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61화 (6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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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귀로

부활절 저녁에도 순례자들이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다. 늦게 도착한 자들이 몹시 아쉬워했으나 이 시대에 사용된 범선이나 범노선의 항해 능력으로는 몇 달 늦어지는 것이 예사였다. 육로로 온 자들은 이런 저런 사건, 사고로 인해 더 늦어졌다.

교황과 성직자들, 그리고 호위 병력은 다음 날 예루살렘을 떠나 아슈도드 항으로 출발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계곡을 지나 첫 번째 쉼터에서 양고기를 나눠 먹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은 사양하고 여전히 마른 빵과 물만 먹었으나, 그 동안 굶주린 순례자들은 양고기 꼬치구이나 물에 끓여 소금을 치는 식으로 간단히 요리된 고기를 먹었다.

“질기지 않아? 노린내가 역하다고 들었는데 괜찮아?”

“세상에! 이 맛있는 양고기를 그 동안 안 드셨어요? 어린 양이라 냄새가 없어요. 저한테는 아쉽게도.”

민영이 권해서 이민호도 꼬치구이 맛을 봤다. 고기는 의외로 질기지 않았고 역한 냄새도 없어서 좋았다. 양고기의 맛은 양의 나이와 요리법에 따라 극단적으로 달라진다고 들었다.

“자네들도 이리 와서 좀 먹어. 이야기 좀 하세.”

“예, 폐하. 감사합니다.”

교대하고 쉬러 가는 스위스 용병들을 불러서 모닥불 옆에 앉혔다. 한 명은 하우프트만, 즉 대위, 두 명은 부사관 계급이라고 했다.

스위스 용병들 중에는 양치기 출신이 많아서 물에 끓인 양고기도 쉽게 먹었다. 농지 면적이 좁고 계단식 농법이 발달한 스위스의 농업에서 남자가 할 일이 별로 없었고, 수확량도 적었다. 그래서 한 가족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남자들이 이렇게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 와야 했다.

장창이나 할버드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할버드는 짧은 길이에도 이것저것 날이 많이 달려 꽤 무거워 보였다. 하얀 철갑옷과 투구, 여러 가지 장식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펑퍼짐한 바지와 소맷자락은 조금 어색했다.

“대위! 혹시 스위스에 남는 인원이 있다면 고용하고 싶은데.”

“폐하께서 저희들을 높이 평가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하지만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 왔습니다.”

“고산국이 에스파냐와 가까워서 불안한가?”

“바로 그렇습니다. 돈에 환장한 주정청에서야 좋다고 하더라도 가톨릭교도가 대부분인 스위스인들은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길 것 같습니다.”

용병이라 해서 무조건 돈을 많이 주는 쪽에 고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스위스 용병들이 교황이나 프랑스 쪽에 주로 고용된 것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

원래 스위스의 백작 가문에서 출발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 제국 황제를 배출하면서 오스트리아로 근거지를 옮긴다. 스위스는 그 기회를 이용해 독립을 시도하지만 이를 막으려는 합스부르크와 계속해서 충돌하게 된다.

1386년 젬파흐 전투는 1500명의 농민군이 4천 명의 기사와 용병 기병들을 패배시킨 역사적인 전투였다. 이어진 1388년의 네펠스 전투에서도 스위스가 거듭 승리해 독립을 쟁취했다. 장창으로 무장한 소수의 농민병들이 말을 탄 다수의 기사와 기병들을 몰살 시킨 어이없는 결과가 나타났고, 스위스 용병들이 전 유럽에서 각광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합스부르크는 계속 스위스를 노렸고,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국가들에게 포위된 프랑스와 밀착했다. 1474년의 계약과 1500년 노바라의 배신에 이어 1515년 마리냐노 패전 이후부터는 프랑스와 스위스 주정부들이 조약을 맺어 프랑스에 적대적인 국가에 용병으로 고용되지 못하게 됐다.

노바라의 배신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교전 상대인 프랑스와 밀라노 공국 양쪽에 속하게 된 스위스 용병들이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밀라노 공작 막시밀리안을 도망시켜주기로 했다. 그러나 현상금에 눈이 어두운 용병이 고발해서 프랑스군이 막시밀리안을 체포해 처형하게 된 사건이었다. 스위스 주정청에서 고발자인 용병을 급히 처형시켰으나 고용주를 팔아넘긴 사실은 변하지 않아 스위스 용병들의 명예가 떨어진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 스위스에는 아직 중앙정부가 없었다. 몇몇 주는 프랑스가 아닌 에스파냐와 계약했다. 현재 네덜란드에는 빌헬름 텔이 활동했던 우리(Uri) 주 출신의 스위스 용병 1개 연대가 1574년 이후 에스파냐에 고용돼 주둔하고 있었다.

