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18화 (667/1,000)

00718  79. 1601년의 일상  =========================================================================

중앙과 지방의 행정체계가 바로 잡히면서 이민호 개인에게 시간 여유가 제법 생겼다. 총리 혜영도 농담처럼 이민호에게 올해는 원정 안 가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토르구트 족이 이주하는 동안 만약 지켜주겠다고 이민호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가면 감시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아예 가지 않았다. 토르구트 족의 이주를 도와주는 자들은 철도원, 의료단, 비무장한 관리들 정도였고 무장한 채 접촉한 자들은 탐사대뿐이었다.

가장 서쪽 튜멘의 요새에 주둔한 고산국 병력은 감시가 아니라 지원해주느라 바빴고 식량과 가축, 화살과 화승총을 나눠주는 사람들로 인식됐다. 덕택에 토르구트 부족민들이 고산국을 같은 편이라고 확실히 인정한 것 같았다. 토르구트 족은 새로 정착한 초지에서 목축을 하고 주변 지역을 조사하느라 바빴다.

이들이 고산국을 지배자로 인정하더라도 토르구트 족에게서 세금도 안 걷고 보급만 자꾸 해줘서 아주 관대한 지배자로 인정됐다. 덕택에 타이지의 권위가 독립적이지 못하고 고산국에 점점 의존하게 됐다. 만약 후대의 타이지가 고산국으로부터 독립할 야망을 품을 경우 부족원들에 의해 결코 살아남을 것 같지 않았다.

이로써 서 시베리아 영토에 확실한 방벽이 제대로 하나 생겼다. 3개 연대 정도 고정 배치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혔다. 토르구트 족도 결국 고산국에 흡수돼 부족명은 그저 출신지로만 언급되는 보통 백성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여진족이나 몽골족 등 다른 민족들이 우리에게 정복당한 피지배자가 아니라 고산국 구성요소의 하나라고 느끼게 해줘. 작은 이익 때문에 서로 다투다가 반란이나 일으켜봤자 피차 피곤하니까.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려는 민족은 없지?”

“그런 민족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 민족이 있었다고 해도 벌써 옛날에 멸절했겠죠. 그런 사람은 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 말이야? 나는 혜영한테만 신세지는 것뿐이야.”

이민호도 시간이 남아돌아서 낮에는 주로 혜영의 총리 집무실에서 노닥거렸다. 혜영은 총리실의 비서들뿐만 아니라 여러 부서의 연락관을 여자 관리로 임명하게 함으로써 여성 행정 관료들을 양성했다.

관리 시험에 여자보다는 남자가 많이 지원하고, 남자 위주로 북미나 호주 등 외직에 파견 근무하는 경우가 많아 승진에 유리했다. 이렇게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중견 관리쯤 되면 여자 관리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인구가 부족한 고산국에서 여성 인력을 육아 외에도 모든 곳에서 활용해야 했다. 안전한 곳에는 여자, 멀거나 위험한 곳은 남자 관리가 다수였다.

“총리님. 지방의회 의원들의 과다한 예우 문제로 이조판서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최 선생이 총리 집무실에 들어와서 보고했다. 최 선생은 여전히 총리 비서실장을 맡고 있었다. 바쁜 일과 중에 역사 교과서를 집필하고 교사들 교육을 총괄하는 것은 물론 총리가 주재하는 모든 회의에도 직접 참가했다.

“전하께서 계셨군요. 마침 잘 됐습니다. 이것들을 아주 혼쭐을 내줘야 합니다. 지방 총독들을 견제하거나 정책을 건의하라고 지방의회를 만들어놨더니 일은 안 하고 스스로 특권만 누리려고 합니다.”

“진정하세요, 이판.”

혜영이 이조판서를 말렸다. 고산국은 국체가 왕국이었고 모든 권력과 정당성은 국왕에게서 나왔다. 기존의 왕국을 뒤엎거나 왕권을 상속받은 것이 아니라 나라가 없던 곳에서 직접 나라를 창업한 건국왕이라서 왕실이 더 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국왕에 의해 임명된 관료들 입장에서 시의원을 비롯한 지방의회 의원들은 그저 백성들의 대표자들일 뿐이었다. 조선에도 유향소가 있고 좌수, 별감 등이 향회를 열어 지방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견제했지만 양반들의 이익집단에 불과했다. 국왕이 위임한 미약한 권력을 기반으로 건방지게 특권을 누리려는 지방 호족 같은 문제아들을 이조판서는 용서할 수 없었다.

