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86 73. 몽골 초원 =========================================================================
비행기 하부 폭탄창에서 기계 장치를 통해 투하하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 승무원이 손으로 폭탄을 들어서 떨어뜨리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폭탄의 위력은 마찬가지였다.
- 콰쾅! 쾅!
- 따다다닷! 따다닷!
몽골군 좌익과 우익이 몰려 있는 곳에 비행기 두 대씩이 교대로 폭탄을 투하하고, 양쪽으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몽골 기병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날벼락에 몹시 놀랐다. 몽골인들은 무지막지 좋은 시력으로 비행기가 어느 정도 고도로 나는 줄을 파악했기에 섣불리 하늘을 향해 활을 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남쪽으로 퇴각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비행기들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꾸준히 공격을 퍼부었다. 말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비행기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지휘관이 흩어져서 도망치라고 지시해도 다들 겁에 질려서, 그리고 서쪽과 동쪽에 강이 흐르고 있어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시 뭉치게 됐고, 피해는 점점 커졌다.
비행기가 계속 쫓아다니자 얼마 가지 못해 좌익과 우익의 기병들은 똑같은 선택을 했다. 말에서 내린 다음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비행기들이 저공비행과 위협사격을 통해 포로들을 다시 북쪽으로 내몰았다.
“포로를 인수해!”
장갑차들이 몰려가 몽골 기병들을 무장 해제시킨 다음 북쪽으로 걷게 했다. 몽골 기병들은 비행기와 장갑차에 얼이 빠져서 제대로 저항도 못했다.
몽골 기병들이 타고 왔던 말이 수천 마리이며 이에 더해 전투 중에 말을 교환하는 몽골 기병 특성상 주변에 말이 서너 배가 더 있었지만 잡아들일 틈도 없어서 내버려두었다. 여름 궁전이나 협력 부족들의 숙영지에도 많은 말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지금은 손을 쓸 틈이 없었다.
몽골 기병 좌익과 우익이 항복함으로써 주 전장에서의 전투가 끝났다. 비행기들은 이번에는 북쪽으로 날아가 토르구트 및 여진 기병이 동몽골 기병들과 싸우는 현장 상공에 도착했다. 그러나 복장과 깃발만으로 피아를 구분하기 어렵고, 더욱이 서로 뒤섞여 싸우고 있어서 안타깝게도 아군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건 비행기 조종사들의 생각이었을 뿐, 몽골 기병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전투 초기에 폭격을 당했던 몽골 기병들은 토르구트 기병과 교전 중에 비행기들이 다시 나타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토르구트 기병들이 그들을 뒤쫓는 동안, 여진 기병들은 전리품을 챙기느라 바빴다. 이민호가 상공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면서 통신기의 송수화기를 잡았다.
“항공대장! 여름 궁전 주변에서 적의 숙영지 위치를 파악하라.”
- 넵! 대첩을 경하 드립니다, 전하. 적의 매복지를 미리 찾아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귀관의 잘못이 아니다. 예로부터 몽골군은 작전범위가 워낙 넓어서 비행기 100대가 초원과 숲을 샅샅이 뒤지고 다녀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 항공대가 큰 공을 세웠다. 이면 중령.”
- 아악! 저 승진시켜주면 조종을 못합니다!
“대령까지는 비행해도 좋다는 특명을 내리겠다.”
서로의 힘을 흡수하려는 욕심에서 시작했던 전투는 동몽골 여러 부족에 큰 인명피해를 낸 끝에 결국 고산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결말이 났다. 그러나 칸에 협력했던 동몽골 부족들이 승리자 고산국의 지시를 따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동몽골 부족들을 이민호가 장악하기를 원하는 민정이 건의했다.
“어서 병력을 보내 여름 궁전을 점령해야 해요. 귀족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귀족들에게서 충성 맹세를 받으세요.”
그러나 배반을 밥 먹듯이 하는 몽골 귀족들이 과연 충성맹세를 지킬지 의심스러웠다. 몽골 귀족들을 강제로 복속시키려면 주변에 강력한 부대를 주둔시켜서 감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숙영지에 먼저 가보자. 피해가 클 거야.”
장갑차들이 몽골 포로들을 한쪽으로 내모는 동안 1호차는 숙영지로 향했다. 숙영지 안에는 거대한 폭발 구덩이가 생겼고 여기저기 불타서 꽤나 처참한 모습이었다. 여기까지는 이민호도 예상했다.
그런데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아서 조금 놀랐다. 몽골족의 기본 전술에 따라 우회 공격했던 적 기병들은 이미 퇴각한 다음이었다. 기동력이 뛰어난 몽골족은 유인과 포위, 우회 등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것은 일정 비율을 차지하는 보병을 방어에만 활용하고 주로 기병만으로 원정을 가는 여진족도 마찬가지였다.
