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82 73. 몽골 초원 =========================================================================
오전에 토르구트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보고했다. 이민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왕이시여! 동쪽 60리 거리에서 부리야트의 대표단이 오고 있습니다! 수레 30대와 기마 80기 정도입니다. 그 뒤에 거리를 두고 기병 1만 정도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음. 뭐, 고맙네. 부리야트 대표단을 이쪽으로 안내해주게.”
“왕의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토르구트 전령이 다시 동쪽으로 달려갔다. 토르구트 부족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잘도 하고 있었다. 원래 기병대대에서 사방으로 정찰대를 보냈었는데 토르구트 기병들이 주변 경계를 하고 있어서 숙영지와 기차역 주변으로 경계 지역을 축소시켰다.
토르구트의 타이지에게 병력을 많이 끌고 온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이 지역이 오이라트와 적대적인 부리야트의 영지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일 뿐, 협상이 잘못됐을 경우 고산국에 야습을 가하거나 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믿거나 말거나였다.
“주인님. 저들을 같은 편으로 인정해줘야 하나요?”
“어차피 고향을 떠날 사람들이라니까 우리가 잘 활용하는 게 낫겠다. 보급이나 해줘.”
외 호위대장 민정에게 그렇게 지시했다. 이렇게 된 이상 토르구트 부족을 고산국의 동맹군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스 차르국과 충돌할 경우 기병이 많이 필요할 텐데 토르구트 부족은 그 기병으로 딱 적당했다.
그래서 이 날 오전부터 토르구트 기병들에게 식량을 조달시켜줬다. 건조시킨 다음 종이봉투에 포장한 소면이나 곡물 가루가 토르구트 족 사람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았다. 몽골인들은 흔히 비린내 나는 고깃국에 면을 말아 넣어 먹고 끓인 우유죽이나 차에 곡물 가루를 넣어 먹었다. 비위가 약한 이민호가 절대 못 먹을 음식이었다.
“요동 여진보다 저들이 훨씬 믿음직스러운데?”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요동으로 피했다가 고산국에 고용된 여진족 기병들을 살펴봤었다. 다들 제멋대로인데다 지휘체계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아 이민호가 보기엔 아주 엉망이었다. 그러나 여진족 출신인 민정이 반박했다.
“단순하고 개인적인 몽골족과 달리 여진족 기병이 훨씬 다양한 전술을 소화할 수 있어요. 같은 수가 싸우면 여진족이 이길 거여요.”
“장단점이 다른 것으로 이해하마.”
점심을 먹으려 할 때 부리야트 대표단이 역에 도착했다. 부리야트인들은 토르구트 족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불쾌하게 여겼으나, 이미 고산국의 동맹이 된 것을 확인하고 항의하지 않았다. 어쨌든 여기는 부리야트의 영역이었다.
“부리야트의 타이지들이 멀리서 오신 솔롱고스의 대왕을 알현합니다.”
“반갑소, 부여의 족장들이여.”
몽골인들은 고구려와 그 이후 한반도 국가를 흔히 솔롱고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솔롱고스가 무지개의 나라나 이상향을 표현한다기보다는 단지 동쪽에 위치한 나라 정도로 이민호는 이해했다.
그리고 부리야트가 반드시 부여와 같다고 볼 수는 없었다. 부리야트의 일부 세력이 부여를 건국했다가 고구려에 흡수되거나 사라지고 원래 부리야트는 계속 바이칼 호 주변에 남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대사는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아서 함부로 단정하기 어려웠다.
“대왕께서 어찌 저희들을 부르셨습니까?”
“지나는 길에 이 땅의 주인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불렀소. 그리고 차하르 부에도 전령을 보냈으니 며칠 안에 책임을 질 만한 직위의 사절이 도착할 것이오.”
“대왕이시여! 저희들은 고산국이 이 지역에 철도를 건설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부리야트인들은 고산국의 군사력이 무서워서 멀리서 철도 건설 현장을 지켜보기만 했다는 주장이었다. 철도 건설 전에 지역 유력자들에게 선물을 잔뜩 안기고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지만 모르고 했던 짓이라고 우겼다. 그러나 한때 중원을 지배했던 원나라에서 지배층을 형성했던 몽골족이 계약서의 중요성을 몰랐을 리는 없었다.
“철도가 통과하면서 부리야트인들이 여러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는데, 필요 없다는 뜻이오?”
“그런 것 전혀 필요 없습니다. 차하르 부에서 높은 사람이 오면 괜히 오해할 말이나 하지 말아주십시오. 웬만하면 철도고 뭐고 치워주십시오. 임신한 양이 기차에 놀라서 유산한 경우도 있습니다.”
