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93 75. 스텝 =========================================================================
75. 스텝
바이칼 호반 도시 앙가라를 떠나 기차로 야린, 현대 지명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도착했다. 철도역사와 관공서 건물들은 아직 건축 중이었다.
고를록 강, 이민호가 우겨서 예니세이 강 건너편부터는 지평선이 넓게 펼쳐진 평원이었다. 바이칼 호수부터 여기까지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북서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알타이 산맥 북쪽으로 크게 우회해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강에 교량 건설하는 것도 큰일인 판에, 산맥에 터널을 뚫을 생각은 아예 접었기에 이렇게 노선이 정해졌다.
역 건너편에 벌써부터 시장이 개설돼 여러 지역에서 온 상인들로 붐볐다. 몽골 족과 외모가 확연히 다른 타타르 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시베리아 타이가 지역에 사는 소수 민족들도 흔하게 만날 수 있었다.
도시가 아직 건설 초기라서 그런지 시베리아 숲 사람들이 방패와 갑옷이 일체화된 특이한 나무 혹은 뼈 갑옷을 입고 도시를 방문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무기를 동원한 분쟁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도시 경비를 맡은 동해국 여진족 기병들이 시장을 공정하게 관리한 덕택이었다. 사실은 말 타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누군가 조금만 위험해 보여도 즉각 총구를 겨눴기 때문이다.
“족장! 새로 생긴 시장에 2층 숙소가 딸린 가게를 내줄 테니 유그 족의 특산품 판매상점으로 활용하게. 부족민 한 가족이 여기서 장사를 하면서 생활필수품을 사서 보관하면 바가지 쓸 염려도 적을 것이야.”
“작은 부족인데도 전하께서 여러 모로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그 족 족장은 눈으로 직접 본 기병만 수만에 달하고 시베리아에 수 천리에 걸쳐 철도를 놓는, 전설에서도 듣지 못한 국왕을 만난 셈이었다. 그런 대단한 국왕이 술병을 싣고 가라고 노새 열 마리를 사주는 등 여러 가지를 보살펴주자 족장이 몸 둘 바를 몰랐다.
“의사들이 이틀 후에 도착할 걸세. 그들을 잘 안내해주게.”
“예, 전하. 매년 꼬박꼬박 공물을 바치겠습니다.”
“검은담비는 귀한 동물이니 잘 보호하면서 일정한 수만 잡고, 다음부터는 확실히 제값을 받게나. 시장에 팔지 말고 저기 관공서에 갖고 가서 유그 족 공물이라고 신고하면 더 좋은 값을 받을 거야.”
“예.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이민호가 약속한 대로 이틀 후에 유그 족 족장 일행이 시베리아 탐사대와 의사, 간호사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유그 족의 주거지로 출발했다.
부족 마을에 도착한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든 유그 족 부족민들에게 몇 가지 예방접종을 해주었다. 앞으로 새로 아기가 태어나면 한 살이 되기 전에 야린의 보건소에 와서 예방접종을 받으라고 권했다.
아주 훌륭한 일이었으나, 유그 족 주거지에 가는데 열닷새, 흩어진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접종하는데 아흐레, 야린에 돌아오는데 열흘이 걸렸다고 한다. 사고는 없었지만 나중에 본 의사와 간호사들의 몸에 근육이 잔뜩 붙은 것 같았다.
철도역사와 관공서 주변에 구축된 여진 기병 주둔지에서 매일 사방으로 정찰을 보내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예니세이 강 하류 최대한 멀리, 남쪽은 강을 따라 하카스 족이 거주하는 아바칸과 그 남쪽 알타이 산맥의 산록까지가 정찰 영역이었다.
하카스의 다섯 부족 대표들이 이미 야린에 와서 고산국에 복속되기를 간청해서 받아들였다고 한다. 부족 대표들이 아주 오래된 듯한 금속제 장식품을 바쳤다. 도끼의 머리 부분 같은데 독수리 머리를 한 사람과 호랑이 종류인 맹수가 싸우는 정교한 금속 장식이 붙어 있었다.
아바칸 동쪽에 미누사 강이라는 지류 이름에서 비롯된 ‘민 우사’, 투르크어로 내 시냇물이나 천 개의 강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지역이 있다고 여진족 정찰대가 지도에 기록했다. 그곳이 현대 고고학 발굴 결과 고대 유물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미누신스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요동 여진 기병의 주력은 서쪽으로 현대 지명 노보시비르스크를 넘어 카자흐 평원까지 진출했다. 몽골족과의 전투에서 큰 인명 피해가 난 다음부터 요동 여진족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제는 누가 물어도 고산국 기병이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도련님. 장갑차 대대가 하역을 마쳤습니다. 내일 아침에 기병연대와 함께 서쪽으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그래. 예니세이 강만 건너면 다시 평원이니까 철도를 건설하기 더 쉬워질 거야.”
