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00 76. 시베리아 =========================================================================
기차가 바이칼 호 남동쪽 울란우데에 도착했다. 울란우데에 동몽골 여러 부족에서 보낸 유학생들, 실제로는 인질들이 모여 있었다. 부족장이나 귀족의 장남과 막내를 제외한 권리가 적은 자식, 또는 조카들 위주였다. 유학생이 반드시 남자일 필요가 없다고 하니까 귀족의 딸을 보낸 부족도 있었다.
이민호가 단상에 오르고 통역관이 유학생들에게 뭐라 말한 순간, 500여 명이 일제히 엎드려 절을 했다. 이들의 표정에 묘하게 부러움 같은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몽골인들에게 이민호는 광대한 영토를 개척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었다.
“갇혀서 지내는 게 아닐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왕도에는 1년만 있으면 된다. 그 사이에 울란우데에 대학교를 건립하면 내년 하반기부터는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생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인질인데 어디에 있건 상관없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이민호는 몽골 귀족 자제들이 예과 1년을 고산국 왕도에서 보내고 나머지 본과를 울란우데에서 보내는 방법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고산국의 발달한 문명을 보여준다 해도 유목민들은 무시할 것이 분명했지만, 그 힘의 크기를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고산국 대학생은 속국이건 외국이건 그 나라 백성이면서 동시에 고산국 백성의 신분도 갖는다. 매 학기가 끝나면 사관학교로 전학 갈 수도 있다.”
“사관학교라면 고산국 장교를 양성하는 학교 말입니까? 그럼 저희들이 그곳을 졸업해도 고산국 장교가 될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 다만 공부가 어려울 수도 있다.”
유학생들의 눈빛이 갑자기 초롱초롱 빛났다. 이들은 이번에 얼마나 큰 행운을 얻었는지 그제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다음 학기부터 동몽골 여러 부족에서 부족장이나 귀족이 후계자들을 추가로 보냈다.
다른 기차에 유학생 500여 명을 태웠다. 식당칸 이용방법과 화장실 사용방법 등 여러 가지를 유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침대에 올라갈 때 옷과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목민 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옷을 세탁하거나 발을 닦도록 가르치는 일은 포기했다. 오히려 옷을 세탁하면서 강물을 더럽힌 자를 죽여야 한다고 유학생들이 난리를 쳐서, 3단계 하수처리장을 보여주고 오물 처리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줘야 했다.
이들을 내일 동해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거기서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 왕도로 향할 것이다. 왕도의 대학교에서 뭘 배우든 귀족의 자식들이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었다.
울란우데 행궁에 여장을 푸는 동안 호위들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민정이 이민호를 우러러봤다.
“진짜로 유학생들을 모아서 보냈군요. 몽골족이 순순히 말을 들을 거라 상상하지 못했어요.”
“우리가 몽골족을 정복하거나 영토를 빼앗을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저들도 알았으니까.”
민정은 자부심 강한 몽골족이 아무리 고산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했어도 이 정도로 고분고분할 거라는 기대를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질을 잡거나 보내는 일이 일상화된 유목민들이었다.
몽골족은 상황이 바뀌면 인질쯤이야 언제든 포기할 수 있는 냉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민호도 이들을 아예 인질로 생각하지 않았다.
“쌀과 밀이 워낙 많이 남아돌아서 가축 사료로 줘야 하나 걱정했는데 이번 일로 몽골족에게 많이 쓰셨어요. 내년에는 토르구트 족이 이주하니까 더 많이 들어가겠죠? 30만 명이면 일 년에 백만 석은 먹어치울 거여요.”
“곡식이 모자랄까 걱정이야. 모자라면 북방과 서 시베리아에 경작지를 확대해야 할 거야. 북미에서 생산한 곡식은 웬만하면 유럽에 수출해야 하니까.”
“건주 여진 문제가 빨리 해결되면 좋겠어요. 그 넓은 땅에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것은 낭비에요.”
민지가 투덜거렸다. 북방, 그러니까 17세기 전반 이후의 지명으로 만주 땅에 경작지를 대폭 확대하지 않은 것은 건주 여진 탓도 있었다. 건주 여진이 너무 강한 탓에 얼마 전까지 동해국은 자체 방어력이 부족했었다. 괜히 경작지 면적을 늘려서 건주 여진의 정복욕을 부추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면서 본토 병력을 추가 배치하고 요동으로 쫓겨났던 기병 2만을 고용했으며, 또한 동몽골 부족들을 끌어들인 다음부터는 전세가 완전히 역전됐다. 건주 여진은 고산국 이전에 먼저 동해국 눈치부터 살펴야 했다.
이민호는 밤중에 추워서 깼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밤에는 몹시 서늘한 이곳은 시베리아였다.
그런데 침전 바깥 하늘이 온통 붉었다. 손 안에 들어온 부드러운 것을 살짝 쥐었더니 민지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품 안에 아담한 체구의 민지가 알몸으로 안겨 있었다.
“깨셨어요? 호수 북쪽 먼 곳에 산불이 났대요.”
“자연적인 산불이겠지?”
