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67 71. 북대서양 =========================================================================
구르카 용병들을 교육시키는 교도대대에서 인원을 차출해 스위스 용병들을 훈련시킬 제2 교도대대를 수에즈에 새로 창설하기로 했다. 수에즈 경비대의 업무 부담이 과중하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들에게는 매우 답답한 일이겠지만 새로운 부대의 교육과 훈련을 제대로 시키는 것은 전력을 증강시키는데 있어서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훈련교관 지원자가 부족해서 진급 대상자들을 모아 수에즈로 보냈다. 대위가 대대 병력을 지휘할 기회였다.
“스위스 사람들은 독일어와 불어 외에도 이탈리아어, 로망슈어를 쓴다고 해요. 통역 장교가 많이 필요해요. 그런데 로망슈어를 할 줄 아는 통역장교가 하나도 없어요. 게다가 로망슈어에는 일곱 가지 방언이 있다니까 감당하기 정말 어려워요.”
“독일어로 다 통할 거야. 만약 안 통하는 용병이 있으면 다른 용병들이 알려주겠지.”
“우와! 잘됐어요. 그럼 독일어 통역 장교만 보낼게요. 그리고 군부대 내에서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명령서에 서명해주세요. 특히 머리색이 옅은 백인은 아일랜드인들처럼 가난한 나라 출신 사람이라 해서 무시를 많이 당하나 봐요. 교관들이 스위스 용병들을 무시하면 안 좋을 것 같아요.”
흑인은 예전에 고산국 군인이라서, 구르카 용병들은 고산국 백성들의 외모와 비슷하게 생겨서 인종 차별을 당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아랍 계통이나 에스파냐, 포르투갈 상인들도 상인들 위주로 접하다 보니 손님 대접을 확실히 해줬다.
그러나 가난했던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백인 일부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나빠졌다. 갈색이 주종에 금발과 빨간 머리가 아일랜드인의 머리색이었다.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지금도 가난해?”
“그건 아니에요. 아일랜드인들 일부가 본토로 흘러 들어왔거든요. 아직 고산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기존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요.”
가난에 찌들었을 때의 습성이 아일랜드 이주민들에게 남아있어서 남의 집 개를 잡아먹는다거나 남의 밭에 몰래 들어가 곡식이나 채소를 훔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직장을 가지면서 충분한 수입을 벌고 별로 돈이 되는 것이 아닌데도 작은 이익을 탐했다.
“그 사람들 사정이 있으니까 불쌍하게 여겨줘야 하는데.”
“그래도 범죄는 범죄에요. 단호하게 대해야 해요.”
“맞다. 그래도 일단 교육부터 제대로 시켜줘야 해.”
아일랜드에서 이주민들을 받느라 고산국 전체적으로 큰 지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껏 데려온 사람이 사소한 범죄 때문에 탄광에서 일하게 된다면 사회적으로 손실이 컸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른 아일랜드인들에게 과도한 형량을 선고하면 고산국으로 이민을 준비 중이던 사람들이 이민을 다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인종 차별 금지를 명하는 명령서에 서명한 다음, 아일랜드 이주민들의 교육을 강화하는 행정 명령에도 서명했다. 그러나 아직은 서로 의사소통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언어가 좀 더 통해야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제대로 적응하고, 오해도 줄어들게 될 것 같았다.
“이민 오기 전에 아일랜드에서 너무 고생한 바람에 아일랜드인들끼리 이웃이 되려 하지 않아요.”
“통합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 정도라면 정말 심각하군.”
아일랜드인들이 고국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동족 혐오 수준이었다. 이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고 고산국의 생활양식에 적응하도록 도와야 했다. 일은 참 열심히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업무를 마치고 이민호가 신문철을 대충 훑었다. 신문만 봐서는 지난 두 달 동안 별다른 일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그래서 혜영에게 의견을 물었다.
“추밀원과 지방의원 선거에 백성들이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지금은 실제 권한도 많지 않으니까요.”
“저열한 자들에게 지배당해봐야 화가 나겠지. 내버려둬. 지금은 교육용이니까.”
“홍보를 충분히 했는데도 투표율이 낮을 것 같아 걱정이에요.”
“정치를 무시한 유권자들이 조만간 그 대가를 받게 될 거야. 권력지향적인 자들이 어떤 놈들인데? 자그마한 권한이라도 최대한 휘둘러서 백성들을 못 살게 달달 볶아댈 걸?”
추밀원과 지방의회 의원 선거는 위험한 실험이기도 했다. 자칫 국론을 분열시키고 심하면 북미나 호주가 떨어져나갈 수도 있었다.