“별 것 아닌 자들이 국왕의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권력집단화하려 합니다. 이들이 나중에 불미스런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모조리 탄광에 보내야 합니다.”

“이판께서 대응 방안을 준비해오셨겠지요?”

“물론입니다. 하오나 국왕전하께 윤허를 얻어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이조판서가 대단히 강경한 대책을 들고 온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민호가 시켜서 지방의회 의원들을 뽑았는데 무작정 벌만 내릴 수는 없었다. 이민호는 회의석에서 떨어진 소파에 앉아 하품을 하며 회의를 지켜봤다.

결국 지방의회 의원들에 대한 예우 문제는 중앙에서 직접 조정하기로 결정했다. 자기들 예우를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한다면 활동비는 무제한, 예우는 최고 수준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례는 법률이나 행정명령의 하부 개념일 뿐이라 잘못된 조례를 제정할 경우 중앙정부에서 수정하기로 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방의원이 과다한 예우를 받는 조례를 제안하거나 투표에서 찬성한 지방의원들은 모조리 파직시키고 피선거권을 평생 제한했다. 그런 조례를 통과시킨 지방의회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파직된 지방의원들이 이민호에게 눈물로 상소할 것이 뻔했지만 그들의 이마에는 이미 주홍글씨가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지방 주민들을 위해 일해야 할 직책에 뽑히고도 특권의식만 내세웠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때까지 지켜보기만 하던 이민호가 이조판서에게 물었다.

“의원들의 출신 성분을 분석하라고 한 적이 있는데, 자료가 마련됐소?”

“예, 전하. 하명하신 대로 보고서를 완성했습니다. 역시나 지방의원의 5할 정도가 조선에서 유학을 배웠다는 자칭 선비들입니다.”

“향안에 오르지도 못한 가짜 양반들이겠지요.”

물론 고산국에는 조선의 진짜 양반들도 소수 있었지만 자기가 공부를 잘해서 양반이 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 급제한 친척들 덕분에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했다. 조선의 무인 집안이 아니면서 고산국에 이주할 정도의 양반이라면 조만간 양반으로 인정받지 못할 집안들이었다.

“유향소 같은 지방 백성들의 대표기관이 필요하오. 그러나 조선의 유향소처럼 양반이란 소수 신분집단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또 다른 권력기관일 뿐이오.”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일반 백성들은 지방의회에 관심이 없습니다. 평범한 백성들은 의원 선거에 출마할 생각 자체가 없습니다.”

“이미 예상한 것이오. 그런데 백성들이 진짜로 의원들에게 부복하던가요? 길바닥에서 무릎 꿇고 절을 해요?”

“나이 든 백성들은 못 본 척하거나, 젊은이들의 경우 의원이 절하라고 강요하면 차라리 욕을 퍼붓고 사흘 동안 구치소에 수감되는 쪽을 택합니다.”

지방의회가 의결한 조례를 위반할 경우 최대 사흘 동안 경찰서나 보안관 구치소에 수감될 수 있었다. 시 아래 혹은 독립적인 행정단위인 군 단위 주민들의 직선으로 선출된 보안관의 경우 위임된 업무만을 처리할 수 있었다. 서부시대나 현대 미국처럼 보안관이 일정한 예산 한도 내에서 직원들을 고용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당한 젊은이들이 많구려.”

“혹시 전하께서는 기존 지방의원들에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지방의회 선거에 출마하길 원하십니까? 하지만 젊은이들이나 조선에서 양인 출신은 자격이 부족하다고 여겨 대표로 나서길 주저할 것입니다.”

“그런 면도 있소. 건국 초기라서 일반 백성들보다 특별하게 부유하거나 유식한 자들이 없는데도 신분 격차가 생기는 것 같아 걱정이오.”

“그놈의 자칭 양반들이 가진 권위의식이 문제입니다.”

“일반 백성들이 높거나 강한 척하는 자들에게 쉽게 숙이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도 드오.”

조선 같은 나라에서 지배계급의 부당한 권력 행사에도 순응해서 살아온 백성들이 성인의 대다수였다. 건국한 지 이제 겨우 10년 남짓,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할 수 있었다.

“고산국에는 전하 외에는 지배자가 없습니다! 조선 출신 양반이나 다른 특권집단을 인정하면 절대 안 됩니다. 모든 백성은 양반의 아랫사람이 아니라 전하의 백성입니다.”

