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60화 (609/1,000)

00660  69. 성지 순례  =========================================================================

“나의 비키! 성묘 기사단이 전보다 규모가 꽤 늘어난 것 같소. 혹시 신교도 기사들이 많이 가입했소?”

“신교도는 몇 명 안 돼요. 예루살렘 순례가 쉬워지면서 1, 2년 동안 신께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새로 가입한 가톨릭 기사들이 부쩍 많아졌어요.”

그래도 헤드비히 공주 이후 성묘 기사단에서 다만 몇 명이라도 신교도들을 성묘 기사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성묘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 교황은 유럽 그리스도교의 최고 수장으로서 상징적으로 신교도 기사 몇 명에게만 가입을 허락했다. 신교도 기사들도 굳이 가톨릭의 성묘 기사단에 가입하지 않고 새로운 성묘 기사단을 창설하려 준비 중이었다.

이민호는 헤드비히 공주에게서 덴마크 서인도회사가 창립된 이후 실적에 대한 간략한 보고를 받았다. 북미 동해안 도시들과 북유럽 발트 해 연안 국가들 사이의 교역은 아주 잘 이뤄지고 있었다. 중개무역 위주인 서인도회사도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고산국 쪽에 일방적인 무역흑자가 발생해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유럽 다른 지역에서 그 이상으로 금과 은을 흡수하고 있어요. 북유럽에서 금화와 은화가 고갈될 일은 당분간 없을 거여요.”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오. 무역수지는 장기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게 이상적인데 말이오.”

에스파냐에서 중남미의 은을 들여온 이래 유럽에서 가격 혁명이 진행 중이라 유통되는 금화와 은화가 줄어드는 편이 나았다. 반면에 고산국은 귀금속이 아직 부족해서 당분간은 흑자가 유지되는 편이 좋았다. 적정한 귀금속 유통량을 추산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고산국 상품의 질이 높아서 현재로서는 무역균형을 맞추는 일이 불가능해요. 북유럽 상품은 타르와 소시지 정도만 경쟁력이 있어요. 치즈와 버터는 고산국 사람들이 많이 소비하지 않아요.”

“심각한 무역 불균형은 문제구려. 치즈와 버터의 판로는 유럽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알아보겠소. 홀스타인 젖소는 계속 보내고 있소?”

덴마크의 얼룩 젖소는 유아와 어린이에게 우유를 공급할 목적으로 북미에서 대량 도입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추운 새원산 남쪽 섬에서 겨울을 지내며 충분히 사육 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그리고 올봄부터 덴마크와 네덜란드 낙농가에서 남는 암소와 송아지를 충분히 공급받기로 했다. 일부는 고산국 본토로 보냈다.

황인종은 인류를 넘어 포유류치고 특이하게 쌍꺼풀이 드문 편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흔히 유당불내증이라 칭하는 우유 분해 효소가 적어지는 것은 황인종 특유의 병이 아니라 흑인 대부분을 포함해 전체 포유류에 공통적인 진화의 산물이었다. 남유럽계 백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프랑스 남부 주민들도 유당불내증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정상적인 진화 과정을 거친 포유류라면 성인이 되어서도 젖을 분해하는 효소를 분비하는 것은 낭비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유를 소화하는 효소 락타아제를 여전히 분비하는 일부 백인들이 돌연변이라는 뜻이다.

“어린이들이 마실 거죠? 네. 매달 천 마리씩 암소와 송아지를 보내고 있어요. 언제까지 보낼까요?”

“수입량과 번식률을 계산해서 5만 마리가 될 때까지 보내주시오. 나중에 정확히 수량을 파악한 다음 수입 중단 시기를 정합시다.”

고산국 인구가 급증하는 시기라서 젖소가 더 필요할 수도 있었다. 사람의 번식력이 소와 맞먹는 것 같았다. 홀스타인 젖소는 임신기간이 사람보다 며칠 더 긴 279일이었다.

“가격이 폭등해도 곤란하지만, 갑자기 젖소 가격이 폭락해서 덴마크와 네덜란드 축산 농가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유의하시오.”

“폐하께서는 남들처럼 물량을 조정해서 가격을 후려치지 않아요?”

“사소한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속일 필요는 없소.”

“큰 이익이라면요?”

“나도 모르겠소. 그때 가서 판단하겠지요.”

“폐하께는 소 5만 마리가 사소한 물량이군요.”

나중에 텍사스에서 수백만, 수천만 마리를 키울 생각을 하는 이민호에게 우유 급식용 젖소 5만 마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공주는 언제 돌아갈 예정이오?”

“지금도 순례자들이 계속 몰려와서 저는 4월 15일까지 근무하기로 했어요. 기사 복무기간은 일 년에 40일 아닌가요?”

헤드비히 공주가 귀엽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말 자체는 갑작스런 긴장 상태로 인해 전역이 며칠 연기된 대한민국 육군 말년 병장 같았다.

“폐하와 함께 가지 못해 안타까워요.”

“두 달은 금방이오.”

“하루가 마치 100년 같아요.”

처녀와 명목상의 총각이 뜨거운 눈길을 교환하는데 옆에서 누가 끼어들었다. 새벽에 숙소에 들이닥쳐 견습 수녀들을 데려갔던 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다.

