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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704화 (653/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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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동해국에서

9월 하순에 여진어로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 뜻의 하얼빈에 도착했다. 철교 건설 현장을 살폈더니 교각은 이미 완성됐고 상부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철교 구조물을 조립하는 기술자들의 손길이 두 달 전 모란 강 철교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능숙해졌다.

“혹시 전기로 기차가 가게 할 수도 있나요?”

“물론이지. 그런데 주변에 전기를 생산할 곳이 없잖아. 있다 해도 수천 km에 이르는 철도에 공급해야 하는데, 지금은 어렵지.”

민지의 질문에 이민호가 그렇게 대답했다. 하얼빈이 앞으로 수력발전과 지열발전으로 전력이 풍부한 곳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이곳은 곳곳에서 수증기가 치솟는 아이슬란드가 아니었고, 지열발전에 적합한 지역을 찾아서 발전소를 세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랴~”

철도를 지키던 동해국 여진 기병들이 갑자기 남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해서 여진의 우라 부에서 기병들을 보내 이쪽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나면 서로 싸우나?”

“아뇨. 선물을 교환해요.”

동서로 이어지다가 치타에서 남동쪽으로 급격히 꺾인 철도 노선은 하얼빈을 지나 동해국 도읍까지 거의 직선을 이루었다. 철길 북동쪽은 고산국 속국인 동해국 영역으로 확정됐고, 남서쪽으로 40km 정도까지 대체로 동해국의 영토였다. 너른 만주 평원 일부분에 해서 여진에서 영유권을 주장했기에 아직 영토 획정을 하지 못했다.

해서 여진이 처음 훌룬 국으로 건립됐을 때는 현대 지명 길림 시 북동쪽에 위치해 하얼빈과 멀지 않았다. 그러나 15세기에 몽골의 습격을 꾸준히 받으면서 남서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은 하얼빈 근처 평원이 거의 텅 비었다.

해서 여진 우라 부가 아무리 하얼빈 인근을 조상의 땅이라고 주장해도 버리고 떠난 지 100년 넘는 옛 영토를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차라리 이 지역에 자리 잡은 작은 부족들과 협상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해서 4부의 영역 중에서 북동쪽에 자리 잡은 우라 부와 남서쪽의 하다 부는 같은 혈통이었다. 15세기 초반 금나라 완안 씨의 후손이라는 일파가 대대로 시버 족의 구왈갸 씨와 혼인관계를 형성했다가, 나치불루 때 시버 족에서 독립해서 후룬 국을 세웠다.

그러나 한때 가장 강력했다는 하다 부는 지난해에 건주 여진에 의해 멸망했고 다른 부들도 위태로웠다. 호이파 부는 도성을 삼중으로 쌓고 있었으나, 여진족이 쌓은 성이 제대로 지켜진 적은 별로 없었다.

“바로 돌아가는군.”

이민호가 호위를 시켜서 여진 기병이 방금 우라 부 여진족과 어떤 상품을 교환했는지 물어보았다. 면포를 내주고 모피를 사들였다고 했다. 가치로 따지면 열 배 이상 남겨 먹는 것 같았지만 남는 건 팔고 필요한 것을 사는 것이 교역의 원칙이었다.

“해서 여진하고 영토 경계 조약을 체결하지 않나요?”

“불가능할 걸? 우라 부에서는 이곳 하얼빈뿐만 아니라 두만강 동쪽 동해국 도읍도 모두 자기네 영토라잖아.”

동해국 도읍에서 바로 서쪽, 두만강 동쪽 강변에 동해 여진 와르카 부 사람들 일부가 피오 성이라는 작은 산성을 쌓고 살았는데 이곳도 우라 부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한때 우라 부에 공물을 바치던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해 동해국에 속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과 그들이 사는 거주지까지 모두 우라 부의 소유라는 것이다. 도무지 말이 안 통했다.

“주인님! 우라 부를 쳐버려요.”

“나도 그럼 참 좋겠다만.”

멸망한 해서 여진 하다 부와 중소 부족 출신 여진족 일부가 요동으로 도망쳤다가 지금은 고산국에 고용돼 시베리아 철도를 지키고 있었다. 이들 여진 기병들은 대체로 건주 여진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라 건주 여진에 맞서고 있는 해서 여진과 다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시버 족을 동원하면요?”

“그들도 반 건주 여진 연합에 속해 있어. 시버 족과 해서 여진은 오랫동안 같은 편이야.”

1593년 해서 여진 4개 부와 몽골족 등 아홉 나라 연합이 건주 여진에 패했을 때 시버 족 일부도 가담했었다. 시버 족은 거주 지역이 워낙 넓어서 여진족들이 벌인 갈등에서 관련이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때는 내몽골 동부에 자리 잡은 코르친 부가 종주권을 쥔 일부 시버 족과 구왈차 족이 참전했다.

