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65화 (614/1,000)

00665  70. 귀로  =========================================================================

교황과 몰타 기사단이 탄 배들이 크레타로 돌아왔다. 성지 순례할 때와는 또 다른 숙연함이 이들의 표정에서 묻어 나왔다.

교황이 일부러 국왕좌승함을 방문했을 때 이민호가 갑판에 나가서 맞이했다. 알현실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감사합니다, 고산국 국왕폐하. 이 말씀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로도스의 산작베이가 친절하게 안내해드리던가요?”

“그렇습니다. 산작베이와 오스만 관리들이 저희들을 정중하게 맞이해서 기사들의 묘지로 안내해줬습니다.”

교황이 뭔가 혼란에 빠진 것 같아서 물었다.

“걱정이 있으시군요.”

“예. 비록 종교가 다르더라도 아흐마드 파샤나 로도스의 산작베이처럼 오스만 제국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제 잘 알겠습니다.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로도스 섬 같은 실지를 회복할 힘이 저희에게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로도스와 키프로스에 남은 기독교인들이 걱정입니다.”

“예루살렘이나 레반트 지역에서 보셨다시피 곳곳에 기독교도들이 남아 있습니다. 종교적 박해를 받더라도 그들은 결코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제 가슴이 아픈 이유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위해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교황이 한숨을 팍 내쉬었으나 오스만 제국 영역 내의 기독교인들은 황제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허락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기독교도나 유대인들보다는 오히려 이슬람의 소수 종파들이 더 큰 박해를 받았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유럽에서 이슬람 신앙을 갖고 살아가기란 정말 어려웠다. 에스파냐에서 모리스코인들을 쫓아낸 것이 얼마 전이었다. 유대인들은 15세기 초반에 이미 에스파냐에서 쫓겨났다. 다른 지역에서도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았고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 사실을 교황에게 말해줄까 말까 망설이는 이민호의 허리를 바로 옆에 선 민지가 지긋이 꼬집었다. 괜히 교황에게 밉보일까봐 말하지 않기로 했다.

“고산국의 자매님들도 추모미사에서 신심 어린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보시기에 견습 수녀들은 어떻습니까?”

“신앙심만 훌륭한 게 아니라 묘비에 묻은 더러운 것을 닦거나 힘쓰는 일에도 나서서 열심히 봉사해주었습니다. 나병환자와 흑사병 환자들을 돌봐줬던 시에나의 성 카테리나와 비슷하게 훌륭한 인품을 가진 분들입니다.”

“견습 수녀들을 로마에서 제대로 공부를 시키면 어떨까 합니다. 성 베드로 대성전이 아직 미완공이라 안타깝기도 하고 말입니다. 험! 험!”

“신앙심이 깊은 분들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자매님들이 신앙과 학문을 닦을 훌륭한 수녀원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전에 기부금을 내고 견습 수녀 세 명을 로마의 수녀원에 유학시키기로 했다. 나중에 전해들은 견습 수녀들이 몹시 기뻐했다.

“학문을 나눈다면 양쪽 모두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입니다. 로마와 이탈리아의 청년 학생들은 과학이 발달한 고산국에 유학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천문학과 수학, 의학 외의 자연과학과 기술 관련 학문은 외국인이 전공을 못하게 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개방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자연과학을 응용한 것을 공학이라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 하기에 외국인 유학생들에게는 별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화학과 지구과학, 기계공학과 금속공학, 전기공학과 전파공학을 다른 나라에 확산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실 순수과학도 유학생들이 배우는 과정은 약간 달랐다. 순수과학을 응용한 것이 공학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 순수과학의 수준 차이를 지금처럼 앞으로도 유지하고 싶었다.

“안 믿으시는군요. 솔직히 사실을 알려드리자면, 지금 이 시대에 고산국이 보유한 모든 지식을 외국과 공유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연화약 제조법은 왕궁에서도 혜영과 혜진 등 극소수만 알고 있었다. 기관 제작 기술도 국방연구소에서 극비로 취급됐다. 바로 이 두 가지가 고산국이 적은 인구로도 태평양과 대서양을 비롯한 세계의 바다를 제패할 수 있었던 핵심 기술이었다.

“이해합니다. 고산국이 특정 국가에만 기술을 전파하지 않고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독점한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큰 불만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교황이다 보니 유럽 여러 나라들의 균형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제게는 유럽 모든 나라들이 동등합니다. 덴마크나 에스파냐에만 기술을 전수하는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훌륭하십니다.”