“물론이에요. 인위적인 산불이라면 울란우데 가까운 곳에 냈겠죠.”
민지의 하체를 끌어 당겨 마땅히 들어가야 할 곳에 넣고 움직였다. 민지가 급격히 달아올랐다. 그런데 산불 때문에 침전 안이 취침 조명보다 환할 정도였다.
“산불을 꺼야 하지 않나?”
“부리야트 귀족이 말하길, 산불은 내버려두면 며칠 안에 알아서 꺼진대요. 수백 리에 걸쳐서 난 산불이라서 사실 끌 방법도 없잖아요.”
이민호는 수백 km 밖에서 난 산불보다는 품에 안겨 가쁜 숨결을 토해내는 민지에게 관심을 쏟았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화재는 계속되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하늘 높이 솟아오른 연기밖에 안 보였지만, 수상비행기로 확인한 결과 바람을 타고 북동쪽으로 점점 확산되는 추세였다. 여차 하면 바이칼 호 동쪽으로 번질 것 같았다.
타이가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산불은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숲에 빽빽이 들어찬 나무가 시들고 그 사이 작은 나무들이 햇빛을 받아 생장할 기회를 주었다. 산불이 나야 비로소 번식하는 식물도 있었다.
“대왕이시여! 호수 동쪽에 거주하던 부족들이 남쪽으로 피신하고 있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자 부리야트의 타이지가 보고했다. 시간이 갈수록 산불은 심각하게 확대됐다.
당장 이 지역 주민들의 생명이 위기에 빠졌다. 이민호는 몽골인 귀족 유학생들을 먼저 동해국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유학생들은 위험할 때 일반 백성을 지키는 것이 귀족의 의무라면서 울란우데에 남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바이칼 호 북쪽은 이 지역 이름으로 엘류에네 강, 즉 바이칼 호 서쪽에서 시작되는 레나 강과 동쪽 지류 비팀 강에 둘러싸여 산불이 밖으로 확산될 염려는 적었다. 그 중간에도 바이칼 호로 흘러드는 지류가 여럿 있어서 산불이 사그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산불을 내버려두면 부리야트 족의 생활공간이 당분간 남쪽으로 확 줄어들 우려가 있었다. 타이가 북쪽에 거주하는 원주민들과의 교역 루트가 끊기는 것은 고산국 입장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산불이 꺼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진화하기로 결정했다.
“주변에 주둔한 여진 기병들을 기차에 태워 이 지역으로 증원시키고 부리야트 족 남자들도 최대한 모아봐. 이면 중령! 수상비행기 몇 대가 작전 중이지?”
“북방에는 평소 4기가 전개됐는데 전하께서 계시는 동안 임시로 8기까지 증원했습니다, 전하.”
“이곳으로 다 불러 모아. 앙가라에 있는 탐사단도 작전 중인 탐사대 외에는 다 울란우데로 불러들여. 벌목회사 직원들도 빠짐없이 소집해.”
이민호가 여러 부대의 병력과 인원을 불러 모았다. 그 사이에도 산불은 계속해서 번져갔다.
수상비행기로 정찰한 결과 산불이 훑고 지나간 면적이 어마어마했다. 레나 강 상류 동쪽에서 바이칼 호수 서쪽, 폭 200km가 몽땅 화마에 휩쓸렸다. 덕택에 벌목회사 사장들이 풀이 잔뜩 죽었다.
“작은 강 지류 같으면 산불이 그냥 공중으로 넘어갑니다.”
“산불이 너무 강해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진화해야겠다. 마침 호수 동쪽에 길이 있어서 다행이야.”
항공대 소속 수상비행기들이 상공에서 관측하는 가운데 기마 3만 기가 호수 동쪽 면을 통해 북쪽으로 향했다. 호수 북단에 도착할 때까지 나흘이나 걸렸고, 그곳은 하늘 전체가 시커멓게 변했다. 까맣거나 회색 재가 가득해서 사람이나 말이나 입마개를 하고 다녀야 했다.
공병대 소속 발전차량이 이때 큰 역할을 수행했다. 발전차 고무관에서 뿜어낸 물이 작은 지류 주변 숲에 물을 뿌려 산불이 지류 건너편으로 번지지 못하게 막았다.
병사나 부리야트 부족 사람들이 도끼로 밀생한 나무를 넘어뜨리는 동안 수상비행기들이 호수에서 물을 퍼 날랐다. 한때 산불에 포위됐던 사람들을 비행기에서 퍼부은 물로 간신히 구하기도 했다.
“화상을 입은 부상자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주인님도 남쪽으로 조금 물러나면 좋겠어요.”
“악전고투네. 그렇다고 내가 물러날 수는 없지. 급하면 호수를 통해 빠져 나가자.”
여진족 호위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이민호가 직접 물통을 지고 나르지는 않았지만, 바람 방향이 바뀌면 지휘부도 순식간에 불길에 둘러싸일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고 불길과 싸우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국왕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불길을 피해 뒤로 물러나더라도 불을 끄는 사람들과 함께 움직여야 했다.
“조심하세요.”