“고산국은 에스파냐의 적인 네덜란드하고도 교역을 하고 있지. 뿐인가? 오스만 제국하고도 가까워. 그런 건 문제가 안 돼.”

“형제들과 싸울 일이 없다면 가능하겠습니다. 하지만 마리냐노, 비코카, 파비안 전투에서 계속 패배한 사실을 알고도 저희들을 고용하시겠습니까?”

“스위스군이 연속 패배한 것은 전술과 무기체계가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네. 고산국의 이름으로 싸우는 동안 전술과 무기체계 문제는 없을 것이야. 내게 용병 고용의 기준은 고용주에 대한 충성, 이 하나라네.”

“저 자부심 넘치는 구르카 용병들처럼 말씀이십니까? 자그마한 친구들인데 체력과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참으로 대단하더군요.”

스위스 용병은 16세기 전반 잇따라 패배해 유럽 최고의 용병부대라는 명성을 잃었다. 1512년 라벤나 전투 이후 중장기병이 중시되는 중세식 전쟁은 종언을 고했고 기동력과 대포의 화력이 우선됐다. 스위스 용병도 뒤늦게 화승총과 대포 등 화기를 도입했으나 한때 전장을 지배했던 특유의 강력함은 이미 잃어버렸다.

그러나 스위스군은 그 이후에도 전멸할 때까지 치열하게 싸웠고, 계속해서 패했다. 심지어 스위스군을 모방했으나 불량배들과 다름없는 독일 용병부대 란츠크네흐트에게도 패했다. 이제 스위스군에 남은 것은 충성심밖에 없었다.

무기체계와 전술은 사실상 한 묶음이라서 무기가 바뀌면 전술도 바뀌어야 했다. 그리고 고산국의 무기는 이 시대 기준으로 과도하게 발전한 느낌이 있었다. 충성스런 스위스 용병에게 고산국 무기로 무장시키고 전술 훈련을 시킨다면 최고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저의 동료들이 폐하께 고용된다면 어디에서 싸우게 됩니까? 가끔 고향에 휴가를 가고 싶어 할 텐데, 고산국은 너무 멀다고 들었습니다.”

“자네는 교황청에서 계속 근무하려고?”

“그렇습니다. 저는 이미 교황 성하께 선서를 했습니다. 제 동료들처럼 저도 30세에 퇴직할 때까지 교황 성하를 지키겠습니다. 30세 거의 다 됐습니다만.”

“자네가 30세 넘어서 와도 좋고, 다른 사람이라도 좋아. 그리고 싸우는 게 아니라 지키는 일일세. 전투가 있든 없든 상관없어.”

스위스 용병은 싸우는 척만 하고 전쟁을 길게 끌려는 이탈리아 용병이나 전세가 불리해지면 그 즉시 도망치는 독일 용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깜빡했다. 스위스 대위가 몹시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젊을수록 전투를 기대할 텐데요. 저도 전투라면 사양하지 않습니다.”

“싸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 평소에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지키다가 일이 있을 때 일부 병력이 예루살렘이나 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 혹은 북미 대륙으로 파병될 걸세. 유럽에서 싸울 수도 있겠지.”

수에즈 운하에는 현재 고산국 병력 일부가 파병되어 경비 임무를 맡았다. 이집트 카이로에 주둔하는 병력이 적다고 하나 거의 1개 대대에 달하는 병력이 수에즈 운하를 지키고 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주마다 창설한 이집트군도 급할 때 운하 방어에 투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시나이 반도에 거주하는 베두인 족, 또는 베드윈 족이라 칭하는 유목민들이었다. 이들이 이집트인 마을을 약탈하거나, 낙타 또는 양떼를 이끌고 이집트를 가로질러 사하라 사막으로 이동하는 일이 잦았다.

베두인 족의 약탈을 막거나 유목민의 대규모 이동이 있을 때 감시하려면 수에즈 운하 경비를 맡은 병력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본토에서 병력을 증파할 수도 없었다. 이집트군은 주 단위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스위스 용병이 아니더라도 따로 용병을 고용할 필요가 있었다.

“근무지역이 어마어마하게 넓군요.”

“배를 타고 가면 금방이지. 일 년에 한 달씩 휴가를 줄 테니 교대로 근무하면 편할 걸세.”

“고산국 배는 다르더군요. 빠르고 안전합니다. 봉급은 어느 정도입니까?”

