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90화 (639/1,000)

00690  74. 타이가  =========================================================================

“총.”

“여기요, 주인님.”

이민호가 손을 내밀자 민정이 화려하게 황금 장식이 된 사냥용 단발총을 바쳤다. 유럽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아주 비싸게 판매하려고 일부러 가격을 올린 물건이었다. 탄피는 구리였지만 황금색으로 빛나는 탄두는 진짜 금 합금으로 만들었다. 군용 소총보다 구경이 커서 위력도 컸다.

비록 사냥꾼과 몰이꾼들을 직접 지휘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산국 국왕을 위해 준비된 사냥이었으므로 이민호도 사냥에 참가했다. 목 줄기를 총탄에 꿰뚫린 다음 주저앉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지를 퍼덕이는 말코손바닥사슴의 이마를 향해 발사했다. 커다란 사슴이 맥없이 쓰러졌다.

옛날에 몽골의 대칸이 참가한 사냥에서는 몰이에 한 달이 걸리고 동물들을 잡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오늘 사냥은 기관총으로 갈겨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족제비가 몰이꾼들의 틈을 엿보다가 튀어 오르기 직전에 이민호가 사냥총을 쏘아 명중시켰다. 이것으로 학살을 끝냈다. 평소에 몽골인들이 화살과 창칼로 동물을 잡는 것보다는 훨씬 적은 피가 흘렀다.

부리야트인들은 고산국에서 사용하는 총기의 강력함을 충분히 확인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소총이나 기관총은 소문으로 들었던 화승총과 차원이 달랐다.

“과연 고산국은 다르군요. 하오나 대왕과 다섯 병사만으로 저 많은 사냥물의 줄드를 해체할 수는 없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몰이꾼들에게 해체하라고 하시오. 그리고 사슴 몇 마리 빼곤 모든 사냥물을 저들에게 분배해주시오.”

이민호가 부리야트 귀족에게 지시했다. 줄드는 머리와 목, 염통과 허파를 연결한 사냥물의 핵심이었다. 원래 몽골에서 모피와 줄드는 그 동물을 직접 잡은 사람만이 가질 권리를 행사했다. 나머지 고기는 사냥에 참가한 사람들은 물론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까지 나눠 가질 수 있었다.

“자비로운(하이르한) 곰님! 우리는 결코 곰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총알이 잘못 나가서 우연히 당신을 맞혔을 뿐입니다.”

부리야트 몰이꾼들이 곰의 눈알을 도려낸 다음 잎에 싸서 나무 위에 올렸다. 곰의 몸체를 해체하는 장면을 그 곰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곰을 해체한 몰이꾼은 곰 고기와 비계 일부를 모닥불에 던지면서 다시 이렇게 변명했다.

“우리가 당신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죽인 것은 우랑카이와 어웡키 사람들입니다. 정말입니다.”

이민호는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 몰이꾼들이 사냥물을 신나게 해체하면서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변명하기 바빴다. 부리야트 귀족이 뭐라 말하는데 통역이 몹시 당황하면서 그대로 말을 전했다.

“전하. 말똥을 주운 사람이 째진 눈의 옷을 갖는다고 합니다.”

“통역!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이민호가 묻자 몽골어 통역관이 다시 귀족에게 물었다. 어떤 동물의 직접적인 호칭을 회피한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때 민정이 도와주었다.

“주인님. 늑대를 죽인 사람이 늑대의 모피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어요. 부리야트 사람들이 늑대를 죽인 책임을 지기 싫어서 우리가 직접 늑대 모피를 벗길 것을 권하나 봐요.”

“알았다. 통역관! 왕이 병사들에게 동물들을 잡도록 명령했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나, 왕이 지겠다. 몰이꾼들이 늑대의 모피를 벗기고 그 모피는 몰이꾼이 가지라고 해라.”

“예, 전하!”

사냥꾼들에게는 제약도 많고 터부도 많았다. 새끼를 배거나 갓 낳은 짐승을 잡지 않는다는 규칙은 합리적이었으나 나머지는 외부인에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관습이었다. 그래도 숲 사냥꾼들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이해했다.

부리야트 족은 몽골비사에서 칭기즈칸이 맏아들 주치에게 정벌을 명령했을 때에도 숲에 사는 부족으로 등장했다. 칭기즈칸 당시에 바이칼 호수 주변의 숲에 사는 부족으로 분류됐던 코리, 바르가, 키르기즈, 오이라트 등은 나중에 모두 초원으로 나왔으나, 부리야트는 여전히 바이칼 호 주변 숲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칭기즈칸 시대에 숲에서 초원으로 나와 유목민이 된 종족들은 크게 번성했다. 그러나 다른 여러 종족들을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지금은 원형을 구별하기 어렵게 됐다. 투르크 혈통의 특성이 섞인 이들과 고산국 사람이나 조선인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부리야트 부족과는 용모에 큰 차이가 생겼다.

