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24화 (673/1,000)

00724  80. 1601년 순행  =========================================================================

순행 함대는 알류산 열도 중간 암치트카 섬에 건설한 항구에 도착했다. 초가을인데도 아주 선선하고 안개가 자욱한 곳이었다. 그 전에 함대에 탑승한 전체 인원이 동복으로 갈아입고 견시 등 함정 외부 근무자들은 겨울용 외투를 입었다.

이곳은 고산국 본토와 북미 사이를 잇는 무선통신 중계 기지였다. 등대와 측후소를 설치하고 보급항과 수리기지를 겸하고 북태평양 탐사전단 소속 탐사선들이 자주 입항하는 곳이라 꽤 많은 인원이 상주했다.

암치트카 섬은 원래 알류트 원주민들이 암치흐타흐 섬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이곳에 기지를 건설한 것은 알류산 열도의 다른 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쪽에 위치하고 주변 화산섬들 중에서 비행장 활주로를 세울 만한 평지가 있는 몇 안 되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활주로는 아직 건설하지 않았다.

해적선 서너 척의 공격을 격퇴할 만한 병력이 필요해 3인치 포 2문까지 해서 1개 중대가 이 섬에 배치됐다. 원래 역사에서는 알류산 열도가 18세기 중반에나 발견되겠지만 고산국에서 영토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위치와 주변 지도를 외국에 공표하는 바람에 언제든 유럽 모피사냥꾼들이 들이닥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영토 편입 선언과 동시에 경계 병력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중대장을 비롯한 병사들, 그리고 측후소 등의 근무자들은 다들 거지꼴이었다. 알류산 열도가 바다 한가운데에 있어서 평균 기온은 그리 낮지 않았다. 그러나 습기가 매우 높아서 뼛속 깊이 한기가 느껴지는 탓에 아무리 단단히 입어도 모자란다고 했다.

“이야! 그 비싼 해달 모피를 깔고 덮고 자? 최소 스무 장씩은 연결했군. 이게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아나?”

“알고 있습니다, 전하. 그렇다고 해달이나 바다표범을 새로 사냥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원주민들에게 얻은 것입니다.”

“알아, 알아. 나도 농담한 거야.”

그러나 기지 대원들이 사치를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흐린 날이 대부분이라 제대로 무두질을 못한 해달 모피에서 나는 냄새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대접할 것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이곳에서는 사냥이 금지됐기에 보급품밖에 없습니다.”

“아니야. 아이누 섬에서 가져온 것이 있네.”

아이누 섬에서 잡아 냉동시킨 연어와 가리비, 몇 가지 보급품 목록에 들지 않는 곡물과 채소를 이곳에서 풀었다. 근무자들과 병사들이 아주 눈이 돌아가면서 미친 듯이 먹어댔다.

알류산 열도에는 해달 외에도 바다표범이나 물새 종류가 아주 많이 서식했다. 그러나 유럽인 모피 교역상들이 사냥을 하지 못하게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상륙도 아예 금지시켰다. 덕택에 병사들도 사냥을 할 수 없게 됐다.

해달 서식지로 소문이 난 알류산 열도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산국 영토로 선포한 이후 유럽 선박들이 섬에 접근하기를 꺼렸다. 올해 초에 멀리서 배 한 척이 암치트카 섬에 접근했다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경우가 유일하게 관측된 사례였다.

“추운 곳에서 다들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요.”

최 선생도 그 동안 말만 들었지 격오지에 파견된 사람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내년 사회 부문 교과서 내용이 약간 달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군대 지원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서, 모병에 큰 지장을 줄 정도가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북태평양 무역항로를 지키고 이 지역의 자연자원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소. 여길 내버려두면 유럽인 모피 상인들이 와서 해달과 바다표범을 멸종시키고 상선을 약탈할 것이오.”

“정규군은 본토보다 바깥 영토에 더 많이 주둔하고 있어요.”

“그게 문제요.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고 군인이 됐는데 열대나 한 대의 오지에서 시간만 때우고 있으니 불만이 많겠지요.”

정규군이 북미나 시베리아 등 외지로 자꾸 빠져 나가서 현재 고산국 본토는 해안경비대와 민병대가 지키고 있는 꼴이었다. 그러나 고산국 본토는 육지로 외국과 이어지지 않았기에 방어병력은 충분한 셈이었다.

고산국 육군과 해군은 점차 증강되는 추세였다. 아무래도 거주지에서 징병하는 것이 병력 관리 면에서 수월했기 때문에 현지에서 직접 병력을 늘렸다. 그래서 북미 육군과 해군 수병 중에서 원주민과 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3분의 1을 차지했다. 북미에 사관학교가 설립되고 나서 원주민과 이민자들의 입학이 허용돼 이들이 조만간 장교로 임관할 예정이었다.

다음 날 순행 함대가 민호 해, 현대 이름 베링 해에 살짝 들어갔다가 바다가 너무 거칠어서 다시 태평양 방면으로 빠져 나왔다. 10년 넘는 탐사기간 중 유일하게 이민호 이름이 붙은 바다였다.

