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05 77. 동해국에서 =========================================================================
다음 날 해서 여진 호이파 부의 패륵, 바인다리가 호위병들을 이끌고 모란 강 별궁에 찾아왔다. 동해국 도읍에 교역을 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이민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알현을 신청한 것이었다.
바인다리는 선대 패륵 지누가 죽었을 때 숙부 일곱 명을 쳐 죽이고 패륵에 오른 자였다. 그래서 요즘 호이파 부의 내부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숙부들을 따르던 부족원들 일부가 예허 부로 투항한 외에도 불온한 반란 움직임이 부족 내부에서 활발했기 때문이었다.
예허 부에 투항한 부족원들을 돌려받는 문제로 호이파 부는 현재 예허 부와 건주 여진 사이에서 왔다 갔다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이 과정에서 건주 여진의 공격을 받았으니, 호이파 부도 결국 후계 문제로 인해 빈틈을 보여서 멸망한 셈이었다.
“어서 오시오, 패륵.”
“과례이십니다, 한. 저는 일개 야만인 부족의 수령일 뿐입니다.”
이민호가 옥좌에서 내려와 맞절을 하려 하자 바인다리가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해서 여진의 4부는 각각 ‘구룬’으로 인정됐으니 패륵 바인다리는 국왕에 해당했다. 금나라가 안춘 구룬, 후금이 아마가 아이신 구룬을 자칭하고 청나라의 국호 대청국이 다이칭 구룬인 것처럼 해서 여진 4부는 모두 독립국으로 대우받는다는 뜻이었다.
1593년 아홉 나라의 전쟁, 구국지전(九國之戰)에 참가한 해서 여진 4부와 몽골 코르친 부는 구룬(國)으로 분류됐다. 반면에 시버 족과 구왈차 족은 국가보다 작은 단위인 아이만(部), 주셔리와 너연은 그보다 작은 골로(路)로 구분됐다. 명확히 구분할 경우 그렇다는 것이지 주셔리나 우라나 흔히 부(部)로 통용됐다.
“패륵은 한 나라의 당당한 국주(國主) 아니시오? 우리 같이 앉읍시다.”
“감사합니다, 한.”
이민호가 바인다리와 수행원들을 탁자로 안내했다. 젊은이 한 명은 패륵의 아들이라고 했다. 고산국에서는 감동과 항공대장 이면이 동석했고 실무를 맡은 예부 관료 몇 명이 배석했다.
“한! 몽골과 여진, 조선과 고산국은 아주 옛날에는 같은 나라였습니다. 머리에 쓰는 모자를 뜻하는 말이 몽골어로는 말라가, 여진어는 마할라, 조선어는 마흐레가 아니겠습니까? 돼지나 범을 뜻하는 말도 비슷하지요.”
“마흐레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가까운 나라였으니 말도 비슷하겠지요.”
상대방과 공통된 조상을 두었다고 처음에 운을 떼는 것은 앞으로 우호와 협력을 바란다는 강한 사인이었다. 하다 부가 멸망한 이후 건주 여진이 호시탐탐 노리는 호이파(揮發) 부는 생존이 지상과제였다.
그리고 당장 국력을 신장할 수 없다면 생존에 가장 좋은 방법이 외교적 연합이었다. 그러나 9부 연합의 공격은 이미 건주 여진에 패했다.
“하다 부가 멸망했다고 들었는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하다 부와 그 동안 하다 부에 복속했던 부족의 백성들은 대부분 건주 여진으로 끌려갔습니다. 건주 여진은 정복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끌고 가서 노예로 삼는 방식으로 흡수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건주 여진은 해서 4부를 하나씩 멸망시킬 때마다 그 백성들을 도읍 허투알라나 새 수도 선양 근처로 이주시켰다. 후금이 건국되고 나서 흑룡강 북쪽 지역 부족들까지 모두 점령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새로 지배를 받게 된 종족들을 수도 인근에 재배치했다.
모란 강 동쪽 동해 여진의 경우는 약간 예외였다. 젊은이나 병사로 쓸 자들 위주로 팔기에 소속시켜 수도로 이주시키고, 늙은이나 애들은 원래 거주지에 남겨두었다.
“건주 여진은 영토가 아니라 백성을 지배하는 아주 옛날 방식이구려.”
“예. 그래서 명나라가 압력을 가해서 멍거불루의 아들 우르구다이에게 하다의 유민들을 보내라고 명했습니다. 건주 여진은 어쩔 수 없이 명나라의 명령을 따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약화될 대로 약화된 하다 부를 예허 부가 내버려둘 리가 없습니다.”
예허 부가 하다 부의 나머지 세력을 날름 집어삼킬 거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예허 부는 하다 부의 유민들 일부를 강제로 복속시켰다.