“제 생각에는 철도를 가급적 산맥 사이에 숨겨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노선이 북쪽으로 향해야 루스 차르국을 견제하거나 시베리아를 지배하기도 더욱 쉬울 것 같습니다.”
“공사기간 단축이나 건설비 때문만은 아니야. 일단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급하니까 그래. 시베리아 중앙을 관통하는 북쪽 노선은 나중에 또 만들면 돼. 몽골 남부를 지나 천산산맥을 지나는 비단길에도 철도를 놓을 거야.”
감동은 철도가 적대세력에게 점령당하거나 공격받는 것을 걱정했다. 그러나 철도야말로 적대세력을 공격할 때 가장 훌륭한 병참선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승리 요인으로 남군에 비해 훨씬 우세한 철도망을 들었다.
다음 날 이민호는 장갑차를 타고 기병연대, 토르구트 기병, 여진 기병 일부와 함께 예니세이 강을 건넜다. 그리고 숲으로 가득 찬 평원을 지나 서쪽으로 사흘 동안 달렸다.
예니세이 강 서쪽부터 넓디넓은 서 시베리아 평원이 시작됐다. 땅은 꽤 풍요로운 것 같은데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토르구트 족이 정착하길 원한다는 땅은 아직 멀었다. 토르구트 족은 유목민이었기에 확실한 초원지대를 원했다.
철도는 오비 강의 지류 톰 강 넘어 더 길게 건설됐으나, 강을 건널 철교가 아직 건설 중이었다. 철교가 완공되길 기다렸다가 다음 구간을 건설하는 식이라면 철도 건설 시간이 열 배로 늘어난다.
배를 엮어 강을 가로지른 주교를 지나 하루 반을 더 이동해서 현대 지명 노보시비르스크, 현지 지명 아스 시에 도착했다. 항상 그렇듯이 항공대장이 먼저 도착해 주변 정찰을 마친 다음이었다.
이면 중령이 몹시 반가워하며 국왕 일행을 맞이했다. 반가워하는 이유가 당연히 있었다.
“전하! 남쪽에 수력발전소를 세우면 기가 막힐 곳이 있습니다.”
“항공대장은 알루미늄에 눈이 먼 것 같아. 지금도 알루미늄 합금을 충분히 생산하고 있네.”
“아닙니다, 전하. 이곳 남쪽, 호수 북쪽에 병목처럼 폭이 좁은 곳을 지나 물이 거세게 흐르고 있습니다. 줄에 건 발전기를 아래로 내리기만 해도 전기를 생산할 만한 지형입니다. 전하께서 직접 보시면 좋겠습니다.”
“알았네. 조금 있다가 비행기를 같이 타고 가보세.”
먼저 이 강이 항공 정찰과 주변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오비 강 본류임을 거의 확인했다. 확실한 것은 북극해까지 탐사를 해봐야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중요한 지역인 이유는 여기서 배를 띄우면 북서쪽의 우랄 산맥 동쪽까지 바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 지역에 도착한 시베리아 탐사단이 작은 배를 타고 하구 방향으로 조사를 나가고 있었다.
“강폭이 꽤 넓소.”
“예, 전하. 가장 좁은 곳의 강폭은 500미터로 별로 넓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수심이 깊어서 철교를 완공하는데 최소 2년은 걸릴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공조 참판이 이곳에서 건설을 지휘하고 있었다. 참판이 건국 이래 해외의 대규모 건설 현장만 평생 돌아다니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하하! 엄청난 숫자의 교각을 옮겨서 조립하느니 차라리 이 근처에 철광과 탄광을 운영하면서 제철소를 세우는 게 낫겠소.”
“그래서 일단 열차 배를 건조하는 중입니다. 철교 완공 전에 기차가 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교각을 건설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러시아가 이곳 오비 강에 철교를 건설하는데 4년이 걸렸다. 그러나 동해국에서 제작한 철교 부분품을 이곳에 수송해서 조립하는 식으로 철교 건설을 앞당길 수 있었다.
철교가 완공될 때까지 열차를 실어 양쪽 강변을 오갈 배를 조선소에서 만드는 중이었다. 이 배는 대규모 기병이 지나갈 때 나룻배 역할도 맡았다. 이곳이 앞으로 오비 강을 중심으로 하는 하상 물류의 중심이 될 것이므로 조선소는 꼭 필요했다.
오비 강은 지류도 많고 서 시베리아의 넓은 유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중요한 강이었다. 그리고 오비 강에는 서쪽이나 동쪽으로 흐르는 지류가 많기에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건설되기 전에 자주 이용된 중요한 교통로였다.
“오비 강에 건설하는 도시면 오비 시라고 하지 아스 시는 뭐요?”
“북쪽에 사는 칸티 족이 오비 강을 아스 강이라고 불러서 아스 시로 정했습니다. 오비 강 영역이 너무 넓어서 말입니다.”
현대 역사학계에 칸티 족은 청동기 제작자인 안드로노보 문화의 직계 후계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AD 500년에 이 근처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됐다.