코르친 부와 할하 부의 일부가 이 전쟁에 참가했다가 패했다. 이들은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건주 여진과 화평을 맺었다. 이는 시버 족과 구왈차 족에도 적용됐으나 이민호가 할하 부와 시버 족을 끌어들여 건주 여진과의 동맹을 파기시킨 셈이었다. 코르친 부는 아직 건주 여진과 동맹관계였고, 동몽골에서 분쟁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 근처가 농사는 아주 잘 되는 것 같아.”

“흙이 검은 곳이 농사가 잘 된다잖아요. 사방이 온통 흑토예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에게 시켜 시험 삼아 농사를 짓고 있었다. 별 기대를 안했는데 밀과 보리 수확량이 남쪽 따뜻한 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높아서 많이 놀랐다.

하얼빈 주위의 토양은 영양이 풍부한 체르노젬이라서 농작물이 아주 잘 자랐다. 그리고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일 만큼 땅이 넓었고, 수량이 풍부한 송화강 덕택에 관개수 공급이 쉬운 지역이었다. 겨울에 추운 것만 빼면 농민들에게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 정도로 비옥한 땅도 드물어요. 면화를 재배하면 어때요?”

“글쎄다. 면화를 재배하려면 일조량이 중요한 조건이긴 한데, 비옥한 지역이 유리하겠지.”

엄청난 밀과 보리 수확량을 감안해 보면 이 지역에서는 비료를 뿌리지 않고도 몇 년 동안 면화 농사가 가능할 것도 같았다. 토양의 양분을 약탈하는 작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면화와 담배, 옥수수를 내년에 시험 삼아 재배해보기로 했다.

“건주 여진이든 해서 여진 우라 부든 어떻게든 빨리 결단을 내려주세요. 이 넓고 비옥한 땅을 묵혀두는 것이 아깝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지금도 곡식이 남아돌아서 문제인데 더 많이 생산했다간 소비처를 못 구할 판이었다. 올해 북미의 곡류 수확량이 두 배로 뛰어올랐고 호주는 경작지 면적이 네 배로 늘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동해 여진과 동몽골 부족들이 자급자족할 정도로 서서히 생산량을 늘리기로 했다.

“그리고 동해국을 어서 직할령으로 흡수하는 편이 좋겠어요. 동해국 영역 안에 든 모든 여진족들이 바란단 말이에요.”

“그게, 장단점이 있어서 말이야. 몇 년 만 더 기다리라고 해.”

동해국 여진족들에게 본국과 동일한 혜택을 주려면 재정적인 문제가 약간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명나라에서 여진족 웬만한 수령들에게 뿌린 직첩과 명목에 불과한 위소제도가 문제였다.

형식상 여진족들은 명나라의 신민이었으므로, 이들을 고산국 직할령의 백성으로 삼기가 곤란했다. 당연히 영토 문제도 뒤따랐다.

“명목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외교적 수단일 뿐인데 주인님의 발목을 잡는군요.”

“나도 더 이상 명나라나 조선을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건주 여진은 처음부터 불리한 상황에서 창업을 했었다. 건주 여진의 남쪽은 조선, 서쪽은 명나라, 북쪽은 예허 부를 비롯한 해서 여진이 자리 잡았다. 동쪽은 그나마 만만한 동해 여진이 위치했는데 동해국이 고산국 속국이 되면서 강력한 이웃으로 떠올랐다.

다음 날 하얼빈을 출발해 남동쪽으로 향했다. 기차는 양쪽 모두 산이 계속되는 계곡으로 깊이 들어갔다. 동해국 도읍에서 시베리아 철도 건설의 첫 삽을 뜬 이래 처음으로 계곡을 통과하게 되면서 난공사가 몹시 많았던 지역이었다.

또한 이곳은 모란 강 철교가 이미 완공돼 기차가 강을 가로질러 건너는 유일한 지역이었다. 강 중간에 섬이 있어서 철교 건설이 쉬웠던 탓에 짧은 기간에 금방 완공했다. 여기서 익힌 기술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다른 철교들을 건설하고 있었다.

산악지역을 통과한 다음 모란 강 북쪽의 역에 도착했다. 오래된 도시 영고탑, 그 전에 발해의 상경용천부가 남서쪽 20km 위치에 있었다. 나나이 족이 세운 장승 비슷한 나무가 곳곳에 서 있고 그 양쪽에는 솟대 비슷한 것이 세워져 있었다.

“들판이 충분히 넓은데도 농사는 안 짓네. 유목도 안 하면 뭘 먹고 살지?”

“나나이 족의 특산품이 인삼과 담비에요.”

“오! 비싼 것만 나는군. 양은?”

“아쉽게도 별로 안 돼요.”

이 시대에 인삼이라면 산삼을 뜻했다. 나나이 족 외에도 여진족들이 주변 산에서 산삼을 캐고 담비를 사냥했다.

