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88화 (637/1,000)

00688  73. 몽골 초원  =========================================================================

아침 식사를 마칠 시간에 동몽골 귀족들이 다시 몰려왔다. 나이가 어려 정식 후계자로 지명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칸의 손자였던 어린애를 죽음으로 몰고 간 차하르 부 귀족들은 의외로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대왕께서는 정말로 칸의 직위에 관심이 없으십니까?”

“몽골에서는 황금 씨족만 칸이 될 수 있다면서요? 그럼 황금 씨족을 칸으로 올리든지, 몽골 사람들이 알아서 하시오. 나는 오이라트의 타이지 에센처럼 괜히 칸에 올랐다가 암살당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잠시 감탄한 차하르의 귀족이 비단 보자기에 싼 것을 내밀었다. 이민호와 잠시 눈을 마주친 귀족이 보자기를 풀었다.

“이것은 쿠빌라이 칸 시대에 만들어진 금불상과 한자로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고 새겨진 원나라 옥새입니다. 죄인의 부하가 갖고 있더군요.”

“오! 멋지구려. 원나라 황제들이 썼던 옥새라니, 대단하오.”

“감상은 그것뿐입니까?”

“아! 귀족 분들이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몽골인들에 의해 칸이 옹립되거든 그에게 주도록 하시오.”

원나라 옥새에 이민호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척했다. 대부분 귀족들이 흐뭇하게 웃었으나, 드러내놓고 실망하는 귀족도 있는 것 같았다.

귀족이 다시 옥새와 금불상을 비단 보자기에 묶었다. 이민호는 옥새가 아까워 미칠 것 같았으나 못 본 척했다.

“대왕께서 당분간 옥새를 보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몽골인의 것은 몽골인이 알아서 하시오. 그게 내 원칙이오.”

“분명히 옥새는 분란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오이라트나 명나라 등 옥새를 탈취하려는 자들이 끊임없이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단일 세력으로서 옥새를 지킬 힘이 없습니다.”

칸의 직할령이라서 나름대로 정치적 통일성을 유지해 온 차하르 부는 최대 2만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몽골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할하족은 남부 연맹 5개 부족과 북부의 13개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시기 동몽골에서 병력을 최대한 짜낸다면 전시에 기병 10만 이상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력이 많다 하더라도 귀족들이 전쟁에 합의한 때에 한해 집결할 수 있었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서 유목에 종사하는 몽골족 특성상 평시에 강력한 적 부족에게 기습을 당하면 막아낼 방법이 별로 없었다.

“그런 문제가 있겠구려. 그럼 당분간 내가 보관할 테니 새로운 칸이 즉위하면 언제든지 돌려달라고 하시오. 다만 오늘 대화에 참가한 귀족들에게서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받은 위임장을 가져온 자에 한해 돌려주겠소.”

“그게 좋겠습니다.”

이로써 옥새를 몽골족에게 돌려줄 일은 없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분열된 동몽골 귀족들에게 3분의 2 이상 동의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몽골족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계속 다스리다 보면 언젠가 이민호에게 칸의 칭호가 저절로 붙게 돼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 홍타이지는 차하르를 격파하고 금불상과 원나라 옥새를 릭단칸의 아들 보르지긴 에제이로부터 얻는다. 그리고 나서 1636년 심양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만주인과 내몽골 지역 몽골인들의 대칸으로 등극한다.

“소문을 듣자면 대왕께서는 동해국에 거의 자치를 허락하셨지요. 몽골도 딱 그 정도 자치 수준을 보장해주신다면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할 것 같습니다. 대왕께서 힘없는 동해국 여진족들을 보호해주고 부유하게 만들어줬다는 소문을 듣고 있습니다.”