이민호가 숙영지를 적의 우회 공격에 방치해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 날 야습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참호 장애물과 철조망으로 방어력을 보강해 자체 방어력은 충분했다. 후방으로 우회하는 적으로부터 본대를 지켜주는 요새 역할을 기대하기도 했다.
철조망을 뛰어넘으려다가 걸려서, 혹은 참호에 빠져서 죽은 몽골 기병들과 말 수십 마리를 볼 수 있었다. 몽골 기병들이 집중적으로 뚫고 들어온 동쪽 철조망 부근에서도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결국 치열한 전투 속에서 철조망이 뚫렸고, 숙영지 안쪽 탄약상자를 쌓아둔 곳이 폭발해 큰 구덩이를 남겨 놓았다. 하지만 민간인 200명을 합해 500명 정도인 숙영지 잔류군에 의외로 인명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잔류군이 보급차량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저항하고 급한 상황에서 기병대대가 외부에서 도와줬기 때문이라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보급차량을 너무 믿었나 봐. 제원은 비슷해도 비전투용이라는 한계가 있어.”
“그래도 저 차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보급차량은 다기능 차량과 비슷하게 생긴 장갑차와 외모가 거의 흡사한 장갑차량이었다. 다만 기관총은 운전석 위에 한 정만 탑재했고, 보병 탑승 공간이 없어서 총안구가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보급차량이 숙영지에 배치된 것만 20대였지만 사방에 흩어져 있는 바람에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급히 지원하러 오던 한 대는 탄약고 폭발에 휘말려 전소됐다.
“군의관! 어떻게 된 일이오?”
“보급대장은 전사했습니다, 전하.”
부상자를 돌보던 군의관이 계속 붕대를 감으며 보고했다. 군의관도 전투 초기에는 총을 들고 싸웠다고 한다.
보급대장은 보급대와 공병대, 정찰대 기타 잡다한 부대 장병, 그리고 민간인들을 이끌고 숙영지를 돌파한 몽골 기병으로부터 주로 3인치 포탄이 든 탄약상자를 지키려고 싸웠다. 그러나 5천이 넘는 몽골 기병들이 큰 희생 속에 철조망을 절단해낸 다음 숙영지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탄약저장고 주변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중에 보급대장은 화살 열 발을 넘게 맞고 전사했다. 숙영지 방어지휘관으로 임명된 보급대장 옆을 지키던 통신병도 바로 이때 전사했다.
그러나 몽골 기병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멋모르고 탄약상자에 횃불을 던졌다가 거대한 폭발에 휘말려 떼죽음 당했다. 숙영지가 적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것은 몽골군 우회부대의 지휘부가 몰살하면서 지휘체계가 붕괴된 탓이 컸다.
“전사 23명, 실종 6명, 부상 57명입니다.”
치열하게 전투를 수행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된 군의관이 그렇게 보고했다. 실종자는 대부분 보급대 소속으로서 탄약상자 주위에서 싸우다가 생사여부를 파악할 수 없게 됐으니 전사한 것으로 봐야 했다.
부상자 중에서 다수는 조리장과 세탁부 등 군속, 간호사 등 민간인들이었다. 보급대 등 군인들은 비전투 병과 소속이라도 방탄장비를 착용하고 평소 전투훈련을 반복한 덕택에 인명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화살에 맞은 부상자들 대부분을 군의관들이 구해냈다.
“실종자의 유품을 정리하라고 하시오. 전사자들을 먼저 울란우데로 보내 냉동 처리를 해야겠소.”
“전사자 시신과 실종자 유품은 영현 가방에 이미 안치했습니다. 이송 허가를 내주십시오, 전하.”
그 사이 몽골 기병을 추격하던 토르구트 기병 일부가 숙영지로 돌아오고 있었다. 기병들 중에서 토르구트의 타이지가 이민호를 발견하곤 빠르게 달려와 보고했다.
타이지는 고산국 군대의 강력함을 확인해서 그런지, 아니면 전쟁 기간이라서 한시적으로 최고 지휘관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건지 이민호 앞에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다른 토르구트 귀족들도 무릎을 꿇었다.
“왕이시여! 동몽골 기병은 북동쪽 계곡으로 도주했습니다. 일단 계곡을 봉쇄했습니다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항복을 권하되, 여름 궁전 문제를 마무리할 때까지만 계곡 입구를 지켜주시오. 토르구트는 역시 이름 그대로 훌륭한 호위병들이오.”
“영광입니다, 왕이시여! 그 어떤 칭찬보다도 저희들을 기쁘게 하는 말씀이셨습니다.”