“민정이가 보기에 부리야트를 백산 3부 여진족들하고 비교하면 어때? 그 사람들은 호랑이나 표범을 마구 때려잡는 것 같던데.”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규칙과 절차가 있어요. 그리고 사냥꾼은 호랑이를 잡더라도 약초꾼은 호랑이하고 적대하려 하지 않잖아요.”

백두산에서 연해주로 이동한 백산 3부 여진족들은 요즘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해져 있었다. 호랑이와 표범을 지나치게 많이 잡아서 먹이사슬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라니와 사슴, 멧돼지와 토끼 등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생산성이 낮은 타이가의 숲을 파괴하고 있었다. 백산 3부 여진족들은 사냥감이 너무 많아져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밭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해수(海獸)를 애써 잡아 죽여야 하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냥감이 부족해 곤란에 처한 것과 전혀 달라서 이민호에게 제대로 하소연도 못했다.

“사슴이야 몽골인의 조상이니까 그렇다 치고, 늑대와 곰, 호랑이 사냥에 대한 제재가 몽골에 많은 것 같아. 육식동물은 민가에 접근하지 않는 한 안 잡는 게 좋겠다.”

“예. 호랑이와 표범이 민가에 피해를 끼치는 조선과 달라요.”

그러나 몽골인의 관습에서 길 가다가 여우를 만나면 무조건 죽이도록 돼 있었고, 늑대를 만나면 운이 좋은 것으로 간주했다. 쥐 같은 설치류를 제일 많이 잡아먹는 게 여우인데, 늑대에 비해 만만한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또 축제야?”

“사냥을 했으니 축제를 열어야죠.”

남자들이 사냥물을 해체하는 동안 울긋불긋한 축제용 옷을 입은 여자들이 몰려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고기를 배분한 다음 다 먹을 때까지 축제가 며칠씩 계속될 것이다. 이민호는 부리야트 몰이꾼들에게 수고했다고 술과 곡식을 지급해 환호를 받았다.

사슴 몇 십 마리를 분배받은 고산국 병력은 괜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축제 지역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전투에 참가한 토르구트, 여진족, 기병대대 등에게 며칠 휴식을 주고 술도 나눠주었다.

“대왕이시여! 바이칼 물범의 해구신을 대왕께 바칩니다. 이것은 암컷을 500마리나 거느려서 대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놈의 그것입니다.”

“그, 그것 참. 고맙소. 답례품을 받아가도록 하시오.”

딸을 바치겠다는 부리야트 귀족들의 제안을 거부했더니 이제는 다양한 선물을 바쳤다. 이민호에게 후궁이 많다는 소문이 퍼져서 해구신이 꽤 많이 들어왔다. 바이칼 호수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민물 물범이 살았다.

“왕도에 팔지 말고 이번에는 꼭 주인님이 복용하세요.”

“왜? 내 정력이 부족해?”

“그건 아니지만, 기회가 한 번이라도 많아질까 봐 기대하는 거죠.”

민지와 민정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력제라는 것은 복용한 사람의 체력을 과도하게 소모하게 하므로 좋은 약재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잘 먹고도 서지 않는 중년이나 노년의 남자에게 필요한 약재였다. 그러나 본처가 늙은 남편에게 해구신을 먹이면 남편은 본처가 아니라 첩에게 그 정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울란우데의 행궁에 있는 동안 바이칼 호 북쪽에 사는 케트 족의 샤먼이 이민호를 찾아왔다. 케트 족은 앙가라 강 하류 예니세이 강, 몽골어로 고를록 강 저지에서 수렵 및 어업에 종사하는 부족이었다.

케트 족은 순록을 사육하며 겨울에는 산타클로스처럼 순록 썰매를 타고 다녔다. 시베리아의 타이가 지역에 사는 본격적인 숲 부족이었다.

케트 족에게는 부리야트 족이 상전인데, 부리야트 족의 상전이 왔다고 해서 샤먼은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부리야트 족에게 바칠 공물을 가져온 샤먼은 부리야트 귀족들이 강력히 권하는 바람에 이민호가 거주하는 행궁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지극히 높은 분이 와 계신다고 해서 케트 족에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검은담비 모피 여러 장을 바칩니다.”

“고맙소. 검은담비 모피 한 장에 은 20냥을 지급할 테니 그 은으로 이곳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서 부족으로 가져가시오. 참고로 은 한 냥으로 쌀 2석, 여섯 가마를 살 수 있소.”