동해국을 명목상 독립국으로 놔둔 덕택에 고산국에 대한 몽골 귀족들의 호감도가 올라가 있었다. 몽골에서 칸이 된 자들은 피곤하게도 돈이 안 되는 몽골 통일과 중원 정복이라는 숙원을 이루겠다면서 걸핏하면 병력을 징집하는 식으로 귀찮게 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일신의 평안과 부귀영화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칭기즈칸 후손으로서의 황금 씨족이야 지금도 흔했지만 쿠빌라이 칸의 직계 황족이 아닌 자들은 더욱 야심이 적었다.

“동해국을 완전히 자치에 맡겨둔 것은 아니요. 동해국 지원을 담당하는 그 지역 출신 후궁이 있소.”

“아! 북방여공작 말씀이십니까? 자애롭고 훌륭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째서 대왕께서는 저희들의 원수인 명나라 도적 두목의 딸을 취하셨습니까?”

“주상아 공주 말이오? 예뻐서요.”

명나라 황법에서 공주는 고관대작에게 시집가지 못하게 돼 있고, 당시 시집갔다가 소박맞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민호가 주상아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것에 정치적인 목적이 없었다고 못 박자 귀족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아주 좋습니다. 그럼 저희 동몽골 귀족들이 합의한 사항을 대왕께 전해드리겠습니다. 발표를 맡게 돼서 영광입니다.”

귀족들끼리 합의했다는 결정을 이민호에게 일방적으로 제시했다. 포로들 주제에 참으로 오만했지만 이민호에게 손해가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묵묵히 기다리다가, 갑자기 궁금증이 들었다.

“평민들은 알고 있소?”

“예. 당연히 평민들이 알고 있고, 또한 동의했습니다. 저희 귀족들이 왕은 아니지 않습니까? 항상 평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만 동의했다는 말은 쏙 뺐다. 전쟁은 귀족과 자유민 성인 남성의 권리이므로 참전자들이 그 부족의 전체 의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합의사항이 뭐요?”

“저희 차하르 부, 할하 남부 5개 부족 연맹, 할하 북부 13개 부족, 그리고 기타 몇몇 부족들이 고산국 대왕을 주군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보얀 체첸칸과의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대왕이시여!”

“대왕이시여!”

동몽골 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이민호를 칸으로 추대한 것이 아니라 다만 보호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동몽골이 이번 전투에 기병 5만 이상 동원했다 했더니 역시 할하 북부 여러 귀족들이 참전했다. 보얀 체첸칸이 부자인 고산국 국왕을 사로잡으면 막대한 몸값을 받아서 나눠주겠다고 부족장들에게 약속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칸은 되도 않을 욕심을 부리더니 혈족이 멸망하고 모든 것을 잃었다.

“뭐, 돌아가신 칸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니 일단은 그렇게 하시오. 그러나 이 지역에 새로운 칸이 세워지면 그것으로 우리의 관계는 끝이오. 그리고 앞으로 10년 이내에 독립하시오.”

“10년은 너무 짧습니다. 아이들을 키울 시간을 주십시오. 일단 20년으로 하고, 그때그때 사정을 봐서 보호 기간을 연장해주십시오.”

“영역이 넓어지고 백성이 늘어나면 그만큼 통치 비용이 많이 드는 법이오. 그런데 몽골에는 딱히 세금을 낼만한 부자가 별로 없지 않소?”

“귀족들이 좀 모아서 바치겠습니다, 대왕.”

이민호가 피식 웃었다. 한때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지만 몽골, 특히 동몽골은 결코 부유한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원 유목민과 농경민의 경계 지역에서 개인 가계로 따지면 농민보다 유목민이 부유했다. 그러나 잉여 생산물을 일정 기간마다 모아서 국가조직을 운영하기에는 농경지역이 훨씬 유리했다.

특히 몽골인들은 원나라가 망할 때 대도 북경에서 쫓기듯 초원으로 돌아오면서 재산 대부분을 잃었다. 그리고 오이라트가 황도 카라코룸까지 포함한 동몽골 지역을 지배했을 때는 오이라트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황족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당연히 재산은 다 빼돌려졌다.