토르구트는 몽골어로 원래 비단이란 뜻이다. 그리고 케레히트의 옹칸 토그릴 휘하에서 근무하며 갑옷 안에 화살촉 관통 방지용 비단옷을 입은 정예 호위병들을 지칭했다. 비단옷이 정확히는 화살촉이 갑옷을 관통한 다음 몸에 꽂히더라도 찢어진 옷감이나 쇳조각 등이 사람 몸에 틀어박히지 못하도록 막는 기능을 했다.
“전리품과 상금 이외에 토르구트에 어울리도록 오늘 참전한 모든 이들에게 비단옷을 두 벌씩 하사하겠소. 부상자는 고산국 병원에서 완치될 때까지 치료할 것이며 전사자의 유족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하겠소.”
“더 없는 영광입니다. 왕께서는 이번 전투에 참전한 동몽골 부족들을 어찌 처리하실 계획이신지요?”
“약속은 약속, 일단 고산국에 속하는 것으로 하겠소.”
“그들은 틀림없이 배반할 것입니다. 인질이라도 받으셔야 합니다.”
몽골의 여러 부족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약속을 지킨다면 보얀 체첸칸은 몽골 전체의 지배자가 되어야 했다. 물론 보얀 체첸칸은 명목상 북원의 대칸이지만 현재는 겨우 차하르 부만 제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
“희망자에 한해서 유학생을 받겠소.”
“음. 아마 다 보낼 것입니다. 귀족의 자제가 맞더라도 버린 자식 취급하는 경우도 많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상관없소. 대신 바로 이 지역에 요새 도시를 하나 만들까 하오.”
이곳은 몽골 초원의 거의 북쪽 끝이며 현대 지명은 대장장이를 뜻하는 다르항이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울란바토르에서 북쪽 약 200km, 울란우데에서 200여 km에 위치한다.
지형은 기본적으로 평원이긴 하지만 좌우에 강을, 그리고 산을 끼고 있어 방어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몽골군이 남북 축만 이용했지 동쪽과 서쪽에서 몰려오지 않은 이유였다.
“현재 몽골 부족들의 분포로 볼 때 이곳은 매우 북쪽에 치우친 곳입니다. 몽골족 전체를 지배하기에는 적당한 곳이 아닙니다.”
“그렇소. 이곳에서 바로 남쪽이 고산국 속국 부리야트와 몽골의 국경선이 될 것이오.”
“바이칼 호반은 모든 몽골 부족들의 발원지입니다. 그러나 이 남쪽을 몽골의 영토로서 확실히 보존해준다고 선언하면 동몽골 부족들이 고산국의 영토로 인정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국경 협정을 받아들이도록 해야지요.”
“오늘 패배한 몽골 부족들을 지배하지 않으시겠다니 놀랍습니다.”
“사실은 지배를 하고 싶소.”
그때 갑자기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뭔가 했더니 계곡으로 도망쳤다던 동몽골 기병들이 포로로 잡혀 토르구트 기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끌려오고 있었다. 수상비행기가 계곡에서 동몽골 기병들을 발견하고 공격하기 직전에 항복했다고 한다.
“잘 됐소. 그런데 인명피해는 어느 정도요?”
“1만 기 중에서 1,200기 정도가 전사하고 2천여 기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여진족 기병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부상병들을 숙영지로 옮기도록 하시오.”
비율로 따지면 5천 기에 불과했던 여진 기병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셈이었다. 토르구트의 타이지는 여진 기병에 대한 평가를 피했지만, 숙영지에서 직접 본 군의관의 말로는 형편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개인의 전투 능력은 우수한 편인데 지휘체계가 제대로 안 잡힌 탓이 클 것 같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울란우데 역에 무전을 쳐서, 나머지 여진 기병들을 이곳에 싣고 오도록 했다. 대부분 철도 주변에 주둔하고 있기에 기차 이동 하루에 기마 이동 이틀을 포함해 사흘 정도만 기다리면 모두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다. 의료진도 급파하도록 요청했다.
“포로가 어마어마합니다, 왕이시여. 4만이 넘겠습니다.”
“몽골족 전사자보다 포로가 더 많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오.”
“저들이 왕의 것이 된다면 덜 죽는 게 낫습니다.”
여름 궁전에 머물렀던 귀족의 가족들은 극히 일부만 빼놓고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 극히 일부에 칸의 손자가 끼어 있는 것으로 추정돼서 조금 문제였지만, 즉위하기도 전에 힘을 잃은 후계자라서 일단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러나 칸의 손자이며 후계자로 자랐기에 얌전히 숨어있지 못하고 반드시 드러날 것으로 예상했다. 능력 없는 자는 혈통에 집착하게 돼 있었다.
