 여자들과 주로 결혼했다. 탕카는 남중국과 베트남 해안 등지에 거주하고 배 안에서 주로 생활하는 떠돌이 민족이었다.

“그것 참 다행이오.”

“고산국 처녀들과 많이 이어지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고산국 여자들도 얼마 전까지 다들 이주민 출신이었던 주제에 이제는 본토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아요.”

고산국 여자들은 백인이나 흑인 등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편안하고 안전한 고산국 본토에 있으려 하지 외국이나 해외 영토에 나가서 힘들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

북미나 호주로 이주한 젊은 여자들은 가족과 함께 갔기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는 식이었다. 포르투갈 남자와 고산국 여자가 결혼한 경우 예외 없이 남편을 고산국에 귀화시켰다.

“인도양에 들어온 네덜란드 배들이 고아와 말래카를 위협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유순해졌습니다. 전하께서 위엄을 보이셔서 그렇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실이라면 감사드립니다.”

“그건 모르겠고, 아마도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와 다른 나라라는 주장을 네덜란드에서 받아들인 모양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에스파냐에서 독립하기 위해 싸우는 중이라 불쌍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사실 네덜란드는 아주 악랄한 침략자들입니다.”

원래 역사에서 네덜란드는 이 시기에 인도 고아와 말래카, 실론의 콜롬보 등을 노리고 여러 차례 공격하다가 실패한다. 마카오에 대해서도 여러 번 공략하다 실패했다. 나중에 1622년에는 대규모로 마카오를 공격하고, 1646년에는 마닐라를 공격했으나 죄다 실패한다.

원래 역사와 달리 이민호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정책결정 과정에 개입한 다음부터 인도양과 남태평양에 진입한 네덜란드 상선들의 군사적 위협이 극도로 감소했다. 그 대신 이민호는 네덜란드 상선들을 위해 교역량을 적당히 늘려주었다.

그리고 트르나테와 티도레, 암본 등 향신료제도의 지배자들을 고북 시로 불러들이고 필리핀 총독, 마카오 시장,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인들과 함께 연간 향신료 무역의 규모를 조절하도록 했다. 교역량을 나라별로 할당하는 과정에서 꽤나 협상이 길어졌지만 결국 타결시킬 수 있었다.

일종의 담합행위지만 향료제도가 멸망하고 유럽 상선들이 오가는 항로가 붕괴될 위기라서 어쩔 수 없이 개입했다. 이 조치 덕택에 유럽에서 한때 폭락했던 향신료 가격이 후추 외에는 다시 적당한 선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동 두아르테는 혹시 아프리카 왕국과의 전쟁 때문에 오셨소? 루안다가 아프리카 왕국에 점령됐다는 소식을 들었소.”

지금까지 두아르테는 계속 변죽만 울려대고 있었다. 참다못한 이민호가 결국 먼저 본론을 꺼냈더니 두아르테가 한숨을 내쉬더니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부끄럽지만 포르투갈은 현재 서아프리카의 노예무역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있습니다. 브라질을 개척하려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예무역의 중심지인 루안다를 아프리카 왕국이 꾸준히 공격해 결국 얼마 전에 함락시켰다. 포르투갈의 인명피해가 컸을 뿐 아니라 노예무역회사 간부와 직원들이 모조리 콩고 강 유역에 끌려가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노예상인들이 거꾸로 흑인 소유의 노예가 된 셈이었다. 아프리카 왕국은 흑인과 동양인이 노예가 되는 것을 금하고,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백인이 붙잡힐 경우에만 노예로 삼았다.

============================ 작품 후기 ============================

이민호가 지구본을 돌려 브라질 위치를 찾았다.

"땅이 무척 넓고 기름지다고 들었소."

이민호가 침을 꼴깍 삼키자 두아르테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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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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