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07화 (656/1,000)

00707  77. 동해국에서  =========================================================================

“우리 예쁜 민지 뭐하는 거야?”

“예. 내년 북방 지역 예산을 짜고 있어요, 주인님.”

민지와 민정은 내외 호위대장으로서 비번일 때도 일하는 시간이 많았다. 적은 인원으로 24시간 돌아가는 호위 업무만 하는 것도 벅찰 텐데 요즘은 민영 대신 북방과 시베리아 개발 업무까지 떠맡아 고생하고 있었다.

“예산이 부족하지는 않아?”

“의외로 모피 교역에서 많이 남겼어요. 주인님이 지시한 대로 한 지역에서 얻은 수입은 다시 그 지역에 재투자하고 있어요. 다만 조선말 교사가 부족해서 대부분 부족에 파견을 못하겠어요.”

“본토 사람 어느 누가 여진족 땅에 와서 가르치겠어? 그저 방학 때 여진족 교사들을 왕립대학에 보내서 가르치라니까. 여진족 지역 학교에서 조선말 교육은 여진족 교사한테 시키면 되잖아.”

“현지인들은 조선말 원어민 교사를 더 원하는데요?”

“앞으로 여진족은 인사말이나 자기소개, 길안내 정도만 할 줄 알면 돼. 조선말을 배워봤자 평생 써먹을 기회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동해국은 물론이고 최근 동해국 영역에 포함된 여진족 혹은 퉁구스 여러 부족들 사이에 조선말 붐이 일었다. 정치 혹은 군사적 영역에서 필요하기도 했고, 조선말을 배우면 고급 일자리 찾기가 쉬울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자기 말보다 외국어를 중시하는 현상을 지켜보는 이민호는 몹시 씁쓸했다.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우리말과 글을 버리고 중국어와 한자만 쓰자고 주장했다. 중국어와 한자는 말과 글자가 같다는 이유를 대면서, 중화에 속하기 위해서라고 목적을 밝혔다. 청나라가 발전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조선의 후진성에 조급해진 탓에 나온 주장이었다. 당연히 다른 학자들, 특히 같은 실학자인 유득공에게 신나게 까였다.

현대 한국에서 국제화시대를 맞아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영국 학자들 일부는 다양한 뜻을 내포하는 바람에 애매해진 영어와 라틴어를 버리고, 엄밀한 의미를 가진 단어 다수를 보유해 자연과학과 공학에 적합한 그리스어를 학술용어로 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국어보다 외국어를 우위에 두는 주장은 결코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주인님이 걱정하시는 것은 알겠어요. 여진 땅은 다른 지역과 많이 달라요. 언어가 너무 다양해서 한 가지 지배층 언어로 금방 통합되기 쉬워요. 여진어도 몽골이 지배했던 겨우 200여 년 사이에 몽골족이나 다른 소수 민족들이 유입되면서 크게 변했잖아요.”

“그래서 더더욱 여진어를 지켜야지. 동해 여진이 여진족의 원류에 더 가까울 텐데 오히려 사투리 취급을 당하더라.”

건주 여진에서 작년 1599년에 만주어 문자를 만들어 보급시켰다. 군사조직 겸 행정조직인 만주 8기의 원형, 4기가 성립되는 것은 1601년이었다.

이렇게 본격적인 행정조직 설립 이전에도 통일적인 언어 교육을 시작할 필요성이 있었다. 고산국의 속국 동해국은 200~300km씩 떨어진 철도역을 중심으로 행정을 펼쳐나갈 계획으로, 대학교도 철도역이 중심이 된 도시에 건립하기로 했다.

“그럼 동해 여진 말을 여진 전체의 표준어로 정할까요? 표준어의 기준을 건주 여진에 주도권을 넘겨주면 안 돼요.”

“아니. 여러 부족들이 지금 쓰는 말을 표준어로 정해서 교과서를 만들라고 해. 500명 이상이 사용한다면 그 언어는 충분히 존속할 수 있어. 우리는 그 언어의 생존을 도와주는 대신 그 부족으로부터 충성심, 아니 협조를 받아내는 거야. 부족장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면 귀찮아서라도 부족의 현자를 골라 교육 문제를 떠넘기겠지.”

교육 제도가 전혀 없어 보이는 유목민이나 수렵민들 중에서도 교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코끼리나 늑대 떼에도 교사 역할을 담당한 개체가 있었다.

여진족이나 기타 원주민 부족의 원로들이 협의해서 자기 부족의 교육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다만 건물이나 재정 문제는 동해국에서 도와줘야 했다.

모란강역 일대에 철도와 철교, 철로를 따라 이어지는 전봇대와 도로, 철도역과 시장 건물 등은 이미 공사를 마쳤다. 이민호가 가끔 머무를 별궁과 호위 병력의 주둔지 건물들도 완공됐다.

