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38화 (687/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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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1603년

총리 집무실은 혜영과 최 선생 외에도 비서관들로 인해 항상 꽃밭이라 이민호가 즐겨 찾는 곳이었다. 1603년 가을까지 많은 일이 있었으나 이민호는 계속 왕도에 머물렀다.

내정은 총리 혜영이 맡아서 잘 해오고 있었지만 이민호에게 배웠다 해도 혜영 역시 이 시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민호가 틈틈이 살펴줘야 했다. 예를 들어 혜영과 최 선생이 지시에 순응하는 백성을 키우려 한다면 이민호는 지도력과 책임능력을 갖춘 시민을 양성하려 했다.

고산국 사람은 군인이 아니더라도 미개척지나 속국에서 근무할 때 수많은 원주민들을 다루거나 지도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접하게 됐다. 그런 사람들은 고산국 영역 밖으로 나가기 전에 미리 리더십 훈련이 되어 있어야 했다. 학교가 역시 가장 좋은 교육의 장이었으며, 임기 한 달짜리 반장이나 축구부 주장 등 각종 감투를 쓰고 집단을 위해 일해 보는 기회를 다양하게 만들어 학생들에게 제공했다.

고산국이 발전하면서 백성들이 외국에 나가면 자기 분야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현지인들을 돕게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산국 국적에 무게감이 많이 실리면서, 더 많은 것을 알아야 그나마 아는 척이라도 할 수 있게 됐다. 이른바 선진국의 백성이 된다는 것도 마냥 쉽고 편한 일만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 평균 신장이 147cm라. 그 동안 많이 컸네. 그런데 평균 몸무게가 왜 이래?”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남녀 신장은 거의 비슷했다. 147cm라면 현대 대한민국 학생들보다는 조금 작지만 주변 어느 나라 아동들과 비교해도 큰 편이었고, 몇몇 지역 성인들보다 더 컸다. 문제는 평균 몸무게가 50kg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해가 흐를수록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초등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올해는 40퍼센트 정도가 비만이에요.”

“이 정도면 체질 차이에 따른 비만이 아닌 것 같은데?”

“식습관 문제 같아요. 조선에서는 부모들이 애들에게 최대한 많이 먹이려고 하잖아요?”

이 정도 비만율이라면 현대 대한민국 4퍼센트보다 훨씬 심한 비율이었다. 세계 최고의 비만율과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 과체중을 자랑하는 미국의 비만율도 34퍼센트에 불과했다. 고산국에서는 체지방률보다는 일단 체질량지수를 통해 비만의 기준을 정했다.

조선인들은 주변 국가들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대식을 한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 어머니가 아이에게 잔뜩 먹이고 나서 배를 꾹꾹 눌러 확인한 다음 더 먹였다는 서양인의 증언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 그래도 조선에서는 애들이 살이 안 쪄. 회충 같은 기생충 때문이겠지.”

“예. 고산국에서는 기생충 구제를 하고 고기를 비롯한 식단이 훨씬 더 풍족한데도 먹이는 양은 조선과 같거나 더 많아요. 당연히 영양을 과다 섭취하게 돼서 비만이 오는 거여요.”

“그런데 애들 부모가 아이들에게 일부러 안 먹일 리가 없잖아? 이거 꽤 심각한 문제네.”

최소한 영양 부족 문제로 아이들이 왜소해질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엄청난 운동량을 보이기 때문에 아동 비만은 초등학생 위주로 발생하는 한시적인 문제였다.

“의사들과 영양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동을 위한 표준 식단을 짜고 있어요. 학교에서 급식할 때도 도움이 될 거여요.”

“지금까지는 영양 공급이나 위생에만 신경 썼지 균형 잡힌 식단은 생각을 못했군. 학부모들도 설득해야 할 거야. 조선이나 아일랜드에 있었을 때처럼 무조건 많이 먹이는 게 좋은 게 아니라 다양한 식품을 섭취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해줘.”

고산국 건국 이후 곡물과 채식 위주였던 식단이 절반 이상 육식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조선에 있을 때처럼 최대한 먹거나 먹이는 식습관이 여전히 유지돼서 생긴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이었다.

“지금 아이들이 커서 성인이 되면 170cm 넘지 않을까요? 벌써부터 고산국 사람들에게 거인족이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조선 사람들 자체가 주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좀 컸어. 고산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더 커지겠지.”