임업을 하는 사람들은 다들 찢어지게 가난했다. 산삼이나 담비를 쉽게 구할 수 없는 탓에 평소 수입이 극히 적은 탓이었다. 운이 좋아 담비를 사냥하거나 산삼을 캔 다음에는 이곳을 떠나 넓은 땅을 구해 소작을 주어 편하게 살았다. 그래서 이곳에 남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했다.

“전하! 서 시베리아의 튜먼에서 전보를 보냈습니다.”

“오! 고맙네.”

역무원에게서 전보용지를 받아보니 발신자는 튜먼의 시장이었다. 그리고 루스 차르국에서 차르가 국경조약에 동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우랄산맥의 정상 부위를 선으로 연결하는 것만으로 국경 획정 협상이 간단히 끝났다. 우랄산맥 남부의 스텝은 루스 차르국이 아니라 이때는 노가이 족의 것이었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로써 시베리아 서쪽 경계에 대한 근심이 완전히 사라졌다. 코사크들이 시베리아에 발을 들일 염려는 더 이상 없었다.

“시원하게 됐어요, 주인님.”

“축하드려요, 전하! 정말 잘 됐어요!”

여진족 호위들이 홀가분한 표정을 지은 반면 루스인 궁녀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어떻게 보면 가상 적국의 농민 출신에서 단순한 이웃나라 출신의 궁녀로 신분이 변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루스인 궁녀들은 이민호가 루스 차르국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일으킬 줄 알고 걱정했었다고 한다.

“루스인 농민들을 좀 더 유인할 수 없을까?”

“산맥 양쪽으로 소식이 꾸준히 전해지고 있어요. 지금처럼 농민들을 보호하고 잘 대우해주신다면 루스인 농민들이 계속해서 산맥을 넘어올 거여요.”

에바가 그렇게 대답했다. 현대에는 불법 체류자로서 처벌을 받겠지만 이 시대에는 이웃나라에서 이주민을 받아들이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심지어 이웃한 군주나 귀족들끼리 선정을 베푸는 경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루스 차르국의 보야르들이 필사적으로 농민의 이주를 막기도 했다.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루스 차르국의 영토를 노리고 있잖아요? 조만간 기회가 생길 거여요.”

“그래. 전쟁이 일어나면 피난민들이 대량으로 생길 거야. 그때 잘 정착시켜야겠어.”

민지가 말한 것처럼 루스 차르국은 조만간 전란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도 문제였지만 가짜 드리트리들이 연속 나와서 반란을 일으키고 코사크나 노가이 족도 약화된 루스 차르국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민호는 우랄산맥 너머 루스인들의 영토에는 관심이 없었다. 굳이 전쟁을 해가면서 영토를 얻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서 시베리아가 온통 나무와 황무지만 펼쳐진 한적한 곳으로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인구밀도를 어느 정도 높이고 싶었다.

우랄산맥 동쪽에 루스인들이 다수 거주한다 해서 반란이 일어날 염려는 별로 없었다. 기존 농민들도 차르나 보야르의 학정을 피해 산맥을 넘었으니 다시 그들의 지배를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주 좋다.”

“왕성을 본 딴 것은 알겠지만 어쩐지 안 어울려요.”

모란 강의 별궁은 산기슭에 세워졌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이라고 칭찬이 자자한 곳으로서 시원해서 여름 별장으로 제격이었다. 그러나 왕성처럼 하얀 대리석 기둥이 줄지어 선 유럽식 건물이라서 민지와 민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데 뭐.”

별궁 주변에 호위 병력이 주둔할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객차와 막사 생활에 지친 병사들이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바로 왕도로 돌아가야 해서 오래 머물 곳도 아니었다.

그런데 1층 휴게실에 당구대가 놓여 있었다. 반짝거리는 빨갛고 흰 공은 아무래도 상아로 만든 것 같았다.

“혹시 아프리카에서 상아를 수입하나?”

“예. 므부투 국왕께서 코끼리무덤에서 구한 상아를 왕궁에 진상하셨어요. 코끼리와 코뿔소를 아프리카 왕국의 상징동물로 삼아서 백성들이 잡지 못하게 했대요.”

“그래? 그럼 다행인데.”

그러나 현재 아프리카에서 수출할 만한 것은 상아나 야생동물밖에 없었다. 무분별한 남획으로 인해 실제 역사보다 훨씬 빠른 시기부터 야생동물들이 멸종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몰랐다.

므부투는 이민호의 권유를 받아들여 늪지나 숲 지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야생동물들을 보호하겠다고 최근에 약속했다. 말라리아모기와 체체파리를 구제하는데 실패한 다음이었다. 이민호가 아무리 생각해도 므부투는 밉상이었다.

============================ 작품 후기 ============================

그냥 지나가는 길인데도 쓰는데 12시간 걸렸군요.

감사합니다.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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