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98화 (647/1,000)

00698  75. 스텝  =========================================================================

“우리 루스인들이 덴마크인 정도의 힘만 있었더라도 어떻게 한 번 해봤을 겁니다!”

“덴마크라면 북방의 강국이긴 하지. 그래도 고산국 상대로는 안 될 거야.”

“우리 루스인들은 오랫동안 몽골의 멍에에 짓눌려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카잔한국이 자행한 노예사냥에 루스인들의 씨가 마를 뻔했다가 간신히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시비르한국을 멸망시켰고, 이제 동쪽으로 영토를 확대할 기회가 오나 했는데 고산국에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루스 차르국 입장에서 동쪽으로 확장할 여력은 없지 않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녹록치 않을 거야. 그리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국경을 맞대고 있잖아. 세 나라 모두 루스 차르국의 넓은 평원에 침 흘리고 있는 나라들이야.”

“흑흑! 이 모든 것이 나라가 약한 탓입니다. 제게 나라를 바꿀 힘이 있었다면!”

귀족은 약소국인 조국의 운명에 비분강개하는 애국자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이 국내정치 개혁에 실패해 좌절한 다음에는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로 변하기 쉬웠다. 나라의 발전보다는 ‘내가 지배하는 나라’가 더 중요한, 전형적인 권력 지향주의자들이었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게. 그리고 시비르한국이 멸망할 때까지 실제로 차르가 직접 군대를 움직이거나 군자금을 댄 것도 아니지 않나? 지금까지 돈이 거의 안 들었을 테니 손해 본 것도 아냐. 어쨌든 이웃나라가 됐으니 우호적으로 지내는 길을 찾아봐야겠지? 차르에게 선물을 보내겠네.”

“비천한 상인이 코사크 야만인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니까 차르 입장에서도 별로 손해는 아니란 말이야. 내가 1만 파운드의 은괴를 내줄 테니까 우랄산맥 동쪽을 루스 차르국으로부터 매입한 것으로 치세. 어차피 이곳은 루스 차르국 영토가 아니라 시비르 타타르의 땅이었고, 지금도 노가이 타타르가 열심히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나?”

“저는 군사지휘관이라 외교 권한도 없고 대리권을 부여받지도 못했습니다. 차르께 그렇게 보고하겠습니다.”

이민호가 혀를 찼다. 귀족은 기본적으로 책임 질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 했다. 일단 은을 가져가라고 해도 자기 손으로 영토 판매대금을 받을 수 없다며 끝까지 거부했다.

그 귀족이 말을 타고 대군에게 포위된 작은 부대를 지휘해 서쪽으로 향했다. 이민호도 전령을 보내 토르구트와 여진 기병 등을 다시 튜멘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 기회에 루스 차르국과 영토조약을 맺으면 좋은데 말이야.”

“루스인들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튜멘을 탈환하러 올 것 같지는 않아요. 조만간 차르가 보낸 사신이 올 거여요.”

“민지 말이 맞아. 노가이 족에게서 백성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거나 막을 것이지 무슨 시베리아 개척을 한다고 그래.”

사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고산국이 서 시베리아에 도착했다. 이민호는 튜멘 등에서 루스 차르국과 대규모 전투를 할 것까지 각오하고 왔었다. 토르구트와 여진 기병으로 부족하면 본토에서 연대 몇 개를 동원하려 했었다.

그러나 마침 노가이 족이 우랄산맥 동쪽을 휩쓸고 다녀서 비교적 쉽게 이 지역을 접수할 수 있었다. 노가이 족은 노예사냥으로 쉽게 돈을 벌고 있지만, 조만간 좋은 꼴을 못 보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카잔한국도 노예사냥으로 흥했다가 참다못한 루스 차르국의 공격에 멸망했다.

이번 일로 가장 충격 받은 사람들은 튜멘에서 건설작업에 동원된 루스인 포로들이었다. 차르의 군대가 자기들을 구해주지 않고 도망간 셈이니 이만저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이들을 조만간 풀어줄 계획이었다. 루스 차르국의 사정이 요즘 극도로 안 좋으므로 만약 포로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겠다면 적극 환영할 생각이었다.

이민호는 토르구트든 루스인이든 자발적으로 결정하도록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괜히 이 지역에 정착시키려고 강요했다간 반발만 불러올 뿐이었다.

“민정이가 보기엔 어때? 루스인 처녀총각들이 좀 붙어먹는 것 같아?”

“예. 정교회 사제가 단 며칠 만에 150쌍을 결혼시켰어요.”

이민호가 음흉한 표정으로 웃었다. 젊은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서 일하다가 자꾸 눈이 마주치면 반드시 뭔가 사건이 벌어졌다. 노예로 팔려갈 뻔한 루스인 처녀들이 특히 조바심이 나서 남자를 구하려고 발버둥 쳤다.

