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36화 (685/1,000)

00736  81. 러시아 대기근과 중앙아시아  =========================================================================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전하. 그런데 이 약해빠진 놈들은 누굽니까?”

“우린 약하지 않아!”

키르기스 청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구르카인 상사가 은근슬쩍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전하! 이 어설픈 산사람 복장은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평지 사람 주제에 되도 않을 산악 민족을 흉내 낸다는 키르기스인이 틀림없습니다. 천산산맥 서쪽 언덕지대에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산사람으로서 자부심이 넘친다면 너는 고르카 족이로구나. 고르카가 사는 지역이 높다지만 키르기스에도 한텡그리 봉이나 포베디 봉처럼 높은 산이 많다! 만년설과 빙하는 히말라야산맥의 전유물이 아니야.”

키르기스의 동쪽에는 천산산맥, 남동쪽에는 천산산맥의 연장선인 콕샬타우 산맥, 남쪽에는 파미르 고원, 북쪽에는 키르기스산맥이 있어서 키르기스 지역 대부분이 산지였다. 그러나 키르기스인들의 주요 거주지는 키르기스산맥 아래 해발 750~900미터인 추 강 유역이었고, 구르카인들이 보기에 언덕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하늘 아래 첫 번째 동네의 주민들은 누가 뭐래도 히말라야 산록에 사는 네팔인들이었다. 사실 네팔에는 산악지대 외에도 낮은 언덕 지대가 펼쳐져 있고 특히 인도와의 국경 쪽에는 고온다습한 평원이 영토에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네팔의 원주민은 자나자티스라 해서 따로 있었다. 고산국의 구르카 여단에는 고르카 족뿐만 아니라 네팔에 거주하는 여러 부족 출신들이 합류했다.

“그래, 그래. 하지만 너희들의 특성을 알지. 명색이 산악 민족이라면서 산에서 움직임이 그렇게 느리다며? 산사람 맞아?”

“너희들은 말을 못 타잖아! 우린 말을 타고 훨씬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이번에 고산국에서 문제를 삼은 것도 키르기스의 마적들이 멀리 우랄산맥까지 가서 루스인들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산에 사는 민족이 말을 탄다고? 그래서 너희들이 산이 아닌 언덕에 산다는 거다, 이 굼벵이들아.”

키르기스 청년들은 굼벵이라는 소리에 아무 대꾸를 못했다. 사실 키르기스가 카라키타이, 즉 서요를 따라 중앙아시아에 들어온 것은 12세기 정도였으나 현재 거주지인 키르기스 산맥의 산기슭에 정착한 것은 채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키르기스의 중심 도시인 비슈케크, 이 시대 이름으로 피슈페크가 산맥 아래 평지에 있을 정도였다.

키르기스는 산악지대에서 생존하기 급급했을 뿐 평지 민족들에 비해 아직 산악 민족 고유의 특징을 보유하지 못했다. 이란계 산악 민족으로서 타지크라 불린 이웃 파미르인이나 다르드인들로부터 산악 민족의 문화를 흡수하긴 했으나 아직 완전히 배우지는 못했다. 산악 민족치고 말을 잘 탄다는 것도 이들이 카라키타이나 위구르제국, 몽골제국의 지배 아래에 살던 초원 유목민이었다는 증거에 불과했다.

“전하! 설마 이 야만스런 고르카 족이 이번 토벌에 참가합니까?”

“그렇다. 키르기스의 사냥꾼 청년이여. 현재 이곳에 5천 명이 대기 중이며, 튜멘에서 5천 명이 곧 출발할 예정이다.”

“평지에는 몽골과 오이라트 기병을, 산악에는 고르카 족을 투입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정말 잔혹하십니다.”

“나는 키르기스 족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다. 네가 말한 마적들을 토벌하러 왔을 뿐이야. 그러나 작전을 방해하거나 마적들을 보호하면 키르기스든 우즈베크든 용서하지 않겠다.”

“그 위대한 칭기즈칸도 호라즘을 칠 때는 자그마치 25만을 동원했습니다.”

