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75 72. 아이슬란드의 여왕 =========================================================================
노르웨이의 베르겐은 여전히 휴식을 취하기 좋은 도시였다. 햇볕은 따사롭고 기후는 온화했다.
베르겐은 고산국 함대와 상선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라 발트 해 연안 국가와 네덜란드 상선들이 몰려들어 단기간에 급성장했다. 부두와 도로는 널찍하게 확장하고 시에서 청소부들을 고용해 항구 주변이 아주 깨끗해졌다.
베르겐은 또한 덴마크 서인도회사 상선들이 북대서양을 횡단하기 전, 또는 횡단한 직후에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고산국 상선과 비슷하게 생긴 아이슬란드 여왕의 배가 베르겐에 정박하고 있어서 이민호는 조금 놀랐다.
“폐하! 내 사랑!”
헤드비히 공주가 펄쩍 뛰어 이민호에게 안겼다. 사람들이 잔뜩 몰린 항구인데도 헤드비히는 애정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어찌 이곳에 있소?”
“폐하가 이곳에 오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예상보다 일찍 오셨네요?”
부활절 즈음해서 성묘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성묘를 지켰던 헤드비히 공주는 덴마크로 돌아와 서인도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예루살렘까지 왕복하는데 1, 2년 걸렸을 텐데 아이슬란드의 여왕호를 임대한 이후 어디든 빠른 시일 내에 갈 수 있었다.
연료 보급은 알제르와 덴마크를 왕복하는 고산국 유조선들이 맡았다. 새원산에 본사를 둔 국영기업 유조선 회사는 부업으로 등잔불 연료로 사용할 등유를 고래 기름보다 싸게 팔았다.
이 시기에는 고래 고기 위주로 포경산업이 운영됐기에 등유 판매가 결정적인 손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익을 줄여 포경업을 조금이라도 위축시키며 더 이상 확장하는 것을 막았다.
“며칠 쉬었다가 쾨벤하운에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나서 기쁘오. 그 사이에 조선말이 많이 늘었소.”
“책과 사전을 구해서 공부하고 있어요. 조선말은 너무 어려워요!”
공주 뒤에는 여기사 둘과 시녀 셋이 시립해 있었다. 이민호가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옮아옴을 느낀 여자 다섯의 얼굴에 동시에 홍조가 번졌다.
“너희들도 오랜만이다. 비키 공주를 잘 모신 것 같구나. 수고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국왕폐하.”
베르겐 시로부터 아예 매입해서 별궁으로 삼은 옛 귀족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 확장공사를 해서 건물 하나가 새로 들어섰고, 정원도 조금 더 넓혔다. 별궁에 고용된 노르웨이 하녀들이 바삐 움직이며 일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결혼식 전에 준비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하객으로 참가할 아이슬란드 귀족들의 예복을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고산국에서 고관들이 참가하려 했으나 중요한 자리를 몇 달씩 비워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새원산의 무역 관련 관리들과 상인들만 결혼식에 참가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사업이 잘 되고 있다는 보고를 꾸준히 받고 있소. 요즘 달라진 것은 없소?”
“폐하의 영향력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에요. 동유럽 여러 나라에 큰 변동이 일어나고 있어요.”
“유럽에 곡물을 대량으로 팔면서 그 정도 예상은 했지만 조금 빠르구려.”
헤드비히 공주가 살짝 놀랐다. 그러나 상품 교역을 하기 전에 무역 상대국의 사회변동에 미치는 영향을 사전에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민호는 생각하고 있었다. 고산국 입장에서 곡물은 무게가 많이 나가는 잉여생산품에 불과했으나, 동유럽 국가의 영주들에게는 목숨 줄이었다.
“예상하셨어요, 아니면 노리셨어요?”
“동유럽 영주와 귀족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 말이오? 나야 유럽에 영토적 야심이 없으니 예상을 한 것뿐이오.”
그 동안 발트 해를 통해 서유럽에 곡물을 공급하던 동유럽의 영주들은 고산국에서 싼 가격의 곡물 수출량을 늘리자 점점 경쟁력을 잃어갔다. 네덜란드와 덴마크에서는 북미에서 생산한 곡물을 정식으로 수입했고, 잉글랜드에서는 고산국이 아일랜드에 제공한 곡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빼돌리는 식으로 동유럽 곡물의 수입을 줄여나갔다.
