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83 73. 몽골 초원 =========================================================================
“이 지역 이름이 뭔가? 강 두 개가 이어지고 철도역까지 생겼으니 도시를 건설하면 앞으로 크게 성장할 만한 곳이다.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부리야트 칸국의 수도로 정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저희 타이지들 중에 황금 씨족이 없으니 감히 칸국을 세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딱히 이름이 정해진 곳이 아닙니다. 부디 대왕께서 지어주십시오.”
양수리나 두물머리는 일반 명사이며 조선말 이름을 따르기도 곤란했다. 그래서 이민호가 기억하는 현대 지명을 그대로 붙이기로 했다.
“셀렝게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가 중류에 위치한 우윳빛 호수 때문에 우데 강이란 이름이 붙었지? 아기를 키우는 젖처럼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강에 젖줄기라는 이름이 붙을 만하다. 젖은 생명을 기르는 위대한 축복이니 앞으로 세워질 도시 이름으로 울란우데는 어떤가? 붉은 우데 강, 즉 위대한 우데 강을 찬양하는 이름이다.”
“몽골어에도 조예가 깊으신 대왕을 깊이 흠모합니다!”
미리 준비된 이름이었으나 부리야트 족의 타이지들은 몹시 감동했다. 그래서 일제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하늘로 뻗었다. 그래도 이들은 죽어도 이민호를 칸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당장 기차역 현판을 달았다. 한글과 몽골어로 울란우데 역이라고 크게 새긴 나무 현판이 역사 문 위에 걸렸다. 원나라가 역참을 운영했기에 역의 역할을 몽골인들도 쉽게 이해했다.
“대왕이시여! 기차 삯은 어느 정도로 책정하실 계획이십니까?”
“사람과 화물 종류, 거리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부리야트 사람들이 이용하는데 부담이 가지 않을 요금을 책정하겠다.”
민정이 요금표를 이민호에게 건넸다. 승객은 100km까지 기본요금으로 은 한 냥의 100분의 1인 한 푼이며 200km마다 한 푼이 더해졌다. 화물도 세세히 규정해서 특히 가축은 양과 소, 낙타와 말까지 세분해서 요금을 책정했다.
“그럼 천 리에 여섯 푼이군요. 기차가 하루에 2천 리를 간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완공되면 밤에도 운행할 테니 하루에 3천리 조금 넘게 달릴 것이다. 은이 없으면 모피로 계산해도 된다. 많이 거슬러 받을 것이다. 자작나무 통나무를 베어 와서 기차 요금으로 내도 받을 것이다.”
“바이칼 호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게 자작나무입니다. 그게 돈이 되겠습니까?”
자작나무 목재는 결이 곱고 단단해서 가구로 쓰기에 좋았다. 조각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팔만대장경 목판 일부가 자작나무였다.
“목재는 부리야트가 가진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여기서는 값이 헐하나 다른 지역에 가져가면 가치가 확 뛰어오른다. 그러니 앞으로는 부리야트 사람만이 이 지역의 자작나무를 베어 팔 수 있도록 하겠다. 대신 나무를 벤 자리에 묘목을 열 그루씩 심어라.”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요금 문제가 해결되자 부리야트 대표들이 눈을 반짝반짝 뜨고 철도 노선을 확인했다. 대표들의 반응을 보니 가축 운송용 유개 화차가 많이 필요하게 될 것 같았다. 철도 노선이 바이칼 호 동서 양안에 나눠서 거주하는 부리야트 족의 통합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이민호는 예상했다.
부리야트 족은 몽골초원의 정치적 동향에 큰 영향을 끼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 일단 인구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은 시베리아를 관리하려면 부리야트 족을 반드시 고산국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이민호는 이들이 시베리아에서 새로 나라를 세우더라도 고산국을 적대하지 않는 한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독립국이 되기에는 주변에 강력한 부족들이 너무 많아서 일단 고산국의 속국으로 출발시키기로 했다.
“도련님. 아예 고산국 영토로 편입하시지 그래요?”
“몽골을 몽땅 적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고, 너무 넓어서 관리하기도 귀찮아.”
감불에게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앞으로 많이 신경 써야 할 곳이 시베리아였다. 부리야트의 영역 바깥은 인구가 너무 희박해서 어쩔 수 없이 고산국 영토로 삼기로 했다. 대신 시베리아 지역 관리나 정찰 임무를 부리야트에게 맡기면서 비용을 지급할 계획이었다.
다음 날 차하르 부의 칸이 보낸 사절이 숙영지를 방문했다. 그리고 남쪽 500리에 몽골 대칸의 여름 행궁이 완성됐으니 알현하러 오라고 명령했다. 이민호가 어이가 없어서 사절을 노려봤다.
“대칸의 명령이라고 했나?”
“그, 그렇습니다, 고산국 국왕이시여.”
“어째서?”