실제 전투에는 몽골군 14만이 참가해 겨울에 천산산맥을 넘고 사막을 건너 호라즘 전역을 전쟁에 몰아넣었다. 몽골의 침공에 대비해 시르다리야 강변에 늘어선 요새 도시 수비대들은 나중에 각개 격파됐을 뿐이었다.

“고산국 직할 병력 1만에 구르카 1만, 토르구트 3만, 동몽골 1만까지 해서 6만 뿐이다. 내가 오만하다고 생각하느냐?”

“고산국에서 동원한 비행기도 몇 대 있지요.”

“항공대는 인원으로 따지면 몇 명 안 된다.”

청년이 한숨을 팍 내쉬더니 이민호에게 청했다. 다른 청년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를 풀어주십시오. 놓아달라는 뜻이 아니라 밧줄을 풀어달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라.”

호위들이 키르기스의 수리 사냥꾼을 묶은 밧줄을 풀어주었다. 키르기스 청년이 일어났다가 바로 무릎을 꿇었다.

“키르기스 전체가 전하께 항복하겠습니다. 마적들은 저희가 소탕할 테니 제발 병력을 물려주십시오.”

“너를 어떻게 믿고?”

“저희들은 키르기스 부족장들로부터 고산국과 교섭을 하라는 명령을 받은 대표단입니다. 저하고 같이 온 이들 모두 여러 부족장들의 자제들입니다. 전하께 오는 도중 부하라의 군사들에게 추격당하다가 저만 잡혔습니다.”

부하라한국 칸의 동생 왈리 무하마드가 비명을 질렀다. 사냥꾼 청년은 왈리 무하마드가 동원한 군사들을 혼자서 막아 동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는 대신 붙잡혔다고 한다.

부족장 자제들인 젊은이들이 대표단으로 온 것은 여차 하면 고산국에 인질로 붙잡혀있기 위해서였다. 키르기스는 이렇게 고산국에 충분히 성의를 보였다.

“보십시오! 키르기스 부족장의 자제들이 맞잖습니까!”

왈리 무하마드는 펄펄 뛰었으나 고산국 국왕에게 가는 사신단을 중간에 막은 잘못을 저질렀을 뿐이었다. 이민호가 그런 이유를 들어 칸의 동생을 나무란 다음 부하라한국과 키르기즈 사신단을 모아서 선언했다.

“문제는 키르기스 마적들이오. 고산국과 직접 국경을 접하지 않았는데 내가 뭐하러 여길 왔겠소?”

“비단길 주변의 부유한 도시들을 약탈하거나 페르가나 말을 구하러 오신 줄 알았습니다.”

“응? 페르가나 말?”

이민호가 번쩍 눈을 떴고 칸의 동생은 자기 입을 손바닥으로 마구 두들겼다. 그러나 일단 말을 뱉어냈으면 절대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오호! 이제 보니 부하라한국의 사신단이나 키르기스 사신단이나 다들 페르가나 말을 탔구려.”

“맞습니다. 이 지역에서도 무척 비싼 말입니다. 그런데 고산국은 얼마나 부유하기에 직할 기병부대 전원이 페르가나 말을 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많은데 더 이상 필요 없지 않습니까, 전하?”

“아니오! 좋은 건 나눠야지요. 삽시다! 말 목장 사람들이 너무 고생하고 있소. 망아지를 낳느라 암말들도, 종마도 고생이 많소.”

한 가지 증거만으로 그 동안 품었던 의문이 모두 풀렸다.

“멀리 남쪽에 사는 키르기스 마적들이 어떻게 우랄산맥까지 와서 루스인들을 잡아가는지 이제야 비밀이 풀린 것 같소. 천리마라 불리는 페르가나 말 때문이었소. 추격에 나선 토르구트 기병들이 마적들을 놓친 것도 모두 우수한 품종의 말 때문이었소.”

“전하! 설마 토르구트에게도 페르가나 말을 주려고 하십니까?”

“당연하지요. 같은 말을 타야 마적들을 추격해서 섬멸할 수 있지 않겠소?”

