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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684화 (633/1,000)

00684  73. 몽골 초원  =========================================================================

그러나 천방지축인 손자 놈이 잠깐 들었던 기대감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보얀 체첸칸의 아들이며 이 아이의 아버지인 망고스 메르겐 타이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모든 사람들이 떠받들며 키워서 그런지 이 아이는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에서 벗어났다.

“대칸이시여! 저런 예의 없는 자와 교섭을 할 필요 자체가 없습니다. 차라리 부처의 힘을 빌리느니만 못합니다. 명나라를 정복한 다음 고산국을 정벌해서 모두 죽이고 불태워 풀뿌리 하나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내 손자이며 다음 대의 대칸으로서 어찌 하여 이다지도 정치 감각이 떨어진단 말이냐! 네 말이 비록 옳고 기개가 높다 하나 적이 될지도 모를 외국 국왕의 면전에서 하면 안 되는 말이다. 북원의 앞날이 어둡구나.”

“명심하겠습니다, 대칸이시여.”

통역을 통해서 조손지간의 대화 내용을 들은 이민호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래서 아이를 돌려보낸 다음에 대화를 하기로 했다.

이민호가 요구하자 보얀 체첸칸이 받아들였다. 안 가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아이를 호위들이 말고삐를 잡아 숙영지로 달렸다.

보얀 체첸칸이 비록 이름뿐인 대칸이라 하나, 실제 역사에서 다음 대 대칸이 되는 손자, 릭단칸보다는 훨씬 나았다. 릭단칸의 권력 기반이었던 차하르와 할하 등 모든 동몽골의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끝내 릭단칸은 오르도스로 쫓겨나고 만다. 릭단칸은 거기서도 잔혹하고 바보 같은 짓을 연속 저질러서 그 지역 몽골족들이 또 반란을 일으킨다.

“민정아! 아무래도 칸에게 하기로 했던 제안을 대폭 수정해야겠다.”

“주인님이 판단하신 대로 하세요.”

민정도 한숨을 내쉬고 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앞으로 몽골족과의 관계가 그리 순탄치 못할 것 같았다. 어쩌면 칸이 자꾸 도발해서 고산국에게 전쟁을 유도하고 있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국왕! 어쨌든 내 허락 없이 몽골 영토에 철도라는 것을 놓았으니 국왕이 잘못한 것이오. 하지만 내가 제시하는 몇 가지 조건을 들어준다면 국왕이 지은 죄를 용서해줄 수도 있소.”

“대칸! 칸이 대놓고 고산국을 자꾸 모욕하고 나를 아랫사람 부리듯이 하는데, 과연 칸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소.”

한 판 붙어보고 나서 서열을 정하자는 뜻이었다. 깡패 세계에서 통용되는 야만적인 규칙이었으나 국가 간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규칙이었다.

“전쟁을 해서 위아래를 가리자는 말입니까? 으음. 강하다고 소문 난 고산국인데 말입니다.”

대칸이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부리야트 기병 1만 기가 빠져 나간 자리가 커보였는지 잠시 후 대칸이 동의했다. 그 동안 칸과 원수 사이였더라도 그래도 같은 몽골족인 토르구트 족이 고산국을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그 같은 결정에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몽골족들끼리 합종연횡이 워낙 심해서 같은 편이었던 두 부족이 싸우다가도 금방 다시 합쳐지곤 했다. 아무리 대를 이은 원수라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는 쉽게 동맹을 맺었다.

“좋소, 국왕. 누가 위인지 텡그리에게 맡깁시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지는 쪽이 이기는 쪽에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어느 쪽에서 대장이 죽더라도 약속은 지켜져야 합니다.”

“물론이오. 군사들에게 밥을 든든히 먹인 다음 해가 중천에 뜨면 전투를 시작합시다. 동맹군들에게도 알리시오.”

차하르 부는 할하나 토르구트처럼 하나의 투먼 단위였고, 직할 병력만으로 기병 1만이 충분히 나오는 큰 부족이었다. 나머지 1만은 몽골족 전체를 통틀어서 인구가 가장 많은 할하족 중에서도 남부 할하의 동맹 부족들에서 지원한 병력이었다.

“정정당당한 전투가 되어야 하기에 양쪽의 균형을 맞춰야 하오. 국왕의 병력이 우리보다 크게 적은 것 같으니 우리 쪽 병력을 약간 줄이겠소,”

“배려는 참 고맙소만, 지금 이대로 싸워도 됩니다.”

푸른 피가 흐르는 자들은 생각하는 게 일반인과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신분 문제로 그렇게 모욕을 했으면서도 숫자까지 맞추면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가리자고 요구하는 꼴을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이민호는 바로 숙영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병들에게 조금 이른 식사를 하도록 지시하고 토르구트와 귀족들을 초청했다. 간략한 오찬이 준비되는 동안 이민호가 설명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칸의 군대와 전투를 하기로 했소.”

“대화로는 협상이 도저히 불가능했군요. 그러나 지든 이기든 고산국과 칸은 동맹이 되겠습니다.”

“동맹이요? 쳇! 저따위 동맹은 필요 없소.”

