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87 73. 몽골 초원 =========================================================================
가장 급한 것은 탄약, 특히 기관총 실탄이었다. 수송차량들이 숙영지와 울란우데를 오가면서 탄약과 연료를 보급했다.
장갑차에 탑재하는 기관총 2정에 배당된 탄약은 3천 발이었는데, 오늘부터 당장 두 배로 늘렸다. 장기적으로 차량에 탑재하는 소구경 기관총의 탄약을 1정 당 5천 발로 규정하기로 했다. K-2 전차 공축기관총의 경우 탑재 탄약이 12,000발이나 됐다.
해질 때까지 전장 정리를 실시했다. 몽골인 전사자 1만 5천 정도가 발생해서 포로들을 시켜서 땅을 파고 묻었다. 여름 궁전에 세운 사원에서 티베트 스님들이 와서 제를 지냈다. 여름철에 전염병이 퍼질까봐 죽은 말 2만여 마리도 땅에 묻었다.
토르구트 기병들은 전투를 끝내고 나서 전사자들에 대한 장례를 정중하게 진행했다. 여진족이 토르구트 전사자들의 시체에서 물건을 약탈한 것 때문에 두 종족 사이에서 다툼이 좀 있었다. 여진족은 몽골족 포로들에게 시켜서 동료들을 매장했다.
토르구트와 여진족, 몽골족 부상자들을 출신별로 따로 세운 대형 천막으로 옮겨서 고산국 군의관들이 응급 처치를 했다. 동해국에 주둔한 군의관과 의사들이 의약품과 함께 기차를 타고 와야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했다.
“야! 똑바로 일하지 못해? 너희들 때문에 아군이 29명이나 죽었어! 네 놈들을 다 죽여 버릴 거야!”
기병대대 소속 병사 하나가 몽골족 포로를 걷어찼다. 병사는 이번 전투에서 몽골군이 1만 5천 이상이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동료로서 함께 싸웠던 토르구트나 여진족 기병에서 각각 천 명이 넘어가는 전사자가 발생한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봐!”
“예! 전하!”
“전사한 보급대 사람들을 아나?”
“모, 모릅니다, 전하.”
“나는 알아. 보급대장 최성한 소령은 조선에서부터 나하고 같이 일하던 사람이야. 해동상단에 남았다면 대방이 될 수도 있던 훌륭한 인품을 가진 분이었지. 공병대에 파견 근무하던 국방연구소 김 씨는 10년 넘게 기관을 연구하던 인재야. 오늘 내가 얼마나 슬프고 화가 나는지 아나?”
“모, 모르겠습니다!”
병사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민호는 보급대장과 연구원이 죽은 것 때문에 몹시 분노하고 있었고, 그 분노가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괜히 포로를 건들지 마. 이들은 자기 부족과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싸운 사람들이야. 방금 네가 한 짓 때문에 몽골인들의 불만이 커지면 그걸 해결하는데 큰돈이 들 수도 있어. 네가 그 손해를 배상할 거야?”
“죄송합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 오늘처럼 고산국 사람들이 죽으면 네가 되살려줄 거야?”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교전규칙 배웠지? 그대로 해.”
교전규칙은 정전과 전시로 나눠 대한민국 국군에도 규정돼 있었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살아온 일반 국민들이 아는 상식과 꽤 많이 다르고, 2급 기밀로 분류되고 규정이 어려워 단순한 문장으로 바꿔 병사들에게 전달된다고 한다. 그러나 제대할 때까지 못 들어본 사병들도 흔했다.
군인들과 관련해서 애매한 규정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군의 군인복무규율 34조 초병의 무기 사용 항목 같으면 ‘야간에 3회 이상 수하하여도 이에 불응하여 대답이 없거나 도주하거나 초병에 접근할 때’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돼 있었다. 그러면 주간에는 자위권 행사 외에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초병이 무기 사용을 못한다는 문제가 생겼다.
