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97 75. 스텝 =========================================================================
“300명 정도라고? 혹시 머스킷병 비율이 확인됐어?”
“많지는 않습니다. 머스킷 무장 비율이 1할 정도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대부분 코사크 탐험대인가 보군.”
루스 차르국이라면 유럽 강국들에 비해 뒤떨어진 나라로 생각했는데 다른 나라보다 의외로 총기 무장 비율이 높은 것 같았다. 돈 코사크를 대규모 탐험대로 조직한 것도 이 시대에는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총병이 기본인 스트렐치라는 병종도 특이했다. 자유민 출신 전문직 장인(tradesman)이나 도시 바깥 주민으로 구성되는 스트렐치는 총기와 긴 날 도끼를 동시에 무장했다. 이들이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며 종신제, 세습제로 변했다. 루스 차르국이 주변의 강력한 유목민 기병집단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총병을 중시하게 된 것 같았다.
“거리는?”
“이곳 튜멘에서 80km입니다.”
“그럼 토볼스크에서 150km 정도네? 출발한 지 나흘쯤 됐나 보군. 코사크도 원래 기병들인데 시베리아에서는 뛰어다니려니 미칠 거야.”
여진 기병을 보낼까, 토르구트 기병을 보낼까. 아니면 수상비행기에서 폭격과 기총소사를 하라고 지시할까 잠시 고민했다. 이면은 당연히 비행기에서 폭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찰하던 수상비행기를 귀환시키고 내일 새벽에 직속 기병대대를 하나 뽑아서 토볼스크 방향으로 보내라고 감동에게 지시했다. 괜히 코사크들을 흩어지게 해서 숲에 저격수가 깔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랄산맥을 넘어가 이 지역 사정을 차르에게 알리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골치 아픈 놈들은 못 도망가게 모아서 처리하는 편이 나아.”
“사실 기병 입장에서는 숲에 숨어서 총이나 활을 쏘는 놈들이 가장 위험합니다.”
그래서 감동과 이면에게 기병대대와 항공대의 합동작전을 실행하게 했다. 다음 날 오후 기병대대가 포위 공격하는 동안 비행기에서 폭격하는 식으로 코사크 지원군 절반을 죽이고 절반을 포로로 잡았다.
기병대대가 내친 김에 토볼스크까지 가서 요새를 완전히 불태우고 무너뜨렸다. 그 전에 시비르한국의 카실리크가 있었듯이, 이르티쉬 강과 토볼 강의 합류점이라 언젠가 그곳에도 도시가 들어설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코사크 포로들을 처리하는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데 그 동안 약탈에 나섰던 다른 노가이 족 부대가 마침 튜멘으로 왔다. 노가이 지휘관을 만나 코사크 포로와 장비를 넘겨주고 그들이 잡아온 루스인 민간인 포로 천여 명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노가이 지휘관이 얼씨구나 하고 150대 천을 바꿔갔다. 노가이 족이 남녀노소 안 가리고 잡아온 루스인 포로 일천 명을 새로 얻었다.
6천으로 늘어난 루스인 포로들을 튜멘을 요새 도시로 대폭 확장하는 공사에 투입했다. 함대로 이동했다면 작업복과 삽, 곡괭이, 들것 등을 포로들에게 바로 넘겼을 텐데, 스텝에서는 말 타고 보급을 추진하는 탓에 여기까지 물품이 오는 데 며칠 걸렸다.
며칠 후 삽차, 밀차와 함께 동해국 건설기술자들이 도착한 다음부터 공사가 빠르게 진행됐다. 튜멘은 우랄산맥 동쪽을 방어하는데 꽤 중요한 지역이고 교역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시장 외에도 군 주둔지와 연립주택 단지, 학교, 그리고 교회와 절도 지었다. 전체가 불교도인 토르구트 족을 위한 절이 완공된 후에 티베트에서 스님들을 모셔오기로 했다.
겨우 기초공사가 끝난 교회는 나중에 잡힌 포로 중에서 정교회 사제가 있어서 임시로 맡겼다. 정상적인 종교생활을 다시 하게 된 루스인 포로들은 고산국 사람들이 최소한 자기들을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는지 일하는 자세가 조금 달라졌다.
“전력은 어떻게 공급해야 합니까? 이 근처는 평지라서 수력발전소를 지을 만한 곳이 드뭅니다. 석유라도 나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설마 이런 데서 석유가 나겠어? 그래도 기본적인 자원 탐사는 해야겠지. 없으면 석탄이라도 때자.”
