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32화 (681/1,000)

00732  81. 러시아 대기근과 중앙아시아  =========================================================================

노가이 족 포로들을 노가이한국에 모두 넘긴 다음 병력을 튜멘으로 돌려 잠시 휴식을 주었다. 그리고 11월 초순 다시 카자흐한국 영역의 카자흐 및 키르기스 약탈자 혹은 노예사냥꾼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평소 이들의 약탈에 시달렸던 루스 차르국에서 병력은 못 보내주더라도 참관단을 파견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를 대신해 13살인 황태자 표도르가 여러 선생들, 그리고 호위를 맡은 보야르들을 데리고 참가했다.

얼마 전까지 루스 차르국이 고산국의 가장 큰 가상적국이었다. 발트 해의 무역시장에서 모피 가격을 조작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여 루스 차르국의 팽창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대기근 기간에 도와줬더니 어느새 보호국 비슷한 위치로 변했다.

“요한 왕자와 크세니아 공주의 결혼식은 어땠나? 보다시피 바빠서 직접 참가를 못했어.”

“전하께서는 더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신경 써주신 덕택에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거행됐습니다. 고산국에서 보낸 선물의 화려함에 모든 보야르와 시민들이 놀랐습니다.”

지난 10월에 덴마크의 요한 왕자와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의 딸 크세니아가 결혼식을 올렸다. 실제 역사와 달리 요한 왕자는 병에 걸려 죽지도, 암살당하지도 않고 여신급 미모를 자랑하는 크세니아와 꿈같은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고산국에서는 예조판서를 축하사절단 대표로 보내 결혼식을 축하했다. 신랑과 신부에게 몇 가지 화려한 보석 장신구를 선물해서 루스 차르국과 덴마크를 동시에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발트 해 연안 국가들이 보낸 외교관들과 몇 가지 교섭을 완료했다. 특히 스웨덴 사절단 대표는 고산국이 대서양 건너편이 아닌 루스 차르국 너머에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루스 차르국을 노리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사절단은 고산국과 덴마크가 루스 차르국을 보호하는 형세를 취하자 크게 낙담한 것 같았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크렘린 가까운 곳까지 철도가 연결돼 있어서 외국 사절단들이 구경하러 몰려갔다. 기차에서 밀 포대를 내려 산처럼 쌓는 것을 본 폴란드 귀족들은 몇 가지 의미를 깨닫고 아주 기겁을 했다고 한다. 고산국은 물론 덴마크와 차르가 외교전의 승자로 떠올랐고, 폴란드와 스웨덴은 당분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굶는 지역은 이제 없겠지?”

“예. 전하께서 조언해주신 덕택에 식량을 모스크바에서 전국으로 배급하는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고산국에서 밀 위주로 너무 많이 보내주셔서 밀 값이 떨어지고 귀리 값이 올라간다고 한탄하는 보야르들도 있습니다.”

황태자 표도르는 어릴 때부터 부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컸고, 교육에 관심이 많은 보리스 고두노프 덕택에 이 시대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표도르는 아주 어릴 때부터 국정에 참가했으며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면서 정치 감각을 키웠다.

황태자는 그저 껍데기만 13살이지, 웬만한 나라의 철없는 왕자나 귀족 자제들보다 훨씬 노련했다. 그리고 체력도 강하고 민첩해서 겨우 16살에 장정 4명을 감당했다고 한다.

현재 고산국 출신 의사가 어의를 맡고 예방접종도 이미 받아서 웬만하면 황태자가 어려서 병으로 죽을 일은 없었다. 다만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는 건강에 적신호가 계속 켜져서 이민호 입장에서는 조금 걱정이었다. 그저 황태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차르가 살아남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덴마크의 요한 왕자가 차르를 계승하는 편이 더 좋겠지만, 황태자 표도르가 제위에 오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난한 자들이 밀을 귀리로 바꿔 먹어서 잠시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뿐이야. 그래봤자 귀리 값이 밀 값을 넘을 일은 없어.”

밭에서 수확을 전혀 못 거두는 대기근이 2년 연속 발생했지만 고산국에서 빠르게 식량지원을 한 덕택에 모스크바에서 굶주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식량 배급을 받으려고 모스크바에 몰려들었던 농민들도 지금은 지방 도시와 농촌으로 돌아가 고산국에서 제안한 몇 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이민호의 조언을 받은 차르는 노인과 어린이 외에 식량을 무료로 배급하는 일을 중지했다. 그리고 도시민들은 주로 도로 건설과 성곽 건설에 동원하고 농민들은 다음해 농사에 대비해 경지정리를 하도록 일을 시킨 다음 식량을 임금 대신 지급했다. 지방으로 식량을 수송하는 일은 군대가 맡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치안이 전국적으로 안정됐다.

“루스 차르국이 유럽 다른 나라들에 비해 뒤떨어진 것은 황태자도 알고 있겠지?”

“부끄럽지만 외국에서, 특히 고산국에서 발행한 책을 읽어보니 확실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루스인들도 다른 나라들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차르께서도 유럽에서 교사들을 초빙하고 유학생들을 보내는 등 교육에 정책의 주안점을 두고 계십니다. 이번에 유학생 100여 명을 받아주신 전하께 감사를 표합니다.”