“건주 여진은 정복한 나라의 모든 백성을 끌고 가기 때문에 복속하는 과정에서 반발이 무척 심합니다. 지금 한의 아래에 하다 부 출신의 여진족 기병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노예가 되기 싫어서 도망친 것입니다.”
“같은 여진족끼리 아주 맹렬하게 싸우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소.”
“그렇지요. 차라리 싸우다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대에 노예가 되면 후손들도 대대로 노예로 만드는 셈입니다.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건주 여진에 복속된 여진족들은 나중에 팔기 체제에 속하게 됐지만, 이 시기에는 노예 비슷한 포로 신세였다. 그래서 건주 여진이 노리는 부족들이 강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패륵! 그럼 만약 하다 부의 빈 영토를 동해국이 차지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모르지요. 그 핑계로 전쟁을 할지, 아니면 모른 척할지. 다만 건주 여진 입장에서는 영토보다는 백성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전후 처리를 하는 동안에는 영토가 아닌 주로 백성을 두고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건주 여진은 계속해서 패배한 지역의 백성들을 각 부대에 나눠주거나, 수도 가까운 지역에 집단으로 재배치시켰다. 이것은 패한 백성들 입장에서는 씨족이 해체되어 생존하기 불리해지는 재앙으로 간주됐다.
이 방식은 흡수된 부족이 반란을 일으킬 꿈도 못 꾸게 만들어준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피지배 부족원들을 이주시킨 다음 잉여 생산물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 부족을 흡수한 다음 다른 부족을 공격하기까지 준비기간이 많이 필요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건주 여진은 이런 식으로 꾸준히, 차근차근 몸집을 불려가고 있었다.
“거 참, 하다 부 사람들이 안 됐소.”
“그래서 저희 호이파나 우라 부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한께서 도와주실 수 없는지요?”
바인다리가 애절한 표정으로 이민호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민호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한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동해국처럼 저희 호이파 부가 한의 속국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호이파 부를 받아들여주신다면 저와 후계자들이 한과 고산국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안타깝지만 패륵이 명목상이라도 명나라 직첩을 받았기에 내가 뭐라 간섭하기 곤란한 것 같소. 나도 대명 천자의 신하 아니오?”
“아아! 원래 할아버지께서 받은 직첩이었지만 그 분 이름이 적힌 직첩을 가지고 북경에 직접 입조한 사람은 바로 저였기에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식이라서 북경에 입조한 여진족 부족장이 수십 년 전에 입조한 자와 동일인인지 여부를 나중에 가려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명나라 기록을 신뢰한다면 여진족 부족장들은 수명 100년을 흔히 넘겼다.
동해 여진은 여진족 중에서도 전통적으로 세력이 약했고 요동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부족장들 중에서 명나라 직첩을 받은 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그리고 명나라와 조선 두 나라로부터 동시에 직첩을 받아 양쪽 모두에 복속하는, 즉 양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동해국의 국왕 대리를 맡은 아오지 첨사는 조선에서 받은 직첩을 정중하게 조선에 반납했다. 그러나 동해국 영역 안에서도 아직 명나라 직첩을 보유한 부족장들이 있어서, 혹시라도 영토 분쟁이 발생할 여지가 남아있었다.
“동해국과 달리 패륵은 명목상 명나라의 제후요. 만약 호이파 부가 고산국의 속국이 된다면 제후가 다른 제후의 영토를 병탄한 꼴이 되오. 그럼 명나라 관료들이 나를 탄핵할 수도 있어서 두렵소.”
“휴우~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직첩과 칙서를 받아 명나라와 교역할 때 유리하지만 묘하게 여진족끼리 내전 상황이 되면서 외부의 도움을 받기 어렵게 됐습니다. 한께서도 대명에 명목상 신하가 되는 편이 유리하니까 선택하셨겠지요.”
“요동 순무나 명나라 관료들이 건주 여진을 제어하지 못하는 거요?”
“누르하치가 형식상 명나라 관료의 말을 듣습니다만, 명나라에서도 여진족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에 섣불리 간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명나라도 여진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내전에는 가급적 간섭하지 않았다. 이이제이의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판에 섣불리 개입하면 나머지 세력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자칫 통합시켜주는 역효과가 일어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주 여진이 주변 여진족들을 흡수하면서 몸집을 불려가자 명나라도 뒤늦게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호이파 부와 우라 부가 망하고 나서 명나라가 직접 군사력을 동원해 예허 부를 지원해줬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몸집을 불린 건주 여진 앞에서 예허 부는 그냥 쓸려 나가버렸다. 명나라가 병력 천 명을 예허 부에 지원해준 것은 티도 나지 않았다.