서몽골의 오이라트도 가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토목보의 변은 마시의 교역 규모 확대를 요구하는 몽골과, 유목민을 통제하기 위해 교역 규모를 줄이려는 명나라가 충돌한 탓에 일어났다. 몽골은 곡식과 철, 차 등 많은 것이 필요했으나 팔 것은 말 뿐이었고, 말 숫자가 심각하게 줄어들었는데도 말 값은 싼 편이었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명나라 중기 이후 계속해서 만리장성 주변 지방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겨우 10 몇 년 후 동몽골의 릭단칸이 건주 여진을 견제해주는 조건으로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매년 은 6만 냥을 받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아주 비싸게 치렀다. 누르하치와 혼인동맹을 맺은 동몽골 여러 부족들의 반란으로 릭단칸이 동몽골에서 쫓겨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제 전투에서 전사한 여진과 토르구트 기병들의 유족에게 은 100냥씩을 위로금으로 전달하기로 결정했소. 비록 반대편이었다 하지만 몽골 기병들에게도 은 열 냥씩을 낼 테니 가족에게 전달해주도록 하시오.”

“히익! 일인당 열 냥이라면 20만 냥에 가깝습니다! 대왕을 위해 싸운 토르구트와 여진 기병들은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돈을 대왕께 대항해서 싸운 몽골 전사자들의 유족에게 나눠준단 말씀이십니까?”

“아깝소? 당신들 돈도 아닌데 가난뱅이들에게 돈이 가는 게 아까워 죽겠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다한 지출을 하시면 앞으로 몽골에서 과다한 세금을 걷으실까 걱정됩니다.”

“나는 몽골인들에게서 세금을 걷지 않겠소.”

귀족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이민호가 뭔가 다른 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던 것이다.

“대신 몽골의 땅속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갖겠소. 아니, 채굴비용을 제외한 이익의 절반을 내가 갖고 나머지는 몽골인들을 위한 일에 쓰겠소.”

이익 절반을 몽골인들을 위한 일에 쓴다는 말은, 몽골인들에게 안 나눠주고 고산국에서 다 쓰겠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몽골인들이 먹고 살게는 해주겠지만 돈을 나눠받은 몽골인들이 직접 투자하는 것과는 차이가 컸다.

“저희들을 보호해주시고 먹고 살 길을 마련해주신다는데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그렇게 하십시오. 하오나 대왕께서는 몽골에 금이나 은이 난다고 보십니까?”

“그거야 나는 모르오. 어떤 지형에 어떤 자원이 나는지는 고산국 과학자들이 알고 있소. 몽골 사람들에게도 분명 이익일 것이오.”

현대를 살았던 이민호에게 기억나는 것은 광대한 노천 탄광의 사진들뿐이었다. 그러나 탄광의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그 외에 몽골에는 구리와 형석, 몰리브덴이 많이 나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물론 정확한 위치는 하나도 몰랐으니 본토의 광산 전문가들이 탐색을 해야 했다.

“어쨌든 앞으로 고산국과 동몽골 여러 부족들이 잘 협력해 나갑시다.”

“대왕! 전쟁은 언제 시작하실 건지요?”

몽골의 적은 동쪽의 건주 여진, 남쪽의 명나라, 서쪽의 오이라트였다. 만만한 적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몽골 귀족들은 복수나 몽골족의 영광, 몽골 땅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제행위로서 전쟁을 원했다.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드오?”

“그건 아닙니다만, 내 자식의 불알을 키우려면 남의 자식의 불알을 떼어서 먹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에게 남는 건 기병밖에 없습니다.”

내 자식 불알 운운하는 것은 숫양, 수소 등을 거세하면서 깐 불알을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침략과 약탈에도 적용됐다.

“앞으로 몽골인들이 다른 지역을 약탈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겠소.”

“대왕께서는 전쟁을 하지 않으실 겁니까? 강하다고 알려져 있고 어제 직접 확인했습니다만, 고산국이 군사력을 통해 이익을 취하지 않아서 의아합니다.”