“예? 예. 그거야 고산국은 조선에서 나왔고, 조선은 대원제국의 부마국인 고려의 후신이기 때문입니다. 대칸께서는 칭기즈칸의 합법적인 후계자가 확실합니다.”
몽골이 통일이 안 되고 차하르 부가 망해가는 이유를 알만했다. 명령 운운한 것은 칸을 만나 직접 따지기로 하고 부대 전체를 출발시켰다.
장갑차 대대와 기병대대, 그리고 며칠 사이 울란우데로 이동한 요동 여진 기병 5천 기가 남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토르구트 기병 1만 기와 부리야트 기병 1만 기가 좌우에서 옹위했다.
“코우틀룩 타이지! 토르구트에서 기병을 최대한 얼마까지 동원할 수 있소?”
“다른 몽골 부족들처럼 15세 이상 성인 남자가 죄다 전사입니다만, 일부는 남아서 가족과 가축을 지켜야 하기에 보통 절반 정도만 원정에 동원됩니다. 그래서 최대 3만 정도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이민호가 오랜만에 말을 타고 토르구트의 타이지와 나란히 달렸다. 페르가나 말의 체고가 워낙 높아서 타이지가 탄 말이 망아지처럼 작아 보였다. 크고 강인한 페르가나 말은 탄 사람의 위엄을 높이는 효과까지 있었다.
“절반이 기병 3만이라니, 엄청나구려.”
“병력이 더 필요하면 원정길 주변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면 됩니다. 전쟁 때는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몽골군은 인원을 강제로 끌어 모았다. 그 과정에서 약탈을 하면서 식량 등 보급품을 채웠다.
“토르구트의 타이지는 앞으로 고산국 이름으로 전쟁을 할 때 약탈을 하지 마시오. 보급품이 필요하다고 보고하면 언제든 보급품을 지원해줄 것이오.”
“보급품은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이 가장 효율이 높지 않습니까?”
“고산국이 침략자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렇소. 나라에 금과 은, 식량이 넘쳐나는데 남의 것을 빼앗을 이유가 없지 않소?”
“왕께서 하명하셨으니 앞으로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력한 전사 부족 하나가 통째로 고산국에 들어왔으나 사고방식이 워낙 달라서 많이 알려줘야 했다. 이들을 잘 활용하면 서 시베리아의 부족들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무난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몽골 기병 3만에 더해 부족한 화력을 고산국이 채운다면 어딜 가든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이틀째 오후에 차하르 부 칸의 여름 행궁이 보이는 지평선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칸은 차하르 부 외에도 동맹인 남부 할하 족의 바린(Baarin)과 자로드(Jarud) 기병을 포함해 2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여름 행궁에 와서 고산국 군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약간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자 놀란 것 같았다.
밤이 되면서 차하르 부 기병들이 언제 어느 방향에서 습격해올지 몰라 사주 경계를 철저히 하며 숙영했다. 토르구트와 부리야트 기병들도 각자 천막을 치고 바깥에 수레를 원형으로 배치하는 식으로 숙영지를 방어적으로 건설했다.
“대왕이시여! 칸이 야습을 해오면 어떻게 합니까?”
“괜히 아군을 도와주러 갔다가 너무 어두워서 자칫 아군끼리 싸우게 될 위험이 있소. 그러니 공격을 받을 경우 해가 뜰 때까지 제자리에서 버티시오.”
이민호를 찾아온 부리야트 대표들은 몹시 불안해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차하르 부의 칸에게 공물을 바쳤으나 지금은 고산국과 한 편이었다. 칸의 기병이 부리야트 숙영지를 먼저 야습해올까 두려워했다.
“대왕이 적의 공격을 받는다 해도 도와드리러 가지 않아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소. 그리고 적이 아니라 아군이 죽을까봐 두렵소.”
이민호는 그 날 밤에 장갑차에서 잤다. 이틀 동안 목욕을 못해서 몸이 조금 가려웠다. 평소에는 오매불망 이민호의 품에 안기길 원하던 호위들도 몸을 피하거나 이민호가 다가가면 화들짝 놀랐다.
“오늘은 안 할 테니 걱정 마.”
“헤헤! 죄송해요. 이해해주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들 장갑차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역시나 차하르 부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두두두두두두~
수를 알 수 없는 기병들이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렸다. 그렇다고 공격해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기병 수만 명이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듯한 소리와 진동음 때문에 쉽사리 잠들기 어려웠다.
어두운 밤에 초원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 방향이나 병력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기병대대와 장갑차 대대가 절반씩 교대해서 밤새도록 경계 근무를 섰다.
강력한 빛과 폭발소리에 말들이 놀랄까봐 조명탄은 쏘지 않았다. 대신 장갑차에서 갑자기 강력한 전조등을 쏘아 보내 멀리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차하르 부 기병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걸음마보다 승마를 먼저 배우고 3보 이상이면 말을 탄다는 몽골 기병들이 말 울음소리가 크게 울리는 순간 낙마하기도 했다.