“후보들 절반이 범죄 전력 때문에 탈락했어요. 나머지도 비슷한 사람들이에요. 그런 저열한 자들에게 작은 권력이라도 나눠준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앞으로 문제를 많이 일으킬 거여요.”
“그래서 선거가 자주 필요해. 후보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는 법을 가르치는 거야. 정치인들이 하는 꼴을 보기 싫으면 그 백성이 입후보해야지.”
“그게 더 걱정돼요.”
“미래를 위해 미리 지금부터 선거를 해서 백성들을 교육시킬 필요가 있어. 만약 개똥이가 다음 국왕이 됐는데, 혼자서 권력을 쥘 수 있을 것 같아?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권력은 나누는 거야.”
“누가 후계자가 되더라도 우리가 지켜줄 수 있어요.”
“만약 후계자의 장인이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면 어쩔 거야? 법적으로 후궁인 혜영이나 다른 여자들이 외척의 발호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자칫하면 왕실이 무너져. 그래서 왕실 외에는 정치적 책임을 지는 자들로 중요한 자리를 채워 넣어야 해.”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사자성어로 유명한 환관 조고는 진시황의 아들 호해 황제 앞에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했다. 문제는 어전에 참석한 신하들 대부분이 황제의 말보다 조고의 말이 맞다고 한 것이다. 이 정도면 나라가 즉시 망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결국 호해는 <사기>에 따르면 조고의 명을 받은 염락의 강요에 의해 자살했다.
“추밀원의 권력이 강해져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에요.”
“그렇지. 하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추밀원이나 정부에 정치적 책임을 다 떠넘기고 왕실은 무사히 연명할 수도 있어. 비겁한 말 같지만 이것이 현실이야. 그리고 사람이 아니라 법과 제도가 우리 후손들을 지켜줄 거야.”
“주인님 같은 국왕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 안타까워요. 부디 오래 사세요.”
“고마워. 우리 같이 오래 살자.”
생각대로 굴러가면 좋겠지만,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전제왕권은 짧은 기간 내에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스스로 권력을 나누는 길을 택했다. 물론 입헌군주정으로 바뀌려면 아직 머나먼 이야기였다.
벌써부터 이민호가 죽으면 고산국이 망하느니, 분열될 거라느니 하는 식으로 악담을 퍼붓는 자들이 많았다. 국왕이 아직 겨우 20대인데 벌써부터 후계구도를 논하는 불충한 무리들도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든 국왕의 힘을 약화시켜 왕실을 뒤흔들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었다.
고산국이 망하지 않도록, 그리고 분열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놓는 것도 이민호가 할 일이었다. 고산국이 앞으로도 계속 발전하고 강대국으로 남을 희망이 커지면 갑작스레 망할 가능성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민호 사후에도 여러 지역 백성들이 고산국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 분리하는 것보다 이익이라고 판단한다면 분리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물론 국가가 망하든 말든 무조건 권력만 탐하는 자들이 어떤 주장을 펼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의 백성들이 판단할 문제였다.
“조만간 북미 인구가 더 많아질 것 같아요. 그 전에 수도를 먼저 옮겨야 하는 것은 아닌가요? 천도하려면 시간이 많이 들 거여요.”
“정해지면 옮기는 거야 금방이지. 조선이 개경에서 한성으로 천도할 때 수십 년씩 걸린 것은 절대 아니야.”
“주인님은 뭔가를 기다리시는 것 같아요.”
“그래. 굳이 명나라 영토를 뜯어먹을 필요는 없지만, 북방 영토 때문에 아직 지켜보고 있는 거야. 북미보다는 여기에 있어야 시베리아 개척을 지원하기 쉬우니까.”
“태평양 한 가운데에 큰 영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와이?”
“그곳은 너무 작아요.”
하와이는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적절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화산 분화 가능성 때문에 처음부터 수도 후보에서 제외했다. 원주민들과의 관계도 아직 정립하지 못했다.
단 며칠이지만 조금이라도 애들과 놀아주려고 왕궁 놀이터로 향했다. 넓은 야외 놀이터에 몇몇 후궁들과 유아원 교사들 말고는 죄다 꼬마아이들이었다. 흙 놀이는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중요한 교육과정이었다.
“아바마마!”
몇몇은 이민호에게 아빠라고 부르며 달려들고, 좀 더 어린애들은 낯이 익지 않아 데면데면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꼬마들의 친구였다.
“애들아! 오늘은 다람쥐를 가져왔다.”
“와! 쥐처럼 생겼는데 귀여워요.”
“꼬리가 탐스럽지? 만져봐.”
이동장에서 다람쥐 한 마리를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 신기하게 생긴 작은 동물을 보려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안 물어요, 아바마마?”
“당연히 물지. 왁!”
