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96화 (645/1,000)

00696  75. 스텝  =========================================================================

“농민들이 스텝에 들어와서 마을을 건설하면 농경지를 일구고 살도록 내버려두고 일단 보호해줍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어느 정도 재산이 모이면 다 빼앗는 것을 바로 수확한다고 표현합니다. 몇 년 사이 농민들이 낳은 아이들까지 죄다 잡아서 노예로 팔지요. 스텝을 돌아다니며 무역으로 먹고 사는 대상들도 보호해주다가 정기적으로 털어먹습니다.”

“휴우! 그런 짓은 안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소. 정착민들이 이를 갈면서 기회가 되면 복수를 노리고 있을 것이오.”

“저는 베이를 제외한 노가이의 서열 3위이며 군사적인 일을 관장하는 케이쿠바트입니다. 약탈을 함으로써 정착민들의 힘을 꾸준히 약화시키는 것이 제가 맡은 의무입니다.”

노가이 족에는 베이 밑에 후계자인 아들이나 동생으로 누르 앗 딘이 두 명 있었다. 바로 그 아래 직위인 케이쿠바트는 카스피 해 북동쪽 카자흐 땅의 엠바 주변 영지를 관리하면서 때때로 스텝 여러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명목상 크림한국에 속한 노가이 족은 루스 차르국 남부와 폴란드-리투아니아, 몰다비아, 왈라키아 등의 농촌마을을 꾸준히 습격해 약탈했다. 그리고 노예를 잡아 와서 흑해 연안에서 팔았다. 크림한국이 존속한 동안 부용 민족 노가이 족에 의해 자그마치 3백 만 명이 노예로 팔려나갔다.

“그런데 장군. 병사들이 다 죽겠소.”

“어이쿠! 후퇴! 후퇴해! 루스 놈들은 가난뱅이인데 괜히 병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폐하!”

요새에서 총격이 거세지자 케이쿠바트가 병력을 서둘러 퇴각시켰다. 5천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하고도 자그마한 요새 하나 점령하지 못하는 노가이 족이 한심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번 작전에 동원된 병력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들이 튜멘의 수비 병력을 묶어놓는 동안 나머지 5천은 주변 마을들을 약탈하며 노예를 수집하고 있었다.

“대왕! 아무리 유목민이 남의 부족을 약탈한다 해도 그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줄 의무가 있습니다. 약탈로 모자라 반항하지 않는 자들까지 노예로 팔다니 정말 구역질납니다. 저희가 저놈들을 쳐도 되겠습니까?”

“타이지! 저들은 간접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관련이 있어서 나도 건드리기 어렵소. 저들을 이용할 생각부터 합시다.”

바로 며칠 전에 다른 부족들을 약탈하는 키르기스 부족을 쳤는데, 똑같은 짓을 하는 노가이 족을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은 사실 모순이었다. 이민호는 타이지에게 앞으로 노가이 족을 침공할 명분을 찾도록 했다.

이민호와 타이지가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케이쿠바트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엉뚱한 제안을 했다. 노가이 병력은 요새의 머스킷 사거리 밖으로 떼어 놓았다.

“사실 여기는 베이의 명령 없이 제가 개인적으로 약탈하던 곳입니다. 만약 고산국 국왕폐하께서 이 지역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당연히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곳이 필요하기에 병력을 이끌고 왔소. 토르구트, 그러니까 칼미크도 마찬가지요.”

“저는 튜멘이나 주변 영토가 아니라 저 요새를 지키는 스트렐치의 머스킷과 루스 차르국에 붙어먹은 돈 코사크들의 목이 필요합니다. 베이께 바칠 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튜멘 요새를 적극적으로 공략하지 않았다는 변명을 했다. 그러나 5천 병력을 쏟아 붓는다 해도 튜멘을 점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일단, 노가이 족 병사들의 전투 의욕이 대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저 허름한 요새는 의외로 방어력이 높소.”

“바로 그렇습니다. 몇 년 전부터 다섯 번 넘게 공격했지만 매번 실패했습니다.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없었지만요.”

“저 요새를 점령하면 주변 지역을 지배할 거요?”

“그건 아닙니다. 만약 폐하께서 튜멘 요새를 공격해서 제가 원하는 바를 주신다면 우랄산맥 남쪽과 동쪽 지역 전체를 양보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저희들은 영토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수확할 땅이 줄어드는 것뿐입니다.”