안드로노보 문화권의 영역은 카스피해 동쪽 연안에서, 북쪽으로는 우랄 남쪽 스텝과 동쪽으로는 발하슈 호를 포함하는 광활한 지역으로 추정했다. 안드로노보 문화의 주인공이 인도유럽 어족의 기원이며 바퀴 달린 전차의 제작자라는 증거들 때문에 서구 고고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아랄 해 남쪽 옥서스 강을 중심으로 안드로노보 문화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기원전 2200-1700년 사이에 번영한 BMAC 청동문화(Bactria-Margiana Archaeological Complex)가 있음이 확인됐다. 성터와 도자기, 금속제 장식품 등 고고학적 유물들은 이 문명권이 기존 4대 문명과 독립적인 고대 문명으로 확인시켰다. 유럽 고고학자들이 매우 씁쓸하게도 안드로노보 문화권의 영역이 대폭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언어에서 아스는 첫 번째나 최고라는 뜻 아니오?”
“아! 그렇습니까? 그럼 괜히 왕도와 헷갈릴 수가 있겠군요. 고쳐야겠습니다.”
“괜찮소. 강 이름은 주변에 거주하는 부족들이 다 아는 오비로 하고 도시는 아스로 하시오. 시베리아에서 제일가는 도시로 키워봅시다.”
이렇게 해서 현대 지명 노보시비르스크는 아스 시가 됐다. 현대 러시아에서 제3의 대도시이며 인구 백만을 자랑하는 큰 도시였다. 이민호도 이 도시가 무역과 기계 공업이 발달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주변에서 채굴될 자원이 많을 것으로 기대했다.
“예, 전하. 이곳은 오비 강으로 향하는 철도 노선의 분기점이 될 곳이니 자연스럽게 커질 것 같습니다.”
“페르시아하고 이야기가 잘 되면 남쪽으로 지선이 생길 수도 있겠소.”
고산준령들이 모인 알타이 산맥을 북쪽으로 우회해서 지나쳤으니 이제 어느 방향으로 철도를 놔도 건설비가 적게 들 것으로 예상했다.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철도를 건설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전하! 여기서 남쪽으로 20km도 안 됩니다.”
“알았네. 가보세. 그런데 여기에 도시를 지을 건데 바로 상류에 거대한 제방을 쌓아도 되나?”
“보탤 것 하나 없는 천연의 수력발전소입니다.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이면이 하도 애타게 재촉해서 결국 강에 띄워놓은 수상비행기로 향했다. 항공대장이 직접 조종하는 비행기는 이민호도 처음 타봤다.
이륙할 때 프로펠러가 돌면서 내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끔찍해서 호위들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면 중령은 탑승자의 신분을 고려해서 최대한 안정적으로 조종하려고 노력하는 티가 났다.
수면에 몇 번 튀더니 비행기가 둥실하고 강에서 떠올랐다. 수상비행기가 강을 따라 상류인 남쪽으로 비행하는 동안 이민호는 사방을 살폈다. 나무가 정말 많았다.
“어? 이런 지형이 다 있네.”
비행기 창문을 통해 내려다 본 이민호가 깜짝 놀랐다. 커다란 호수에 물이 고이고 좁은 바위 틈새로 물이 빠르게 빠져 나가고 있었다.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에 이상적인 지형이라고 한 이면 중령의 말이 맞았다.
수상비행기의 내부 소음이 너무 심해서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다. 그래서 비행기는 금방 아스 시로 되돌아왔다.
“폭을 조금 더 줄이면 호수에 더 많은 물을 가둬 놓고 전력원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침수지가 넓어지면서 안 좋은 영향을 많이 끼칠 거야. 이 상태 거의 그대로 수력 발전을 하는 게 낫겠다.”
러시아에서 1950년대에 이 지역에 400메가와트 용량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한 다음 주변 환경에 여러 가지 재앙을 선사했다. 댐 건설로 인해 침수지가 확대되고 수면이 넓어진 결과 노보시비르스크의 풍속이 전보다 두 배로 빨라졌다.
그리고 댐 주위에 안개가 자주 끼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끔찍하게 추운 시베리아에서 온도를 더 낮춰주는 효과도 일으켰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기록된 4월 최고 기온이 섭씨 30.7도, 최저 기온이 영하 29.1도였다.
“예. 만약 나중에 인구가 늘어서 전력이 더 필요해지면 입구 폭을 줄이십시오.”
“인구 100만이 넘어서 수력발전소 용량을 확장하더라도 여기에 알루미늄 공장은 안 세울 거야. 바다에서 너무 멀어.”
“네, 네. 알겠습니다, 전하.”
“혹시나 근처에서 알루미늄 원료가 발견되면 다시 고려해보지.”
“상관없습니다.”
물론 당분간 아스 시가 인구 100만이나 되는 대도시로 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왕도 인구가 겨우 10만을 넘긴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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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스텝은 아니고 평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