수십 년 뒤부터 민호 해에서 게 잡이를 할 어부들이 거센 파도에 시달리면서 이민호를 죽어라 욕할 것 같았다. 작년에 시험 조업을 해보라고 태평양 탐사전단에게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탐사대원들이 원한을 품고 이민호 이름을 붙인 것이 틀림없었다.

처음으로 순행 함대에 참가한 최 선생과 몇몇 궁녀들이 심한 뱃멀미를 앓으며 드러눕고 말았다. 예전에 외륜선으로 항해할 때보다 순양함이 훨씬 크고 안정적인데도 체력이 약한 여자들은 며칠째 노란 국물을 쏟아냈다.

배를 타본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태평양에서도 뱃멀미를 안 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산국 본토와 조선 사이를 오가는 연락선과 북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타고 넘는 순양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괜찮소?”

“괜찮아요, 전하. 푹 쉬면 나아질 거여요. 제발 자리를 피해주세요. 우욱!”

최 선생이 토한 것을 이민호가 직접 대야에 받아주려다가 시녀들에게 밀려 쫓겨났다. 최 선생의 상태가 걱정돼서 그랬을 뿐이었는데 오랜만에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드러누웠던 여자들은 사나흘 정도 심하게 앓고 나서 간신히 일어났다. 핼쑥한 얼굴이 안쓰러우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험! 험! 고생했소.”

“순행 함대에 참가하길 잘했어요. 아니라면 전하와 해군이 평소 이렇게 고생하는지 몰랐을 거여요.”

“멀미는 한두 번 겪으면 그 다음부터 괜찮소.”

“뱃멀미를 앓는 동안 죽는 줄 알았어요. 게워낼 때마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울 때는 정말 죽고 싶었어요.”

“이제 지나간 일이오. 죽지 마시오.”

만 톤 넘는 여객선 정도 돼야 멀미를 심하게 하지 않았다. 고산국 군함은 현대 군함처럼 길쭉하지 않고 여객선처럼 둥근 선형으로 건조돼서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강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민호 해와 태평양의 거센 파도는 처음 대양을 건너는 사람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북미 서해안 몇 군데를 들러서 탐사대를 격려했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햇빛이 강해져 어느덧 다시 하복을 입게 됐다.

새 나하도 오랜만에 방문했다. 유구국 국왕은 나하에서 해상 운송업을, 왕자는 새 나하에서 농업을 관리하는 식으로 나눠서 일하고 있었다.

“이게 다 밭이야? 드디어 지평선 너머까지 개간을 마쳤군. 상풍 왕자가 아주 잘하고 있네.”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도 유구국 사람들은 해상 민족입니다. 저희들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개간을 마친 널따란 평원에 갖가지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숲이라고 생각한 것은 포도나무를 비롯해 죄다 과실수였다.

그 넓은 땅을 빈틈없이 활용하는 것이 마치 소금기 먹은 섬의 모래땅에도 빼곡히 곡식을 심어 재배하던 시절과 같았다. 판로가 따로 확보되지 않았기에 수확물 대부분을 새인천에 보낸다고 했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바다가 좋은 게 아니라 혹시 역마살이 낀 것은 아닌가? 시베리아 철도 기관사 절반이 유구국 출신이야.”

“북미에서 대륙횡단 철도가 완성되면 마찬가지일 겁니다. 유구국 사람들이 배를 운항하는 것 외에도 새로운 장난감을 갖고 노는 재미에 눈을 뜬 것 같습니다.”

“좋다면야 말리지 않겠네. 기관사들의 가족을 잘 돌볼 수 있도록 해주겠네.”

고산국에서 활동하는 유구국 사람들은 국적에 구애받지 않았기에 따로 이민 문제가 크게 도드라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한때 백성들을 끌어들이고 지키는 문제로 은근히 감정싸움을 벌이곤 했었다. 지금은 두 나라가 서로 강력하게 결합돼 있기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전하! 기관사 자녀들의 학교 수업에 문제가 있습니다. 고산국에서는 기관사 자녀들에게 언어교육을 이상하게 시키는 것 같습니다만, 저희들에게 아예 맡겨 주십시오.”

“안 돼! 수업은 학생들의 국적에 따라서 그 나라 말로 해야 해. 그리고 조선말은 일주일에 세 시간 이상 수업할 수 없네. 조선말을 배우려면 학교 밖에서 배워.”

상풍 왕자의 의향을 파악한 이민호가 제지했다. 그러나 유구국은 지난 몇 년 동안 고산국과 동질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저희들은 상인이라 옛날부터 외국어를 빨리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선말이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말이 됐습니다.”

“뭐야? 겨우 10년 만에?”

“그래서 유구국 본토에 세운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아예 조선말로 가르칩니다. 기관사의 자녀들로서 여진 땅에서 유구어 위주로 배운 학생들이 본토에 돌아오면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게 무슨 민족반역자 같은 소리인가? 상풍 왕자나 유구국 사람들은 영원히 유구국 사람이야!”