“좋소. 우리가 만나지 않는다면 그럴 일도 없겠지요. 철도가 달리는 땅이 부리야트 영토임을 인정하겠지만, 동시에 계약에 따라 철도 좌우 100리는 고산국 철도회사에서 임대한 땅이오. 이제부터 부리야트인들은 이 땅에 들어올 수 없소. 반대하는 사람 있소?”
만약 부리야트에서 반대한다면 전쟁으로 결판을 내겠다는 협박이었다. 부리야트의 대표자들이 움찔거렸다.
“고산국은 침략자입니까? 어째서 남의 영토를 갖고 협박합니까?”
“여기 계약서가 있다. 한글과 한문, 몽골 문자 세 가지로 돼 있다. 너희들이 몽골 문자를 모른다고 우기지는 않겠지?”
“자격이 없는 사람이 계약을 했을 것입니다.”
북미 원주민 추장들이 백인들과 토지계약을 했을 때 그런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부리야트 족과 임대계약을 담당한 철도회사 직원이 이민호에게 몇 사람을 지정했다.
“바로 당신도 계약서에 날인했잖아? 그리고 당신도! 은을 받을 때는 좋았는데 철도가 완공되고 나니까 두렵나? 아니면 은을 더 받고 싶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저희들끼리 대화 좀 하겠습니다.”
임시로 친 게르에 부리야트 대표단들이 들어갔다. 그리고 고함소리, 때리는 소리, 비명소리가 잇따랐다. 잠시 후 대표단이 게르에서 나왔을 때 몇 명의 눈이 퍼렇게 변해 있었다.
“부족의 허가도 없이 멋대로 계약을 맺은 타이지들은 저희 부족민들이 벌을 내리겠습니다. 계약금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철도를 철거해주십시오.”
부리야트 대표단은 단단히 마음먹고 온 듯했다. 종주권을 가진 차하르 부나 할하 부가 알기 전에 고산국과 계약을 맺은 것을 부정하려 했다.
“부리야트에서 기병 1만을 데려온 것을 안다. 부리야트의 인구가 8만이 안 되므로 모든 성인 남자를 데려온 셈이다. 그 병력으로 여기 고산국 병력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부리야트 대표단이 도착하기 직전에 토르구트 기병 전체가 동쪽으로 움직여 부리야트 기병에 대응하는 위치에 포진했다. 기병대대와 장갑차 대대도 배치가 완료됐다.
“우리는 용감한 전사들입니다. 비록 할하 족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지만 우리는 케트 족과 사모예드 족을 물리치고 칸 족과 어웡키 족에게서 공물을 받을 정도로 강합니다.”
“너희들은 힘을 과신하고 있다. 저 언덕의 숲을 보라! 자작나무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나며 자라지만 흰 눈의 무게에 부러지기도 한다.”
허옇게 빛나는 줄기의 자작나무 숲에 휘어진 나무들이 꽤 많았다. 지난겨울 나뭇가지에 눈이 쌓인 탓이었다. 조만간 말라죽을 것이다.
그 숲 위로 비행기 여러 대가 나타났다. 부리야트 대표단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지켜봤다.
- 부우웅~
“저것은 비행기다. 자주 봤을 것이다.”
“하늘을 날기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수상비행기 네 대가 날아가면서 작고 새까만 것들을 자작나무 숲에 떨어뜨렸다. 마치 새가 날아가면서 새똥을 싸는 듯한 모습이라서 부리야트 대표단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콰콰콰콰쾅~
그러나 대표단이 지은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자작나무 숲에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맹렬한 폭음이 천지를 진동했기 때문이다. 나무줄기가 통째로 하늘을 날더니 숲 전체가 금방 화염에 휩싸였다. 폭발 섬광과 폭음에 놀란 대표단이 땅바닥을 기었다.
- 따다닷! 따다다다닷!
비행기들이 자작나무 숲 상공으로 다시 돌아와 이번에는 기체 양옆에서 기관총을 발사했다. 총알에 맞은 두꺼운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져 숲 위로 날아다녔다. 부리야트 기병이 몰린 곳에 기관총을 발사하면 어찌될지 상상한 대표단이 벌벌 떨었다.
“부리야트 기병이 도주했습니다.”
감불이 살짝 귓속말로 전해주었다. 이민호는 토르구트 기병이 쫓아가지 못하도록 감불에게 지시했다.
“대왕이시여.”
“말하라.”
드러난 힘 차이는 명백했다. 부리야트 대표들이 무릎을 꿇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이민호에게 호소했다.
“호수와 숲은 넓고 부리야트는 통틀어 8만도 채 되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없는 셈치고 그냥 지나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앞으로 절대로 고산국의 일에 아는 척하지 않겠습니다.”
“안 됐지만 나는 이 지역에 관심이 아주 많다.”
