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10화 (659/1,000)

00710  77. 동해국에서  =========================================================================

“하온데 전하! 서 시베리아에도 학교가 세워지고 있는지요? 아이들 교육이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넨 모르는 모양인데 새로운 영토를 얻으면 행정관서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병원과 학교야. 고산국 영토 내에서 사는 한 의료와 교육 문제는 걱정하지 말게.”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물론 학교는 건물만을 뜻하지 않으니, 그 지역에서 교사를 새로 구해야 했다. 보통은 이주민의 부인이나 시집 안 간 처녀들이 단기 교육을 받은 다음 교사에 임용됐다. 먼저 학교부터 운영해야 해서 교사들은 임용되기 전보다 그 후에 받는 교육 기간이 훨씬 길었다.

새로운 개척지로 이주한 모든 남자는 민병대에 가입해, 농사를 짓는 시간 중에 짬을 내서 교대로 주변 경계 임무를 맡아야 했다. 그래서 한 동안 개척지의 학교는 심각한 성 불균형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서 시베리아에 가서 농업으로 크게 성공해서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리게나.”

“지금도 돈은 충분합니다. 남는 곡식을 고향 사람들에게 보내주려고 합니다. 강원도에서는 쌀밥을 먹기 너무 힘듭니다. 기껏 수확한 쌀은 모두 세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넨 참 훌륭한 인물이로군. 하지만 운송비가 더 들 테니 은으로 보내는 게 나을 거야. 그리고 추워서 쌀농사는 힘들 걸?”

19세기 한민족 이주사에서 흔히 보듯 조선인 출신 농민들은 어딜 가든지 쌀을 재배하려고 했다. 그래서 무상일수와 일조량을 감안해 쌀 재배의 북방한계선이라고 농업학자들이 자신 있게 그어놓은 선을 매번 깨고 다녔다.

농업연구소에서 추위에 강한 쌀 품종을 개발해 아이누 섬 일부에서 재배에 성공했지만 서 시베리아에서 쌀농사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농업학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조선 출신 농민이라면 기대할 만했다.

“예. 먼저 밀농사를 지으면서 쌀농사를 조금씩 확대할 계획입니다.”

“자꾸 이사 가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백성들이 잊어버렸던 어릴 적 꿈을 다시 꾸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꿈이 이루어지게 도와주십니다. 어찌 그 일이 전하께서 죄송할 일이겠습니까?”

그 사이에 기차가 와서 기적을 울렸다. 대화를 계속했던 농민 외에 가족들, 그리고 다른 농민 가족들이 땅에 엎드려서 이민호에게 절을 했다. 부복이란 고산국에서 이미 없어진 예의였다.

이민호는 개척지로 과감하게 떠나는 농민들이 고마워서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맞절을 했다. 농민들이 황망해 했으나 이렇게라도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이주 초기에 고생하더라도 자네들이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겠네. 자네들이 북미에 못지않을 옥토를 만들 수 있도록 내가 열심히 지원해주겠네. 판로는 걱정 말고 무조건 많이 생산하게.”

“황공하옵니다. 만수무강하옵소서, 전하.”

농민들이 짐을 지고, 양손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멀리 북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민호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이 문제야.”

“예. 새로 이주한 지역에서 소수민족이 되어 다른 종족에게 핍박받는다면 이주를 안 하는 편이 낫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겨우 몇 세대만 지나면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겁니다. 그때까지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지켜내야 합니다.”

감불이 오랜만에 무거운 이야기를 해서 새삼 다시 보게 됐다. 장기적으로 볼 때 국력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인구가 가장 중요했다.

지금은 고산국의 과학 문명이 멀찌감치 앞서더라도 물량 앞에 장사 없었다. 앞으로 군사기술 수준 차이가 조금씩 줄어들다 보면 결국 최종적으로는 군대의 규모에 따라 승부가 결판날 것으로 예상했다.

“감불이도 열심히 자식들을 낳아라.”

“도련님은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저는 여자가 세 명이 넘어가니까 도저히 감당을 못하겠습니다.”

“계복이도 여덟 넘겼어. 좀 더 노력해봐.”

“예. 좋은 게 아니던데요.”

매일 밤 여러 명을 감당해야 하는 이민호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감불이 새삼 이민호를 존경이 가득 담긴 눈길로 바라봤다.

“뭐?”

“아닙니다.”

“쳇!”

감불이나 감동이 여진족 출신이란 사실은 벌써 잊혀졌다. 둘은 훌륭한 고산국의 장군들이었으니, 고산국의 국책에 따라 자식을 많이 낳을 의무가 있었다.