독일에서 속도 제한이 없는 일부 아우토반 구간에서 성능이 좋은 자동차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경찰도 포르쉐나 페라리를 몰아야 한다. 이민호는 그 동안 토르구트 기병들이 키르기스 마적을 못 잡는다고 불평했는데, 말의 성능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민호는 마적들이 비싼 페르가나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더 신기했다. 노예매매를 하면 이익이 많이 남는 모양이었다.

“위험합니다, 전하! 페르가나 말이 오이라트 전체에 퍼질 수도 있습니다.”

“비싼 말이 오이라트에 넘어가지도 않을뿐더러, 혹시나 그렇게 되더라도 내 알 바 아니오. 키르기스 마적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오. 페르가나 말을 사도록 사신 대표가 도와주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모셔드리겠습니다. 시르다리야 강변을 따라 가면 나옵니다. 다만 외국 군대는 쉼켄트 외곽까지만 가실 수 있습니다.”

이민호가 강한 의욕을 보이자 칸의 동생이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길을 안내하겠다고 약속했다. 12세기에 실크로드의 교역도시 사이람을 오가던 대상들의 숙소로 활용하기 위해 동쪽 10km에 건설된 쉼켄트는 사이람보다 오히려 훨씬 큰 도시로 발전했다.

쉼켄트는 카자흐 말이고 나중에 개칭된 침켄트는 우즈베크어로서, 둘 다 잔디를 뜻했다. 켄트나 칸트는 도시였다.

고산국 기병군단이 얼어붙은 시르다리야 강의 북안을 따라 남동쪽으로 며칠째 진군했다. 시르다리야 강은 부하라한국의 북부 영토를 관통해 키르기스에 접근하는 경로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민호가 이 기회에 부하라한국이나 키르기스를 공격할까봐 이민호와 동행한 두 세력의 사신단이 몹시 걱정했다.

구르카여단은 일부는 수송차에, 대부분은 마차에 타고 이동했다. 이들을 이동시키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다.

시르다리야 강변에 이어진 도시들을 지나가는 중에 가끔 시장에 들러 상품을 살폈다. 그러나 딱히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별로 없었다. 바닷길이 열린 다음부터 실크로드의 중요성이 떨어진 면도 있으나, 지금은 이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상업이 위축된 시기였다.

며칠째 행군하는데 어느 날 오전에 남동쪽에서 자욱한 모래먼지가 일어났다. 그리고 정찰대가 무선으로 급히 보고했다. 부하라한국의 우즈베크인들이 말을 타고 대거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칸의 동생이여. 부하라한국은 결국 전쟁을 택했소.”

“전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금 남서쪽 페르시아나 북동쪽 카자흐한국에 대응하느라 이쪽에 병력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칸의 군대가 절대 아닐 것입니다.”

“부하라한국에 칸 말고도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자가 또 있소?”

칸의 동생 왈리 무하마드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깜빡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민호가 예상한 대로였다.

“영주나 대상인들이 병력을 모으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맘이라면 혹시 성전을 일으켰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 물론 우즈베크인들은 전하가 용을 다루는 악마라는 소문을 믿지 않습니다.”

부하라한국의 이맘 쿨리는 그 동안 페르시아가 침공해도, 카자흐가 타슈켄트를 점령해도 상관하지 않았었다. 이맘은 주변국들도 같은 무슬림으로서 종교인이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다만 페르시아는 시아파라서 수니파인 이맘이 카자흐에 비해 더욱 경계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고산국이 남진하자 이맘이 고산국을 기독교 국가로 규정하고 성전을 선포했다. 이맘 쿨리는 나중에 칸이 된 왈리 무하마드를 쫓아내고 스스로 칸이 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종교를 기반으로 정치적인 야심을 가진 자였다.

이맘의 소집에 응해 말을 타고 몰려든 우즈베크인들은 자그마치 5만에 달했다. 이맘에 의해 성전이 선포됐으니 잘 되면 전리품을 얻고, 잘못 되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부하라한국에서 군인으로 활동하기 적합한 젊은이들은 대부분 카자흐 방면이나 페르시아 방면의 방어선에 투입돼 있었다. 이맘의 소집에 응한 자들은 신앙심이 넘치는 어린애나 중년, 노인들뿐이었다.