고산국 육군과 해군에서는 교전규칙이든 복무규율이든 알기 쉬운 문장으로 명백하게 규정돼 있었다. 괜히 책임을 일선 실무자들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제가 포로가 됐다면 저들은 교전규칙대로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처형할 수도 있겠지만, 더 관대한 처분을 내리기도 해. 상대방 장수의 기분에 따라 예상하기 어려운 처분을 받겠지. 그 전에 포로가 되지 않도록 해라.”
그때 남자 호위가 이민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전하. 부리야트의 타이지들이 알현을 신청한다고 합니다.”
“멀리 안 도망가고 구경했나 보네. 천막으로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부리야트의 타이지 10여 명이 벌벌 떨면서 천막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땅에 엎드려 이마를 찧었다.
“비겁한 저희들을 죽여주십시오, 대왕이시여!”
“꾹 참으려고 했는데 너희들 얼굴을 보니까 진짜 죽여 버리고 싶어진다. 어느 나라든 적전도주는 무조건 사형이야.”
“살려주십시오, 대왕이시여!”
“부리야트가 약한 부족인 것을 안다. 오죽하면 다우르 족 몇 백 명에게 본거지를 잃고 도망가겠나?”
그러나 부리야트는 몽골족의 위엄을 자랑하며 시베리아의 숲속 부족들에게 위세를 부렸다. 몇몇 부족들에게는 공물도 받았다. 시베리아 전체를 장악하려면 부리야트와 여러 숲속 부족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도 전시에는 절대로 부리야트를 동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은 다른 몽골족과 달리 초원의 전사로서 자질이 많이 부족했다.
그런데 소문을 듣자면 숲에서는 바로 이들이 끝판대장에 해당할지도 몰랐다. 고산국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부대가 우수한 무기를 보유하고 높은 훈련도가 특징인 특전대대와 탐사대였다. 그러나 부리야트 사람들과 숲에서 싸울 경우 비슷한 손실비율이 발생할 것이라고 이면 항공대장이 평가했다.
“부리야트 부족만이 바이칼 주변의 자작나무를 벌채할 수 있는 특권은 그대로 인정해주겠다. 대신 목재 가격을 절반으로 인하하겠다. 부리야트의 상황이 그러하니 벌은 그 정도로 끝내지.”
“감사, 감사합니다, 대왕!”
성인 두 명이 기차를 타고 500km를 가려면 근처에서 자작나무 한 그루를 베어서 기차역으로 옮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 두 그루를 베어 옮겨야 한다. 목재 하나를 둘이 들어야 하니 두 번 왕복해야 했다.
“다른 몽골 부족들처럼 부리야트도 말을 잘 타고 대규모 기병부대도 운용하는데 왜 그리 못 싸우는가?”
“저희들은 숲이나 산에서 주로 생활합니다. 말 등에 짐을 싣고 다니지 사람이 타고 다니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다른 부족들과 싸울 때 전투력에서 말도 못하게 차이가 납니다. 말을 탄 적과는 아예 싸우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 조상 대대로 유훈이었습니다.”
“그럼 진작 말을 했어야지. 어쨌든 숲 생활이 더 익숙하다면 이해할 수 있지. 이만 나가보게나.”
부리야트 족 타이지들이 나간 다음에는 여진족 패륵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말만 패륵이지 부족장이 아닌 작은 마을의 촌장 정도였고, 부족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건주 여진에게 쫓기는 도망자 신세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다들 얼굴에 상처투성이였고 가죽갑옷에는 화살에 관통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부상자들도 눈에 띄었다.
“동해국의 칸이시여! 저희들은 몽골족보다 더 잘 싸운다고 자부해왔습니다. 몽골족과 일대일이나 비슷한 숫자끼리 붙으면 저희들이 거의 항상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대규모 전투를 해본 결과 많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게 됐습니다.”
“부족 간의 분쟁과 국가 간의 전쟁은 많이 다르지.”
“만약 오늘처럼 격렬한 전투가 또 있다면 저희들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이 살 길을 마련해주십시오.”
“마련해주십시오!”