“전쟁은 길게 보면 손해라서 그렇소. 고산국이나 동맹 속국이 먼저 다른 지역을 공격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오.”

몽골 귀족들이 매우 실망하는 것 같았다. 사내들이란 이익이 하나도 없더라도 전쟁에 로망을 갖고 있었다.

“5년 후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때 지원자에 한해서 데려가겠소. 조금 먼 원정길이 될 것이오.”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에 몽골 기병을 동원하는 것이 이민호가 몽골과 관계를 유지하려는 진짜 목적이었다. 시베리아나 몽골, 러시아는 땅이 너무 넓어서 기병 아니면 동원할 병종이 없었다.

특히 러시아 지역은 장갑차 같은 기계화부대를 투입해도 봄과 여름에는 진흙탕에 갇혀서 꼼짝 못할 우려가 컸다. 그리고 장거리 장기 원정에 투입할 고산국 병력도 그리 많지 않았다.

고산국에는 오랜 기간 적대하는 세력이 없었다. 명나라, 에스파냐 등과 우호를 지속하는 한 방어 병력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민호는 원정작전에는 가급적 외부 병력을 동원하는 쪽을 선호했다. 지금 고산국에 국민개병제를 실시한다면, 백성들을 괴롭히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 루스 차르국인가 하는 서쪽 나라를 대왕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아주 멀리 있는 나라라는데 저희들이 본거지를 비울 동안 오이라트와 명나라, 건주 여진이 발호하면 어떻게 합니까?”

“멀리 원정을 가더라도 몽골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병력 절반은 본거지에 남아야겠지요. 그리고 동몽골이 고산국의 보호 아래에 있는 동안은 함부로 동몽골 땅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오.”

만약 오이라트나 건주 여진이 동몽골을 침범한다면 그 핑계로 두 세력을 박살내놓겠다고 약속했다. 건주 여진은 계속 신경 쓰이는 세력이므로 확실한 실력의 우위를 보여주는 편이 이민호로서도 좋았다.

“명나라는 어떻습니까?”

“명나라는 어느 방향이든 대규모 원정군을 보낼 사정이 안 된다는 것을 귀족 여러분들도 알고 있지 않소?”

지금 만리장성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차 스스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나라가 명나라였다. 자체 방어력을 유지하는 것을 버거워한다면 제국으로서 수명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전투가 있던 날로부터 사흘 후 보얀 체첸칸에 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무덤은 매장한 다음 평탄화시키는 몽골식 평장을 했으며 마지막 지배자의 무덤이 다 그렇듯 부장품은 별로 많지 않았다.

이민호가 개인 자격으로 금은보화를 제공했으나, 도굴을 우려하는 의견이 많아 칸의 유족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비용을 들여 석비를 세우고 추모 공원을 만들었다. 토르구트, 여진족, 몽골족 전사자 묘지도 시간과 비용을 들여 잘 꾸미기로 했다.

“웃기잖아. 누가 센지 붙어보자는 의미 없는 전투였어. 서로 잡아먹자고 전쟁하는 것도 비슷하지만.”

장례에서 돌아온 이민호는 속이 불편했다. 몽골인 전체를 자칫 멸망 위기에 몰아넣은 보얀 체첸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 자체가 싫었다.

뒤늦게 여진족 기병 1만 5천, 동해국에서 출발한 의료진 등이 속속 도착했다. 특히 감동이 기병연대의 나머지 2개 대대와 동해국 여진 기병 2천을 대동하고 왔을 때는 분위기가 아주 살벌해졌다. 몽골 귀족들이 유독 감동 앞에서만 설설 기었고, 항상 쾌활한 감불마저 도련님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며 감동에게 멱살을 틀어 잡혔다고 한다.

============================ 작품 후기 ============================

대칸의 직위를 지금 당장 받기는 어렵겠고, 뭔가 업적을 쌓아야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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