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26 80. 1601년 순행 =========================================================================
이민호는 2만 명이나 거주하는 임시 수용소를 방문했다. 외국 난민들을 받아들인 경험이 여러 차례 쌓인 북미 도시에서는 난민 수용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돼서 크게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일랜드 피난민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깔끔한 수용소 건물에서 지내고 있었다. 다행히 식사도 나무랄 게 없고 식수와 목욕용 온수 공급에도 문제가 없었다. 가끔 이미 북미에 정착한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방문해서 친지들의 소식을 묻곤 했다.
눈에서 초점을 잃었던 피난민들이 고산국 국왕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깨어났다. 그리고 이민호에게 몰려와서 호소했다.
“고산국 국왕폐하! 아일랜드를 구해주소서!”
“불쌍한 사람들을 제발 살려주세요. 그리고 잉글랜드를 벌해주세요!”
“나는 신이 아니오. 외국의 전쟁에 개입하지도 않소.”
이민호가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 몹시 불편했다. 아일랜드 피난민들이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고산국에서 그 동안 아일랜드를 위해 식량을 지원한 사실을 알고 있어서 호의를 내비쳤다.
난민들은 예방접종을 받는 중이었다. 건강 검진을 받고 식이요법과 적당한 운동으로 건강을 되찾은 다음에는 농가에 정착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국에 남은 가족과 친지들이 걱정돼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잉글랜드인들은 아일랜드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요. 여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해요.”
수용소에서 별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올레타가 몹시 분노해서 이민호에게 말했다. 비올레타는 예전부터 잉글랜드와 앙숙인 에스파냐 출신이었으나, 전혀 없는 소리를 지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흔한 가해자의 논리였다. 노예무역이 성행한 시기에 잉글랜드인들은, 그리고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잉글랜드 출신 미국인들은 아일랜드인들을 하얀 흑인이라고 경멸했다. 그래도 아직은 그나마 나아서 잉글랜드 귀족들이 아일랜드 영주들과 협상도 하고 양보도 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조만간 북 아일랜드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주민들을 이주시켜 아일랜드인들을 황무지로 내몰게 된다. 17세기 중반 크롬웰 시대에 잉글랜드의 정책 목표는 아일랜드인의 멸종이었다. 영국에는 사람의 노동력이 아니라 농사짓고 소를 키울 땅, 즉 곡물과 육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하. 아일랜드에 가서 독립전쟁을 하겠다는 병사들이 있어서 모아봤어요.”
“고맙소, 비올레타. 병사라. 지휘할 장교가 없어서 아쉽지만 대표자를 불러보시오.”
장교의 전투력이야 병사들보다 나은 경우가 드물지만 장교는 부대의 지휘를 맡은 군인이었다. 당연히 교육기간도 훨씬 길었다. 이민 역사가 짧은 아일랜드에서는 아직 장교를 배출하지 못했다.
“전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청년 하사가 별궁 알현실에 출두했다. 하사는 위압적인 크기의 건물에 압도되지도 않았고, 국왕 앞인데 떨지도 않았다.
고산국에서 부사관이 되기에는 쉬운 편이었다. 장교가 되려면 4년을 교육받아야 하나 부사관은 겨우 6개월만 훈련과 교육을 받으면 하사로 임관할 수 있었다. 물론 6개월 동안 집중적인 훈련과 교육이 이뤄졌다.
“아일랜드로 돌아가고 싶다고?”
“예, 전하. 제가 아일랜드 출신 군인, 청년들과 함께 독립전쟁에 참가할까 합니다.”
“도대체 자네의 조국은 어디인가?”
이민호가 몹시 경멸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하사는 꿋꿋하게 허리를 펴고 대답했다.
“제가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이미 고산국 백성입니다. 저는 다만 인간으로서 아일랜드인들이 불쌍해서 그들을 돕고 싶습니다.”
“고산국 군인이나 관리, 백성이 외국의 전쟁에 개입하면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지?”
“황공하옵니다, 전하. 고산국의 외교정책에 부담이 되는 것은 알고 있으며 죄송스런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제 고향 친구들과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서 가만히 있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좋다. 혹시 아일랜드에서 살았을 때 네 직업은 무엇이냐?”