이민호가 버럭 화를 내자 상풍 왕자가 몹시 당황했다.

“유구국이 고산국에 흡수 통합될 수도 있다는 말씀인데도 전하께서는 전혀 기뻐하지 않으시는군요?”

“왕자가 오해하고 있네. 나는 고산국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는 백성이 늘어나길 원하는 것이 아니야. 말을 잃으면 정신을 잃는 법이야! 고산국의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유구국의 장점을 상실하지 말도록 하게.”

상풍 왕자를 설득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 유구국이 독립하든 말든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이미 완전히 예속돼 독립해서 얻을 이익이 없었다. 이는 이민호나 상풍 왕자나 다른 유구국 사람들도 공감하는 바였다.

그러나 이민호가 작은 유구국을 그 동안 높이 대우해준 것은 아시아에서 구하기 어려운 해상민족이기 때문이었다. 남의 땅을 노략질하는 왜구나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먹고 살다 죽는 필리핀의 바다 민족들은 사실 바다를 잘 몰랐다. 남태평양 사람들은 더 이상 먼 바다로 항해를 하지 않게 됐다.

이들과 달리 유구국은 오래 전부터 대형 선박을 동원해 먼 나라를 찾아다니며 무역으로 먹고 살았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해로를 개척해 외국과 교통하는 것은 이 시대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민호가 대서양에서 덴마크와 네덜란드를 상대적으로 우대한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

태평양을 내해로 삼은 고산국이 앞으로도 바다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뱃사람으로서 유구국 사람들의 모험가 기질이 계속 필요했다. 만약 유구국 사람들이 언어를 잃어 고산국에 동화된다면 그 장점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용납할 수 없었다.

“태평양은 대충 탐사를 끝냈지만 인도양과 대서양에는 아직 탐사를 하지 못한 곳이 많네. 유구국 사람들이 또 다른 고산국 백성이 돼버리면 나는 유럽에서 모험심 강한 선원들을 구해야 해. 잘못하면 유럽 국가에 탐험의 과실이 넘어가버린단 말이야.”

“전하께서는 저와 생각이 많이 다르시군요. 말씀을 듣다 보니 얼떨떨합니다.”

“건국 초부터 지금까지 유구국 선원들에 대한 대우는 고산국 백성과 동등하게 해줬잖아. 유구국 젊은이가 고산국 해군이나 해병대에 입대할 경우 용병이 아니라 내국인 대우하면서 무한정 받아줬지. 녹봉이나 승진도 동일하게 적용했어.”

“전하의 은혜에 유구국 백성들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산국에서 배정한 화물을 운송하느라 유구국 배들은 항상 바빴지만 혹시라도 일이 끊길 것 같으면 급하지 않은 일을 미리 당겨서 시키기도 했다. 유구국이 선박 보유량, 즉 해상 운송 능력을 확대하는 것은 고산국의 국익에 직결됐기에 항상 신경을 써서 지원해줬다.

“이 평원을 유구국에 내준 것도 식량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백성들을 많이 키워서 바다에서 써먹기 위해서야. 그러니 괜히 고산국에 동화되면 쓸모가 없어져. 피차 손해야.”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전하. 저희 유구국 사람들을 그리 높게 평가해주시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나는 상인 출신이야. 괜히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네.”

조선 출신자만으로는 고산국에 뱃사람이 부족했다. 아일랜드나 프랑스, 에스파냐의 모리스코 등 다른 나라 출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들은 큐슈나 시코쿠, 혼슈를 가리지 않고 바다로 진출하지 못하게 했다.

선원으로서 가장 적당한 민족이 유구국이었으나 숫자가 적은 것이 이민호에게 유일한 불만이었다. 유구국 사람들이 땅에 안주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이 넓은 평원을 하사해주신 것에 대한 유일한 보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산국과 유구국은 영원한 동반자가 될 거야. 고산국에 흡수되는 것도, 떨어져 나가는 것도 고산국에 손해야. 명심하게.”

“예, 전하. 유구국은 앞으로도 고산국에 빨판상어 같은 유용한 부하가 되겠습니다.”

“그건 너무했다. 동반자라니까? 사람 말 좀 믿어.”

상풍 왕자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닌 것이, 빨판상어라면 서로에게 이로운 공생의 예였다. 고산국과 유구국은 오스만 제국과 북아프리카 해적의 관계와 흡사한 면이 있었으나, 훨씬 생산적인 관계였다.

어쨌든 고산국이 해양제국을 유지함에 있어서 유구국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 유구국의 후계자로부터 새롭게 충성 맹세를 받았다.

============================ 작품 후기 ============================

유구국과는 이런 관계입니다. 이제는 고산국 규모가 너무 커져서 차라리 통합되는 편이 낫다고 유구국 사람들이 생각할 정도입니다. 현대 오키나와가 일본인들을 싫어하면서도 독립에는 반대하는 그런 이미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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