여름 궁전에서 전투의 향방을 지켜보던 나이 든 귀족들이 먼저 움직여 이민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투에 참가했던 청년과 중년 귀족들은 죽었거나 사로잡혀 다른 포로들과 함께 전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고산국의 대왕이시여! 부디 칸의 장례를 치르도록 해주십시오.”
“상주는 누가 맡소?”
이민호가 차하르 부의 귀족에게 물었다. 귀족은 몹시 원통하게 울다가 대답했다.
“칸의 손자도 오늘 전사해서 상주는 다른 귀족께서 맡으실 예정입니다.”
“칸의 손자가 죽어요?”
“시신을 찾지 못했지만 전투 중에 전사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안 믿겨지십니까?”
“알았소. 그렇게 하고, 포로들에 대한 보급은 당신들이 책임지시오. 그리고 내일 아침에 귀족들을 모아서 나한테 오도록 하시오. 귀족이 아닌데도 궁금한 사람이 참가해도 좋고, 귀족인데 귀찮으면 참가 안 해도 좋소. 저기서 일하는 포로들 중에 귀족이 있으면 알리시오.”
귀족들이 동시에 움찔했다. 승리자가 패배한 세력의 귀족들을 모아놓고 몰살시키는 것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종종 발생하는 일이었다. 이민호는 죽이지 않겠다고 보장한 것이었는데, 역사상 귀족들을 몰살시킨 자들은 항상 비슷한 말을 해서 안심시켰기에 저들이 믿을지는 알 수 없었다.
“저, 대왕이시여. 칸과 했던 약속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약속을 제대로 들으셨소?”
“예. 오전에 대왕께서 칸과 대화하실 때 칸의 호위병 중 몇 명은 다른 부족의 귀족들이 보낸 자들입니다. 오늘의 패배로 힘을 잃은 저희들이 영지와 영민들을 다른 부족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돌봐주십시오.”
부족을 돌봐준다는 것은 병력을 보내 지켜준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호를 받는 몽골 부족들이 병력을 모아서 보내고, 이민호는 부하 장수를 시켜 지휘만 해도 된다. 피보호자가 된 부족 외에 보호자가 가진 힘 때문에 다른 부족들이 함부로 건들지 못하게 되는 식이었다.
“열두 살짜리가 칸에 오르기는 부담 간다, 이건 가요?”
“칸의 손자는 분명히 전사했습니다.”
“알았소. 다음 칸이 세워질 때까지, 혹은 앞으로 10년 동안 고산국이 당신네 부족들을 보호해주겠소. 이곳에 오래 주둔할 병력도 없고, 무엇보다 세금을 거의 못 내는 유목민들을 다스리는 것은 귀찮은 일이라서 말이오.”
이민호가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동몽골 여러 부족을 지배할 수 있다면 시베리아와 북방이 아주 편해진다. 이민호는 기병 숫자만 10만을 넘길 수도 있는 동몽골에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민호는 칸과 했던 약속 때문에 공개적인 비난을 받지는 않지만 황금 씨족의 정통 칸을 죽인 몽골의 원수이기도 했다. 그래서 섣불리 동몽골에 마수를 뻗었다가는 동몽골 부족들이 몽땅 건주 여진이나 오이라트로 넘어가서 다시 대항해올 수도 있었다. 명나라로 귀순해서 엉뚱하게 명나라의 수명을 연장시켜줄 수도 있었다.
이민호는 결코 기마민족과 술래잡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가능하면 적당히 보살펴주고 여러 가지 일에 부려먹는 쪽이 좋았다. 그래서 이제부터 본격적인 밀고 당기기를 시작했다.
“대왕이시여! 텡그리에 맹세한 칸과의 약속을 이행하셔야 합니다. 승리자로서 대왕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됐소. 그 문제는 내일 아침 귀족들과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합시다.”
“귀족들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아마 다른 귀족들은 칸과의 약속 따위는 벌써 잊어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옮길 생각부터 할 것이오. 아니면 건주 여진과 손을 잡든지 말이오.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목민이 땅을 버리고 이동하면 어떻게 다음 세대로 핏줄이 이어지겠습니까? 다른 부족의 노예가 되어 혹사당하다가 어느 가을 날 차가운 물구덩이에 처박히고 말 것입니다.”
“내일 봅시다.”
이민호가 손을 휘휘 젓고, 귀족들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저 귀족들이 다른 귀족이나 평민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따라 동몽골의 운명이 바뀔 예정이었다.
============================ 작품 후기 ============================
오해 여지가 많아서 내용 중에 설명이 길어지더라도 할 수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