패륵들이 일제히 외치는 순간 이민호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진족 전사들이 평소에 워낙 거세고 자신만만해서 고산국의 젊은 장교를 지휘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여진족의 자부심과 고집을 잘 아는 이민호도 억지로 지휘관을 보내지 않았다.
오응태나 정문부처럼 여진족들을 휘어잡을 정도로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들이 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여진족 중년 전사들 입장에서는 기마실력이 떨어지는 고산국의 20대 후반 대위 정도는 만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지휘관을 뽑아서 오늘 전투에 참가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선두로 달려 나간 연대장이 전투 초반에 맥없이 전사하고 대대장 4명 중에서 한 명만 살아남았다. 유일한 생존자는 낙마 후 말발굽에 밟혀서 중태였다.
전투 중반부터는 여진 기병들을 지휘할 사람이 없어서 우르르 몰려다니다가 몽골 기병들에게 일방적으로 활도 아닌 칼에 도륙당한 적도 있었다. 토르구트 기병들이 위험한 순간마다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살아서 올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기병 500명 이상을 지휘해본 사람 있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희들은 작은 부족이나 마을 출신들입니다.”
“지휘관을 키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워. 작은 부대부터 차근차근 경험을 쌓게 해줘야 하거든. 책이나 강의를 통해 배우는 것도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 경험이야.”
“저희들이 이미 나이가 들어서 지휘 경험을 쌓는다 해도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동해국 국왕대리 겸 만호 아오지는 행정가로서, 그리고 군사 지휘관으로서 꾸준히 성장했다. 처음에 형제, 친척들과 함께 300명을 지휘하던 아오지는 겨우 몇 년 만에 1만 명을 지휘하고도 여유가 넘쳤다. 이렇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으나, 이들 여진족에게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대들은 패륵으로서 작은 기병부대를 지휘하는데 장점이 있다. 그래서 용병부대 중대장 정도가 딱 맞다. 150명까지만 지휘해라.”
고산국 군대에서 외국인 용병에게는 상사 계급을 주어 중대장을 맡기고, 그 이상 제대에서는 고산국 장교가 지휘를 맡았다. 고산국 육군 중대장의 계급은 원래 대위였다. 중대장 경력이 있는 고참 대위가 용병부대에서 같은 계급으로 대대장이나 부대대장을 맡았다.
“맞습니다. 현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남자라면 더 많은 병력을 지휘하면서 더 큰 승리를 꿈꾸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그대들에게 더 큰 부대를 맡길 수는 없다. 오늘 같은 꼴을 다시 보게 될 테니까. 대신 그대의 자식들, 아니면 어린 동생을 고산국 사관학교에 맡겨라. 훌륭한 장교로 키워주겠다.”
“실로 은혜롭습니다, 위대한 칸이시여!”
천막에서 나가려는 여진족들을 붙들어두고 토르구트 타이지와 귀족들을 불러서 조촐한 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토르구크 귀족들과 여진족 패륵들이 화해하도록 했다. 티격태격 다투던 이들이 어느새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까지 하게 됐다.
이민호가 사상자들이나 유족들에게 은 100냥씩 위로금으로 지급하겠다고 해서 연회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고산국이나 북미에서는 별 것 아닌 금액이지만 이 지역에서는 꽤 큰돈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동몽골의 귀족들이 말을 타고 숙영지로 몰려왔다. 새로운 적 병력인 줄 알고 경계병들이 깜짝 놀랐으나, 지금도 벌판에 널린 것이 말이었다. 심지어 포로들마저 변소에 갈 때 말을 타고 다니기도 했다.
어제부터 토르구트 기병들이 동원돼 벌판에서 몽골 전마 3만 마리를 잡았고 아직 1만여 마리를 쫓고 있었다. 여름 궁전이나 몽골 부족들의 숙영지는 위치만 확인하고 말을 몰수하지 않았다. 말을 안 주고 포로들을 벌판에 내버려두면 다들 굶어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귀족들께서는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이오? 좀 일찍 왔구려.”