이제는 모란강역 주위에 동아시아 기준으로 작은 성 아랫마을을 건설하는 중이었다. 고산국에서 도시나 마을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기본적으로 도로, 상하수도, 주택, 상점, 전기 시설, 오수 정화시설까지 갖춰야 했다. 각지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건설공사에 동원됐다.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던 이민호가 마을 건설현장을 지나다가 조선인 인부들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 중에서 분명히 낯이 익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네들은 혹시 함경도 기병들인가?”

“그렇습니다, 제독총병관 대인.”

“와! 그 호칭 오랜만에 들어본다. 역시 나하고 같이 함경도에서 싸운 자들이 맞군.”

“예. 대인 밑에서 영통에서 싸웠지요.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이민호는 강력한 함경도 사투리를 걸러내고 들었다. 한겨울에 길주, 명천, 단천 등지의 눈밭에서 함경도 군과 함께 왜군을 박살내고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임진왜란 중에 함경도 기병 또는 의병으로 참전했던 자들 중에 이번에 철도 건설 노무자로 지원한 자들이 많았다. 이민호는 몹시 반가워하며 이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리며 치하했다.

그런데 이곳 건설현장에 기병 외에도 보병들이 있다고 했다. 조선 군인은 갑사와 정병으로 구분됐고, 정병이 기병과 보병, 수군으로 나뉜다.

“그런데 자네들 전쟁 중에 전리품 많이 받았잖아?”

“그래도 한 달에 은 두 냥이나 준다는데 얼른 지원해야지요.”

갑사들은 대개 중소 토지 보유자들이라서 대부분 집에 남았다. 건설현장에는 가난한 정병들 위주로 하번 기간 동안 두만강을 건너와서 일한다고 했다. 함경도 인구가 전쟁과 전염병 때문에 대폭 줄었어도 살아남은 병사와 그 가족들에게 농토면적이 늘어나지 않아 생활은 여전히 팍팍했다.

“북병사나 종성 부사가 자네들이 두만강을 건너게 해주던가? 나는 조선인들이 철도 건설에 참가할 줄은 전혀 몰랐지.”

“아전이나 군관들에게 적당히 뇌물을 쑤셔주면 안 통하는 게 없습니다.”

“저런! 쯧쯧!”

매달 건설 현장에서 받는 두 냥 중에서 왕복 여비로 쓰고 뇌물을 바치면 절반밖에 남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일거리가 없는 함경도에서는 모처럼 돈을 벌 기회였다.

“다행히 동해국이 대인의 속국이라서 저희 정병들이 진영에 일 년 내내 붙어 있지 않아도 됩니다.”

함경도는 원래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인명피해를 크게 입었다. 정병들 숫자가 확 줄어들어서 지금은 첨사가 겨우 20명, 만호가 병사 3명을 거느리는 곳도 있었다. 그나마 동해국이 조선에 우호적이라 적은 병력만으로 국경선을 지킬 수 있었다.

“대인께서 함경도를 다스려주시면 좋은데 말입니다.”

“예끼! 이 사람아! 큰일 날 소리 하지도 말아!”

발언한 병사 옆 사람이 화들짝 놀라 주의를 주었다. 간만에 술과 고기를 먹으며 시끌벅적하다가 갑자기 다들 목소리를 죽였다. 누군가 관아에 밀고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민호는 고산국이 영토를 두고 조선과 다퉈봤자 결코 이익이 없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지금도 남쪽 바다에서 활발하게 무역이 진행되고 있으니 함경도 병사들도 쉽게 납득했다.

“그건 그렇고, 함경도나 여기나 살기는 비슷하지?”

“예, 대인. 함경도처럼 산도 높고 너른 평원도 있습니다.”

“여기 눌러 앉아서 계속 일하면 어떻겠나? 수입은 아무래도 확실히 나을 텐데 말이야.”

“그래도 어찌 고향 땅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조선에서도 흉년이 들면 고향을 떠나곤 하던데 뭘 그러나? 자네들도 몇 대 조상들은 대부분 남도에서 떠나온 이들의 후손 아닌가?”

함경도 정병들이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럴 때 이민호가 강하게 승부수를 두었다. 원래는 인구가 적은 함경도에서 조선인들을 유인하지 않을 계획이었으나, 임진왜란이 끝났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동해국 군인은 한 달에 은 두 냥을 받아. 그런데 한때 내 전우였던 자네들에게만 권하겠는데, 고산국 군인은 기본소득 넉 냥에 월봉을 최소 여섯 냥을 받거든?”

“고산국 군인들이 월봉을 많이 받는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습니다만, 이민 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아전이나 군관들이 해결해주겠지. 안 그런가? 자네들이 여기 온 것도 사실 잘못 된 거야. 허락 없이 국경을 넘으면 기본이 참수잖아?”

“끄응! 그렇습니다만.”