이민호는 이 근처 오비 강 유역이 현대 러시아에서 최대 규모의 유전지대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바이칼 호 서쪽 앙가라 시 근처도 이르쿠츠크 탄전이라고만 기억했지 천연가스가 나온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튜멘을 점령하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 공조 참판이 기술자들과 함께 찾아왔다. 참판이 시베리아 전체의 건설 책임자이기도 하지만, 특히 이곳 튜멘까지 철도 지선을 건설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북쪽으로 오비 강 유역을 따라 북극해까지 철도를 건설할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 공조 참판! 어서 오시오.”
“새로운 영토와 백성을 얻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경하 드립니다.”
“일감이 잔뜩 생긴 것이오.”
공조 참판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새로운 땅을 얻은 다음 공조 참판에게 무책임하게 다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우랄산맥 동쪽에 위치한 튜멘은 루스 차르국 입장에서는 시베리아의 관문이었다. 시베리아에 대한 모든 탐험이 이곳에서 시작됐고 모든 길이 이어졌다. 그러나 고산국이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도시의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루스 차르국과 흑해 방면 유목민 세력들의 공격을 방어하고 스텝 지역과 시베리아의 교차점이 될 중요한 곳이오. 평시에는 교역으로, 전시에는 병참선으로 흥할 곳이오. 토르구트 족과 협의하여 이곳을 발전시키시오.”
“예, 전하. 하온데 겨울에 추워서 여기에 정착할 고산국 백성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토르구트도 백성이고 여진족도 백성이오. 타이가 숲에 사는 한티 족이나 만시 족도 모두 고산국 백성이오.”
“휴우~ 산업이나 국방을 다른 민족에게 의존한다 해도 행정이나 교육업무를 맡기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격오지 근무수당을 대폭 올려주면서 유인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한 지역의 민족 구성이 다양하고 사용하는 언어 종류가 많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언어를 골라 언어의 가교, 링구아 프랑카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우랄산맥 동쪽 지역에서 특정 언어를 공용어를 지정하지 않더라도 고산국 관리들이 행정조직을 장악하면 자연스럽게 조선말이 링구아 프랑카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했다.
특정한 언어 교육만 강요하다간 괜히 여러 민족들에게 민족주의적 각성만 시켜줄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고산국에서 새로운 지역에 학교를 세울 때 가장 먼저 그 지역 언어교육을 담당할 현지인들을 교사로 임용했다.
“아스 시에서 옴 강 하구까지 노선은 조만간 완공될 것입니다. 철교는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잘 됐소. 서쪽으로 쭉 뻗어서 흑해까지 연결하고 싶지만 좀 기다려야 될 것 같소. 그리고 북쪽 오비 강 하구를 향해 지선을 연결하는 공사를 진행하시오. 튜멘과 토볼스크, 오비 강과 다른 지류의 합류점을 연결하는 방향이오.”
“예. 철도 주변 위주로만 개발이 진행되겠지만 철도가 있으니까 정말 편하게 개척을 할 수 있습니다.”
도시를 건설하고 도로를 닦는 식으로 천천히 개척했다간 수 세대가 걸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가 모피 교역 때문에 짧은 기간에 시베리아를 정복했듯이, 교역이나 여러 가지 자원을 신경 쓰지 않고 일단 철도를 깔고 봤다.
“영토 경계에 표지석을 다 세웠습니다, 전하. 언어가 참으로 다양하더군요.”
“수고하셨소, 타이지. 같이 식사나 하십시다.”
토르구트의 타이지도 이민호에 대한 호칭을 바꿨다. 그러나 타이지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해 칸 칭호를 주고 싶었는데, 타이지가 필사적으로 사양했다.
어이없게도 스텝에 아직 보르지긴 씨가 남아있어서 타이지가 칸을 칭하기 어려웠다. 몽골인과 유럽인의 혼혈들이 타타르계 언어를 쓰면서 타타르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가진 특이한 황금 씨족이었다.
타이지는 가을에 고향에 돌아가서 내년 봄에 부족민들을 이 지역으로 데려올 예정이었다. 아무리 기차를 이용한다지만 30만에 달하는 인구와 그 인구의 몇 배나 되는 가축의 숫자를 생각하면 이동하는데 몇 달 넘게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지금 토르구트 영역에서 키우는 가축이 지역에 맞는 가축이 아닐 수도 있겠소.”
“기후는 비슷합니다만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노가이 족이나 카자흐 족을 비롯해 주변에 유목민이 많으니까 그들로부터 사면 될 것이오.”
“전하께서는 저희들에게 정착 생활을 강요할 뜻이 전혀 없으신 것 같습니다.”
남쪽에 위치한 겨울 숙영지에 주택과 축사를 건설하는 문제를 논의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토르구트 족을 정착 유목민이나 농민으로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초지를 따라 이동하면 국경수비대 역할도 할 수 있지 않겠소? 하여튼 공조 참판과 잘 협의해서 이 지역을 잘 발전시켜 보시오.”
“전하께서는 왕도로 돌아가실 예정이십니까?”