부리야트 족에게서 검은담비 모피를 은 30냥에 매입했으나, 앞으로도 부리야트 족이 중간상 역할을 해야 하므로 이익을 남기도록 20냥에 매입했다. 부리야트 족이 이민호에게 그렇게 청원했기 때문이다.

검은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검은담비 모피 300장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이민호도 처음이었다. 검은담비는 그 정도로 귀했다. 이 모피가 북경이나 유럽에 가면 은 100냥 이상으로 가격이 치솟았다.

“케트 족 거주지 주변에 검은담비가 많이 살고 있소?”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숲 깊숙이 들어가면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검은담비를 대량으로 직접 사냥하는 부족을 처음으로 만났다. 부리야트 등 다른 초원 주변에 삼림에 거주하는 부족들도 검은담비를 가끔 잡긴 했으나 세계적 수요에 부응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시베리아 중부와 동부에서는 케트 족이나 유그 족, 어웡키 족, 야쿠트 족 등이 검은담비 모피의 주요 공급자였다. 시베리아 동부 레나 강 유역에 거주하는 야쿠트 족은 80개 부족 대부분이 동해국의 탐험대와 교역을 했으나 검은담비 산출량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백두산과 아이누 섬에서 잡는 수량이 차라리 더 많았다.

“당신이 입은 외투는 아무리 못해도 은 400냥의 가치가 넘겠소. 백미 800석, 2,400가마의 가치와 같다는 말이오.”

“무척 비싼 모피였군요. 무서워서 앞으로는 검은담비 모피로 만든 옷을 못 입고 다니겠습니다.”

“검은담비는 보물이니 한꺼번에 잡지 말고, 서식지를 잘 보호해서 앞으로도 오래도록 많이 잡도록 하시오.”

“예, 예.”

샤먼이 오들오들 떨었다. 힘없는 소수 부족의 샤먼이 값비싼 검은담비 모피를 입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부리야트의 영역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것만으로 부리야트 족의 공정함과 관대함을 알 수 있었다.

샤먼은 울란우데에 오는 동안 천막을 칠 상황이 안 되면 모피 옷을 입고 노숙을 했다고 한다. 해달 모피 이불을 덮고 자는 북서 태평양의 원주민들처럼 세계 최고의 부자들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할 짓을 하고 다녔다.

“표정을 보니 케트 족에 문제가 있는 것 같소. 혹시 부리야트 족이 공물을 과도하게 요구해서 살기 어렵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동안 부리야트 족에서 저희들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부리야트에서 매년 공물을 받는다지만 강압적인 것은 아니었고 그 대신 쇠도끼나 칼 등 유용한 하사품을 내줬다. 그래서 실제로는 교역과 비슷했다.

그리고 만약 부리야트가 과도한 공물을 요구할 경우 케트 족이 거주지를 멀리 옮기면 된다. 땅은 지독히 넓고 인구는 몹시 적은 곳이 시베리아였다. 케트 족은 큰 부족에게 완전히 정복당하지 않으면서도 교역하기에 적당한 지역에 떨어져서 살고 있었다.

“그럼 뭐가 문제요?”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아이들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인구가 불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악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혹시 얼굴에 수두가 나거나 그런 병이오?”

이 시대에 다양한 전염병이 세계 전역을 휩쓸고 다녔다. 조선에서도 전염병 관련한 기록이 흔한 시대였다. 오직 고산국이 지배하는 영역에서만 예방접종을 통해 주요한 전염병이 유행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제가 하늘님에게 대화를 청해봤으나 딱히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호수 남쪽에 가서 귀인을 만나라는 말씀을 들어서 이번에 제가 직접 오게 됐습니다.”

“그것은 해결책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일 것이오. 의사들을 파견해 아이들의 병을 고쳐주겠소.”

“감사합니다, 높은 분이시여!”

동몽골 여러 부족에게 공급하려던 의약품 수량을 늘려서 일부를 케트 족에게도 공급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의사들이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케트 족을 통해 시베리아와 북극권에 이르는 지역의 사정을 자세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 시비르한국이 루스 차르국이 보낸 코사크들에 의해 멸망했다는 소식을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다. 시베리아 타이가 지역에 사는 부족들이 매우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면서도 적절한 하사품을 주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고 합니다. 추운 지역에서 간신히 먹고 사는 저희들이 그런 흉포한 정복자들의 노예가 된다면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문제 때문에 철도를 놓아 군대를 이동시키고 있소. 그대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코사크의 침략을 막아주겠소.”

시베리아 정복에 나선 코사크들은 원주민들에게 모피 세금을 부과하면서 하사품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반란이 일어나 죽을 맛이었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하사품을 제대로 줄 수 있는 쪽이 훨씬 유리했다.

============================ 작품 후기 ============================

몽골 초원이나 타이가나 일방적으로 세금만 받기가 어려운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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