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09 77. 동해국에서 =========================================================================
동해국에 전기가 공급된 것은 벌써 2년이 넘었다. 먼저 공공부문에서 전기가 사용돼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전화가 가설됐다. 그리고 차차 민간부문에서도 냉장고와 선풍기 같은 가전제품을 사용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부터 동해국에서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언어는 조선말과 동해 여진어 두 가지였다.
앞으로 시베리아 각 지역마다, 그러니까 기차역마다 세울 방송국에서 두 가지 채널을 이용해 각각 다른 언어로 방송을 내보낼 예정이었다. 모든 가정마다 방송 수신을 할 수는 없지만 공공기관이나 가게에서 수신기를 틀어놓을 정도로 수신기가 보급됐다.
여진족들은 음악과 극은 조선말 방송, 보도는 여진어 방송을 주로 청취했다. 동해국 여진어 방송에서는 여러 지역 족장이 방송에 출연해 부족민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거나 샤먼의 굿이나 푸닥거리를 녹음방송하기도 했다. 여진어로 노래 부르는 가수들이 큰 인기를 얻어 여러 마을에 초청돼 돈을 받고 노래를 불렀다.
“오늘은 토지개혁 문제로 아오지 족장님이 방송국에 나오셨습니다. 우리 동해국에서는 현재 작은 농지를 소유한 개인에게서 농지를 회수하는 대신, 개간된 넓은 농지를 나눠주면서 세금을 받는 식으로 토지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농지가 없는 분들에게도 개간된 농지를 무료로 나눠주고 있습니다. 관개사업을 이미 마쳐서 배분하는 농지 면적은 전에 농민들이 경작하던 것보다 훨씬 넓고 비옥합니다. 곡식을 재배하는 경작지의 경우 일에 비해 수확량이 열 배나 많아져서 불만이 거의 없습니다.”
고산국의 속국인 동해국의 총독은 민영이 계속 맡고 있었다. 국왕 대리 겸 총독 대리 자격으로 아오지 첨사가 직접 방송에 출연했다.
그리고 사회자로부터 미리 준비된 질문을 받고 설명하는 기회를 가졌다. 여진어로 먼저 방송될 경우 조선말 방송에서 통역을 해서 전했고, 그 반대일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마을 단위로 공동 소유한 목초지를 왕토사상과 어긋나지 않고 조화롭게 공용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오지 총독 대리께서는 어떻게 진행할 계획이신지요?”
“토지개혁 중에 모든 과정은 개인이나 마을, 혹은 부족의 동의를 받고 실시합니다. 절대로 강제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그 동안 개인이나 마을에서 소유했던 토지를 환수한다면 일단 반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 동해 여진 사람들은 어느 쪽이 이익인지 먼저 확인해봐야 합니다.”
10원을 100원으로 바꿔준다 해도 아이들은 여러 모로 계산하며 망설이는 법이었다. 어른이라도 사기 당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경작지나 목초지 중에서 개인 소유나 마을 공동 소유 방식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현재 그대로 유지해도 됩니다. 그 경우 세금을 안 내도 됩니다. 그러나 보통은 왕의 토지로 넘기면 관개사업을 해주고 면적이 몇 배로 늘어나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생산력 차이가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목축을 위주로 하는 마을에서 특히 우려가 큽니다.”
“목축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서는 목초지도 관개사업이 필요합니다. 수로가 완성되면 개자리나 알팔파라는 목초를 심어 같은 면적에 훨씬 많은 소와 양을 기를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고산국 국왕전하의 영도 아래 이루어집니다.”
불만이 조금 있더라도 감히 고산국왕의 대리인인 동해국 총독부에 반발하지 말라는 협박이었다. 모든 것을 알아서 다 해준다는 식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기존 농민과 목축인들의 동의를 받고 나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실제로 관개사업을 마친 지역에서는 수확량이나 목축 가능 두수가 그 전보다 몇 배나 늘었다. 관개사업이 진행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확실히 비교가 되고, 그 사실이 여진족들에게 충분히 알려지면 그것으로 판단은 끝났다.
관개사업을 마친 곳에 수시로 동해 여진 사람들이 구경하러 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모든 지역이 고산국의 왕토사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동해국에서는 국왕 외에 그 누구도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지만, 능력 가능한 한도 내에서 누구든지 최대한 토지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그것도 관개사업이 완료된 비옥한 토지였다.
