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30화 (679/1,000)

00730  81. 러시아 대기근과 중앙아시아  =========================================================================

1602년 가을 서 시베리아의 중심 도시 튜멘에서는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고산국 본토 병력과 여진 기병이 꾸준히 충원됐고 보급품이 끝도 없이 수송됐다.

이민호가 직할 병력을 이끌고 튜멘에 도착한 것은 9월 하순이었다. 루스 차르국과는 이미 국경 조약을 맺고 식량을 추가로 공급하기로 약속했다.

루스 차르국 입장에서는 직접 지배하지 못하는 초원 지역을 고산국에 넘기면서 일 년치 식량을 공급받는 좋은 조건의 조약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기근을 해결하더라도 차후에 루스인들이 동쪽이나 남동쪽으로 영토를 확대할 가능성 자체를 아예 없애버린 결정이었다.

“저는 소시바 강 만시 족의 족장입니다, 전하. 고산국이 어디를 공격하든 저희 충성스런 만시 족이 참전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풋! 아! 미안하오. 궁병과 산악 정찰병으로 참전하도록 하시오. 병참장교를 보내줄 테니 여러 가지 보급품과 오리털로 만든 바지와 외투를 받아 병사들에게 나눠주시오.”

“보급품을 고산국에서 나눠준다는 말씀이십니까? 고맙습니다, 전하.”

만시 족 상인이나 사냥꾼들은 모자를 쓰고 다녀서 몰랐는데 전사들은 모조리 대머리였다. 양쪽 머리를 길러 예쁘게 땋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짧게 길러 아주 귀여워 보였다. 만시 족은 어렸을 때는 연한 금발머리였다가 커가면서 점점 황인종과 비슷한 외모로 변하는 핀-우르그 어족 사람들이었다.

서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대다수 소수민족들이 고산국을 따라 참전할 것을 선언했다. 이번 전쟁에 참가해서 고산국 국왕에게 충성스런 부족이라는 눈도장도 찍고, 노획물도 얻기 위해서였다. 전 세계적인 대흉작으로 인해 정세가 불안해진 것을 느끼고 크고 풍요로운 고산국에 더욱 의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튜멘에 고산국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우랄산맥 남서쪽 초원에 사는 여러 작은 국가나 부족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크림한국과 노가이 족, 각각 폴란드-리투아니아 혹은 루스 차르국의 통제를 받는 코사크 족, 카프카스 북서부의 체르케스 족, 우랄산맥과 그 서쪽에 사는 유목민 바쉬키르 족이 전전긍긍했고 일부 부족들은 튜멘에 사절을 보냈다.

“전하! 저는 노가이한국의 지배자인 베이께서 보낸 사신입니다.”

“오! 어서 오시오.”

노가이 족 중에서 흑해 북쪽의 크림한국에 복속된 노가이 족이 아니라 카스피 해 북쪽의 독립적인 세력인 노가이한국에서 사신을 보냈다. 이민호가 서쪽 국경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한 우랄 강 동쪽 지역은 이들의 본거지였다.

노가이한국 사신의 복장은 만화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량과 비슷했고 늙은 호박을 닮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노가이 족은 완전히 수니파 무슬림으로 개종했으면서도 복장은 여전히 동양적이었다.

“루스인의 차르가 저희들을 고산국에 넘겼다는 소문을 듣고 사실인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노가이한국은 독립국인데 저희들도 모르게 저희들의 영토를 사고파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루스 차르국은 기존에 지배하던 영역, 그러니까 루스인 정착촌이 산재한 우랄 강 동쪽 일부 영토를 고산국에 넘긴 것뿐이오. 이번 전쟁의 목적은 고산국의 속국인 토르구트 족의 영역을 침범한 노가이 족, 카자흐 족, 키르기스 족에 대한 응징이오.”

“헉!”

사신이 땀을 뻘뻘 흘렸다. 독립 노가이 부족 일부가 부유한 토르구트 유목민 마을 몇 개를 약탈한 사실을 사신은 나중에 들었다. 그러나 사신이 할 말은 있었다.

“그 문제는 노가이한국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베이나 케이쿠바트에 정식으로 속하지 않은 일부 독립적인 노가이 부족이 칼미크를 약탈했을 뿐입니다.”

“과연 전혀 관계가 없소? 얼마 전에 노가이 족이 약탈한 몽골의 양이 노가이한국의 시장에서 발견됐소.”

“으윽!”

서몽골에서 키우는 양은 이 지역에서 키우는 양과 비슷한 품종이지만 약간 다르게 생겼다. 토르구트 족이 노가이한국으로부터 양을 대량으로 수입한 적은 있어도, 갓 이주를 마친 토르구트 족이 당분간 양을 수출할 일은 없었다. 당연히 노가이한국에서 발견된 몽골 양은 노가이 부족이 토르구트 족 마을에서 약탈한 것이었다.

“이는 독립 노가이 족이 사실은 노가이한국에 복속 상태라는 것이오. 아니라면 노가이한국의 베이나 케이쿠바트가 독립 노가이 족을 배후 조종해서 토르구트 족 영역을 공격했다고 볼 수밖에 없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상인들이 독립 노가이 부족으로부터 양을 매입했을 것입니다. 다만 전하처럼 오해할 가능성은 있겠습니다.”