루스인 포로들의 천막에 남녀 따로 배정했으나 밤에 천막촌을 지키는 병사가 없었다. 그리고 튜멘 주변의 숲은 아주 무성했다. 포로들끼리 일 안 하고 연애를 하든 말든 고산국 기술자들은 못 본 척했다. 수천 명 단위의 처녀총각들이 짝을 맺을 조건이 아주 잘 갖춰져 있었다.

“신혼부부에 대한 연립 주택 배정은 잘 되고 있지?”

“아직 완공되지 않았지만 기대를 많이 하고 있어요.”

“가족 거주지와 독신자 거주지에 대한 차별을 확실히 해줘.”

“그렇게 진행하고 있어요. 음흉한 미소는 그만 지으세요.”

“큭큭!”

그런데 젊은 루스인 여자가 천 명이나 남았다. 이민호가 보기에는 다들 미인이었으나, 이번에도 사람마다 선호하는 용모나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토르구트 기병들은 루스인 여자들에게 전혀 관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가족을 잃고 떠돌던 요동 여진 기병들은 가끔 루스 처녀들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이민호와 호위들은 몹시 안타까웠다.

“웬만하면 데리고 살지 말이야. 나이 40이 넘은 노총각, 홀아비 주제에 여자 용모를 너무 따져.”

“검은머리나 갈색머리는 가끔 여진 기병하고 맺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금발이나 은발은 가능성이 전혀 없어요.”

“에스파냐 귀족 여자들이 중요한 교훈을 남겨줬잖아. 루스 처녀들에게 염색약을 넘겨줘.”

그 다음부터 루스 처녀들 중에 검은머리가 흔해졌고, 여진 기병과 맺어지는 비율이 확 늘어났다. 그러나 여자들이 너무 말라서 그다지 인기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계속 같은 도시에 살면서 부대끼다 보면 서로 정이 갈 것으로 기대했다.

이민호에게도 루스인 처녀 네 명이 생겼다. 이민호가 선택한 여자들은 아니었지만, 호위들이 비올레타나 갈라티아 궁녀 등 이민호의 취향에 맞는 용모의 처녀들을 골라 행궁에 고용해서 일을 시키고 있었다.

“일단 갈라티아 궁녀들이 받는 급료의 절반에 고용했어요. 조선 궁녀들처럼 주인님의 여자들이니 마음대로 하세요.”

“호위에 문제가 생기지 않나?”

“호위에 문제가 생겨서 고용했어요. 주인님이 시녀들을 안 데려오는 바람에 그 동안 저희들이 빨래까지 다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잖아요. 그리고 어의께서 그 여자들을 다 확인했어요.”

민지가 그렇게 보고했다. 어의가 확인했다면 각종 질병 검사는 물론 처녀인지도 분별했다는 뜻이었다.

이민호가 안 건드리더라도 조선 궁녀들처럼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출퇴근하는 식으로 근무하게 할 수도 있었다. 물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펑퍼짐한 옷 말고 짧은 메이드 복 있지? 망사나 검은 스타킹을 신겨서 다시 데려와 봐.”

얼굴은 충분히 합격점이었고, 궁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온 다음에 보니까 다리가 정말 길고 날씬했다. 그 동안 제대로 못 먹어서 마른 것도 아니었다.

“좋았어. 여름에는 그 옷을 입어라.”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파악한 궁녀들이 물러났다. 일단 보기에는 좋았다. 키와 체구는 아담한 편인데 신체 비율이 아주 좋았다. 잡일에서 해방된 호위들도 기뻐했다.

튜멘에서 도시를 건설하는 인력 일부가 튜멘 북쪽과 동쪽 방향으로 농경지 개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족 단위의 루스인 포로들을 개간이 완료된 경작지에 정착시켰다.

네 집 단위씩 묶여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농지를 바라보면서 농부들이 훌쩍거리는 꼴을 자주 보게 됐다. 비록 세금이 5할이나 되고 추워서 경작효율이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소작농이나 농업노동자가 아닌 자영농이 되었다.

농지는 쉴 새 없이 일해야 될 정도로 넓었고, 농가마다 말 한 마리와 마차가 지급됐다. 밭갈이처럼 힘드는 일은 시청에서 보낸 경운차로 해줬고, 추수할 때도 경운차를 보내주기로 했다.

“벌써 가을이 다가오는데 괜히 욕심 부리지 말라고 해. 새로 개간한 땅이니까 첫 해는 콩만 심으라고 농부들을 지도해줘.”

“내년까지 먹을 밀을 미리 주면 안 되나요? 내년 수확 때까지 식량을 지원해준다고 해도 잘 안 믿어요. 농부들이 급히 감자를 심고 있어요.”

“평생 속아왔으니까 그렇겠지. 어쩔 수 없군. 다 지원해줘.”

“그런데 식량 재고 중에 호밀과 귀리가 없잖아요.”

“밀로 대체해주면 안 되나?”