그 동안 영지의 농노들을 쥐어짜면서 불만을 군대로 억눌렀던 영주들은 곡물수출이 줄어들면서 따로 수입처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이런 현상이 몇 년 더 지속되면 동유럽의 영주들은 파산을 하든지 아니면 농노들의 반란을 막지 못해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조만간 동유럽 영주들이 몰락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동유럽 슬라브족들에게 농업 말고는 산업이 없어요. 영주의 수입이 줄어들면 군대를 유지하기 어려워요. 그럼 폴란드나 루스 차르국이 오스만 제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것도 문제요. 그런데 곡물 수출이 막히면 동유럽 영주들이 농노를 해방하는 방향으로 갈 것 같소, 아니면 농노를 노예로 팔아치우는 선택을 할 것 같소?”
“루스 차르국은 유럽에서도 가장 늦게 농노제가 확산됐어요. 원래 자유농민들이었지요. 그래서 서유럽에 비해 농노제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이 더 심해요. 하지만 영주들은 미련하죠.”
슬라브족의 아시아적 전제성을 몽골이 지배했던 역사의 잔재로 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몽골족의 잔인성은 과장된 면이 있었다. 그리고 유럽 역사에서 잔인한 장면은 무수히 찾을 수 있었다.
“미련한 게 맞소. 가장 좋은 해결책이 있는데도 그저 단순히 쥐어짜다가, 굶어죽기 전에 반란을 일으킨 농노들을 다 죽일 것 같소.”
이민호가 유라시아 전도를 펼쳤다. 여진족의 땅에서부터 몽골 북부를 지나 우랄 산맥으로 향하는 선이 있었다. 바이칼 호수 남쪽부터는 점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은, 혹시 철도 노선인가요?”
“그렇소. 실선은 완공, 점선은 건설 중이오. 일부는 초원이고 철도 북쪽은 대부분 툰드라나 타이가 등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라오.”
시베리아 철도는 꾸준히 건설 중이었다. 인원이 넘쳐나서 철도 주변에 벌목장이나 목초지 개간 등 다른 경제 기반을 만드는데 투입된 인원이 더 많았다.
“철도를 건설하는 이유가 루스 차르국 때문인 것 같군요. 하지만 다른 동유럽 국가들은요?”
“나는 동유럽의 영주들이 몰락하든 말든 상관이 없소. 일부는 오스만에 대항하는 영주들이지만 다른 일부는 오스만 편에 붙어서 싸우고 있지 않소? 다만 농사는 농노나 소작농이 아닌 자유민이 지을 때 가장 효율이 높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소.”
“가장 좋은 해결책이 바로 그것이었군요. 그래요. 자작농 입장에서는 곡물을 수출하지 않아도 생활에 지장이 없어요. 반란을 진압할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쪽은 영주나 국가에요.”
“귀족들의 사치가 더 큰 이유일 것이오.”
농노들의 생산성에 의존해 편하게 수입을 올리던 동유럽의 영주들은 앞으로 큰 경제적 곤란을 겪을 것이 분명했다. 북미의 생산성이 너무 높은 탓에 곡물 수출은 경쟁 자체가 되지 않았다.
동유럽 영주들이 이 문제를 타개하려면 농노를 해방해 자유농민들이 생산성을 올리든지, 아니면 공업과 상업을 장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백 년 동안 타성에 젖었던 동유럽 영주들이 과연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사실 폐하의 걱정이 얼마 전부터 현실화됐어요.”
“어휴!”
헤드비히 공주가 2층 테라스로 안내해서 보여준 것은 정원을 가득 메운 500여 명의 슬라브족 노예들이었다. 주로 폴란드와 오스만 제국 국경 주변 몰도바, 왈라키아 등에서 살던 농민들이라고 했다. 그나마 헤드비히가 돌봐줬는지 깨끗한 옷을 입고 살도 적당히 올라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이 15세기까지 열심히 동유럽으로 진출한 것은 영토를 넓히려는 목적 외에도 이교도 노예를 얻어 농업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 외의 슬라브족과 발트족이 서둘러 기독교로 개종한 다음부터 게르만족이 동유럽으로 진출할 의욕을 어느 정도 상실했다.
그러나 흑해를 통해 오스만 제국으로 흘러드는 슬라브족 노예는 여전히 많았다. 같은 종교를 가진 자를 노예로 삼지 않는 것은 이슬람도 마찬가지라서, 기독교 문화권에서 이슬람 지역으로 노예가 많이 흘러들어갔다. 유럽에서는 대규모 노예를 소유할 경제적 동인이 적었던 시기였다.
“요즘 유럽에서는 노예 수요가 적어 팔리지도 않아요. 저도 괜한 돈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인간으로서 지나치기 어렵더군요. 노예상인들이 저들에게 밥을 거의 안 주는 거여요.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해서 팔려는 속셈이었어요.”
“마치, 아니요.”