“상인들이 양의 생김새를 보고도 모르고 샀겠소? 장물임을 알고도 매입할 때는 직접 훔쳤다는 오해를 살 각오를 해야 하오.”

노가이한국은 평소에 유목 외에 약탈을 사업으로 여겼다. 서열 3위이며 군사지휘관인 케이쿠바트가 지휘하는 병력이 정주민 농민 마을을 약탈하고 대상들에게서 강제로 세금을 걷었다.

독립 노가이 부족들도 당연하다는 듯이 다른 유목민이나 농민을 공격해 가축을 약탈했다. 그런 사실을 노가이한국에서 몰랐을 리가 없었다.

“비싼 교훈을 얻었습니다.”

“어쨌든 토르구트 족의 종주국인 고산국 입장에서는 노가이한국에 속하든 말든 노가이 족 전체에 대한 응징을 피할 수 없게 됐소. 노가이한국은 약탈자가 아니라고 했으니 여기서 노가이 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요.”

원래 역사에서는 1630년대에 토르구트 족이 이주한 다음 노가이 족의 영토를 빼앗고 그 후에도 꾸준히 노가이 마을들을 약탈했다. 현재 토르구트는 힘이 없어서 노가이 족에게 약탈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이민호의 명령에 의해 꾹 참으면서 명분을 축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무엇입니다, 전하? 살 길을 마련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우랄 강 동쪽에 거주하는 노가이 족 전체가 고산국의 지배를 받아들이거나, 그 지역을 비우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오. 베이에게 그렇게 전하시오.”

사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상대방에게 복속하거나 근거지를 비우고 떠나라고 강요하는 것은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사생결단을 내자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민호의 말뜻은 조금 달랐다.

“만약 노가이한국이 앞으로 다른 지역을 약탈하지 않고 방어에 전념한다고 약속하면 현재 영토에 계속 거주해도 좋소. 물론 고산국의 속국이라는 새로운 위치를 받아들여야 하오. 우랄 강과 볼가 강 사이의 광대한 초원지대에 대해서는 고산국에서 신경 쓰지 않겠소. 다만 흑해까지 연결될 철도만 지킬 예정이오.”

“고산국 국왕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베이와 다른 귀족들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노가이 족을 응징하기 전에 고산국이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키르기스 족 등을 공격할 계획이었는데, 노가이한국 사신이 고산국의 속국 신분이 되어도 좋다고 바로 승낙을 해버렸다. 이민호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고산국은 이번 원정에 토르구트 기병 3만과 합쳐서 총 7만, 이른바 10만 대군을 동원했다. 튜멘에 오면서 주변에 배치된 병력을 파악한 사신은 노가이한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병력을 동원했으니 노가이한국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작전을 할 예정이오.”

“전하의 고충을 이해합니다. 고산국 영역을 침범했던 독립 노가이 부족들의 본거지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들은 고산국의 징벌이 두려워 서쪽으로 이주했지만 국경에서 멀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위치를 넘겨준다면 철저히 징치하겠소.”

“전하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베이께 고해 동맹, 아니 고산국의 속국으로서 보호를 받도록 설득하겠습니다. 멀리 떨어진 오스만 제국이나 호시탐탐 영토를 노리는 루스 차르국보다는 고산국이 훨씬 믿을 만하기 때문입니다.”

사신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약탈에 가담했던 노가이 부족들이 이전한 지역이 표시된 지도는 이번 원정에 꽤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토르구트 족의 타이지, 코우툴룩이 갑옷을 입은 채 이민호에게 알현을 신청했다. 토르구트 족 전체를 성공적으로 이주시키고 초원을 덮친 냉해를 큰 문제없이 넘겨서 그런지 표정은 아주 좋아보였다.

“국왕전하의 종, 토르구트의 코우툴룩이 전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그런 낮은 칭호는 사용하지 마시오. 이번에 보내준 오리털 옷은 마음에 드오?”

페루 와이나푸티나 화산의 분화 이후 이곳 초원에도 계절에 관계없이 밤이면 얼음이 얼었다. 가을이 되기 전부터 초원에서 자라는 풀 대부분이 누렇게 말라죽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민호가 가장 신경 쓴 것은 보온 대책이었다. 웬만한 솜옷이나 모피만으로는 추위를 버티기 어려워서 오리털과 거위털로 파카와 바지를 대량으로 생산했다.

“입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나서 지금은 입지 않고 있습니다. 한겨울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추위에 강한 타이지가 부럽소. 앞으로 전쟁이 시작되면 노숙을 밥 먹듯이 해야 할 것이오. 작년부터 몹시 추워졌으니 야전에서는 반드시 오리털 옷을 착용하도록 하시오.”

“예, 전하.”

