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31 81. 러시아 대기근과 중앙아시아 =========================================================================
“보병도 얼른 차에 태워야 하는데 말이야.”
“기동 속도가 마음에 안 드시면 마차를 동원하면 어때요? 아니면 보병에게 말을 지급해 승마보병으로 훈련시키면 되잖아요.”
“구르카 보병들에게 승마 훈련을 시키다가 포기했어.”
같은 고원지대에 거주하더라도 티베트 전사들은 기병이 대표적인 병종이었다. 그러나 구르카 보병들은 땅에 발을 딛고 있어야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구르카 여단이 전체 기동속도를 확연히 떨어뜨리는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하루에 45km 이상을 거뜬히 행군했다.
그러나 보병이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기병 이동속도의 절반 이하에 불과했다. 특히 얼음이 얼었다 녹아 진창으로 변하는 초원에서 보병부대를 뒤따르는 보급용 마차는 기동속도를 갉아먹는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보병은 이번 원정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구르카 여단의 일부 병력이 튜멘에서 이어지는 보급로를 지키는 동안 나머지 병력은 우랄산맥과 오비 강 유역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가끔은 영토에 대규모 병력이 움직이는 것을 주민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반란은 다양한 이유로 발생할 수 있어서 주민들이 아예 반란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해야 했다. 특히 우랄산맥 동쪽은 루스인 농민들이 넘어와 마을을 형성했고 고산국에 귀화한 루스인 노동자들이 많아서 가끔 이렇게 무력시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며칠 동안 스텝 지역에서 노가이 족에 대한 토벌작전을 계속 진행했다. 그 동안 노가이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던 독립적인 노가이 부족들이 고산국 기병대에게 저항하다가 금방 격파되고 가족들은 포로가 됐다.
일부 노가이 부족들은 노가이한국의 영역으로 도주하면서 베이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당분간일지 몰라도 앞으로 이들은 토르구트의 영역이나 루스인 농촌마을을 약탈하지 못하게 됐다.
“우와! 총도 없이 싸우는데도 토르구트 족은 정말 대단하다.”
토르구트 기병대마다 고산국 기병장교와 통신병을 배속시켜 자세한 전투보고를 매일같이 받았다. 몇몇 묘사에 따르면 비슷한 숫자의 기병이 싸우는데도 노가이 족은 토르구트 기병의 상대가 아예 되지 못했다.
나중에는 토르구트 기병이 창칼을 휘두르는 노가이 족 기병 전사에게 맨손으로 달려들어 땅바닥에 패대기쳤다고 한다. 기마실력에 격차가 크게 벌어졌을 때 흔히 발생하는 전투 양상이었다.
토르구트는 한때 몽골고원 전체를 지배했던 오이라트 제국 소속의 기병 전사들이었다. 비록 주변 초원지대에서 강인한 전사로, 혹은 잔인한 약탈자로 악명 높은 노가이 족이었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루스인 혹은 멀리 우크라이나 농민들이나 약탈하던 그들이 몽골 전사들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다만 노가이 족을 비롯해 스텝 지역 기병 전사들이 타고 다니는 말, 바크마테스는 몽골 말처럼 참으로 특이한 말이었다. 자그마한 주제에 몸체가 길고 꼬리도 길어 땅에 끌릴 정도였다.
그러나 속도가 빠르고 지구력이 강하며 야지에서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는 등 아주 쓸 만했다. 그런데 바크마테스는 너무 못 생겼다는 이유로 토르구트 족이 몹시 싫어했다.
“주인님! 군복이나 무기 같은 건 토르구트 족에게 다 보급해주면서 왜 유독 전투 식량은 안 나눠줘요?”
“저들에게도 말린 고기나 고기분말 같은 전투용 보존 식품이 있어. 그리고 우리 것을 주면 개밥을 먹인다고 욕할까봐 차마 못 나눠주겠더라.”
“푸핫! 맞아요.”