대표들이 일제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철도는 선으로 이어져있기 때문에 한 지역이라도 불안하면 전체 철도 노선이 소용이 없게 된다. 이 기회에 부리야트 족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기로 했다.
“할하 부나 차하르 부의 칸에게서 저희들을 보호해주시면 매년 일정한 규모의 야삭을 바치겠습니다. 당연히 철도도 보호하겠습니다.”
“좋다. 앞으로는 양떼나 말을 몰고 철도를 넘어 다녀도 좋다. 야삭을 내면 일정 금액을 하사하지. 검은담비 모피를 바치면 은 스무 냥을 주겠다. 아니면 쌀 40석을 줄 테니 선택해라.”
“에이! 북경에 가져가면 그게 얼만데요.”
“능력이 된다면 북경에 가져가서 팔아도 좋다.”
어차피 몽굴족 내에서 사냥꾼은 아주 적었다. 몽골초원에 거주하는 대부분 부족은 다른 부족에서 사냥하거나 판매한 모피를 사서 남쪽으로 되파는 모피 무역의 중간상 역할을 맡았다. 공물인 야삭으로 바치면서 합당한 대가를 받는다는 것은 부리야트 족에게 결코 나쁘지 않았다.
결국 부리야트 족과 협정을 체결했다. 부리야트의 영토를 인정하고 보호해주는 대신 철도 주변 땅은 계약서상에 명시된 100리가 아니라 10리로 줄여주고, 고산국에서 영구 임대하는 것으로 수정했다. 그리고 예조 직원과 어용상인이 주도해서 무역협정을 마무리했다.
“이곳은 셀렝게 강과 우데 강이 연결되는 곳이다. 타이지들은 어째서 교통로 중심인 이곳을 황무지로 내버려뒀나?”
“한 6년 전부터 다우르 족이 수시로 침공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우르 족?”
“거란족의 후예라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그냥 몽골족 여기저기서 모인 떠돌이들의 일파입니다.”
다우르 족이 몽골어 비슷한 언어를 쓰긴 하지만 유전학적으로는 거란족의 후예가 맞았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 몽골 동쪽, 흑룡강의 상류인 실카 강 유역에서 살다가 서쪽으로 확장했다.
“다우르 족이라면 철도 건설 노동자로 많이 지원한 부족이에요.”
“그래?”
민정이 그렇게 보고하자 이민호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철도 노동자라면 열악한 주거환경에도 불구하고 공사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착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러나 부리야트 족을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 몰아낼 정도라면 악독한 약탈자라는 인상이 깊었다.
그러나 둘은 같은 다우르 족이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 동안 동해국의 탐사대와 아주 좋은 관계를 맺은 교역 상대방이기도 했다. 다우르 족의 극히 일부가 바이칼 호 주변을 약탈하고 다녔을 뿐이었는데 부리야트 족은 근거지를 내놓고 숲으로 도주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실제 역사에서 1650년에 코사크들을 이끈 하바로프가 흑룡강 상류에 위치한 다우르 족의 큰 마을을 공격했을 때 661명을 죽이는 동안 코사크는 겨우 4명이 죽을 정도로 일방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만약 평원에서 기병끼리 대결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었다.
전력상 부리야트나 다우르 족과 별 차이가 없는 토르구트가 서쪽으로 이주해서 기병으로 나가이 칸국, 크림 칸국, 자포로제 코사크를 무인지경으로 쓸어버리는 동안 시베리아를 횡단한 돈 코사크는 다우르 부족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화약무기가 전면에 등장한 이후 보병이 기병을 서서히 압도해가는 시대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시베리아는 워낙 광대해서 걸어 다녀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지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숲과 늪지대가 흔한 시베리아에서 전투를 벌일 경우 기병의 역할은 극도로 제한되는 편이었다. 그래서 시베리아에서는 말이나 배를 타고 움직이고 전투는 말에서 내려서 하는 편이 나았다. 나선정벌 때도 기병이 주력인 청나라는 코사크에게 연전연패한 반면 함경도 포수들이 두 번 출정해서 두 번 다 코사크들을 격파해서 몰아냈다.
“할하 부나 차하르 부는 공물만 받고 부리야트를 지켜주지 않았단 말인가?”
“그쪽도 전쟁하느라 바쁘다고 합니다.”
“휴우! 알았다. 바이칼까지 약탈하러 오지 못하도록 다우르 족에게 명령을 내리겠다.”
“대왕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부리야트의 타이지들이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 사이 이민호는 다우르 족에게 해줄 경제적인 보상을 고민하고 있었다. 약탈을 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대가를 줘야 한다는 것이 웃겼지만, 이 시대 이 지역에서는 어쩔 수 없는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산국만 손해 볼 수는 없었다. 바이칼 호수 주변에 지천으로 자라는 자작나무를 벌목할 때 가격을 좀 더 깎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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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