“진 쪽이 승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그럼 승자가 최소한의 보호조치를 패자에게 취해줘야 합니다. 만약 전투 중에 칸이 죽더라도 왕께서 차하르 부와 할하 남부 부족들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 정도로 칸은 동맹이 절실한 상황에 처한 것 같다고 토르구트의 타이지가 설명했다. 건주 여진이 현재 칸의 영역인 동몽골 여러 부족들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어나가는 것이 칸의 불안감을 자극한 탓이라는 설명을 추가했다.

“굳이 내 밑에 있겠다면 노예로 써먹어야겠소.”

“바로 그겁니다. 몽골에서는 같은 부족에 속하더라도 부족민의 신분은 제각각입니다. 전투에 패해 흡수된 부족민은 하층 계급을 형성하기 마련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다루든 왕의 자유입니다.”

“황금 씨족이라고 특권을 요구할 것 같소만.”

“아무리 보르지긴 씨족이라도 노예는 노예지요. 정당한 전쟁을 통해 획득한 노예에 불과합니다.”

식사를 마친 후 토르구트 족과 함께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장갑차 대대에 두 대밖에 없는 공병차가 참호를 급조했다.

그 사이 항공대장 이면에게 통신을 보내 시간에 맞춰 적의 대열을 폭격하라고 지시했다. 항공대 소속 수상비행기 네 대는 세렝게 강 하구, 바이칼 호수 바로 옆의 잔잔한 석호에 배치돼 있었다.

정오가 되면서 양쪽 군대가 대열을 갖췄다. 장갑차 대대가 횡대로 늘어서고 그 사이에 말에서 내린 기병대대 배치됐다. 보병들도 장갑차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 토르구트 기병은 고산국 대열 왼쪽에, 여진 기병은 오른쪽에 배치됐다.

칸이 지휘하는 병력이 2만인 줄 알았는데 그 사이 불어나서 3만을 넘었다. 일부 병력이 칸의 여름 궁전과 떨어져서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실제로는 신하가 아닌 동맹 부족들이 어느 정도 병력을 동원했을지 사전에 파악하기 어려웠다.

토르구트와 여진족을 빼면 전력비는 1,000대 3만 이상이었고, 포함하면 1.6만대 3만이 될지, 1,000대 4.5만이 될지 확실치 않았다. 토르구트 기병 1만과 여진 기병 5천이 고산국과 같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경계는 확실히 하고 있었다.

“칸의 손자라는 놈이 어디 있는지 파악 못했나?”

“칸 주위와 커다란 유르트를 살피고 있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요.”

쌍안경이 아닌 관측용 중형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피던 민정이 보고했다. 칸보다 후계자인 손자가 훨씬 더 개념이 없는 놈이라서 이민호는 손자를 먼저 잡고 싶었다. 칸을 먼저 죽이면 전투가 끝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몽골이 확실히 망하게 하려면 손자를 살려둬서 릭단칸으로 즉위하게 내버려두는 편이 좋았다. 같은 몽골족들을 학대하다가 반란이 일어나 몽골 전체가 스스로 멸망하고 건주 여진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골족이 막강한 기병 전력을 유지한 채 건주여진에 합류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고산국이 몽골족에게서 지분을 얻든지, 아니면 몽골족이 분열되더라도 건주 여진에 흡수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이 시기에는 건주 여진보다 동몽골 부족들의 인구가 훨씬 많았다.

“방금 막 정오가 지났어요.”

“아직 기다려.”

칸은 한참 뒤에 위치한 언덕에서 지휘를 맡고 있었다. 몽골족이 야만족 같아도 지휘관의 위치는 일본처럼 항상 맨 뒤쪽이었다. 그리고 승부가 완전히 결정된 다음에나 전투에 끼어들었다.

칸이 위치한 언덕에서 거대한 깃발이 휘날리자 몽골 기병 3만이 서서히 몰려들었다. 지평선을 가득 메운 기병은 상대방에는 확실한 악몽이었다. 토르구트 기병들이 명령을 기다리며 꼿꼿이 서 있었지만 몹시 불안한 듯했다.

“할 수 없지. 장갑차 포대는 적 지휘부를, 기병 포대는 적 기병을 타격한다. 포격 개시!”

민정이 통신기를 통해 명령을 전달했다. 적 기병과의 거리가 2km, 칸이 자리 잡은 언덕이 3km 거리였다.

- 퍼버벙!

포구에서 빠져 나온 포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언덕을 향해 날아갔다. 3인치 야포 8문이면 작은 언덕 하나 정도는 날릴 만한 화력이었다. 칸이 자리 잡은 언덕에 폭발 화염이 일어나면서 검은 연기에 완전히 가려졌다.

몰려오던 몽골 기병들이 고개를 돌려 언덕을 바라본 직후 갑자기 진격 속도를 높였다. 이들 사이에도 포탄이 연속 떨어졌다. 몽골 기병들이 화염과 파편에 휩쓸리며 쓰러지자 나머지 기병들이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빠르네. 기관총 사격!”

- 따다다다닷!