“앞으로 바뀌겠지만 현재는 고산국에서도 보병 중대장까지 부사관일세. 그 이상 지휘관은 고산국 현역 장교가 맡는다네. 중대장 24굴덴, 중대 기수 20굴덴, 나머지 부사관은 12굴덴, 병사는 8굴덴을 지급하겠네.”

“우와! 조건이 아주 좋습니다.”

“봉급 기간은 그레고리력에 따라 30일 또는 31일 기준, 계약기간은 기본 2년에 병사의 자유 선택에 따라 매 2년을 추가로 연장해서 40세까지 근무. 계약금은 월급의 절반 선지급. 어떤가?”

스위스는 법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고, 영주나 시에서 제국 굴덴의 금 함량에 맞춰 금화를 발행했다. 16세기 후반에 제국 표준 굴덴은 피렌체 플로린의 1.2배 가치이며 피렌체 플로린은 금 3.49그램, 베네치아 두캇은 금 3.545그램을 함유했다. 굴덴은 현재 고산국 기준으로 은 한 냥에 가까웠으나 현재 금과 은의 상대가치에 변동폭이 컸다.

유럽에 가격혁명이 일어나면서 직공들의 우두머리가 현재 6굴덴 정도를 월급으로 받았기에 병사가 8굴덴을 받는다면 대우가 좋은 편이었다. 교황청에서 근무하는 스위스 근위병의 딱 두 배였다.

이 시대 유럽에서 병사나 용병들의 봉급을 확실히 지급하는 것은 군 기강의 확립과 전력 상승에 크게 기여했다. 네덜란드 독립군이 초반의 계속된 패배에서 벗어나 에스파냐 군대를 제대로 상대하게 된 것은 마우리츠의 군제개혁이나 참호, 화약무기 확보보다는 병사들이 봉급을 제때 받게 된 이후였다. 네덜란드는 현재 보병 3만, 기병 2,600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임오군란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군 조직에 부패가 만연하면 외국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낼 수 없다. 오히려 반란이 일어나 국가가 위태로워진다. 문제는 부패의 구조화가 정착되기 쉬운 반면, 부패 척결은 어렵다는 것이다. 상층부부터 부패한 군과 행정부에서는 이 문제를 알면서도 부패 척결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온갖 구호만 난무하게 된다.

“후한 대우에 감사드립니다. 무기와 복장, 그리고 식사는 당연히 병사들이 자체 해결해야겠지요? 보급 상인들은 누가 지명합니까?”

“그럼 전술을 어떻게 변경하겠나? 무기와 군복, 식사나 다른 보급품은 다 해결해주겠네. 보급 상인은 없는 대신 보급부대가 보급품을 수송해줄 거야.”

“충격적이군요.”

“음. 요리사를 부사관과 병사 대우로 스위스에서 고용해오는 것이 좋겠네. 술은 보급해주지만 담배는 따로 사서 피우게. 계약 기간 중에는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좋을 걸세.”

이 시대에는 병사들에게 술과 음식뿐만 아니라 무기와 화약을 판매하고 전리품을 매입하는 상인들이 전쟁터까지 부대를 따라붙었다. 간호와 세탁을 담당한 여자와 예능인들까지 합하면 부대를 따라다니는 민간인들이 부대 규모와 비슷하거나 30년 전쟁 중에는 1.5배에 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대 명칭은 마음대로 해도 좋네. 헬베티로 하든 스위스로 하든, 아니면 칸톤 이름으로 하든 자유야. 규모는 1개 연대, 1,500명에서 3,000명 정도인데 모집이 가능하겠나?”

“유럽에서 1개 연대는 일반적으로 12개 중대에 6천 명입니다만 고산국은 에스파냐처럼 연대 정원이 적습니다. 혹시 규모를 좀 늘려주실 수 없습니까? 스위스에는 노는 젊은이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오호? 그럼 2개 연대. 4개 연대?”

1474년 부르고뉴 전쟁 때는 스위스 베른 시 한 곳에서만 용병 2만을 동원했다. 300년 동안 프랑스에 고용됐던 스위스 용병 50만이 죽었다. 열악한 스위스 농업의 특성상 성인 남자 대부분을 용병으로 파견할 수도 있었다.

“제 고향 루체른 주 외에 다른 주에 통보하면 병력을 더 모아줄 겁니다.”

“평시에는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으니 일단 2개 연대로 시작하세. 음. 1개 연대는 수에즈에 두어 경비시키고, 1개 연대는 어디에 주둔시키지?”

이때 교황을 측근에서 모시는 추기경이 모닥불로 다가왔다. 그 동안 계속 엿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고산국 국왕폐하! 혹시 로마를 지켜주기 위해 스위스 용병을 모집하고 계십니까? 역시 기독교의 수호자로 예정된 분이십니다.”