“으앙~”
아이들이 기겁해서 물러서더니 몇 명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을 울렸다고 혜영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아이들에게 동물을 접촉하게 하는 것도 면역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다. 위생과 면역력 증가는 정반대에 위치했으나 최선의 합의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예방주사나 치료약으로 대처하기에는 세균의 종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5월 초에 일찌감치 덴마크로 향했다. 국왕좌승함을 비롯한 순양함 네 척, 연료보급선 한 척, 수송선 세 척은 거리상 가까운 서쪽 인도양 항로가 아니라 동쪽 태평양 항로를 선택했다.
함선들은 유구국, 구주, 아이누 섬에 이어 감자반도에 들렀다가 본격적인 북태평양 항로에 접어들었다. 새 나하에 도착해서는 농업 생산력에 놀라고, 새인천에 들러서는 유전을 점검했다. 새목포의 별궁에서는 이틀 쉬었다.
“꺄악! 차가워!”
아이슬란드 시녀들이 물놀이를 하는 별궁 수영장에서 이민호는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이번 항해에서는 카트린 브륀디스아르도티르를 비롯한 아이슬란드 시녀들도 데려왔다. 왕립여학교에 다닌다지만 주군인 여왕의 결혼식에 참가하는 것은 모든 귀족들의 의무였다.
“저 애들이 열일곱, 열여덟이란 말이에요? 저 정도면 충분히 큰 것 같은데 말이에요.”
“가슴만 크오. 헤드비히 공주가 가슴이 큰 순서대로 뽑았소.”
“어머나? 오호호호! 공주님이 전하의 취향을 제대로 파악하셨군요.”
북미 여공작 비올레타가 이번 항해에 동행했다. 비올레타는 덴마크와 아이슬란드에서 두 번 열리는 결혼식에 참가한 다음 새강릉 별궁에서 살기로 했다.
비올레타의 시녀들도 이삿짐을 싸서 옮기고 있었다. 다스마리냐스 전 총독 부부가 에스파냐 비베이로로 이사하면서 비올레타도 쉽게 북미로 이사할 수 있었다.
“비올레타만 먼저 가게 해서 미안하오. 북미에서 수도가 결정되면 바로 천도를 실시하겠소.”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하세요. 시간은 많아요. 왕도를 옮기는 문제는 몇 백 년 앞을 내다보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해요.”
“그렇게 하겠소.”
“그리고 전하가 모든 일을 다 할 필요는 없어요. 후세를 위해 몇 가지 과업을 남겨둘 줄도 아셔야 해요.”
이민호는 건국 이후 항상 조바심을 내면서 살아왔다. 그것을 잘 아는 비올레타가 이민호를 위로했다.
5월 중순에 파나마를 통과하고 새순천, 새진주를 들러서 업무 보고를 받았다. 북미 여공작인 비올레타가 이 지역의 실무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다. 새진주 시장 오응태가 비올레타에게 보고하면서 땀을 뻘뻘 흘렸다.
“오 대감님. 지금까지 대감님이 지휘하는 기병대의 힘을 원주민들에게 충분히 과시하셨어요. 이제부터는 다독일 필요가 있어요.”
“예? 에. 그것은 제 장점이 아니라서요. 헤헤.”
시장 오응태가 이민호를 대할 때와 달리 비올레타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비올레타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미시시피 강 주변에 거주하는 원주민 부족들은 아주 옛날에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위치상 새진주는 고산국의 새로운 왕도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원주민들을 안정시키지 않고는 불안해서 어떻게 왕도로 선정할 수 있겠어요?”
“여공작 합하! 사실 새진주는 왕도로서 부적합합니다. 교통이 좋고 미시시피 강 때문에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비가 너무 자주 내리기 때문입니다.”
“비가 자주 내리는 것은 상관이 없어요. 혹시 홍수가 자주 나나요?”
“예. 작년에 제방을 높고 튼튼히 쌓았는데도 지난 달 태풍 한 번에 침수가 돼버렸습니다. 시장으로서 제가 맡은 새진주가 왕도로 선정된다면 영광이겠지만 이런 건의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홍수가 자주 나는 지역은 전염병 피해도 우려되는군요. 좋은 건의를 해주셔서 고마워요. 참고하겠어요.”
비올레타가 이민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태평양을 내해로 두고 국가를 운영한다면 북미 서해안이 수도로서 가장 적당한 위치였다. 그러나 새인천에는 지진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자칫 대화재로 인한 국가 멸망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북미 남해안이나 동해안에서 새로운 수도를 찾기로 했다. 현대 미국 같으면 워싱턴이 수도니까 다시 생각할 것도 없지만, 고산국은 대서양보다는 아직은 태평양이 본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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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문제는 좀 더 언급하고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