“고산국에 유학 가는 것은 자유니까 괜히 선발시험을 볼 필요는 없었어.”

“루스인들 중에서 최고 인재들을 골라 최고의 나라에 유학 보내고 싶었습니다. 제가 고산국 왕립대학에 직접 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1605년 전쟁 중에 허망하게 병으로 죽어버림으로써 동란 시대를 열어 루스 차르국에 10년 가까운 대혼란을 초래했다. 하지만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로서 그다지 무능한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비록 오랜 리보니아 전쟁에서 패했더라도 남동쪽 타타르인들과의 전쟁에서는 연전연승했고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군제개혁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만 세금수입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농노들을 땅에 고착시키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농노의 신분을 크게 하락시켰다. 이를 피해 농노들이 코사크에 가담하거나 우랄산맥을 넘어 도주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오히려 시베리아를 개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나, 고산국이 우랄산맥 동쪽을 차지함으로써 루스 차르국의 동쪽 진출이 차단됐다.

세수와 타타르 문제는 연결돼 있었다. 루스 차르국은 크림한국과 노가이한국의 약탈을 막기 위해 남쪽 국경 지대에 병력 수만 명을 고정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접경지역이나 리보니아 등 다른 지역에 대한 방어력 약화와 함께 고스란히 재정 부담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고산국과 국경을 접하고 타타르인들의 약탈을 금함으로써 올해부터 루스 차르국의 재정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작년에는 식량 대금을 금과 은으로 받고, 올해는 국경을 조정하는 것만으로 식량을 지원해줘서 재정파탄을 피할 수 있게 됐다. 혹시나 자금 여유가 생기더라도 그 동안 국내외에 쌓인 채무를 해결하느라 바빴다.

“국왕전하는 대단하십니다. 그 동안 모스크바를 침공해 주민들을 약탈했던 크림한국, 노가이한국을 시켜서 또 다른 루스인의 적인 카자흐한국을 공격하고 계십니다.”

“조금 애매하긴 한데, 카자흐한국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야.”

카자흐한국의 영토는 현대 카자흐스탄이 세계 최대 내륙국이듯이 엄청나게 넓었으나, 북쪽은 대부분 사막이나 황무지라서 인구가 희박했다. 그래서 지역을 나눠서 첫 작전구역을 카자흐한국 북서쪽, 노가이한국과 접한 지역으로 잡았다. 즉 카스피 해 북동쪽, 아랄해 북쪽 엠바 주변과 동쪽 지역이었다.

이 작전에 노가이한국에서 기병 2만을 내어 도와주었다. 그 전부터 노가이한국이 카자흐한국과 영토 문제를 두고 다투던 지역이라 자세히 파악하고 있어서 작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영토를 확장하지는 않더라도 그 동안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살아서 어정쩡하게 지배하던 지역을 이 기회에 영토로 확정하는 것만으로도 노가이한국에 큰 이익이었다.

“으하하! 국왕전하! 저항하는 카자흐인들을 격파하고 포로 2천을 새로 잡았습니다. 응? 옆에 계신 분은 혹시 루스인의 황태자이십니까?”

“에! 맞습니다. 혹시 노가이의 케이쿠바트이십니까? 반갑습니다.”

전에 튜멘에서 봤던 노가이한국의 군사지도자 케이쿠바트가 전공을 보고하기 위해 이민호를 알현했다. 케이쿠바트가 황태자와 인사하는 사이 포로들을 살펴본 이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이쿠바트!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저들은 혹시 노가이 족이 아니오? 생긴 거나 옷 입은 게 똑같은데 말이오.”

“반은 맞았습니다, 전하. 서부 카자흐, 그러니까 카자흐한국 북서부에 거주하는 작은 부족연맹 사람들은 대부분 노가이한국 출신들입니다.”

똑같은 투르크계 사람들이 노가이한국, 노가이부족, 카자흐인 등으로 달리 불리고 있었다. 어쩐지 노가이한국에서 토벌에 적극적이다 싶었다. 노가이한국의 베이와 부족장들이 80년 전에 잃어버렸던 자기 백성들을 되찾는 일이라면서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었다. 약탈자 마을을 토벌하는 단순한 일이 국가 간 전쟁으로 확장되는 분위기로 점점 바뀌었다.

“도련님. 유목민과 노예사냥꾼을 구별하기 몹시 어렵습니다.”

“옛날부터 겸업했겠지. 그럼 토벌작전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거야?”

감동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감동은 신중한 성품이었고, 전투 전에 이기기 위한 모든 조건을 미리 준비해두는 훌륭한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대 게릴라전에 익숙하지 않은 감동은 몹시 곤혹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피아 구별 문제는 오랜 세월 정규군의 숙제였다.