이민호는 조선 혈통의 성인 남성 평균 신장이 언젠가는 현대 대한민국과 비슷하게 174cm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최소 수십 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잘 먹을수록 커지겠죠?”

“그건 모르겠지만 표를 보니 여자아이들은 10대 초반에, 남자아이들은 10대 중반에 쑥쑥 크는 것 같아. 인종마다 유전적인 성장 한계가 있을 거야.”

“그럼 성장기에 비만이 어느 정도 생기더라도 어쩔 수 없겠어요. 영양 공급을 줄일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다. 식단을 더 다양화하고 곡물을 조금 줄이는 대신 그만큼 채소나 과일 비중을 높여.”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인 이민호는 최소한 아이들이 못 먹어서 못 큰다는 말은 죽어도 듣기 싫었다. 곡류는 물론 호주에서 양과 소를 대규모로 키우면서 육류가 넘쳐났고, 주변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도 풍족했다. 그래서 식량 가격을 항상 싸게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산국은 속국은 물론 주변 국가들과도 교역을 확대하고 농업 및 어업기술을 전수했다. 고산국의 영향을 깊이 받은 브루나이와 자바 섬의 도시국가들, 베트남과 타이 등에서 인구 폭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열대 지방은 최근 몇 년 사이 전 지구를 엄습한 냉해와 대기근의 영향을 적게 받아서 지속적인 인구 폭증이 가능했다. 명나라와 일본은 정치적인 문제에 더해 냉해 때문에 더 혹독하게 기근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행정체계가 붕괴돼서 고산국에서 지원한 식량이 굶주린 농민들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아서 바로 지원을 끊었다. 대신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 등 구황작물 종자를 배포했다.

조선에서도 흉작이 이어졌지만 시멘트를 대량으로 고산국에 수출하고 각종 광산을 운영해서 생긴 여유 자금으로 식량을 충분히 구입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고산국과 무역을 하면서 챙기는 세금만으로도 조정과 왕실이 자금 문제에 시달리지는 않게 됐다.

“어제 토르구트 족이 보낸 진상품이 도착했어요. 양 열 마리, 염소 두 마리에요. 황금 일만 냥도 있어요.”

“오! 드디어 토르구트가 제대로 정착한 것 같아서 기쁘다. 그런데 황금은 뭐야?”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가축을 판 대금 중 일부래요.”

“사람들 참! 자기들 먹고 살기도 바쁘면서.”

시베리아 남부 스텝도 3년째 냉해를 입었으나 고산국에서 보낸 건초용 작물을 파종한 이후 한시름 놓게 되었다. 올해에도 여전히 루스 차르국의 농업은 수확량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기아에 시달리지 않게 된 농민들은 내년 농사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대신에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신성로마제국의 상황은 상당히 나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영지마다 식량 사정이 제각각이라 일률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스웨덴은 올해 봄에도 전국에 홍수가 나는 바람에 농사를 망쳤으나 고산국이 덴마크 서인도회사를 통해 식량을 지원해준 덕에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몇 년째 날씨가 추워지면서 스웨덴에서 수출하는 난방용 석탄의 수요가 유럽 전역에서 급증했으나 식량 가격이 훨씬 더 많이 폭등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에도 3년 연속 흉년이 들어 금과 은은 물론 그 동안 이탈리아에서 수집한 예술품까지 고산국에 식량 수입 대금으로 지불하게 됐다. 프랑스에서 북미로 새로 이주한 자가 지난 3년 동안 10만이 조금 넘었다. 이들은 주로 미시시피 강 유역에 정착시켰다.

“내년부터 곡물 경작을 대폭 줄이라고 지도하는데도 농민들이 도무지 말을 안 들어요.”

“곡물가가 폭등하는 것을 봤으니 다들 눈이 뒤집혔을 거야. 내년에 풍년이 들면 곡물가가 폭락할 테니 빈 창고나 채우지 뭐.”

페루 와이나푸티나 화산의 분화는 1600년 2월에 처음 시작됐고, 5월에 재분화가 있었다. 엄청난 양의 분진과 황 입자가 대기를 가득 채웠고 광범위한 지역에 황산비가 내렸다. 그리고 전 세계의 일조량을 떨어뜨려 스위스에서 일본에 걸쳐 500년 만에 최악의 추위를 몰고 왔다.