“그 문제가 아닙니다. 대왕! 강물에 독을 푼 자를 처벌해주십시오.”
밧줄에 묶여 무릎을 꿇은 자가 다섯 명이었다. 가장 어린 한 명은 입에 재갈을 물렸어도 이민호의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칸의 손자를 모르는 체했다.
“몽골에서 강물에 독을 푼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형 아니오? 강물에 빨래를 한 자, 가축을 잡으면서 땅에 피를 흘린 자 등등이 처벌을 받는다고 알고 있소.”
“이 자들이 우리들을 다 죽이려고 아침 식사 직전 화부들이 물을 긷는 시간에 독을 풀었습니다. 그래서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잡아왔습니다.”
칸의 손자가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뭐라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이민호는 못 들은 척하고 계속 귀족들과 대화를 나눴다.
차하르 부와 할하 남부 귀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칸의 손자는 어제 이미 전사했다, 이민호도 속아주는 척 넘어갔다. 그랬기에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는 칸의 손자가 아닌 것으로 간주했다.
“고산국에서는 독으로 인한 피해가 없었습니까?”
“우리는 바이칼에서 수질시험을 통과한 물을 수송해서 먹고 있소. 어딜 가든 현지의 물을 바로 안 마신다오.”
그래서 바로 옆에 강물이 흐르는데도 며칠째 목욕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죄인들을 나에게 데려왔소?”
“그야 대왕께서 칸과의 약속을 지키신다면 재판 결과에 대한 최종적인 재가를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몽골 귀족들은 칸의 손자를 어떻게든 살리려 했었다. 그러나 아침에 강물에 독약을 푼 것으로 알량하게나마 남아있던 칸의 후계자에 대한 경외심이 한 순간에 날아갔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초원의 법이었다.
그러나 자기들 손으로 칭기즈칸의 혈통을 이은 칸의 손자를 직접 죽이기에는 너무 두려웠다. 그래서 이민호에게 책임을 분담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재판권은 몽골 귀족들이 가지는 것이 아니요?”
“일반 범죄는 그렇습니다만,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에 한해서는 당연히 대왕께서 재가를 해주셔야 합니다.”
“그런 죄를 지은 자는 볼 것도 없이 사형이오. 지금 즉시 목을 베어 군문에 효수하시오.”
“대왕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제 이민호와 동몽골 귀족들은 같은 배를 타게 됐다. 이 문제로 다른 지역 귀족들이 비난할 것이 분명했지만, 초원의 법을 어긴 자를 처벌하는 것은 귀족들의 의무였다.
칸의 손자가 사형 집행을 받기 위해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며 민정이 거의 얼이 빠졌다.
“왜?”
“겨우 열두 살짜리 아이를 처형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저 아이가 너무 악독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부하들이 항복했다고 강물에 독을 탈 생각을 하다니요.”
“그냥 어린애가 아니라 칸의 손자다. 혈통은 그만큼 무거운 것이다.”
그러나 칸의 손자가 진짜로 부하들을 시켜 강물에 독을 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동몽골 귀족들이 칸의 손자에 대한 처분 문제를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린 것으로 이해했다.
만약 칸의 손자가 일반적인 사람과 비슷한 생각을 한다면 몽골 귀족들이 웬만해서는 다음 대 칸으로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칸의 혈통으로서 그 평범한 일반인이 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칸이 갑자기 전사하는 바람에 후계구도를 하나도 준비하지 못했다. 칸의 손자는 가장 취약한 시기에 칸이 될 꿈만 꾼 채 그렇게 죽어갔다.
이로써 칭기즈칸과 쿠빌라이의 제국을 계승한다는 의식을 가진 북원은 완전히 사라졌다. 동몽골 귀족들이 스스로 칸의 혈통을 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이민호도 나눠서 지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4년 후에 북원의 마지막 대칸 릭단칸이 될 아이인데 이번에 죽여버렸습니다.
다음은 츤데레 같은 몽골 귀족들과의 협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