- 부웅~

이때 튜멘 상공을 정찰기 한 대가 지나갔다. 잠시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던 타이지가 갑자기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전하께서는 장갑차라는 금륜보(金輪寶)와 하늘을 나는 상보(象寶)를 비롯해 일곱 보물과 네 가지 신령한 덕을 모두 갖추셨으니 전륜성왕이 틀림없습니다. 부디 법으로써 이 세상을 평화로이 다스려주십시오.”

“나는 그 정도로 이상적인 군주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겠소.”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가쵸가 몽골에 티베트 불교를 전도했고 현재 알탄 칸의 증손자인 욘텐 가쵸가 4대 달라이 라마로 등극했다. 토르구트 족은 시베리아 남부 초원으로 이주한 후에도 오이라트 부 및 티베트 불교 겔룩파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승려들을 티베트에 유학시키고 있었다. 그것이 생각난 이민호가 타이지에게 물었다.

“몽골의 칸은 황금씨족만 된다고 들었소. 하지만 만약 타이지가 달라이 라마에게서 칸의 칭호를 받으면 어떻소?”

“그야 저 개인적으로 영광스런 일이겠고, 저희 부족민들도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하오나 저는 칸의 칭호를 받을 만큼 훌륭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이민호는 만약 타이지가 칸을 자칭하는 것이 아니라 달라이 라마에게서 칸 칭호를 받을 경우 에센처럼 암살당하지 않고 존중받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 정도로 몽골인들에게 달라이 라마의 권위가 높았다.

“그럼 토르구트가 티베트의 겔룩파를 지원하면서 타이지가 칸의 칭호를 받는 방향으로 일을 만들어봅시다. 초원지대에 몽골족의 후손과 투르크 족이 많아서 타이지가 만약 칸 칭호를 받으면 주변을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원정이 끝나면 강력하게 추진해보도록 합시다.”

“미천한 신하를 위해 애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하.”

10월 초에 대군이 일단 남서쪽으로 움직였다. 고산국과 토르구트 및 여러 부족 연합군이 평원을 가득 메우며 진군했다. 그 사이 본진에 앞서 기동한 선발대들이 국경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는 독립 노가이 부족들을 포착해 공격했다.

그 동안 토르구트 족의 유목마을을 약탈했던 노가이 부족들은 고산국의 침공에 대비해 미리 서쪽으로 이주했다. 수시로 정찰대를 보내 고산국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가이 부족에서 내보낸 정찰대를 해치우면서 빠르게 이동하는 선발대에게 노가이 부족 마을들이 모두 점령당했다. 노가이한국 사신이 제공한 정보가 정확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전하! 이런 쉬운 일은 저희 토르구트에게 맡겨주소서.”

“아니오, 타이지. 고산국 군대도 실전 경험이 필요하오.”

토르구트는 기병 3만, 고산국은 각종 병과를 합해 2만을 동원했다. 고산국 본토에서 기병연대 3개, 구르카 보병여단 2개, 장갑차 연대가 참전했다.

그 외에 여진족 기병 1만, 동몽골 기병 1만, 서 시베리아 소수민족 2천이 참전했다. 총 7만여 대군 중에서 보병을 뺀 기병과 장갑차들이 유목민 기병 5천에 불과한 독립 노가이 부족들을 휩쓸고 다녔다.

“쳇! 노가이한국을 쓸어버리려고 작정하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는데 미리 손을 들어버리네. 괜히 많이 동원했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많이 동원했으니까 노가이한국이 미리 손을 들었겠죠.”

장갑차 관측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며 이민호와 민지가 대화했다. 신형 장갑차에서는 예전처럼 비좁은 기관총 사수석에서 두세 명이 부대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장갑차 차체 하부에는 무한궤도가 달려 있었다. 봄마다 진창으로 변하는 서 시베리아 초원에서 작전하기 위해서는 무겁더라도 무한궤도 장갑차가 필수였다.

노가이한국에서도 기병 몇 만을 가뿐히 동원할 수 있었다. 부족장들의 권한이 강하고 최고 지도자인 베이의 권력이 약하다지만 유목민답게 급한 상황에서는 모든 성인 남자를 기병으로 동원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노가이한국을 비롯해 초원의 타타르 부족들은 고산국의 진군 앞에 숨을 죽였다. 오스만 제국과 몽골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고산국의 국력을 충분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없다면 이민호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크림한국에 전령을 보냈지?”

“예. 우리와 오스만 제국의 관계를 아는 크림한국이 함부로 노가이한국을 지원하지는 않을 거여요. 그리고 노가이한국도 독립 부족들을 포기했잖아요.”

크림한국에서만 기병 8만을 동원할 수 있었다. 유목민들은 인구에 비해 과도한 기병 전력을 동원할 수가 있어서, 고산국에서 원정을 나설 때마다 몹시 부담이 갔다. 동몽골에서 한때 위기에 몰렸던 기억도 강하게 작용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렇게 압도적인 군세를 동원했다. 이민호와 장갑차 연대는 기병부대를 뒤따라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지만, 기병들은 초원을 가득 메우며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 자그마한 독립 노가이 부족들을 무찌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변 초원 민족들에게 고산국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실제 전투 묘사는 키르기스 상대로나 가능하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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