이민호는 토르구트 부족을 스텝에 정착시켜 국경선 바깥의 1차 방어선으로 삼으려 했었다. 그런데 토르구트와 루스 차르국 사이에 오스만 제국과 가까운 노가이 족이 있게 된다면 완충지대가 더 충실해지게 된다.

그러나 못된 이웃 옆에 있다가 괜히 같이 날벼락 맞는 꼴을 보게 될 것 같아 걱정이었다. 지금 당장은 루스 차르국이 튜멘을 탈환할 여력이 없겠지만, 노가이 족이 계속해서 루스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간다면 국력을 기울여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가이 족이 무너진다면 다음 차례는 당연히 토르구트, 그 다음은 시베리아가 될 것이 뻔했다.

“글쎄요.”

“젊은 남녀 노예 5천 명을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노가이의 케이쿠바트가 씩 웃었다. 이민호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케이쿠바트에게 있었다.

노가이의 장군이 이쪽 사정을 훤히 아는 것 같아 이민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다가 결국 받아들였다.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는 이민호에게 거절하기에는 너무 강력한 유혹이었다.

“쯧쯧! 불쌍한 자들이오. 알았소. 국경조약과 관련해서 베이께 친서를 써드릴 테니 장군이 전해주시오. 장군의 병력도 앞으로 고산국 영토인 우랄산맥 동쪽에는 들어오지 말도록 주지시키시오.”

“물론입니다. 다만 저희들이 급할 때 폐하께서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동맹이 아니니까 반드시 도와줄 의무는 없소.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도와줄 상황이 되면 도와주겠소.”

“같은 편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정치적, 군사적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민호가 감동을 불러서 요새를 무너뜨리라고 지시했다. 장갑차 대대 소속 포대에서 야포 몇 발을 쏴서 외곽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요새 본채도 한쪽 면을 붕괴시켰다. 감불이 기병연대에게 일제 사격을 지시하기 직전에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스트렐치 3백여 명과 코사크 4백여 명이 항복했기 때문이었다. 포로 약 8백 명이 얼이 빠진 채 요새에서 줄줄이 나왔다.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파편을 비산하는 포탄 공격을 처음 당해본 자들은 이렇게 공황에 빠졌다가 집단으로 항복하는 경우가 있었다.

“폐하의 군대는 특별한 대포를 사용하는군요. 총격도 다를 것 같은데 저놈들이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못 봐서 무척 아쉽습니다.”

“뭐, 별 차이는 없소.”

“어쨌든 대포 몇 방만으로 차르의 군대를 산 채로 잡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동안 속 썩였던 스트렐치 놈들은 저 울긋불긋한 복장을 입은 그대로 여름 궁전에 끌고 가겠습니다.”

노가이의 장군은 이민호가 한글로 쓰고 타타르어로 부기한 친서를 갖고 떠나갔다. 루스 차르국의 군인 포로 800명을 잡은 것이 지금까지 케이쿠바트 개인은 물론 노가이 족이 세웠던 최고의 전공인 것 같았다. 기병과 싸울 생각을 아예 접고 요새에 틀어박힐 경우 기병 위주인 노가이가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다.

루스 노예 5천여 명이 남아서 흐느꼈다. 그나마 자주 보던 타타르보다는 고산국이나 토르구트 사람들이 더 무섭게 보인 탓이었다. 특히 몽골족 복장을 한 토르구트는 어렸을 때부터 몽골족을 악마로 인식해온 루스인들에게 진짜 악마처럼 보였다.

루스 차르국 포로를 노가이에 넘긴 것처럼, 노가이도 민간인 포로 5천을 고산국에 넘겼다. 여진 기병들이 경계하는 동안 군의관들이 포로들의 상태를 살폈다. 잡힌 지 얼마 안 돼서 건강한 편이었다. 상품 가치 때문인지 여자들을 폭행한 흔적도 없었다.

“도련님! 저 노예, 아니 포로들을 어떻게 할까요?”

“저들이 돌아갈 곳이 있나? 일단 현지에서 고용한 노동자로 취급해야겠어. 옴 시로 보내서 성벽 쌓는 일에 동원해.”

감동이 살펴보고 나서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노예 수집 과정에서 남자들이 저항하다 많이 죽었는지 여자 3천, 남자 2천 명 수준이었다.

루스인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젊은이들은 길쭉하게 생겼고 중년 넘으면 둥글둥글하게 생겼다. 그러나 5천 명 대부분이 20대 초중반 정도였다.