“초원의 법칙을 적용해 우리 기병대가 접근할 때 환영하면 유목민, 도주하거나 저항하면 노예사냥꾼으로 간주해 토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가이한국과 토르구트 족 기병들이 웬만하면 일단 공격하고 보는지라 초원 전체에 안 좋은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저항하다 토벌당한 마을 중에 일반 유목민도 많이 섞여 있을 것 같습니다.”

“구별하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앞으로 연대 단위로 무력시위를 하면서 카자흐인들을 가급적 남쪽으로 이주하도록 권해. 노가이한국과 토르구트 기병은 휴식을 핑계로 후방으로 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카자흐 유목민들이 겨울 숙영지로 이주한 것이 지금 위치입니다. 봄이 되면 남쪽으로 이동했던 유목민들이 다시 북상할 것입니다.”

이 지역에 전체적인 카자흐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가족씩 분산해서 유목생활을 하기에 꽤 넓은 영역에 기병대를 보내야 했다.

“문제가 계속 발생하는군. 유목민 마을 중에 키르기스 족은 없나?”

“루스인이 만든 지도나 문서에서 키르기스로 표시된 것은 죄다 카자흐인입니다.”

“코사크와 구별하기 위해서 카자흐를 키르기스로 표시했다더군.”

떠돌이, 바퀴 달린 수레 등 어원에 대한 학설은 분분하지만 코사크나 카자흐나 둘 다 투르크어에서 기원한 같은 말, 즉 지배에서 벗어난 자들이라는 의미였다. 나쁘게 말하면 범죄인 도망자, 좋게 말하면 자유인이었다. 코사크는 슬라브계 농노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도망자들의 집단에 가까워졌고 카자흐는 우즈베크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세력이었다.

그런데 루스 차르국 입장에서는 남부에서 폴란드 혹은 루스 차르국에 종속된 코사크와 남동쪽의 카자흐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카자흐를 일괄적으로 키르기스라고 분류해 20세기 초반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국경을 나눌 때 현대 카자흐스탄을 키르기스 자치공화국으로 명명한 적이 있었다.

“카자흐한국에 보낸 사절에게서 연락이 없습니까?”

“작은 부족연맹은 회의 중인데 아직 결론이 안 난 것 같아. 칸에게 보낸 사절단은 돌아왔어. 칸이 부족장들하고 회의한 다음 우리한테 사절을 보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해.”

“수도가 남동쪽에 과하게 치우쳐있습니다.”

1598년부터 카자흐한국의 부족들을 구분하는 부족연맹이 셋이 있었다. 일명 큰 주드, 즉 부족연맹은 남동쪽, 중간은 북동부, 작은 주드는 북서부에 위치했다. 남동쪽에 위치한 큰 부족연맹 빼고는 인구가 극도로 희박한 지역에 거주하는 부족들의 연맹이었다.

현재 카자흐한국 북서부를 영토로 둔 작은 부족연맹은 고산국 상대로 전쟁을 할지 말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산국이 작전 목표를 영토 획득이 아닌 약탈자 소탕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곧 물러갈 것으로 예상한 자들이 대다수였다. 대군을 상대로 승산 없는 전투를 벌일 이유가 없이 기다리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이 기회에 카자흐한국과 국경 협정을 맺을 계획이었다. 물론 국경선을 둔 협상은 결코 쉽게 진행되는 법이 없지만 건조지대에서는 의외로 간단히 협상이 타결되는 수도 있었다.

카자흐 인구 대부분이 몰려있는 천산산맥 북쪽, 발하슈 호 남동쪽 지역은 확실히 보장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카자흐한국이 영토로 편입한 지 80년밖에 안 된 사막과 황무지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편이었다.

카자흐한국의 광대한 영토만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카자흐한국도 결국 실크로드의 교역로에 목을 멘 중앙아시아의 작은 상업왕국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현대 카자흐스탄의 인구는 20세기 이후에 유입된 다른 종족들 덕택에 우즈베키스탄의 절반을 넘어섰고, 이 시대에는 우즈베크인들보다 훨씬 적었다. 인구 60만에 불과한 오이라트 부에게 항상 침략당해온 이유가 있었다.

“장기적으로 영토를 남쪽으로 확장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혹시 관리하기 어려울까봐 꺼리십니까?”

“토르구트와 오이라트가 연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아차! 아주 중요한 문제군요.”

이민호도 카자흐스탄 영토 북부를 뚝 떼어서 먹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그러나 늘어난 영토인 초원과 사막을 토르구트에게 맡겨야 하는데, 자칫 오이라트와 영토가 연결될 우려가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볼가 강 유역으로 이주했던 칼미크는 오이라트와 연락을 유지했고 오이라트 통일법전을 새 이주지에 시행하면서 오이라트의 일원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18세기 초에는 아유카 칸이 중가르 전체를 통일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1771년에는 러시아의 압제를 피해 중가르 분지로 귀환했다.

“카자흐한국 인구가 120만 정도로 추정된다고 해. 평소에는 기병 5천도 유지하지 못하겠지만 전시에 병력이 최대한 얼마나 나올 것 같아?”

============================ 작품 후기 ============================

중앙아시아 역사는 몹시 복잡하면서도 기록이 아예 없는 시대가 많습니다.

내용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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