장갑차에 2정씩 달린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장갑차 사이에 전개된 기병들도 기관총을 땅에 내려놓고 사격했다. 150여 정이 넘는 기관총이 불길을 뿜어내고, 빠르게 접근해오던 몽골 기병들이 말과 함께 픽픽 쓰러졌다.

- 콰쾅! 쾅!

어느새 수상비행기들이 나타나 폭격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들이 폭탄을 떨어뜨린 곳은 고산국 장갑차 대열에서 한참 뒤쪽이었다. 조종사들이 상황을 알고도 저런 행동을 했다면 뒤쪽에서도 적이 몰려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병력이 더 있다는 뜻이야. 여긴 몽골족의 안마당이라 이건가?”

“숫자를 맞춰준다더니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어요.”

“어쩐지 계속 말로 도발한다 했지. 처음부터 우릴 공격할 셈이었어. 병력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초원으로 우릴 끌어들인 것이야.”

“항공대장에게서 보고에요. 적 기병 2만 가량이 후방에서 돌격해오고 있어요.”

칸은 자그마치 기병 5만을 이 전투에 동원했다. 평소에는 명색뿐인 칸이었고 차하르 부의 1만이 최대 동원 가능 병력이었지만 이번에는 동몽골 여러 부족들을 설득해서 병력을 최대한 동원한 것 같았다.

고산국 북방철도회사는 가급적 몽골 영토를 피해서 철도 노선을 확정했다. 그러나 철도 건설 공사를 급히 진행하느라 시베리아 횡단 철도 북쪽 노선보다는 바이칼 호수 남쪽 노선을 먼저 건설하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동몽골 주요 부족에 끼워주지도 않고 공물이나 받아내던 부리야트의 땅을 칸이 몽골 영토라고 주장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우르 족의 침략은 물론 코사크가 침략할 때도 부리야트 족을 도와준 몽골 부족은 하나도 없었다. 부리야트는 핑계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그곳에 폭탄이든 기관총탄이든 다 퍼부으라고 항공대에 지시해. 전령! 토르구트 기병과 여진 기병도 후방을 맡는다.”

장갑차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토르구트 전령과 여진 전령이 방어선 양쪽으로 달려갔다. 토르구트와 요동 출신 여진 기병이 동맹이라 하나 아직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워 아군 통신병을 배치하지 않았다.

곧이어 적의 방어선 돌입을 눈앞에 두고 토르구트와 여진 기병들이 후방의 적을 막으러 반대 방향으로 출전했다. 토르구트는 물론 고산국 장병들의 사기도 떨어지거나, 토르구트가 도망친다고 오해할 만한 장면이 연출되고 말았다.

“소총 사격 개시.”

“1호차다. 쏴! 모든 화기 사격 개시!”

보병이 쏘는 연발총이 가세하자 방어선에 접근하는 몽골 기병의 숫자가 줄어드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그러나 적 기병들이 워낙 빠른 속도로 돌격해 와서 탄창 하나를 갈아 끼우는 순간 선두의 기병들이 아군 방어선에 뛰어들었다.

“히힝~”

별로 넓거나 깊지 않은 참호라도 발을 헛디딘 말들이 구덩이에 연속해서 처 박혔다. 공병차 두 대가 한 시간 동안 참호 작업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가끔 칼을 뽑아들고 참호를 넘어오는 몽골 기병이 총탄에 맞고 다시 참호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 타타탕!

몽골 기병들이 참호를 확인하려고 속도를 늦춘 사이에 탄창을 갈아 끼운 보병들이 다시 사격을 퍼부었다. 이따금 이쪽으로 화살이 날아왔으나 사상자는커녕 화살에 맞은 사람 자체가 아직 없었다.

200발을 발사한 기관총 부사수들이 방열장갑을 낀 채 총열을 바꿔 끼웠다. 이민호는 현대 대한민국 군대에 간부가 아니라 병사로 갔기에, 처음부터 총열을 착탈식으로 만들어 빠르게 교환이 가능했다. 총열에 손잡이가 달려 있어 방열장갑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실수로 손에 화상을 입을까봐 방열장갑을 끼고 총열을 교환하도록 했다.

- 콰쾅! 쾅!

“뭐야?”

대열 뒤쪽 숙영지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천막을 모두 거뒀으나 물자는 그대로 남겨 두었다. 군의관과 간호사, 조리장 등 비전투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들이 다수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숙영지 쪽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있어요. 적의 우회 공격을 비전투원들이 방어에 실패했나 봐요. 토르구트와 여진 기병은 후방의 적 기병 주력과 전투에 돌입했어요. 배반한 건 절대 아니에요.”

“적에게 예비 병력이 엄청나게 많은 모양이군.”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거대한 연기 줄기를 보고 용기를 얻은 몽골 기병들이 더 빨리 돌격했다. 적 기병 주력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화살이 마구 쏟아져 날아왔고, 장갑차에는 기름 먹여 불붙인 솜뭉치가 날아왔다.

============================ 작품 후기 ============================

이렇게 해서 고산국 군대는 전멸하고 이민호도 전사하는데...

농담입니다.

전투가 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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