“더블린에서 제화공으로 일했습니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농민이 가장 흔한 직업이었지만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 대장장이, 빵집 주인, 목동과 나무꾼 등 중세 이후 직업이 다양하게 분화됐다. 그리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세상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신문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중에 신문을 읽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18세기 유렵 각국에서 일어난 혁명을 지식인들이 촉발시켰더라도 혁명에 적극 가담한 사람들은 주로 도시 노동자들이었다. 농민들은 도시 바깥에서 살기에 도시의 일에 가담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의식이 바뀔 정도로 새로운 지식을 얻기도 어려웠다.
“한데 아일랜드에 돌아가서 싸우겠다는 사람들이 몇 명 안 되지 않나?”
“부사관 훈련소에서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상대하는 유격 훈련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아일랜드 서쪽 황무지에서 감자를 키우면서 장기적으로 유격전을 수행할까 합니다.”
“고산국은 덴마크의 안전 외에 유럽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식적인 국가 정책이다. 아일랜드로 돌아가서 싸우려면 고산국 국적을 버려야 한다.”
“안타깝지만 고산국 국적을 버리겠습니다, 전하. 그 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앞으로 아일랜드인의 자유를 위해, 아일랜드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자유란 잉글랜드가 지배하지 않는 상태였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13세기 스코틀랜드를 묘사한 것처럼 잉글랜드는 다른 지역을 점령한 다음 흔히 군사력으로 억압하고 폭정을 자행했다. 19세기 감자 대기근 이후 수백 만 명이 굶어죽어 가는데도 구호하지 않고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밀과 쇠고기를 브리튼 섬으로 옮긴 것이 영국이 신봉한 시장의 자유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스코틀랜드 귀족처럼 아일랜드 귀족들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잉글랜드에 충성하며 자국민을 배반했다. 윌리엄 월레스처럼 아일랜드 사람들도 스스로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 차례 독립운동과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계속 실패한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1937년, 영국의 인정을 받은 것은 1949년이었다.
“연발총이나 단발총도 아닌 머스킷을 써야 하는데도?”
“무기가 중요한 요소이긴 하나 전쟁은 무기나 병력만으로 승부가 결정되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에게서 최대한 많은 지지를 얻어 잉글랜드를 몰아내겠습니다.”
그것이 꿈이라도 좋았다. 압제자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일랜드에는 희망이 있었다. 자유인에게 의미 없는 싸움을 하지 말라고 차마 강요할 수는 없었다.
“좋다. 아일랜드로 가는 것을 허가하겠다. 그러나 아일랜드 평민들이 스스로 싸워야 한다. 내게서 지원을 바라지는 마라.”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전하.”
그러나 귀족 독립군에게 하는 정도의 지원은 해줄 생각이었다. 평민 독립군이 창칼로 싸우다가 다 죽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잉글랜드 침략자들과 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두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독립군이라 칭하는 아일랜드 귀족 영주군들도 적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신교로 개종한 아일랜드 지주들도 잉글랜드 편이다. 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로 아일랜드의 여론이 갈릴 것이다.”
“전쟁 중에는 적 아니면 아군입니다. 독립군에 적대적인 아일랜드인 지주계층을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예쁜 아일랜드 지주의 딸에 홀려 원칙을 어기는 독립군이 반드시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귀족 독립군과 여러 가지 갈등을 빚다가 심지어 적을 앞두고 내전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실 북미에 오기 전부터 모든 부정적인 예상을 해두었다.
“영주나 부족장들이 병력과 보급품을 넘기라고 하면?”
“그들을 상대로 싸우겠습니다. 잉글랜드와 협상을 하다가 자기들에게 유리해지면 언제든 아일랜드인들을 버릴 자들입니다.”
“좋다. 잘 싸우도록 해라. 에스파냐의 갈리시아 지방 사람들이 너희들을 도울 것이다.”
대신 고산국에서 공개적으로 지원해주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고히 했다. 제화공 출신 하사는 그것만으로도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다.
“하오나 만약 잘 될 경우 귀족들 중에서 왕이 될 자를 부디 전하께서 골라 주십시오. 그래야 백성들이 믿고 따르게 됩니다.”
“네가 해.”
“예? 하오나 씨족과 부족으로 이뤄진 아일랜드에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귀족이 왕이 되어야 합니다.”
“왕을 네가 하라고! 씨족장이고 부족장이고 언제 제대로 싸운 적이 있나? 영주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을 배반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 훌륭할 정도다. 나는 그들을 절대 믿을 수 없다.”
아일랜드 출신 하사가 한참 고민하더니 수긍했다. 이민호는 끝까지 하사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실명을 숨기고 활동하는 동안 사용할 그럴 듯한 별명이나 하나 만들어주기로 했다.
