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94화 (643/1,000)

00694  75. 스텝  =========================================================================

노보시비르스크, 즉 아스에서 이틀 쉬는 동안 주변 여러 부족 지배자들이 끊임없이 알현을 신청했다. 제대로 선 건물이 없어 대형 천막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공물과 하사품을 빙자한 교역이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게 진행됐다.

부족장들은 몇 달 전까지는 고산국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정복하러 온 줄 알고 긴장했는데, 철도만 깔면서 지나가니까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철도회사는 무난히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여러 세력과 교역을 미끼로 협상을 진행했고, 대체로 성공했다. 통행세를 요구하던 부족들이 고산국 군대의 무력시위를 구경하게 된 경우도 있었으나, 실제 싸움까지 간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부족들은 철도가 완공되고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기겁했다. 사람이 타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한시름 놓았는데 시베리아 부족들을 상대로 시장이 열려 좋은 조건으로 편하게 교역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고산국 국왕이 왔다고 소문이 퍼지자 여러 부족의 지배층들이 서둘러 몰려왔다.

“고산국 국왕전하! 에우쉬타 타타르의 공작 토얀이 인사 올립니다.”

아스를 방문한 여러 유력자들 중에서 가장 특이한 자였다. 북쪽에서 온 타타르 공작은 타타르 말이 안 통하자 몽골어를 사용해 이민호에게 인사했다.

시베리아 타타르는 우랄 산맥 동쪽부터 예니세이 강까지 널리 분포했다. 에우쉬타 타타르는 시베리아 타타르의 일족으로서, 아스 북쪽에 자리 잡은 유목민들이었다. 부족장이 유럽처럼 공작을 칭하는 것이 특이했으나 외국에 내세우는 호칭이라고 했다.

이들이 쓰는 언어는 옛 투르크어 요소가 많이 남은 킵차크어 중에서 동부 방언을 사용했다. 흑해 방면의 노가이어와도 통한다고 해서 통역을 몇 명 빌리기로 했다.

“혹시 볼가 강에 사는 타타르와 같은 종족이오?”

“아닙니다, 전하! 그놈들하고는 말도 안 통합니다. 차라리 카자흐인들하고 가깝습니다.”

몽골제국의 일족으로 타타르 부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서 시베리아와 우랄 남부 스텝 지역에 살면서 타타르라 칭하는 집단은 킵차크한국의 후예들이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사는 타타르 부족끼리 언어는 통하더라도 전혀 다른 인종 집단일 경우가 흔했다. 몇몇 타타르 부족들은 비슷한 투르크어에 속하더라도 다른 타타르 집단과 언어가 아예 안 통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례했소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희 지역으로 키르기스 산적들이 자주 쳐들어옵니다. 전하께서 혹시 저희들을 보호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색을 들인 고깔모자를 쓰고 말 타고 활 쏘는 놈들입니다. 안장에 기병창을 꽂아 세우고 다니는 것이 특징입니다.”

공작이 말한 키르기스가 현대의 키르기스스탄에서 사는 종족은 아닐 것으로 이해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여기서 거리가 천 km 이상으로서, 약탈하러 오기에는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예니세이 강의 계곡에 살던 키르기스 부족들은 한때 돌궐이나 8, 9세기 위구르 제국의 일원이었다. 바이칼 호 주변에서 살다가 떠난 키르기스 부족도 있었다.

키르기스스탄에 사는 키르기스인들은 서요가 서쪽으로 진출했을 때 함께 이동해온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마나스의 전설에서는 마나스가 서요의 침략을 맞이해 싸운 키르기스인들의 민족적 영웅으로 묘사했다.

“철도를 따라 경비대가 순찰할 테니 산적이 나타나면 신고하시오. 도와드리겠소.”

“저희들은 주로 철도 북쪽에 삽니다. 고산국에서 철도를 건설해주셔서 다행입니다.”

“여진 기병들이 잘 지키고 있으니 산적들이 철도를 넘어가지 못할 것이오. 철도를 넘을 경우 총을 쏴서 때려잡겠소.”

“예? 전하! 총을 쏘아 죽이는 것은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왜요?”

“그래도 총각들이 장가가겠다는데 말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만 지참금이나 제대로 내고 처녀를 데려가면 좋겠습니다. 훔쳐 가면 좀 타일러 주십시오.”

“끄응!”

21세기에도 유부녀 절반이 납치 결혼을 했다는 통계가 있는 곳이 키르기스였다. 납치해서 남자 집에 데려온 다음 결혼할지, 남자 집에서 나가는 대신 손을 탄 여자로 소문날지 물어보면 대부분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다고 한다. 여자의 가족들도 그런 선택을 하도록 여자에게 강요했다. 붙잡아 뛴다는 구호의 약탈혼은 이 시대에 더욱 성행했다.