“워낙 겁을 먹어서 제대로 일이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통역을 통해서 잘 설명해줘. 2년만 제대로 일하면 말 한 마리 사서 루스 차르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돌아가지 않을 사람에게는 농지를 분배해주겠다고 해.”

“몽골인들이 루스인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입니다. 여진족도 몽골족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같이 식사 준비를 시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루스인 포로들을 양 잡는 곳에 보냈다. 그러나 거기서 자기들도 도살당할까봐 아주 까무러쳤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루스인 포로들이 조금 안심하는 것 같았다.

“타이지가 보기에 너무 좁은 건 아닌지 모르겠소.”

튜멘에서 노가이 족과 합의한 서쪽 우랄산맥 국경까지 거리가 200km 정도였다. 이민호는 타이지와 협의를 하면서 아스 시부터 우랄산맥까지 스텝 지역 동서 1500km, 남북 500km에 해당하는 지역, 75만 평방킬로미터를 토르구트의 영토로 제시했다. 현대 몽골 인민 공화국의 절반이 안 되고, 내몽골까지 합한 면적의 4분의 1을 넘었다.

“아닙니다, 대왕. 사막이나 황무지가 없는 풍요로운 초지만으로 이 정도 면적이면 대단한 것입니다. 이주해 올 저희 부족민들도 대왕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게다가 싸움 한 번 없이 이런 넓은 초지를 얻었고, 앞으로 싸울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아 도무지 믿기지 않습니다.”

“싸움을 못하게 돼서 섭섭한 건 아니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이라트 부에 있는 동안 소수 세력의 설움을 절감했습니다. 이제부터 전쟁에 몰두하기보다는 꾸준히 인구를 늘려가야지요.”

어느 시대에나 인구는 국력이었다. 치안이나 공중위생, 식량 사정이 조금만 좋아져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이주는 철도가 1차 완공되는 내년 봄부터 시작하시오. 현재 부족의 방목지에서 울란우데로 이동할 수 있지요?”

“예. 오이라트의 다른 부족들은 섭섭하더라도 우릴 보내줄 것입니다. 다른 동몽골 부족들은 대왕의 위엄에 눌려 저희들을 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토르구트의 타이지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이민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자급자족이 어려운 유목민은 정착민과의 관계에서 결코 대등해지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어느 한쪽이 위에 서야 했다.

그러나 타이지의 말은 이민호가 예상한 내용과 달랐다.

“토르구트 전체를 대왕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주십시오.”

“동해국이나 부리야트처럼 토르구트도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가진 속국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소만.”

“하오나 저희들에게 기병 전력이 너무 많습니다. 속국으로 두기에는 부담이 되실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런 면이 있소.”

“그리고 고산국의 한쪽 국경을 한 종족만으로 온전히 맡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토르구트 기병 1, 2만 정도를 다른 곳에 배치하시고 그 대신 여진 기병을 이 지역에 교환해서 배치하시길 대왕께 권해드립니다.”

타이지 코우틀룩이 걱정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토르구트 부족 전체의 뜻을 물어서 다시 결정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부족 전체가 이주를 마칠 때까지 기병들에게 계속 녹봉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곡식과 차 등 식량과 생필품 보급도 당분간 계속하기로 했다.

토르구트의 인구는 현재 30만이나 됐다. 방어전이 아닐 경우 원정에 기병 3만 정도를 빠른 시간 내에 동원할 수 있었다. 동해국부터 흑해 북쪽 스텝까지 이어질 철도를 이용해서 건주 여진, 명나라, 몽골, 카자흐, 노가이, 루스 차르국 등 문제가 생긴 곳마다 바로 기병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노가이 족과 협상하고 크림한국은 긴밀한 관계인 오스만 제국을 통해 압력을 행사한다면 그들의 영토에 철도를 놓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기병이 약한 곳은 오늘도 봤듯이 단단히 준비된 방어선, 즉 요새나 성곽이었다. 그 문제를 야포를 휴대한 고산국 정규군이 해결해준다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이민호는 토르구트 기병을 서쪽 스텝 지역 방어군 겸 신속대응군으로 활용할 작정이었다.

“토볼스크에서 적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응원군인 것 같습니다.”

튜멘과 달리 토볼스크에서 달려온 적은 총병인 스트렐치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코사크 족이었다. 이면 항공대장은 토볼스크 요새에 주둔군을 거의 남기지 않고 몰려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 작품 후기 ============================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루스 차르국이 이 지역을 탈환할 여력이 없으니 거의 끝났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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