“장갑차 연대는 대대별로 원형진을 형성한다. 기병은 뒤로 이동하고 보병은 원형진 사이의 틈을 봉쇄하라.”

“전하! 적은 숫자만 많은 어중이떠중이들입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더 많습니다. 저희 토르구트를 활용해주십시오.”

토르구트의 타이지는 지금까지 충성을 드러낼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민호가 매번 토르구트의 출전을 제지하는 바람에 강력한 기병 전력을 자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타이지뿐만 아니라 토르구트 기병들이 불만을 품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토르구트에서 동원한 3만 기병만으로 부하라한국의 기병 5만을 충분히 격파할 수도 있겠다고 이민호는 예상했다. 하지만 이민호는 군인이 아닌 국왕, 즉 정치가였다. 전투를 장군 감동에게만 맡기지 않고 직접 지휘하는 이유가 있었다.

“타이지. 대규모 기병끼리 정면에서 충돌하면 병사들끼리의 전투가 아니라 말 때문에라도 아군에 병력 손실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토르구트의 병사라면 단 한 명이라도 아깝소.”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전사들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으면 불만이 생깁니다.”

“칸의 동생이 한 말에 따르면 저들은 전쟁에 나설 만한 인원이 아니오. 그러니 토르구트에게 기회가 의외로 빨리 올 것이오.”

“예. 기다리겠습니다, 전하.”

아군 기병 5만을 뒤로 후퇴시키고 장갑차 연대가 대대별로 원형진을 구성했다. 포병대대까지 원형진 넷이 외곽을 막고 중앙에는 정찰중대와 호위대가 포진했다.

“알라흐 아크바아아아르~”

종교적 열정인지 전리품에 대한 욕망인지 알 수 없지만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말을 타고 장갑차 대열 정면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에게 제대로 된 지휘체계가 없는지, 혹은 이맘이 지휘 능력이 결여됐는지 기병 5만이 덩어리를 지어 한꺼번에 몰려왔다.

“포병대대, 1, 2대대, 쏴!”

우즈베크인들 입장에서 본다면 고산국 장갑차 연대 중에서 포병대대가 정면, 장갑차 대대가 양 측면에 포진하고 있었다. 대대 3인치 야포 탑재 차량 16대, 5인치 야포 탑재 차량 8대에서 발포하고 보급 또는 정비차량 16대에서 기관총을 발사했다. 원형진 사이의 틈을 메운 구르카 보병들은 아직 거리가 멀어 자리만 지켰다.

우즈베크인들은 늙으나 젊으나 유목민들이었다. 말을 정말 잘 탔고 간격이 좁혀지자 빠른 속도로 쇄도했다.

- 콰쾅!

그때 우즈베크 기병 집단 중간에 폭발이 일어나면서 밀집한 기병들이 한꺼번에 열 명 단위로 쓰러졌다. 측면에 배치된 장갑차 대대에서도 아군 차량에 가리지 않는 차량들에 한해서 적에게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우즈베크 기병들은 장갑차에서 포탄을 발사한 직후 더욱 용기를 내서 돌진했다. 대포를 쏘고 나서 장전하는데 한참 시간이 걸리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탄은 단 몇 초 후에 날아왔다. 기병들이 당황하는데 3탄이 날아왔다.

“이맘은 어디에 있지?”

“찾았어요! 기병 대열 뒤쪽, 큰 일산 아래에 백마를 타고 있어요.”

“찾기 좋으라고 고급스런 붉은 비단을 사용했군. 항공대에 연락해!”

민지가 망원경으로 확인하고 민정이 정찰기에 연락하는 사이 우즈베크 기병들의 전진은 멈춰 있었다. 그러나 장갑차 연대에서는 이맘이 동원한 우즈베크 기병 집단에 끊임없이 포격과 총격을 퍼부었다.

우즈베크 기병들이 큰 혼란에 빠졌으면서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하늘에 연회색 그림자가 나타났다. 고산국 항공대 소속의 정찰기였다. 우즈베크 기병들이 하늘을 가리키며 손짓을 하거나 알라를 찾았다.

============================ 작품 후기 ============================

전투 승패는 뻔하고 그보다는 전후 처리과정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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