교황이 차 한 모금을 마신 다음 주제를 바꿨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교수가 이번에 낸 책에서 지동설을 발표했습니다. 기원전부터 지동설을 주장한 학자들이 여럿 있었고 약 60년 전 코페르니쿠스도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약간 오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젊고 명석한 학자답게 논리에 어떠한 흠집도 없더군요.”

“예. 관측 결과와 이론이 정확히 합치했습니다.”

천동설의 치명적인 약점이 지구 안쪽 궤도를 도는 내행성들의 궤적과 위상 변이였다. 천동설로도 행성들의 궤도를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다지만 원 궤도 운동 속에서 또 다른 원 궤도를 도는 주전원과 부전원을 도입해야 해서 천체 운동이 꽤나 복잡해졌다.

갈릴레오는 이민호의 조언을 받아들여 행성들이 원운동이 아닌 타원 운동을 한다고 이론을 수정해서 관측 결과에 훨씬 가까운 이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고산국과 유럽에서 연구결과를 출간했다. 갈릴레오는 그 동안 천문대와 천체망원경, 여러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티코 브라헤 이상으로 천문 관측 자료를 쌓아놓고 연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직자들 일부가 몹시 불편해 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여호수아 시대의 표현 방식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성서에 해와 달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는 식으로 기록됐으니까요. 일부 성직자들이 갈릴레오를 파문해줄 것을 제게 건의했습니다. 물론 저는 거절했습니다.”

“교황 성하의 우려를 이해하겠습니다. 갈릴레오에게 당분간 유럽에 가지 말 것을 권하겠습니다.”

로마가톨릭이 우세한 지역은 그나마 지동설에 동의해주는 성직자라도 있었다. 그러나 성서에 최우선 가치를 둔 신교도 지역을 방문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훌륭한 학자가 이 세상의 진리를 알아가는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감히 신의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신의 섭리를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피조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역시나 성직자들은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생각보다 깨어 있는 학자였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은 사실만 알았던 이민호는 개신교가 한 술 더 떠서 지동설을 비판할 줄은 예상도 못했다. 그러나 교황과 성직자들이 신과 신도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좋아할 리 없고 성서를 최고로 여겨야 하는 개신교로서는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4월 중순에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장갑차와 승합차로 교황 일행과 순례자들을 항구에서 교황청까지 실어 날랐다.

순례자들은 돛 없는 배와 말이나 소가 끌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마차를 타보는 경험을 하게 됐다. 비행기도 천사나 악마가 아니라 사람이 타고 움직이는 기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순례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내내 떠들어댈 것으로 예상했다.

“고아인 저희들을 보살펴주신 것만으로도 모자라 꿈에 그리던 로마에 유학까지 보내주시니 은혜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수녀님이 되면 은혜를 갚는 거야.”

과학기술이나 군사력, 부유함이 아니라 영적 수준을 중시하는 유럽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견습 수녀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뛰어난 인재들인 견습 수녀들이 훌륭한 수녀로 성장할 것을 이민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 학문적인 성과도 기대했다.

“대사관에 일러두었으니 매월 100냥씩 받아서 써라. 필요 없어도 받아가도록 해. 괜히 대사관 직원 곤란하게 하지 말고.”

“너무 많습니다, 전하! 수녀가 되려면 청빈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너희들이 좋은 옷을 입고 사치를 부리라는 것이 아니야. 필요한 책은 사서 읽고, 아직 성장기니까 좋은 음식을 먹는 게 좋겠어. 그리고 남는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해. 바쁘면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고맙습니다, 전하. 만수무강하소서.”

견습 수녀들에게 처음으로 큰절을 받았다. 수녀가 수녀원장에게 엎드려 절을 해야 하는 시대라서 국왕에게 큰절을 하는 것은 유럽에서도 과도한 예절이 아니었다.

성 베드로 성당 앞에서 교황과도 작별 인사를 나눴다. 감사 인사는 지금까지 숱하게 받았다. 그리고 무슨 공의회를 열어서 기독교 수호자 운운한다는 이야기를 이민호는 흘려듣고 말았다. 그런 칭호는 별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나오자 로마에 상주하는 스위스 관리가 이민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에 이야기를 나눴던 대위와 함께 용병 계약에 관해 논의하고 조건을 관리와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장기적인 계약이며 급료도 높아 관리가 아주 기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여러 주정청을 대리하는 관리와 계약을 맺기로 했다. 계약금을 베네치아 금화로 지불하자 관리가 좋다고 입이 찢어지려 했다.

“그런데 용병들에게 일 년에 한 달씩이나 휴가를 줘도 되겠습니까? 용병들은 계속 근무지에 있는 편이 좋을 텐데요.”