이민호가 함경도 하급 관리들에게 비리와 부패를 조장하고 있었다. 좀 더 강력히 이민을 권해보기로 했다. 조선의 입장만 봐주기에는 동해국도 인력 충원이 급했다.

“자네들 언문은 떼었나?”

“언문이야 당연히 떼었습죠. 어깨 너머로 잠시만 배워도 금방 익히는 문자가 아니겠습니까? 여섯 살 먹은 제 자식 놈도 언문을 배웠습니다.”

정병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대체로 천자문도 떼었다고 했다. 같은 정병이라도 조금 더 부유한 기병들이 보병에 비해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갑사는 상급 양인, 혹은 하급 양반에 해당했다.

“지금 동해국에는 군인뿐만 아니라 여진족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칠 선생도 많이 필요하거든? 조선말을 하고, 언문만 알면 선생 자격이 돼.”

“저희 같은 무식한 놈들이 선생을 한다고요?”

“한자를 쓰지도 않을 텐데 뭐 어떤가? 선생이 남자일 필요도 없어. 자네들 마누라나 딸이 교사학교에 채용돼서 여진족 교사들에게 조선말을 좀 가르치면 한 달에 여덟 냥은 벌 거야.”

한 달 동안 땡볕 아래에서 힘겹게 건설 노동을 해서 두 냥을 벌어 희희낙락했는데. 더 편하게 돈을 버는 방법이 있었다. 정병들의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어때? 이번에 집에 돌아가면 정병이 아닌 자들에게도 전해주게.”

“여진족 땅에 와서 반드시 군인이 될 필요는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정병이란 원래 다른 직업, 대체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을 병사로 지정한 것뿐이었다. 일정 기간 한성에 올라가 상번을 하거나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우 부방을 하게 돼 있지만 직업군인은 아니었다.

“그렇지. 마흔이나 쉰 넘으면 무릎이 시리다고 들었네. 무관이나 진무들처럼 평생 군인으로 남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야. 다른 일을 할 기술이 없다면 훈장질이나 해야지.”

“젊을 때 군인을 하고 나이 들어서 교사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진 땅이 워낙 넓으니 농사나 다른 일을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바로 그거야!”

인구도 별로 없는 함경도에서 수천, 수만의 이주민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장 필요한 조선말 교사 혹은 기병을 수백 단위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모란강역 별궁에서 며칠을 더 기다렸지만 예상했던 건주 여진 누르하치의 방문은 없었다. 어쩌면 지금쯤 말 타고 땀 뻘뻘 흘리면서 달려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9월말까지 별궁에서 노닥거렸으니 충분히 기다려준 셈이었다.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렸는데도 안 오네. 섭섭하더라도 이제 왕도로 돌아가야겠다.”

“지금까지 누르하치를 기다리셨어요? 주인님이 예상한 대로 그가 중원에 야심이 있다면 더 이상 주인님을 만나지 못할 거여요.”

“내가 누르하치를 죽일까봐?”

침전에 책상을 들여서 이민호는 침대에 누워서 노닥거리고 민지와 민정은 예산안을 짜고 있었다. 둘이 의견 교환을 하다가 막히면 이민호에게 물어서 지시를 받는 식으로 일이 진행됐다.

하얼빈이 춥기는 하지만 여진 땅의 새로운 중심 도시로 삼기로 결정하고, 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여진족 교사들을 가르칠 대학이 하얼빈에서 첫 번째로 건설될 공공시설이 될 예정이었다.

현대 중국 입장에서야 하얼빈이 북쪽 땅의 국경도시이겠지만 고산국 속국 동해국 기준으로는 남쪽 국경선에 자리 잡은 도시였다. 춥기는 정말 추워서 이민호가 자주 가지 못할 것 같았다.

“몇 년 전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누르하치를 죽여야 해요. 죽이지 않으면 주인님이 명나라에게서 의심을 사게 돼요. 이 시기에 누르하치를 만나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손해에요.”

“민지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영웅을 못 만나게 돼서 아쉬우세요? 제가 보기에는 주인님이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영웅이세요.”

“농담이라도 고마워.”

지금까지 고산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을 회복 불가능한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이미 들어온, 혹은 앞으로 들어올 유럽인들을 순화시켰다. 에스파냐든 잉글랜드든 이제 정복이나 식민지화는 꿈도 못 꾸고 무역밖에 할 것이 없었다.

이제 앞으로는 누르하치가 세울 후금과 망해가는 명나라가 가장 큰 변수였다. 내버려둔다면 후금이 명나라 전체를 정복하기까지 앞으로 수십 년이 걸릴 예정이었다. 왕조 교체 과정 중간에 고산국이 등장해서 활약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실제 역사에서는 누르하치가 푸순을 치면서 본격적으로 명나라와 대립하는 것이 1618년이었다. 아직 한참 멀었으나, 고산국의 등장으로 인해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누르하치가 확장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좀 더 이른 시기에, 혹은 다른 방법으로 움직일 것으로 예상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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