“패륵도 아시다시피 나는 그 동안 건주 여진이나 해서 여진의 일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소. 여진족이 알아서 할 일이기도 하고 종주국인 명나라에서나 신경 쓸 일이기 때문이오.”
“호이파 부가 한의 속국이 되겠다고 황제폐하께 주본을 올리겠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허락해주실 지도 모릅니다.”
“글쎄요. 대명 천자께서 윤허하지 않으실 것 같소.”
그러나 요양으로 가는 길이 건주 여진에 막혔고, 몽골 쪽으로 돌아서 가려면 건주 여진과 가까운 관계인 코르친 부가 막을 것이 뻔했다. 다른 길로 멀리 돌아서 가더라도 사신이 북경에 가는데 몇 달, 황제의 윤허를 기다리는데 몇 달씩 걸리는 동안 호이파 부는 건주 여진의 침공을 받아 멸망할 수도 있었다.
이민호는 호이파 부의 사람들이 불쌍해서 동해국 도읍으로 가는 길에 선물을 잔뜩 안겨줬다. 실망이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도 패륵은 정중하게 이민호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나중에 혹시나 고산국이 도와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란 강 별궁의 침전은 무지막지하게 넓었다. 침대도 이민호 외에 다섯 명이 올라와 있어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넓었다. 올가의 무릎을 베고 에바가 입에 넣어주는 포도를 씹고 있자니 이민호는 마치 로마황제가 된 기분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타타르들이 전하 앞에서는 얌전하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타타르가 아니라 여진족이야, 에바.”
그러나 유럽에서는 16세기 말 세스페데스의 기록이나 17세기 중반에 작성된 동아시아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여진족을 타타르, 혹은 차이니스 타타르라 해서 타타르와 비슷한 종족으로 알았다. 물론 아시아에서는 몽골과 타타르와 여진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유럽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지수 님이 전하께서 다스리는 영토를 가르쳐주셨어요. 세상에! 루스 땅보다 몇 배나 넓어요. 세계를 정복하실 건가요?”
“전쟁으로 얻은 땅은 거의 없단다. 북미는 돈 주고 샀고 호주는 탐험을 통해 얻었어. 물론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어야 남에게 안 빼앗기겠지.”
이민호가 풍만한 올가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올가가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으나 이제는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에바는 어머니로부터 가정교육을 확실히 받았는지 아는 것도 많아서,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제국이란 한 국가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다양한 민족과 문화, 그리고 생활양식을 보듬어 안은 큰 나라라고 배웠어요. 고산국은 제국이지요?”
“글쎄다. 아직 아닐걸? 지금도 명목상 명나라의 제후국이거든.”
“명나라보다 고산국이 훨씬 큰데요?”
“인구는 명나라가 훨씬 많거든. 그리고 명나라는 제후를 자칭하지 않으면 무역을 안 해줘.”
“명분보다 실제로 이익을 얻는 편이 낫겠죠. 하지만 가끔은 어느 정도 손해를 보더라도 명분을 앞세워야 할 때가 있어요.”
“그럴 상황이 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엄밀하게 따져서 실제 역사에서 명나라는 여진족에 의해 멸망한 것이 아니었다. 이자성의 난이라는 농민반란에 의해 명나라 황실이 멸망하고, 여진족은 명나라 황실을 도와 농민반란을 진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산해관을 넘었다.
명나라의 멸망 과정에서 여진족이 한 일은 그 전에 수십 년 동안 요동 방면을 공략함으로써 늙은 제국 명나라의 힘을 뺀 데에 있었다. 국방력을 강화하려 해도 국고인 태창이 비었고, 이런 상황에서도 만력제는 끝내 내탕고의 은을 풀지 않았다.
대신 환관들을 전국에 풀어서 백성들에게서 과중한 세금을 뜯어냈다. 환관들이 겨우 은 몇 푼을 빼앗기 위해 있지도 않은 은광을 핑계로 남의 집을 부수는 짓을 하는 판이니 왕조에 망조가 들었다고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오늘 호이파 부의 패륵이 고산국의 속국이 되겠다고 제안해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여진족이 명나라의 멸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가 국가 방위를 위해 세금을 쓸수록 반란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민호는 건주 여진이 어서 해서 여진을 흡수해 푸순을 비롯해 요동을 점령해주길 바랐다. 이렇게 여진족에 대한 이민호의 비밀 정책은 항상 명나라의 멸망과 연결돼 있었다.
명나라 영토에 욕심은 없었지만 이민호는 중국이 최소한 두세 개로 나뉘길 바랐다. 명나라를 직접 침공할 것도 아니고, 일단은 이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기만 하면 됐다.
다만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고민이었다. 그리고 습관적인 중국 땅의 통일 운운하는 어떤 학자의 말도 신경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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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쓸 만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