이민호는 전철역 같은 곳에서 눈도 제대로 못 뜬 강아지나 새끼 고양이를 파는 악덕 장사꾼을 떠올렸다. 운 좋게 마음약한 주인을 만나 구해지더라도 그 전에 열악한 환경에서 키우고 예방접종도 하지 않았기에 금방 죽고 만다.
“여기 모인 이들 말고도 3천여 명이 더 있어요.”
“많군요. 그런데 이들은 정교회 신도가 아니란 말이오?”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있던 사람들이라서 명목상 무슬림이래요. 물론 거짓말이지요. 문제는 이들을 고향에 돌려보내줄 수가 없다는 거여요.”
“잘했소. 돌려보내면 다시 팔려갈 것이오.”
헤드비히 공주를 통해 폴란드어 통역을 구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정원에 모인 노예들에게 외치도록 했다.
“너희들에게 자유와 함께 약간의 여비를 주겠다. 고향에 돌아가거나, 갈 곳을 정할 때까지 당분간 이 저택에 머물거나, 북미로 가서 살아라.”
노예들이 한참 웅성거리더니 서로 통역을 해줬다. 그리고 대부분 북미로 이주하겠다고 청했다. 이주 희망자들은 당분간 여기서 머물다가 여객선이 오면 타고 가도록 했다.
“그리고 폐하의 취향에 맞춰서 노예 몇 명을 해방시켜 하녀로 고용했어요. 보시겠어요?”
“됐소. 하녀는 비키 공주가 관리하시오.”
헤드비히가 장난스런 미소를 짓기에 하녀들의 체형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상상은 현실이 돼서, 나중에 식사시간에 새로 고용한 하녀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발아래에 떨어진 물건을 찾기 어려운 체형이었다.
“아이슬란드 왕궁에 배치하기에는 그 지역 출신이 낫지 않겠소?”
“네. 맞아요. 수행 시녀는 있으니 됐고 서인도회사 본사와 새강릉 별궁에서 일을 시키려고요. 이미 하녀들에게 동의를 받았어요. 제가 폐하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끄응! 나를 말려죽일 셈이오?”
고산국 내명부에 속한 여인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중년 부인인 어의 같은 특별한 직책을 제외하고 가급적 외부 여자를 왕궁에 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명나라나 조선의 궁전처럼 왕실가족 외의 모든 여자들이 최소한 법적으로라도 군주에게 속하는 편이 왕실과 내명부 전체의 안전을 도모하는데 유리하다는 뜻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하렘에 거주하는 여자들이 300명에서 500명 수준이라고 해요. 그런데 폐하의 여자는 겨우 200명밖에 안 되잖아요. 설마 폐하께서 오스만 황제보다 못하지는 않으시겠죠?”
“이제 그만 좀 들이시오. 후궁에 공주를 따르는 시녀들이 많아진다 해도 영향력 차이는 없을 것이오.”
“그런 건 아니에요, 폐하. 제가 겨우 권력이나 탐하는 속물인 줄 아셨나요?”
괜한 소리를 했다가 헤드비히 공주가 토라지고 말았다. 공주를 달래는데 한참 걸렸다. 그러나 헤드비히 공주의 시녀들, 아이슬란드 귀족 영애들, 이번에 슬라브 계통 하녀들까지 해서 공주에 딸린 여자들이 30명에 가까웠다.
밤에 침전으로 여기사 소피에와 시녀 요한나가 들어왔다. 이민호가 반갑게 맞았다가 입이 쩍 벌어졌다. 소피에는 고산국 여자 해군 장교의 정복을, 요한나는 육군 장교의 정복을 입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헤드비히 공주의 작품이 틀림없었다.
“저, 폐하. 제가 군복을 입으면 안 어울리나요?”
“아니. 아주 잘 어울려. 그래서 문제야.”
키가 큰 소피에에게 짧은 군복 치마와 망사 스타킹을 입힌 것은 지나친 것 같았다. 요한나도 가슴에 달린 단추가 터져 나가려 했다.
“벗겠습니다, 폐하.”
“뭐, 안 벗어도 되는데.”
소피에가 군모를 벗자 기다란 금발이 엉덩이까지 쏟아져 내렸다. 소피에는 키 이상으로 다리가 엄청나게 길어서 한참 눈요기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요한나가 눈을 반짝반짝 뜨고 이민호 옆에 앉아 함께 소피에의 다리를 구경했다.
“망사 스타킹이 좋긴 좋구나. 겉옷은 그대로 입고 속옷만 벗어볼래? 요한나 너도.”
제복을 입은 여자는 남자의 환상을 채워주는 뭔가가 있었다. 이민호는 그렇게 새로운 세계에 입문했다. 예전에 체크무늬 치마를 입히고 호위들을 안은 이래 오랜만이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