연해주로 이주했던 백산 3부 여진족들이 몰려와서 이민호에게 거대한 호랑이 가죽 여러 장을 바쳤다. 이민호가 몹시 감탄했다.

“전하께 바치기 위해 멀리 흑룡강 하구까지 가서 대호를 몇 마리 잡아왔습니다. 보잘 것 없는 진상품이지만 전하의 위엄을 돋보이게 할 것으로 믿습니다.”

“굉장히 크군. 고맙네. 털에서 윤기가 좌르르 흘러. 반드시 왕성의 옥좌 밑에 깔겠네.”

“영광입니다, 전하.”

그런데 백산 3부의 여진족들은 요즘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연해주로 이주한 다음 신나게 호랑이와 표범, 곰을 잡을 때는 좋았으나 몇 년 지나자 눈에 띄게 맹수들이 줄어든 탓이었다. 이는 수입의 급감으로 나타났다.

“사냥감이 줄어든 것은 철도 공사를 위해 벌목을 한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벌목한 곳은 한참 북쪽이네.”

연해주 북쪽은 타이가, 남쪽 해안지대는 온대림이었다. 철도 침목 때문에 북쪽의 타이가 수림을 먼저 베었으나, 남쪽에도 1미터 굵기에 30미터 길이의 황철목이 무성하게 자라서 경제적인 목재로 벌목 일순위로 꼽혔다. 황철목은 펄프나 성냥으로 만들기에 적당한 나무였다.

그러나 백산 3부 여진족들은 뛰어난 맹수 사냥꾼들이라서, 이들을 벌목공으로 전업시키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이민호는 이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다.

“헤헤! 저희들이 너무 많이 잡은 탓이 맞습니다.”

“이상해. 전에 왜 그리 많이 잡았지? 백두산에 비해 맹수가 쉽게 잡히나?”

“그렇습니다. 백두산 같으면 호랑이가 깊은 계곡에 숨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맹수들이 숨지 못해서 금방 잡히기 때문입니다.”

동해를 따라 연해주 남북에 1,300km나 이어지는 시호테알린 산맥은 시베리아의 다른 산맥들에 비해 풍요로운 곳이었다. 곳에 따라 비가 매년 천 밀리미터 이상 내려서 동식물이 아주 잘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맥 최고봉이란 산이 겨우 2천 미터밖에 안 되고 나머지도 대체로 낮고 지세가 험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산 정상이 모조리 민둥산이라는 사실이었다. 산 정상 아래의 숲 외에는 맹수가 숨을 곳이 없는데 백산 3부 여진족들은 사냥개들을 몰고 다니면서 숲에 숨은 맹수를 아주 잘 찾아냈다.

“풍산개 닮았네.”

“권력서열에 민감한 개답게 국왕전하를 바로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흰 털을 가진 사냥개들이 꼬리를 맹렬하게 흔들거나 이민호 앞에서 배를 드러내고 집단으로 아양을 떨었다. 개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치고는 매운 드문 경우였다.

그러나 이민호가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사냥개들에게 나눠주자 여진족 사냥꾼들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사냥개들이 육포 냄새를 맡고 이민호에게 아양을 떤 것뿐이었다.

“지역을 나눠가면서 적당히 교대로 잡는 게 좋을 거야. 멧돼지 피해는 좀 줄었나?”

“예. 전하의 명대로 담비 사냥을 줄였더니 담비가 새끼 멧돼지를 잡아먹어서 숫자가 많이 줄었습니다. 전하! 먹고 살려면 저희들도 목축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냥꾼은 사냥을 해야 했다. 이들을 정착시킨답시고 농사나 목축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반 사냥꾼이 아니라 맹수 사냥꾼들이었다. 다른 지역 여진족 사냥꾼들 같으면 멧돼지가 나타나면 감사히 잡겠지만, 이들에게 멧돼지는 호랑이나 표범을 유인하는 미끼에 불과했다.

“자네들은 호랑이, 표범 위주로 잡지?”

“그렇습니다. 물론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멧돼지나 노루, 사슴을 잡습니다만, 호랑이나 표범 모피가 돈이 되지 않겠습니까?”

“좋아. 그럼 자네들이 맹수만 잡는다면 사냥할 땅을 내주겠네.”

“어이쿠! 감사합니다.”