호밀과 귀리를 주로 먹던 루스인들이 밀로 만든 빵을 먹게 됐다. 조선에서 소작농들에게 보리밥 말고 쌀밥을 먹으라고 한 것과 비슷했다.

8월 중순에 옴 시에서 갈라진 철도 지선이 튜멘에 들어왔다. 첫 기차가 도착한 다음 날에는 차르가 보낸 사절단이 튜멘에 도착했다.

“원래 이 땅은 루스 차르국에게 권리가 있습니다.”

“이 땅은 원래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것이오. 타타르인들을 빼더라도 한티인과 만시인 등등은 수천 년 동안 이곳에 살았소. 그들에게 당신들은 침략자에 불과하오. 물론 고산국도 마찬가지요. 그리고 루스 차르국은 이 지역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으니 권리를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소.”

“맞습니다. 지금 루스 차르국에는 외부를 돌아볼 여력이 없고 아마도 당분간 외부로 확장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하온데 고산국 국왕폐하께서 은 1만 파운드의 무게를 제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사신 대표는 영토 조약보다는 금액에 관심이 더 큰 것 같았다.

“우랄산맥 동쪽 지역을 루스 차르국의 영토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즉시 지급하겠소.”

“금액을 좀 더 올려주실 수 없는지요. 요즘 차르께서 국정을 운영하는데 자금 부족 문제가 심각해서 말입니다.”

텅 빈 국고에 채워 넣거나 통치 자금도 아니고 아마도 차르의 개인 금고로 직행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민호는 모른 척했다. 1만 파운드는 4.5톤 살짝 넘는 무게였고 54만 냥 정도였다.

“먼저 국경을 획정하는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시오. 그럼 차르께 2만 파운드를 드리겠소. 사절 대표에게도 1천 파운드를 드리겠소.”

“제게 2천 파운드를 주시면 조약 내용을 고산국에 좀 더 유리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대표에게 2천 파운드, 차르께 1만 5천 파운드를 드리겠소.”

“감사합니다. 조약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사신 대표가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고산국도 4천 파운드를 아끼게 됐다.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공무원이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 몇 배나 몇 십 배에 해당하는 편의를 봐주는 것과 같았다.  물론 그만큼 세금이 낭비됐다. 대표 덕택에 조약은 수월하게 체결됐다.

“크세니아 공주를 이웃나라가 된 고산국 국왕폐하께 시집보내자는 주장이 신하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덴마크 궁정에서 봤는데 정말 대단한 미인이시더군요. 요한 왕자에게 잘 어울리는 배우자가 될 것 같소. 요한 왕자는 지금 모스크바에서 생활하고 있소?”

“그렇습니다, 폐하. 크세니아 공주가 아직 어려서 결혼하려면 1, 2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공주를 다른 나라에 시집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혼자를 설득해 파혼시켜야 했다. 스웨덴 왕자 구스타브는 보상으로 영지를 받았지만, 요한 왕자는 암살해버리고 병을 사칭할 수도 있었다.

“요한 왕자의 안위가 잘못될 경우 덴마크와 고산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덴마크 국왕은 만약 동생이 모스크바에서 병에 걸려 죽는다 해도 암살로 간주하겠다고 다짐했소.”

“병에 걸려 죽는 것은 하늘이 결정하는 일입니다. 루스 차르국의 책임이 아닙니다.”

“덴마크가 루스 차르국을 침공할 아주 좋은 핑계거리가 아니오? 그리고 그런 일이 동맹국에 벌어지면 고산국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이오.”

원래 역사에서 요한 왕자는 결혼식 직전에 병으로 죽는다. 그리고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의 딸 크세니아는 반란 이후 수녀원으로 보내진다.

그러나 이민호가 덴마크에 있는 동안 요한 왕자에게 어의를 보내 몇 가지 예방 접종을 받게 했다. 모스크바에서 반란이 일어나든 말든 일단 요한 왕자가 병에 걸려 죽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드디어 국경 조약이 체결됐다. 사절단은 은을 실은 마차들을 몰고 서쪽으로 떠나갔다. 이민호는 일부러 기병대대를 보내 호송마차를 호위하게 했다. 우랄산맥 너머 페르미아까지 왕복할 수 있었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우랄산맥 곳곳에 고갯길이 몇 개 있는데 루스인들은 바로 그 고갯길을 이용해 산맥을 넘어 다녔다. 고갯길마다 요새를 세워 루스인의 통행을 제대로 막으려면 병력이 엄청나게 들어가야 하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의 국왕이 되셨어요.”

“인구는 얼마 안 돼.”

“명나라와 인도를 제외하면 인구로도 높은 순위에 들 걸요?”

“오스만이나 신성 로마 제국보다는 아직 적을 거야.”

국토 면적이나 인구는 다른 나라와 비교되거나 부족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산국은 과학기술과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바로 그것이 고산국의 근원적인 힘이었다.

============================ 작품 후기 ============================

스텝 편이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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