고산국에서 보관과 수송이 간편하고 조리하는데 시간이 덜 걸리도록 통조림을 이용한 전투 식량을 개발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전투 식량이 다 그렇듯이 맛은 극도로 떨어졌다. 영양과 위생 위주로 만들려다 보니 고기와 쌀 외에 몇 가지 곡물과 채소, 향신료를 섞어 조리했고, 그래서 비주얼마저 최악이었다.
“국방연구소에서 깡통 하나에 모든 걸 담으려다 발생한 참극이야. 나눠 담아도 되는데 말이야.”
“개밥은 심하고 남자의 요리래요. 혜진님이 새로 만든 전투 식량은 훨씬 나을 거여요.”
“무게 제한을 너무 심하게 해서 아무리 혜진이라도 좋은 게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어.”
그러나 혜진이 시험적으로 만든 동결건조 비빔밥이나 다른 몇 가지는 먹을 만했다. 포장도 반드시 깡통으로 할 필요가 없었다. 종이포장 대신 얇은 알루미늄 포장에 담은 전투 식량은 뜨거운 물을 부어 바로 먹을 수 있게 제조했다.
그러나 이번 원정에서는 그 전에 대량으로 만들어둔 전투 식량을 소모해야 했다. 그 동안 국방연구소가 계속 욕을 먹게 될 것 같았다.
고산국 병사들도 자기들이 먹는 것이 너무 창피해서 토르구트나 소수민족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전투 식량을 우연히 얻어먹은 토르구트 족이 한 숟갈 먹고 토했다거나 독약이라고 소리 지르면서 칼을 뽑아들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노가이한국이 의외로 순순히 복속할 것 같은데요? 토르구트도 그렇고, 유목민치고는 고분고분해요.”
“유목민이 원래 강자에게 약하잖아. 생존 기술이지. 대신 약해 보이면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어. 조심해야 해.”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강한 국력을 유지해야겠네요.”
크림한국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을 칭하면서, 카잔한국이나 아스트라한한국이 멸망하는 동안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노가이한국도 크림한국과 비슷한 기회를 이번에 얻을 것으로 기대하는 듯했다.
“전하! 토르구트 기병 지휘관의 전언입니다. 노가이 족 기병 100여 기 정도를 이쪽으로 몰이하고 있습니다. 선물이랍니다.”
“귀찮아. 그냥 잡으라고 지시해.”
전투 차량만 100대가 넘어가는 장갑차 연대를 상대로 기병 100여 기는 전술적으로 전혀 무의미했다. 이민호가 그 동안 심심했을 것으로 오해한 토르구트 지휘관의 과잉 충성이었다. 토르구트 기병에 쫓긴 노가이 기병이 계속해서 달려왔다.
“말은 300마리 정도인데?”
“교대해서 타려고 세 마리를 끌고 다닌대요.”
“몽골족에 비해 예비마가 줄어든 거네.”
토르구트 기병에게 공격 명령이 전달되면서 추격 중에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갑자기 확 달라졌다. 이민호가 장갑차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토르구트 기병들이 노가이 족 기병에게 달려들었다.
노가이 족 대부분은 갑옷도 안 입은 경기병이었다. 이들이 창칼을 휘두르면 일본 사무라이처럼 견갑까지 착용한 토르구트 중기병이 무기를 들어 막은 다음 맨손으로 상대의 목이나 옷깃을 붙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가끔 토르구트 족이 창대를 휘두르기도 했으나 이럴 때도 목표는 상대의 낙마였다.
낙마한 노가이 족은 다행히 목이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는다면 포로로 잡혔다. 만약 낙마 과정에서 노가이 족 기병이 자그마한 부상이라도 입으면 토르구트 족 기병이 즉시 자비를 베풀었다.
이런 식으로 노가이 족을 포로로 잡았다. 전사 외에 여자와 아이들은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작전을 전개한 지 단 며칠 사이에 노가이 족 포로가 3만 이상으로 불어났다. 소탕작전이 진행되면서 드넓은 스텝 지역이 점점 텅 비게 되었다.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킬 건 아니죠?”