“힘든 길을 돌아가야 하겠지만 전하의 뜻을 받들어 독립군 지휘부에서 귀족들을 배제하겠습니다. 하오나 저보다 나은 자를 왕으로 내세워야 하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부디 혜량해주십시오, 전하.”
“알았다. 아일랜드 일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알아서 해라. 나는 도와줄 뿐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물러가려는 하사를 보면서 이민호가 싱긋 웃었다.
“좋다. 이제부터 지옥의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 전하?”
“지휘란 어려운 일이다. 지시를 내릴 때 병사들이 아니꼽게 여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임무를 수행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은 배워야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병사나 부사관이 배운 유격전은 겨우 수박 겉핥기 수준에 불과하다. 하사부터 제대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
독립군 희망자 20여 명을 이리의 북미 탐사전단 훈련소에 보냈다. 일반 훈련소가 아니라서 악 소리 나겠지만 이들이 살아남아 아일랜드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제대로 훈련부터 받아야 했다.
훈련이 힘들다고 독립군에서 탈퇴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아직 고산국 군인이나 백성 신분이었다.
시간을 벌어 병력을 좀 더 확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아무리 유격전이라도 최소 300명 정도는 돼야 적지에서 장기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공개적으로 모집을 할 수가 없어서 적당한 인원이 모일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폐하께서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편이 훨씬 간단하고 싸게 먹히겠어요.”
아일랜드 출신 하사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헤드비히 공주가 말을 걸었다. 아이슬란드 여왕은 덴마크 왕궁과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 왕궁, 그리고 새원산과 새강릉의 별궁까지 모두 네 곳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
북미 여공작 비올레타는 새강릉과 고산국 왕도를 오가며 업무를 처리했다. 다스마리냐스 전 총독 부처는 새강릉에 새 둥지를 틀었다.
“그러게 말이오. 그나저나 조선말이 많이 늘었소, 비키.”
“오직 폐하만을 생각하면서 살기 때문이에요.”
헤드비히 공주가 이민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어도 헤드비히는 제대로 일을 할 줄 아는 여자였다.
덴마크 서인도회사의 자산이 겨우 일 년 사이에 몇 배나 불어났고 배당도 매년이 아니라 매 분기마다 꾸준히 실시했다. 마치 중간 크기의 금광 하나가 생긴 것과 비슷한 양의 금괴가 석 달마다 들어왔다.
“저 미인 분은 누구시죠?”
“최 선생은 조정에서 교육 분야를 맡고 있소.”
“아! 이번에 입궁하신 총리 비서실장이라는 분 말씀이죠? 처음 뵙겠어요, 최 선생님.”
“아이슬란드 여왕폐하를 알현합니다.”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하던 최 선생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안경테를 손으로 살짝 들었다 내렸다. 갑자기 알현실에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했다.
“아이슬란드의 여왕께서는 연치가 그리 낮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전하께 어리광을 부리고 계십니다. 이는 혜영 총리님이 건국 원년에 제정한 고산국 왕실 법도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여왕께서는 제게 고산국 왕실 법도에 대한 교육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시죠.”
“아, 안 돼요. 폐하! 살려주세요!”
“공식 호칭은 전하입니다.”
헤드비히가 애처롭게 비명을 질렀으나 시녀 둘이 양쪽에서 팔을 붙잡은 다음 다른 방으로 끌고 갔다. 최 선생이 이민호와 함께 있는 동안 사라져 있었던 비올레타가 갑자기 나타나 한숨을 쉬었다.
“왕실의 법도가 중하긴 하나 아이슬란드 여왕님은 전하의 후궁이 아니시잖아요?”
“그러게 말이오. 비올레타는 잘 지냈소?”
“물론이에요, 전하.”
비올레타가 환하게 웃었다. 알현실에 다시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듯했다.
“북미 이주민 숫자를 늘리기 위한 꼼수는 아니고 순수하게 도와준 것이오. 오해 없길 바라오.”
“물론이에요, 전하. 이주민 숫자를 늘리기만 원했다면 다른 방법도 많아요.”
아일랜드의 독립전쟁을 도와주는 것은 극도로 외로워하는 사람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건넨 것과 같았다. 국왕이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지만 정치는 그 다음 문제일 경우가 아주 가끔 있었다. 현대 미국도 소말리아처럼 돈이 전혀 안 되는 곳에 병력을 투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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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