“훌륭하오, 이판. 하지만 양반이 없어지더라도 양반을 대신해 특권계급을 형성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이 꾸준히 생겨날 것이오. 부자나 학식을 가진 자, 장교나 관료인 자들이 말이오.”

“관료나 장교가 가진 모든 권력, 그리고 부자의 재산과 교수의 학식은 전하께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듯이 관료나 장교 등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반역자일 뿐입니다. 그런 자들을 관직에서 내쫓거나 힘을 꾸준히 깎아나가겠습니다.”

“그것을 제도로 정착시키는 것이 이판이 하실 일이오. 잘 부탁하겠소, 이판.”

“국왕전하와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목숨을 바쳐 일하겠습니다!”

“고맙소.”

조선에서 서자의 서자 출신으로서 양반들에게서 몹쓸 소리를 자주 들은 이조판서는 불합리한 신분제도를 혐오했다. 바로 그것이 그가 이민호의 눈에 일찍 띄어 이조판서로 출세한 이유였다.

다른 판서들이 실무 책임자로서 높은 직위에 오른 자들이라면, 이조판서는 국왕에 대한 충성심과 생각이 비슷한 덕택에 고위직에 오른 친위세력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조판서 외에 몇몇 중요한 자리에는 이민호의 든든한 정치적 동지들이 자리했다. 이민호가 후궁들만 주요직에 배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요즘 법을 공부한 자들 중에 법의 미비점을 악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악랄한 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법을 보완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그런 자들을 응징해야 할 것으로 아옵니다.”

“그런 인간들 때문에 갈수록 법이 복잡해지는 것 같소. 미리 법안을 잘 만드는 수밖에 없겠소.”

이조가 지방행정청을 관할하기에 중앙보다는 오히려 지방에서 권한이 더 막강했다. 호조와 예조, 병조와 공조처럼 건국 이후 업무가 과다해진 것은 이조도 마찬가지였다.

6조에서 유일하게 형조만 조용한 것 같지만 각급 법원과 경찰, 탄광 등 형무소를 운영해야 해서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호조와 공조가 가장 바쁜 기관이었다.

“소방관에 대한 처우는 어느 정도요?”

“비슷한 경력이나 직급의 다른 부서 관리들보다 항상 한 등급 높은 대우를 받습니다. 전하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라 저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혹시 달리 하명하실 건지요?”

“아니요. 매우 동감하는 바요. 소방장비를 잘 갖춰주시오.”

“물론 소방관의 안전이 우선이기에 장비는 항상 신형을 보급합니다. 경찰이나 군인, 의료진들도 그렇지만 소방관만큼 헌신적인 사람들도 드뭅니다. 나중에 관리들이 충분한 숫자가 된다면 신입 관리들을 1년 정도 소방서에 파견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관리들도 그렇게 헌신하면 좋겠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오.”

소방서가 관할하는 지역이 지나치게 넓다는 지적이 제기되곤 했다. 그래서 소방마차가 아니라 본격적인 소방차를 제작해야 하는지 고민에 쌓이게 됐다.

현재 고산국에 군용과 건설용 외에 자동차라곤 왕도에서 운행하는 승합차밖에 없었다. 기관이 장착된 차량이 많아질수록 자동차 사고의 위험이 높아졌다.

마차도로를 마구 횡단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인 현재, 자동차를 선뜻 도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우마차에 깔리나 자동차에 깔리나 사람에게 치명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조판서가 돌아가고 나서 혜영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최 선생도 흥미진진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혹시 위험한 자들을 골라내려고 지방의회 의원 선거를 했나요?”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골라내야지. 주어진 권한을 제대로 활용해서 일할 사람들을 뽑아야 해. 직종별 대표를 선출하는 것도 생각해봐.”

“양반이 아니더라도 뭔가 가진 자의 특권의식을 무시하면 안 돼요. 지방의회나 추밀원과 관련해서 계속해서 문제가 터져 나올 거여요. 좋은 사람들은 권력을 더럽게 여겨 출마하지 않을 거여요.”

“그 정도는 각오했어. 하지만 장점이 있으니까 계속 추진해야지.”

그러나 강아지는 배가 터진 후에도 계속 밥을 먹고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난다. 못된 인간들은 반드시 권력을 정당하지 않은 곳에 행사하기 마련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안에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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