물론 총독부에서 농지와 초지를 개간하는 대신, 여진족은 수확량 절반을 세금으로 냈다. 그래도 예전보다 남는 게 많았으니 여진족 모두를 만족시켰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다 보면 문제는 항상 생겨났고, 끊임없이 해결해줘야 했다. 아오지 첨사가 심각한 얼굴로 보고했다.
“대부분 동의는 받았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농지와 초지 개간이 진행될 경우 곡식과 고기가 너무 많이 남아돌게 됩니다.”
“아직 개간 가능 면적의 10분의 1도 안 나눠줬지요?”
“현재 100분의 3을 분배했고 내년 중에 10분의 7까지 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벌써 예상 생산량이 남아돕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남으면 다른 지역에 수출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다른 여진족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고 명나라는 멀고 조선은 가난했다. 배에 태워 다른 지역으로 수출하려니 호주나 북미에서 생산된 곡식이나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이었다.
한참 고민하던 이민호가 결론을 내렸다. 매우 무책임했으나 다른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군인과 학생들에게 하루 다섯 끼씩 먹이시오. 일반 여진족도 가급적 끼니를 늘리라고 하시오. 물론 농담이고, 첨사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차라리 북쪽의 다우르 족이나 축치 족 등에게 곡식과 양을 공짜로 넘기겠습니다. 대금은 나중에 받기로 하면 어떻습니까?”
“그게 낫겠소. 아오지 첨사가 수고해주시오.”
세금을 걷으면 곡식과 양을 대량으로 싣고 북쪽 여러 부족에 나눠주기로 했다. 사할린과 감자 반도에도 공짜로 보낼 예정이었다. 땅은 넓고 인구가 적다 보니 부족한 게 아니라 항상 남는 게 문제였다.
추수를 마치고 축제를 열었다. 몽골의 나담처럼 씨름과 활쏘기, 말 타기 등의 경기를 개최해 우승자에게 큰상을 내렸다. 몽골처럼 열 살 이하 어린이 경주가 가장 큰 호응을 얻었고, 상위 순위 3명이 은과 함께 페르가나 망아지를 상으로 받아 몹시 기뻐했다.
마지막 순서로 순수 동해 여진 출신 여진족 기병 3만여 명이 경주를 해서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이민호는 그 동안 동해국을 지켰던 감불과 함께 백마를 타고 그 장관을 구경했다.
“감불이가 보기에는 어때?”
“야인 여진 기병 3만이면 건주 여진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네 방향 모두가 적대 세력에 둘러싸인 건주 여진은 본거지를 비워놓고 한 방향에 2만 이상을 투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건주 여진은 사방에 적을 두었고, 본거지를 비우면 다른 방향의 적이 움직인다고 기본적으로 가정해야 했다. 더욱이 건주 여진의 대군이 아직 망하지 않은 호이파나 우라 부의 영역을 그냥 지나쳐서 동해국만 공격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동해국 여진족들은 불안하면서도 아직 여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감불이나 다른 고산국 지휘관들도 그렇게 판단했다.
“중간에 다른 적대적인 세력이 있다 해도 건주 여진은 주력이 기병이야. 초월 공격은 언제든 가능해. 하얼빈이나 이곳 도읍 중에서 선택해서 집중 공격할 수도 있어.”
“그렇죠. 1만 이상이 급습해온다면 동해국 일부 영토가 일시적으로 점령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해국 기병이 소집된 다음에는 1만 기병 역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까?”
“동해국 전체에 기병 4만, 협력 부족들까지 합하면 7만 정도를 동원 가능합니다. 호이파나 우라 부도 건주 여진 기병을 몰살시킬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건주 여진이 먼저 동해국을 치러 나설 리가 없습니다.”
감불이 씩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도련님. 괜히 방어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우리가 먼저 건주 여진을 공격하죠? 그럼 고분고분한 동해국을 여진족 전체의 지배 종족으로 발돋움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여진족들 모두 도련님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을 겁니다.”
“별로 바람직하지는 않아.”
“건주 여진이 쳐들어올지 안 올지 모르는 판에 괜히 오랜 기간 방어하느라 비용을 들이는 것은 낭비입니다. 차라리 선제공격해서 건주 여진을 복속시키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힐 것 같습니다.”
“물론 선제 공격을 하는 것이 방어만 하는 것보다 더 싸게 먹힐 때가 있어. 하지만 명분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더 기다리는 편이 좋아.”