“우리만 당할 수는 없지. 기병대대를 출전시켜.”
“칸의 여름 행궁을 중심으로 돌게 할까요?”
“그래. 내일 칸의 눈이 퀭하게 만들어줘.”
신경전은 밤새도록 계속됐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함부로 상대를 공격하지 못했다.
신경전의 여파는 컸다. 밤새 부리야트 기병들이 천막을 걷고 북쪽으로 도주해버렸다. 서로 먼저 도망가려고 짓밟아서 꽤 많은 인명피해를 내는 추태를 보였다.
“벌써 100km를 도주했다고? 대단하다.”
수상비행기가 부리야트 기병의 도주로를 따라 비행하고 있었다. 수상비행기들이 부리야트 기병들 상공에서 저공비행을 하면서 위협도 해봤지만 도주를 막지는 못했다.
실망스러운 동맹이었다. 얼마 안 되는 다우르 족에게 본거지를 내주고 숲속으로 도망친 이유가 있었다.
“고산국의 왕은 들으시오! 대원제국의 대칸께서 알현을 허락하셨으니 복장을 단정히 가다듬고 오도록 하시오.”
아침 일찍 밥을 지어먹고 있는데 칸의 전령이 와서 그런 소리를 내뱉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리야트 기병의 도주에 화가 나 있었던 이민호는 몹시 짜증이 나서 전령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이 매를 버는구나. 기어코 싸우자는 소리지?”
“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칸께서는 고산국과의 우호를 위해 멀리 남쪽에서 여기까지 몸소 오시는 수고를 하셨지 않습니까? 고산국 국왕께서도 그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권위의식에 절은 칸이라서 자기가 아량을 베푼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호 운운한 것도 믿기 어려웠다.
“당신네 기병들이 밤새도록 우리 숙영지 주위를 돈 것은 뭔데?”
“대칸께서는 너무나 훌륭한 혈통을 타고 나신지라 충신들이 밤새 주변을 경계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고산국 기병들이 밤에 행궁 주변을 돌며 경계를 해주신 데 대한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저 한숨만 나왔다. 한동안 논란을 벌인 다음 결국 칸과 이민호는 양쪽 숙영지 중간에서 만나기로 했다. 고귀한 혈통과 북원의 대칸으로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나름대로 소탈한 보얀 체첸칸이 중간에서 만나도 좋다고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양쪽에서 호위 기병 10여 명씩만 이끌고 나갔다. 여진족 몽골어 통역 외에 호위 4명, 기병 5명이 이민호를 따라 나섰다.
“대원제국의 유일한 군주 대칸이시오. 고산국 국왕은 즉시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어 대칸께 존경을 표하시오.”
“이 분은 고산국 국왕전하이시오. 몽골의 추장은 예의를 갖추시오.”
호위들이 상대방 군주가 먼저 존경을 표하길 권하는 기 싸움을 하는 꼴을 보게 됐다. 이민호와 동시에 보얀 체첸칸이 손을 저어 자존심 싸움을 멈추게 했다.
“그만 되었다. 아직도 옛 영광에 취해 이국의 국왕에게 과도한 예의를 강요할 수는 없느니라.”
“반갑습니다, 대칸. 앞으로 고산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대원이 쇠락했다고 하나 그대처럼 신분이 미천한 자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실로 한심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소.”
“하아! 그렇습니까?”
칸이 말하는 본새가 지극히 한심했다. 그러나 차기 칸이 아직 어려도 똑똑하다고 했으니 다음 세대를 기대하기로 했다.
열두어 살 먹은 꼬마가 옆에 있어서 그가 후계자인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민호의 기대를 산산이 무너뜨렸다.
“바닷가에 살며 물고기를 잡아먹는 천한 인간이 감히 대원의 대칸을 무시하는군요. 위대한 대칸이시여! 이들을 모두 죽여 개밥으로 던져줘야 합니다.”
“어허! 처음 보는 외국 국왕을 앞에 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대칸이 손자를 나무라면서도 즐거운 듯이 허허 웃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민호가 민정을 불렀다.
“아무래도 이놈들을 다 쳐 죽여야겠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외교 교섭 중에는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마세요. 비겁하다고 나중에 비난을 받아요. 일단 교섭을 결렬시키고 돌아간 다음 선전포고를 하세요.”
“그래. 그게 좋겠다. 돌아가자.”
이민호가 말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보얀 체첸칸이 황급히 말에서 내렸다.
“고산국 국왕! 가지 마시오. 제발 우릴 도와주시오. 과거 고려는 대원의 가장 가까운 동맹이었소. 조상들도 아마 비슷할 것이오. 우리가 곤란할 때 아량을 베풀어주시면 국왕께 반드시 은혜를 갚겠소.”
그래도 칸은 대화할 자세가 돼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아주 살짝 마음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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