실제 역사에서 공작 토얀은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키르기스 도적떼로부터 보호해달라고 1604년에 요청했다. 차르는 코사크 200명을 파견해 요새를 세웠고, 공작은 차르에게 요새 지역의 영토를 할양했다. 이때 코사크 지휘관은 바실리 티르코프와 가브릴 피셈스키였다.

“총각 몇 십 명이 말을 타고 여러 마을을 습격해 신부를 납치하러 다닌다고? 그것 참 이상한 일일세.”

“부족 단위로 막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흉내를 낼 수도 있겠어요.”

민정도 의심을 품었다. 몽골에도 약탈혼 풍습이 남아 있었지만 최소한 여러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지는 않았다.

아스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병력을 이끌고 이동했다. 첨병 외에는 장갑차 대대 뒤로 기병연대, 8천으로 줄어든 토르구트 기병과 요동에 피난 갔다가 새로 고용된 여진 기병들 중에서 대부분이 철도를 지키고 5천이 따랐다.

오비 강 본류와 서쪽 지류 이르티쉬 강 사이, 늪과 초원으로 가득 찬 바라바 스텝 지대를 조심스레 지났다. 숱하게 많은 호수 때문에 부대 간격이 크게 벌어져 서로 안 보이는 경우도 생겼다.

호수와 늪이 많아 농경지로 적당한 지역이었는데 그래도 풀이 주로 자라는 스텝 지대라고 유목민들이 천막촌을 이루며 유목에 종사하고 있었다. 주변 부족들은 이 유목민들을 바라바 타타르라고 불렀다. 유목민 천막촌에서 말에 탄 몇 사람이 달려왔다.

“혹시 고산국 국왕전하이십니까?”

“그렇다. 바라바 타타르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잠시 마을에 들러서 마유주나 한 잔 하고 가시지 않겠습니까? 병사들을 위해 양 몇 십 마리를 잡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냥 가겠다. 호의는 고맙게 받겠네.”

싸울 때 싸우고 약탈할 때는 하더라도 손님 대접 하나만큼은 확실히 하는 사람들이 유목민이었다. 호의를 사양한 것이 미안해서 보급대에 시켜서 술 한 상자를 마을로 보냈다. 유용하게 쓸 유리병에 담긴 술이었다.

아무 일 없이 나흘 걸려서 오비 강의 가장 큰 지류인 이르티쉬 강에 이르렀다. 동서로 흐르는 작은 옴 강이 합류하는 곳이었으니 현대에 옴스크가 세워질 곳이었다.

“사방에 지평선이 보이네. 그런데 역시 항공대가 가장 빠르군.”

수상비행기 두 척이 이르티쉬 강에 떠 있었다. 넓은 강폭을 확인한 이민호는 또 철교를 만들 걱정을 하게 됐다. 평원에 기찻길을 놓는 것은 정말 일도 아니었으나 철교 때문에 건설 기간이 사정없이 늘어나게 생겼다.

“어떻소?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초원이오. 그런데 타이지는 아직 마음에 안 드시오?”

“대왕! 황공하오나 밤에 말 타고 달리다가 호수나 늪에 빠져 죽을 것 같아 두렵습니다.”

“끔찍한 상상이오. 그럼 좀 더 건조한 곳을 찾아봅시다.”

이민호 입장에서 토르구트 부족이 우랄 산맥 남쪽의 스텝 지대에 정착한다면 어디든 좋았다. 평소에 꾸준히 연락을 유지하고 지원해주다가 일이 생길 경우 동맹군으로 동원할 수 있다면 든든할 것 같았다. 철도를 놓으면서 새로 생긴 국경선 안에 이들을 정착시킬 필요는 없었다.

- 부웅~

수상비행기 한 대가 동쪽 하늘에서 나타나더니 이르티쉬 강에 착륙했다. 항공대장 이면 중령이 모는 비행기인데 어째서 동쪽에서 나타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면 중령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강변을 뛰어왔다. 그리고 헉헉대며 보고했다. 통신기용 축전지가 또 말썽이 난 모양이었다.

“키르기스 족 기병 3천여 명이 남방 20km에서 북진 중입니다, 전하.”

“어째서 동쪽에서 날아온 거야?”

“그야 정찰병이든 정찰기든 본대가 위치한 방향으로 돌아가면 본대의 위치를 적에게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아. 어째서 3천 기나 동원했는지 키르기스 기병과 대화를 해 보자.”

장갑차를 풀과 나무로 위장하고 기병들은 말과 함께 옆으로 쓰러져서 누웠다. 키르기스 기병 정찰병들이 근처까지 왔다가 돌아갔고, 한참 후에 본대가 나타났다.

“포위해.”

잘못 누워서 말의 몸체에 깔린 기병들의 다리에 쥐가 날까봐 키르기스 기병들이 완전히 포위망 안에 들어오기도 전에 일으켰다. 길게 풀밭 위로 기병 1만 6천여 기가 일어나자 키르기스 기병들이 깜짝 놀랐다.