“물론. 노가이한국에서 전원 인수하기로 했어.”
노가이 족 포로의 몸값을 받고 노가이한국에 넘겨주기로 작전 전에 이미 약속했다. 말이 몸값이지 금액이 적어 명목에 불과했으나, 포로 처리가 곤란해서 이민호가 허락했다.
노가이한국과 노가이 부족은 같은 종족이었지만 정치 체제가 완전히 달라서 서로를 마치 이민족 대하듯이 했다. 노가이한국의 영역으로 도망친 노가이 부족원들도 베이의 군대에게 모두 사로잡혔다.
서쪽으로 멀리 크림한국의 영역으로 도망친 일부 노가이 부족 기병들은 토르구트 기병이 강력하면서도 잔인하다는 소문을 스텝 전역에 널리 퍼뜨렸다. 다뉴브 강 일대로 약탈 원정을 떠났던 크림한국 소속의 노가이 족 기병들이 황급히 크림한국으로 귀환했다.
소탕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크림한국에서도 서둘러 사신을 보냈다. 크림한국은 작전 지역인 우랄 강 동쪽에서 몇 백 km나 떨어져 있었지만 초원에서 벌어지는 일에 계속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가 급히 사신을 파견할 수 있었다.
“크림한국의 칸이 보낸 심부름꾼이 전하를 배알합니다.”
“멀리 바흐치사라이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소.”
오후에 날이 추워서 유르트를 치고 사신을 맞이했다. 크림 타타르는 크리미아 반도와 흑해 북안에 사는 투르크계 이슬람교도들이었다.
“크림한국의 칸은 고산국 국왕전하를 존경하십니다.”
“고마운 일이오.”
“만약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후사가 없이 서거하실 경우 크림한국의 칸이 황제가 된다고 오스만 제국 법령에 적혀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들었소.”
이민호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사신의 낯빛이 시커멓게 변해갔다. 이민호는 사신이 강조하는 것을 알아듣고도 장난을 친 것이었다.
“사신은 걱정하지 마시오. 오스만 제국과 고산국은 비록 동맹은 아니지만 친밀한 사이라오. 오스만 제국과의 우호관계는 제국의 속국인 크림한국에도 적용될 것이오.”
“휴우~ 정말 감사합니다. 크림한국에 복속된 노가이 족들의 동요가 매우 심합니다. 그래서 노가이 족장들이 칸에게 고산국이 크림한국에 대한 침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받아오길 원했습니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가 친밀하더라도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침략할 수도 있지 않겠소? 아! 농담이오.”
크림한국 사신이 입에 거품을 물고 까무러치기 직전에 얼른 농담을 주워 담았다. 그러나 국제관계에서는 그것이 현실이었다.
“칼미크라 불리는 토르구트 족 기병의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합니다. 혹시 전하께서 토르구트 영역에 대한 노가이 족의 약탈을 유도했다가 응징을 명분 삼아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아닙니까?”
“뭐요?”
“아!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사신이 벌벌 떨었다. 잠시 인상을 잔뜩 찌푸렸던 이민호가 옥좌에 등을 기댄 채 활짝 웃었다.
“오해 아니오. 그런 면이 분명히 있소.”
“예에?”
“약탈을 유도한 게 잘못이오, 아니면 약탈한 것이 잘못이요?”
“으으! 국제적으로는 국경을 넘어 약탈한 쪽이 무조건 범죄자입니다. 강한 자가 모든 것을 빼앗아 가지는 유목민의 논리로도 노가이의 잘못입니다. 토르구트가 약하다고 판단해 약탈한 노가이 부족들은 상대의 강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멍청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신이 꿀꺽 침을 삼킨 다음 이민호에게 물었다.
“고산국은 충분한 영토를 갖고 있습니다. 이번에 서쪽으로 진출하신 목적을 혹시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크림한국과 친해지기 위해서요.”