“전혀 아니요, 추기경 예하.”

“말씀을 들어 보니 2개 연대를 고용하시는 것 같군요. 스위스 용병은 저희 교황청에서도 신뢰하는 군대입니다. 수에즈에 1개 연대, 로마에 1개 연대를 주둔시키면 어떻겠습니까?”

“으음. 글쎄요.”

“로마는 스위스에 가까우니 휴가를 보내기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폐하에서 용병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켜주신다면 1개 연대의 봉급과 주둔 비용은 교황청에서 분담하겠습니다.”

만약 1개 연대가 로마에 주둔한다면 유럽 문제에 개입시키기에도 위치가 좋았다. 그리고 유사시 베네치아를 구원해야 한다면, 로마에서 보내야 훨씬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중대 단위로 로마와 수에즈에 교대로 주둔시키면 전력 상승에 도움이 될 듯했다.

“그렇다면 로마 인근에 주둔지를 내주십시오. 평시에는 로마 시를 보호하겠지만 교황청의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스위스 연대에 대한 교황청의 명령권이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입니다. 교황청은 이제 예전처럼 성전을 일으키거나 신성동맹을 주도해 열강들을 가입시킬 힘도 없습니다. 로마를 집어삼키려는 이리떼 같은 열강들로부터 지켜주십시오.”

1571년 레판토 해전이 교황이 주도적으로 참가한 신성동맹이었다. 1683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오스만 제국을 동유럽에서 몰아내기 위한 신성동맹을 제안했고, 전쟁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교황청은 유럽 안에서는 주권국의 하나로서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이교도 국가에 대한 연합의 필요성이 있을 때는 그런 식으로 성전을 주도했다. 나중에는 로마 교황청이 아예 빠지고 기독교 국가들끼리 신성동맹을 체결하기도 했다.

“좋습니다. 스위스 용병 1개 연대를 로마에 주둔시키고 평시 임무는 교황청 외곽 경비와 로마 시 수비로 규정하겠습니다. 교황청 내부 경비는 지금처럼 교황청에서 맡으십시오.”

“감사합니다. 교황 성하께서도 기뻐서 기도를 올리시는군요.”

추기경이 활짝 웃으며 돌아갔다. 교황은 천막 앞에서 성직자들과 함께 밤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교황과 추기경들이 화려한 법복을 벗어 지금은 성지 순례에 참가한 늙은 수도사들처럼 보였다.

“루체른 외에 주정청 몇 곳에 폐하의 계약 의사를 전달하겠습니다. 주정청에서 심의를 거쳐 계약할 관리를 폐하께 보낼 것입니다. 관리를 어디로 보내드릴까요?”

“로마와 베네치아에 고산국 대사관이 있네. 연락해둘 테니 그곳에서 계약하라고 대위가 알려주게.”

스위스 용병들은 개인 자격이 아니라 일단 스위스 주정부의 모집에 응한 다음 고용주에게 파견되는, 일종의 파견근무 형태로 고용됐다. 그래서 돈에 눈이 먼 주정청에서는 가급적 용병들을 스위스 바깥으로 내몰았다. 고산국처럼 장기 계약을 할 수 있다면 스위스 주정청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일이었다.

“폐하께서 미리 알아두셔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1474년 프랑스와의 용병 계약 부가조항과 1515년에 체결된 조약의 일부 내용이 스위스 용병 계약 조항에 준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주마다 다릅니다만, 원칙적으로 스위스 용병은 신성로마제국이나 스위스의 동맹국의 적국과 계약할 수 없습니다. 해군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용병이 원하면 고향에 돌려보내줘야 합니다. 또한 봉급을 체불하면 안 됩니다.”

“좋아. 아주 좋아!”

8굴덴이라면 고산국 본토에서 1년차 병사들이 받는 봉급 은 8냥과 비슷한 돈으로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하게 됐다. 그러나 평생 지급하는 기본 소득과 교육비, 노후 의료비 등이 제외되므로 훨씬 싸게 쓸 만한 병력을 고용한 셈이었다.

훈련은 수에즈 경비대대에 맡기기로 했다. 장기적으로는 수에즈 경비대대를 중대 규모로 축소할 계획이었다.

“혹시 당장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나요?”

“그건 아니야. 나는 전쟁에 관심이 없더라도 전쟁은 나에게 관심이 많을 것 같아서 미리 대비하는 거야.”

민영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비슷한 말을 누군가 했던 것 같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30년 전쟁에 대한 대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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