명나라는 더 많은 병력을 요동에 주둔시키면서 매년 엄청난 군비를 지출하고 있었다. 차라리 한 번에 병력을 동원해서 여진족들을 다 쓸어버리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물론 결과는 전혀 아니었지만, 이 시대에는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여진족을 원정할 때 승패에 대한 불확실성은 물론, 주적인 몽골족의 움직임 때문에 명나라 군대가 함부로 여진족 지역 깊숙이 들어가기 어려웠다. 건국 이후 몽골을 주적으로 상대해 온 명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기껏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했는데 명군이 원정에 나선다는 소문을 듣고 유목민족인 여진족이나 몽골족이 멀리 피해버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명군이 원정에 실패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건주 여진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명나라가 대군을 동원해서 친다면 지금까지 다른 부족을 상대할 때처럼 산악지역 깊숙이 숨어서 버티는 도리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따금 1만 정도의 무시할 수 없는 기병세력을 내보내 예상치 못한 지점에 강력하게 타격을 가한 다음, 상대가 대응하기 전에 금방 돌아가는 식의 전략이었다.
“이러다간 호이파나 우라, 해서 여진이 건주 여진에게 차례로 다 넘어갑니다. 그렇게 되면 늦어요. 동해국만으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때는 다른 방법이 있겠지. 하여튼 누르하치는 우리하고 충돌하지 않으려 하니까 동해국을 잃을 염려는 없을 거야.”
감불이나 감동은 건주 여진이 명나라 멸망 과정에 개입하게 내버려두려는 이민호의 장기 전략을 듣지 못했다. 혜영과 계복 등 극소수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민호는 감불에게 은근히 전략을 말해주려다가 말았다. 감불의 입이 너무 싼 탓이었다.
“도련님! 제가 계속 동해국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문제는 도대체 몇 년이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가 없다는 거야.”
“북경보다는 동해국이 훨씬 재미있어서 말입니다. 도련님! 저 그냥 여기에 있을 게요. 네?”
“너의 재미를 위해 북경을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없지. 이제 돌아가.”
“흑흑! 저도 다른 사령관들처럼 교대하게 해주세요.”
“미안. 넌 만만해서.”
군인들도 생활인인 만큼 병력을 주구장창 다른 지역에 주둔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1년 중 원정 기간이 석 달, 지휘관은 여섯 달로 원정 기간이 제한됐다. 원정 기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원정 수당을 추가로 지급해야 했다.
그러나 계복과 감동, 감불처럼 친위군 대장에 해당하는 지휘관들은 일 년 열두 달 뺑뺑이를 돌렸다. 물론 이들은 가족을 부임지에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
동해국 도읍에는 고산국 본토 출신으로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이주하는 가족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이민호가 기차를 기다리는 백성들을 불러서 물었다.
“농업 이민을 간다고? 어디에 정착할 계획인가?”
“전하! 고남에서 농사를 지으며 몇 년 동안 돈을 모아서 올 여름에 겨우 경운차를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갖고 땅이 넓다는 서 시베리아 지역에 가서 농장을 크게 경영할까 합니다.”
농민 개인이 경운차를 살 정도였다면 그 동안 꽤나 성공적인 영농을 한 농민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미주로 가지 않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는 것이 신기해서 물었다.
“루스인이나 노가이 족이 종종 침입하는데 괜찮을까?”
“그래서 단발총을 가져가려고 했는데 본토에서 출국하기 직전에 금지 당했습니다. 단발총을 갖고 북미로 가는 것은 상관없는데 서 시베리아로는 못 가져가게 합니다. 현지 군인보다 농민이 가진 총이 더 좋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유랍니다. 그래서 화승총 3정으로 바꿔서 가져갑니다.”
“음! 그건 어쩔 수 없겠군. 지역마다 상황이 달라.”
서 시베리아의 주력인 토르구트 기병이 보유한 마상총이나 화승총도 몇 백 정이 안 되는데 농민이 단발총을 보유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리고 군인이 아닌 농민이 단발총을 도난당하거나 빼앗겼을 때 회수할 확률이 적었다.
몇 년 후 토르구트 족과 신뢰가 충분히 쌓이면 그때 단발총을 공급해 무장시킬 예정이었다. 그 후에야 고산국 본토 출신 농민들이 이미 익숙해진 단발총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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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질 내용입니다. 이제 여진 지역도 한 회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