“히익!”
강한 국가가 국경을 맞대고 붙어있으면 지배계층들은 밤잠을 자기 어렵다. 그리고 강한 국가가 구체적으로 뭐라 하지 않더라도 약소국은 여러 가지 국가 활동에 스스로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놀라지 마시오.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요.”
“혹시 고산국이 시베리아에 건설했다는 철도를 흑해까지 연장하실 셈이십니까?”
“사신의 예상이 맞소. 훌륭하오.”
이민호가 사신에게 지도를 보여주었다. 튜멘이 아닌 옴에서 서쪽으로 뻗어 우랄산맥 남쪽까지 연장된 가상의 철도는 이후 세 가지 길로 나뉘었다. 하나는 우랄 강이나 카스피 해 연안에 기차 종착역을 두고 선박으로 갈아타는 것이었다.
흑해의 북부 아조프 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는 쿠모마니치 저지가 있고 이는 유럽과 아시아의 실질적인 경계선이었다. 이 저지대를 수심이 낮은 마니치 강이 북서쪽으로 흘러서 돈 강과 아조프 해와 흑해에 차례로 연결되고, 쿠마 강이 남동쪽으로 흘러 카스피 해에 유입된다. 두 강을 연결하면 카스피 해에서 흑해로 나갈 수 있는 운하가 되고, 이 운하는 구소련 시절에 건설된다.
다른 하나는 볼가-돈 운하, 세 번째 안은 크림반도 남단의 내륙도시이며 크림한국의 수도인 바흐치사라이에 직접 철도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민호는 운하나 강을 통하면 시간이 걸리므로 직접 철도를 흑해 북쪽 연안까지 연결하는 세 번째 안을 선호했다.
“국방을 감안하면 절대 안 되지만, 만약 세 번째 안으로 결정된다면 우리 크림한국의 수도 바흐치사라이가 고산국과 오스만 제국을 잇는 무역도시로 번성하겠군요. 물론 외곽에 항구를 건설해야겠습니다만.”
“흥분하지 마시오. 동시에 크림한국에 고산국과 오스만 제국의 입김이 강해질 것이오.”
크림반도 남쪽, 현대 세바스토폴 항구의 북동쪽 내륙에 바흐치사라이가 위치했다. 서쪽 세바스토폴 항구는 아직 건설되지 않았다. 대신 현대 크림반도 동부의 페오도시야, 기원전에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도시 테오도시아, 이 시대의 카파 항이 노예무역을 주도했다.
“뭐든지 장단점이 있습니다, 전하. 이 지도를 제게 주신다면 제가 칸과 귀족, 부족장들을 설득하겠습니다.”
“좋소. 그러나 철도가 지나는 지역에 무역으로 얻을 이익 일부를 나눠주겠다고 약속해야 할 것이오.”
오스만 제국에 종속되어 그 동안 이익을 많이 본 크림한국은 나쁘게 말하면 강대국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그러나 카잔한국과 아스트라한한국, 시비르한국 등 킵차크한국에서 분리돼 나갔던 주변 타타르 국가들이 멸망하는 과정을 지켜본 크림한국은 생존을 위해 강대국을 이용할 줄 알았다.
한때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되기도 했으나 이 시기 크림한국에게 가장 큰 실질적인 위협은 루스 차르국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불안에 떨던 크림한국은 동쪽에서 고산국이 등장하자 바로 접근했다.
서쪽 국경의 불안 문제와 철도를 흑해로 연장하는 문제는 대강 해결됐다. 크림한국과 노가이한국이 적극 협조해줘서 쉽게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목표는 키르기스 족과 카자흐 족이었다. 내륙 아주 깊이, 심지어 키르기스의 본거지인 천산산맥 서부 산악지대까지 원정군이 들어가야 할 수도 있었다.
============================ 작품 후기 ============================
완성하니 아홉 시. 그래서 오랜만에 빨리 올립니다. ㅜ.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