“그렇소. 타이지 덕택에 이 지역을 지키는 군사력은 충분할 것 같소.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게 됐소.”
토르구트 기병 1만이 튜멘을 중심으로 한 스텝 여러 지역에 배치됐고, 여진 기병 2만이 스텝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분산돼 수비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1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토르구트 족 전체가 스텝으로 이동해야 병력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루스 차르국도 요즘 정신이 없지만, 고산국도 여기서 더 이상 서쪽으로 진출할 여력이 없었다. 철도 노선은 주변 세력들과 좀 더 협의하도록 했다. 고산국 세력이 그리스나 바다 방향이 아니라 갑자기 흑해 북쪽에서 나타나면 오스만 제국의 황제와 대재상이 화들짝 놀랄 것 같았다.
아침 일찍 토르구트 기병이 달려와 이민호에게 급보를 고했다.
“서쪽에서 차르의 군대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알았네. 노가이 족이 완충지대 역할을 해줄 것으로 믿은 내가 바보지.”
오후가 다 돼서 루스인 군대 800여 명이 아주 조심스럽게 튜멘으로 접근했다. 대부분 보병이었고 기병 50여 명은 지휘관이나 정찰병으로 추정했다. 대포도 1문을 끌고 왔다.
이민호는 일단 튜멘의 방어태세를 완비하고 통역을 내보내 대화를 나눴다. 차르 군대의 지휘관은 몹시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귀족의 특성인 궁금증을 참지 못한 지휘관이 호위 서너 명만 거느리고 직접 튜멘으로 들어왔다. 이민호는 호랑이 가죽을 깔아 만든 높은 옥좌에서 기다리다가 지휘관을 맞이했다.
“내가 고산국 국왕이라네. 자넨 모스크바에서 보내서 왔나?”
“고산국이 어째서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서 나타난 것입니까?”
“지구는 둥그니까 앞으로만 나가면 온 세상...... 그리고 내가 먼저 물었네.”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 폐하. 튜멘 요새가 노가이 족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페르미아에서 출동했습니다. 그런데 겨우 몇 주 만에 튜멘이 완전히 달라졌군요.”
15세기 우랄산맥 서쪽의 페르미아 지역이나 영주성 페르미아, 그리고 17세기 중반 이후에 생긴 페름은 위치가 약간 달랐다.
“노가이 족의 서열 3위 케이쿠바트라고 자칭하는 자가 튜멘을 점령하고 요새를 지키던 자들을 포로로 끌고 갔네. 그리고 우랄산맥 동쪽 지역 전체를 내게 팔았어.”
“말도 안 됩니다! 고산국 국왕폐하는 불법적인 장물을 사신 겁니다. 당장 돌려주십시오.”
노가이 족의 장군이 판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 지역을 고산국에 넘긴 것만은 분명했다. 이때 토르구트 타이지와 장로들이 이민호를 방문했다. 루스인 지휘관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몽골인? 진짜 몽골인입니까?”
“소문은 들었을 거야. 칼미크라고. 그리고 자네 부대가 처한 상황을 보게.”
토르구트 기병 1만이 남쪽에, 여진 기병 1만이 북쪽에, 그리고 고산국 직할 기병연대가 동쪽에서 몰려와 차르의 군대를 3면에서 포위했다. 겨우 800명밖에 안 되는 루스인들이 오들오들 떨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2년 전에 멸망한 시비르한국의 영토 전체를 노가이 족이 점령하고 있었고, 차르의 군대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네. 그리고 노가이 족이 합법적으로 고산국에 우랄산맥 동쪽 전체의 영토를 판 이상, 나는 국왕으로서 영토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네.”
“그, 그래도.”
“루스 차르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겠군. 모스크바는 동쪽 스텝과 흑해 방면, 그리고 발트 해 방면에서 대군을 맞이하게 될 걸세.”
“루스 차르국에는 우방이 많습니다! 우방국들이 고산국의 침략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귀족이 그렇게 주장했지만 러시아 전체가 이 시대 기준으로 소식이 느린 시골 사람들이었다. 현재 바다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덴마크는 고산국의 동맹이고, 이 기회에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크림한국과 노가이, 자포로니 코사크들이 루스 차르국 영토를 뜯어먹으려고 달려들 테고, 그 동안 무시했던 돈 코사크들도 등을 돌리겠지. 오스만 제국도 얼씨구나 하고 쳐들어올 거야.”
“차르의 딸과 덴마크의 왕자가 곧 결혼합니다.”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서겠지. 그런데 나는 덴마크 왕의 여동생과 결혼했어. 차르의 딸 크세니아의 약혼자 요한 왕자의 누나 헤드비히 공주가 내 아내라네.”
“크흐흑!”
차르군 귀족 지휘관이 약한 나라의 설움에 북받쳐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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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질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