안장에 창을 세운 키르기스인의 모습은 토얀 공작이 묘사한 것과 비슷했다. 페르시아부터 중앙아시아까지 높다란 고깔모자를 쓴 기병이 의외로 많았다.

“어딜 가는 길인가?”

“소문이 자자한 고산국 국왕전하 같으신데, 어째서 초원을 가로막는 겁니까?”

젊은 귀족이 말을 타고 이민호의 장갑차로 달려왔다. 에우쉬타 타타르의 토얀 공작이 붙여준 통역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귀족의 말을 전했다. 이민호는 차장 좌석 위로 상체만 내밀고 말했다.

“키르기스 도적떼들이 자꾸 약탈하니까 막아달라는 에우쉬타 타타르의 요청을 받아서 말이야.”

“도적떼라니요? 말씀을 삼가십시오!”

“그럼 도적질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초원에서 약탈은 유목이나 사냥에 버금가는 생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인은 상관하지 마십시오.”

역시나 예상한 것이 맞았다. 약탈 결혼을 핑계로 주변 부족들의 병력과 방어 상태를 확인한 다음 본대가 들이치는 작전이었다.

“나는 철도 주변 부족들을 안정시켜야 한다네. 혹시 키르기스 족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알려주게. 국왕인 내가 하사할 테니까. 약탈을 하지 않고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약탈은 강자의 권리입니다. 누가 해라 하지 마라 할 권리가 없습니다.”

“나는 강자다. 반면에 너는 약자지. 자! 생각이 변하지 않았나?”

얼굴 표정이 구겨진 젊은 귀족이 뭐라 떠들긴 했는데 에우쉬타 통역이 얼버무렸다. 욕설이 틀림없었지만 구태여 확인했다.

“욕 맞지?”

“조금 과한 욕이었습니다. 전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전하.”

“민지야! 쏴버려!”

이민호가 통신기 송수화기를 잡아 전체 부대에 사격 명령을 내렸다. 토르구트와 여진 기병은 물러서고 장갑차와 기병연대가 앞으로 나서서 총격을 퍼부었다.

스텝 지역에 카자흐인과 키르기스 족이 잡거하는 중에서 어느 키르기스 부족이 이 지역의 강자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공물이나 세금을 수탈한다면 몰라도 폭력을 동원해 약탈한다면 피해를 입는 부족의 생존 문제를 생각해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키르기스 족이 복수를 위해 다른 부족들과 연합해 다시 몰려온다 해도 얼마든지 상대하겠다는 각오였다.

- 따다다닷!

총성이 길게 울리는 동안 이민호는 한숨만 내쉬었다. 포위망 안에 완전히 갇히기 전에 키르기스 족이 멈췄기에 아군의 오사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차장석에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구경했다.

아주 잠깐 사이에 절반이 말에서 떨어지거나 말과 함께 쓰러졌다. 나머지 절반은 잽싸게 뒤로 돌아 도주했다.

“추격해서 사살해!”

이민호가 명령을 내리자 기병연대, 토르구트 기병, 여진 기병이 돌진했다. 키르기스 기병이 뒤로 돌아서 활을 쏘려는 순간 기병연대원들이 마상에서 총격을 가했다.

키르기스 기병이 몸을 돌리지 못하고 말을 달리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토르구트 기병이나 여진 기병은 정말 빨랐다. 등을 내준 키르기스 기병은 칼을 맞고 낙마하거나 손을 뻗은 여진 기병에게 덜미를 낚아 채였다.

“퇴각 나팔.”

- 뿌우우~

토르구트나 여진 기병에게 아직 통신병을 배치하지 않았다. 여진 기병들은 용병이라 곧 고산국 지휘관을 대대장 급에 앉힐 생각이었으나, 토르구트는 용병이 아닌 속국 수준의 동맹으로 대우해야 했다.

“1,500기 중에서 300기 정도를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소문을 퍼뜨리라고 일부러 살려 보낸 것이오. 수고했소, 타이지.”

거리가 가까워 키르기스 족이 타고 온 말은 거의 죽지 않고 고스란히 전리품으로 들어왔다. 안장에 걸린 자루를 조사해보니 금붙이가 꽤나 나왔다. 평생 약탈한 금을 몸이나 말안장에 지니고 다니는 것 같았다.

전리품을 모두 모아서 공평하게 분배했다. 그러니까 왕이 절반을 갖고, 나머지 절반을 머릿수에 따라 나눠 가졌다는 뜻이다. 말 2천여 마리는 보급대에 넘겼다.

토르구트와 여진 기병들이 매우 공평하게 분배됐다고 이민호를 칭송했다. 대신 이민호는 보급을 책임 졌다.

============================ 작품 후기 ============================

뒤에 내용이 더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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