“어차피 월급은 똑같이 나가니 걱정 마시오. 그리고 용병 개개인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나, 용병부대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 기간 휴식을 취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오.”

“피 냄새가 몸에 밴 자들이 평화로운 마을에 돌아오면 괜히 사고나 쳐서 말입니다.”

“쯧쯧! 용병들이 스위스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구려.”

“그런 면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관리인 제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용병들이 스위스 안에서 저지를 범죄가 걱정돼서 말입니다.”

관리의 뻔뻔스런 대답에 대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스위스의 현실이었다. 용병 계약을 주정청 단위로 하기 때문에 용병들이 무시당하면서도 선택권은 별로 없었다.

밤에 지수와 지영이 결혼식 성장을 하고 침전으로 들어왔다. 합환주를 마시고 나서 이민호가 진중한 표정으로 둘의 결혼 예복을 차례로 벗겼다. 이번 원정 중에 안겠다는 약속을 미루고 미루다가 뒤늦게 지키기로 했다.

지수는 키가 크고 날씬한 편이었고, 지영은 키가 작은 대신 골반이 커서 애를 잘 낳게 생긴 몸매였다. 그 동안 육체적인 접촉은 꽤나 자주 있었는데도 둘은 오늘 있을 일을 두려워했다.

“너희들에게 물어보자. 민자 돌림 언니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지자 돌림 호위들의 첫날밤을 미룬 것은 민자 돌림 호위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몰리고 몰려 결국 안고 말게 됐다.

민자 돌림과 달리 지자 돌림은 여진족 부족장들의 딸이었다. 평민에 불과하고 시전부락이 멸망한 직후 한때 전쟁포로로서 노비 신분이던 민자 돌림에 비해, 처음부터 후궁이 된 귀족 처녀들의 신분이 훨씬 높다는 뜻이다.

이들이 여진족 추장의 딸이라는 신분을 앞세워 기존 호위들을 무시할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민호 개인의 기우에 불과했다.

“그분들은 주인님을 도와서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십 년 넘게 주인님을 모셨으며 개국공신으로서 높은 작위까지 받으신 분들입니다. 능력도 뛰어나시고 신분도 저희들에 비해 까마득하게 높습니다.”

“너희들은 부족장의 딸들이라면서? 신분이 높다며?”

“여진족 작은 부족의 딸이 어찌 감히 고산국의 개국공신과 신분을 비교하겠습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동안 괜히 걱정했다 싶었다. 이민호는 부족장들이 억지로 맡긴 처녀들이 신분이 높다고 위세를 부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기존 호위들의 신분이 이미 높은 탓에 오히려 여진족 귀족 처녀들이 오랫동안 위축됐다. 나이가 어려서 왕립여학교 학생으로 집어넣은 것도 신분 격차를 더욱 벌리게 만들었다. 민희나 민영 앞에서는 귀족 처녀들이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잘 알았다. 앞으로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도록 해라.”

“주인님을 모시게 돼서 영광이옵니다.”

마치 독재국가의 지배자가 무수히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원해서 여자들을 수집한 것도 아니고, 여러 지역을 지배 아래 두다 보니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피부가 아주 곱구나.”

“의용공주 전하 덕분입니다, 주인님.”

“가슴은 크고.”

“혜영 총리님 덕분입니다, 주인님.”

이민호가 말만 했다 하면 호위들에게서 다른 후궁들의 이름이 나왔다. 사실 기존 후궁들이 제대로 잘 가르쳤다. 얼굴과 몸매 하나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쳐지지 않을 것이다.

알몸이 된 둘을 눕히고 이곳저곳을 만졌다. 둘의 몸을 서서히 달아오르게 만든 다음 먼저 몸이 준비된 지영과 결합했다. 고통보다 환희가 큰 듯 지영이 이민호의 몸을 꽉 껴안았다.

“이제 안심이 돼?”

“네, 주인님. 드디어 제 꿈이 이루어졌어요.”

“꿈도 참 소박하다.”

새로운 여자를 안을 때마다 부담이 커졌다. 그러나 왕립여학교 재학생들이 점점 졸업하면서 조만간 왕실 자녀들이 공부할 왕립학교로 개편될 예정이었다. 후궁의 숫자 자체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30분 쉬었다가 이번에는 지수를 안았다. 지수는 기뻐서 처음부터 훌쩍거렸다. 딱히 이들의 출신 부족에 특권을 주는 것도 아닌데도 이민호에게 안기면서 무척 안심하는 것 같았다.

함대는 밤새 항해해서 수에즈 운하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부터는 분위기가 확 달라지겠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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