그러나 올해 봄부터 각 지역 측후소에서 보낸 기온 변화를 세심히 분석한 결과 조만간 예년 기온을 되찾을 것으로 고산국 관상대에서 예상했다. 기후 예상이 그렇듯 틀릴 가능성도 있었지만 확실히 작년보다는 따뜻했다.

“그럼 농민들이 손해를 많이 볼 수도 있어요. 농민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제 즐거움이에요.”

“손해? 지난 3년 동안 얻은 엄청난 이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리고 곡물가가 예전처럼 낮아지더라도 농민들이 손해는 절대 안 봐. 기대 수익이 줄어들 테니 몹시 실망하겠지만.”

“맞아요. 고산국 건국 이래 농민들이 가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물론 가장 고생하는 사람들이지만요.”

고산국 영토 전체에서 그렇지 않아도 부유했던 농민들이 지난 3년 동안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덕택에 농가마다 그 비싼 경운차를 장만해 좀 더 편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농민들이 비단 작업복을 입는 등 소소한 과소비를 해대면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다녔다. 고산국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정책적으로 농민의 비율을 줄여왔는데 이번 일로 인해 다시 확 늘어나게 됐다. 그러나 고산국에서는 항상 어느 분야든 노동력이 부족해서 문제였지 많아졌다 해서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아일랜드는 어때?”

“여기 비올레타 님이 정리한 내용이 있어요.”

아일랜드에서 북미로 이민을 받아들이고 식량을 지원하는 일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귀족들이 주도했던 독립운동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면서 더블린에서 더 많은 아일랜드 농민들이 배를 타고 북미로 향했고, 역시나 냉해를 입어 지원하는 식량이 더 많아졌을 뿐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올해에는 고산국에서 훈련 받고 돌아간 아일랜드 평민 독립군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기록됐다. 500명 중에서 몇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300여 명으로 인원이 줄었다가, 다시 아일랜드 지원자들을 충원해 지금은 천 명 약간 안 되는 수준으로 늘었다고 한다.

“잘하면 독립군이 장기간 생존하겠는데?”

“잉글랜드 토벌군보다는 귀족들과의 싸움에서 먼저 살아남아야 해요.”

아일랜드 북부 티르코넬의 왕, 휴 오도넬이 병으로 죽으면서 지난번에 북미 새강릉에 전령으로 왔었던 동생 로리 오도넬이 왕으로 즉위했다. 이민호가 예상한 대로 로리 오도넬은 잉글랜드와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

로리 오도넬은 고산국으로부터 식량을, 에스파냐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으면서도 동시에 잉글랜드에 협력하는 대단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로리 오도넬은 자기가 아일랜드 동포들에게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군을 규합해서 잉글랜드 군대와 싸우기보다는 다른 아일랜드 무장 독립 단체를 때려잡는 일에 열중했다.

셰이 쇼 하사가 이끄는 평민 독립군은 토벌하러 온 잉글랜드 군대를 한 번, 아일랜드 귀족 독립군을 세 번이나 격파했다. 잉글랜드 토벌군이 공격했을 때는 독립군 전체가 거의 와해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로리 오도넬이 이끄는 귀족군과의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크게 이겨 아일랜드 전국에 명성을 드높였다.

“괜히 독립군을 훈련시켜 보내는 바람에 아일랜드 내전을 격화시킨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그렇다.”

“다른 독립군이 없었다면 귀족들이 아일랜드 전체를 잉글랜드에 벌써 바치고도 남았을 거여요.”

“그까짓 귀족 작위와 영지를 보존해준다고 잉글랜드가 비밀리에 약속한 때문이겠지.”

“그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가치일 테니까요.”

고산국에서 평민 독립군을 지원한 것은 아일랜드인들을 위한 선택으로서 나쁘지 않았다. 다만 평민 독립군이 고산국의 지원을 받았다고 잉글랜드 진압군 사령관이 폭로함으로써, 귀족군처럼 평민군 역시 외세의 꼭두각시라는 흑색선전에 시달리게 됐다.

“독립전쟁이란 것은 결코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거야. 계속 지원해주도록 해.”

“예. 조만간 항구를 포함한 근거지를 확보하면 지원하기 더 편해질 거여요.”

이민호는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정점에 이른 순간에 고산국 직할 병력을 투입할 생각도 해두었다. 안 됐지만 고산국이 존재하는 한 잉글랜드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번성할 일은 절대 없었다.

============================ 작품 후기 ============================

1603년은 처음으로 순행을 안 하는 해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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