여진족이나 북방 여러 민족들을 다스리다 보면 다양한 요구에 접하게 된다. 그 중 일부는 어느 지역에 맹수가 너무 많아서 사냥꾼들이 숲 깊숙이 못 들어가니, 맹수를 잡아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좀 멀어도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사냥꾼과 몰이꾼 열 명이 한 달 동안 호랑이 한 마리만 잡아도 남는 장사입니다. 요즘 북쪽 벌목지대 왕복하는데 한 달이 걸리지만 그렇게라도 잡고 있습니다.”

“흑룡강 하구라면 배를 타고 가지 그랬나? 이틀이면 될 텐데.”

“예? 아!”

백산 3부 사냥꾼들은 요즘 길도 없이 나무가 빽빽한 곳을 열흘 넘게 말을 타고 다녀오는 식으로 사냥을 하고 있었다. 멀리 흑룡강 하구까지 간다니까 더 걸리는 수도 있었다.

“앞으로 배를 타고 가게. 배 삯은 내야하겠지만 그리 비싸진 않아.”

“저희들이 바보짓을 한 것 같지만, 배는 전혀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앞으로 종종 이용하겠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맹수를 잡아달라는 요청이 많아. 북쪽 다우르 족에서 2건, 바이칼 호수 북서쪽에서 5건, 감자 반도에서 1건이 있어.”

“굉장히 먼 곳 같습니다만.”

바이칼 호수 주변 부리야트 족은 호랑이든 뭐든 충분히 잡을 능력이 됐다. 그러나 더 북쪽, 타이가 지역에 널리 흩어져서 사는 소수 민족들은 야생동물들 사이에 끼어서 사는 셈이었다.

이들은 맹수들 때문에 매년 인명피해를 크게 입었고, 이빨이나 다리라도 다쳤는지 사람만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식인 호랑이가 생기기도 했다. 이런 경우 부족 전체의 외부 활동이 극도로 제한돼 기아에 허덕였다.

“다우르 족 거주지하고 감자 반도는 배를 타고 가면 되네. 바이칼 호수는 기차를 타고 가게.”

“와! 저희들이 저 기차를 탈 수 있습니까?”

“안 타봤나? 아무나 타도 돼.”

“기차는 워낙 기물이라서 고산국 군인이나 그 가족들만 타는 줄 알았습니다.”

“다음부터 타고 다니게. 사냥 성공 여부나 모피를 처분하는 문제는 신경 쓰지 않겠네. 대신 그 지역 맹수들을 퇴치해주는 일을 해주는 것으로 간주하고, 건마다 수당을 주겠네.”

“맹수도 잡고 나라에서 돈도 받고, 아주 좋군요.”

백산 3부의 장로와 부족장들을 모두 불러서 해수 구제 계약을 체결했다. 이제 시베리아 어느 지역이든 맹수가 지나치게 많이 발생한 곳에 이들을 보내 일정 숫자 이하로 줄이는 일이 가능해졌다.

“맹수라 해도 몰살시키면 안 돼. 씨를 말리지는 말란 말이야.”

“물론입니다. 맹수가 있어야 저희들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때 백두산 호랑이를 창으로 찔러 잡았던 백산 여진족들이라서 이민호도 든든했다. 그런데 이민호에게 욕심이 생겼다.

“혹시 산맥 하나를 지키면서 국경선을 관리하는 일을 맡지 않겠나? 천 명 정도 필요한데. 문제는 일할 곳이 여기서 좀 멀다는 거야.”

“혹시 월급 받고 일합니까?”

“당연하지. 매달 은 4냥을 주겠네. 무기는 활 외에도 단발총을 지급하겠네. 어떤가?”

“우와! 저희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멉니까? 10일이나 보름 내에 집에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면 좋겠습니다.”

“7일에서 길어야 10일 걸려. 세 부족에서 300명씩 뽑게. 거기도 사냥감이 풍족하니까 세 부족에서 일부씩 나눠서 이주하는 편이 나을 걸세.”

“마침 사냥감이 부족해 곤란한 시기라서 아주 좋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저희들이 원하는 것마다 다 해결해주시는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신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내년 봄에 이주할 준비를 하게.”

이로써 한 달에 겨우 은 4천 냥으로 우랄산맥 레인저 부대를 고용했다. 이들이 완전한 고산국 백성으로 인정되면 기본소득 4냥에 월봉 6냥으로 인상시켜줄 예정이었다.

현대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7일 정도 걸렸으니 이민호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연해주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우랄산맥 산록에 정착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나라 인구는 적은데 생업이나 문화가 참으로 다양합니다.

감사합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