“호숫가에 집중된 불만 어떻게 진화하면 나머지는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소방선이 없는 게 한이다. 그리고 수상비행기에서 물을 퍼붓는 것은 비효율적이야.”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전하?”
이면의 얼굴에 그을음이 잔뜩 엉겨서 시커멓게 변했다. 이민호가 이면을 보고 웃는데 이면도 이민호 얼굴을 보고 웃었다. 굴뚝 청소한 아이들 같았다.
“내 얼굴도 까만 모양이지? 장갑차에 달린 고무수도관을 여럿 연결해서 길게 만들고 비행기에 붙여서 물을 뿌리자.”
“어떻게 말씀입니까? 켁켁!”
바람 방향이 살짝 바뀔 때마다 매캐한 연기가 불을 끄러 온 사람들을 덮쳤다. 화재에서 발생하는 인명피해는 주로 유독가스 흡입으로 인해 생긴다던데 맞는 말이었다.
이민호가 시킨 대로 장갑차에서 떼어 낸 두꺼운 소방호스 여러 개를 연결한 다음 수상비행기 동체에 달았다.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도록 이민호가 주의 사항 몇 가지를 설명했다.
“보다시피 고무수도관의 길이에 한계가 있다.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서 산불을 끌 수 없다는 말이야.”
“예. 그럼 호수변을 직선 비행으로 지나가면서 물을 뿌립니까? 그렇게 해서는 물이 숲에 안 닿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까 한 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서 비행해. 고무수도관 끝이 나선형으로 호수에 내려앉도록 말이야. 그리고 비행기가 육지 쪽에 닿을 때마다 물을 뿌리는 거야.”
수중에서 작전 중인 잠수함을 잠망경 심도로 긴급 부상시켜 명령을 내리려 할 때 알파벳 몇 자만 전달하기 위해 장파통신을 한다. 이때 항공기가 동원되는 경우에는 안테나의 길이를 가급적 길게 늘이기 위해 이런 나선형 비행을 했다. 이민호는 안테나 대신 고무호스를 늘어뜨려 수면에 안정시키는 아이디어를 활용했다.
“수도관의 길이가 300미터도 안 되니까 비행기 고도는 50미터 정도로 유지해야 할 거야. 많이 위험해.”
“제가 직접 조종하겠습니다.”
조종술이 가장 나은 사람이 이면이라서 이민호도 말리지 못했다. 동체에 수도관을 달고 항공대장 이면이 직접 조종하는 수상비행기가 이륙했다.
비행기는 불이 가장 강한 지역 호숫가로 가서 저공비행을 하면서 빙글빙글 돌았다. 비행기가 상공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도 수도관 끝은 일정한 곳에 고정돼 있었다.
- 푸악~
준비 비행이 끝나고 드디어 비행기에서 물을 뿌렸다. 사람들이 작은 물통을 등에 지고 와서 뿌리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물을 화재 중심지역에 한꺼번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
“와!”
부리야트 사람들은 물론 유학생들, 즉 동몽골의 귀족 자제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자연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몽골족에게 비행기를 동원해 산불을 진압하는 장면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산불 진압에 다른 비행기 세 대가 더 가세했다. 호숫가를 따라 강하게 번지던 화재가 빠른 속도로 약화됐다. 힘을 얻은 몽골족들이 잔불을 끄면서 차근차근 전진했다.
두 시간이 지나자 하늘을 가리던 검은 연기가 흰 연기로 바뀌고, 잠시 후 푸르고 맑은 바이칼 호수의 원래 하늘이 드러났다. 그리고 화사한 색채의 무지개가 호수 위를 수놓았다.
“아름다워.”
유학생들이 감탄하는 동안 민정이 수건으로 이민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이민호가 민정과 민지의 얼굴을 닦아주는 동안 유학생들이 몰려왔다.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게 된 부리야트 타이지들도 이민호에게 환호를 보냈다.
“물과 불을 자유자재로 다스리셨습니다. 대왕은 달라이 칸이십니다!”
“나는 칸이 아니야. 그리고 달라이 라마와 같은 칭호를 받을 수는 없다.”
달라이는 몽골어 큰 바다를 뜻하며,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소남개초가 알탄 칸을 만나 받은 칭호였다. 개초 자체가 대해(大海)라는 뜻이었다.
“그럼 텡그리 칸이십니다!”
“하늘은 무엇보다 위대하다. 외람된 호칭이라 부끄럽다.”
“그럼 설렁거 칸! 대왕은 무지개를 만든 위대한 칸입니다!”
통역이 솔롱고스는 고구려와 그 후계 국가를 뜻하는 말이 맞지만, 무지개라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비슷한 발음의 설렁거는 뜻이 무지개가 맞았다. 유학생들이 이민호에게 어떻게든 칸 칭호를 붙여주려고 애쓰는 것 같아서 수용하기로 했다.
“명예 칭호로 받아들이겠다.”
“와아! 설렁거 칸 만세!”
명예 칭호는 아무리 많아도 실제가 없었다. 그러나 몽골인들이 직접 부여한 칭호인 만큼 몽골인들에게 친숙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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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올립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