“고산국 국왕폐하! 새벽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과 전 팔레스타인의 총대주교 예하, 알현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활절 대축일이 엄숙하고 화려하게 끝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총대주교는 고산국 왕도에 정교회 교구를 두게 해달라고 이민호에게 요청했다. 정교회의 수장인 이스탄불의 세계 총대주교가 수시로 교체되고 심지어 한 사람이 세 번이나 폐위됐다가 다시 즉위하는 등 정교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었다. 이스탄불에서 외부에 신경을 못 쓰는 사이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고산국을 관할권에 넣으려고 시도했다.

“교구를 설립하고 싶으시다고요? 유럽과 달리 고산국의 교구에는 교회 토지나 그 토지에 속한 주민이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익숙합니다.”

“정교회 운영비용과 사제들의 봉급은 다른 교회들처럼 국가에서 지급하겠습니다. 물론 교회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금액이라고 들었습니다. 선교를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11세기 중반 클루니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는 하급 영주나 기사가 교회나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할 경우, 그 교회나 수도원은 영주에게 봉건적 의무를 져야 했다. 즉 그 토지에서 나온 세금을 상급 영주에게 바치거나 영주 밑에서 일정 기간 기사로서 복무해야 한다는 뜻이다.

주교나 수도사가 기사로서 싸우기 어려우니 대리 기사를 보내 1년 중 40일 동안 봉사했다. 영주들은 당연히 주교를 봉건 제도에 속한 하급 영주로 간주하고 성직에 대한 서임권을 행사했다.

이후 노르망디에서 시작된 클루니 운동은 교구의 토지를 영주에게서 분리시키려는 개혁이었다. 이는 서임권 투쟁으로 확대되고 결국 교황권의 확대와 추기경들을 선거인단으로 한 선거제를 이루어냈다.

“다만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셔야 합니다.”

“정교회는 흔해빠진 종교나 종파와 다릅니다. 정교회야말로 세계 보편 교회입니다.”

정교(orthodox)보다는 가톨릭(catholic)처럼 세계 보편(ecumenical)을 외치는 곳이 정교회였다.

“그런 문제는 다른 종파의 수장들과 협의하시고, 조건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험! 험! 이교도와 불신자들의 가련한 영혼을 구하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군요. 역량 있는 주교와 사제들을 파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교회는 도둑놈, 사기꾼이라도 신앙심이 절로 생길 정도로 크고 장엄하게 지어드리겠습니다. 다른 종교나 정파와 똑같은 금액과 건축자재, 그리고 인력을 지원하겠습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가톨릭 성당과 같은 규모라는 설명을 듣고 크게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고산국 왕도에 정교회 교구를 설립하기 전에 준비할 게 많아 귀국할 때 사제 몇 명을 대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교회 설계와 감독을 예루살렘 총대주교좌에서 맡아서 하기로 했다.

이로써 웬만한 종교와 종파는 고산국에 다 들어오게 됐다. 다른 종교 또는 종파와 서로 경쟁하면서 소수파일 동안에는 신앙 집단이나 교회가 부패하지 않을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물론 썩을 집단은 언제든 썩게 마련이었다.

“폐하! 고산국 왕도에 루터교도 있죠?”

“물론이오, 공주. 북미로 이주한 노르웨이와 스웨덴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 외에 몇몇 목사들은 왕도에 자리를 잡았소. 종교인들에게 고산국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 아니겠소?”

“국왕이 주최하는 회의에서 두 번째 자리는 어느 종파의 차지인가요?”

유럽에서 국왕이나 영주가 회의를 열어 주석에 앉을 때 성직자가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그만큼 왕국 또는 영지 내에서 성직자의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교구에 속한 토지가 너무 많아 성직자가 실질적으로 영주에 이어 두 번째 땅 부자, 즉 영주 아래 첫 번째 하급 영주일 수도 있었다. 다른 하급 영주들이 성직자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양보한 것이 아니라 실력에 따른 당연한 대우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앞서 설명한 것처럼 영주들은 주교의 서임권을 놓치지 않으려 했고, 영주의 동생이나 친인척을 주교에 앉혔다.

그런데 클루니 개혁 이후에 주교들은 로마 교황의 명목상 수위권을 인정하면서 점차 영주의 수하라는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영주 입장에서는 교구의 토지는 되찾아야 할 영토였지만, 이미 교권이 강해져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자리는 총리가 앉소. 성직자와 종교인은 너무나 숭고해서 세속적인 정치인들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요.”

“까르륵! 폐하, 이단으로 몰리시겠어요. 종교집단들은 평소에 서로 싸우다가도 자기들 이익을 지킬 때에는 똘똘 뭉치거든요.”

“상관없소. 종교는 종교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때 소중한 법이오. 종교인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은 상관없으나, 종교인이 직접 정치에 나서지는 못하게 하겠소.”

현재 고산국에는 국교로 칭할 종교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토지는 국왕의 소유였다.

유럽에서 대규모 지주였던 교회나 수도원은 부동산 거래가 제한된 고산국에서는 따로 경제적 기반을 보유하기 어려웠다. 유럽에 비해 종교 단체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교회의 부활절 성화가 고산국 견습 수녀들에게 내렸다면서요? 순례자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해요. 고산국 왕도에 교구를 설립하는 것도 기적에 감동한 폐하께서 예루살렘 총대주교에게 요청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질 수도 있어요.”

“정교회 쪽에서 벌써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모양이오. 고산국이 정교회를 국교로 삼을 것이라고 말이오.”

“불쾌하지 않으세요, 폐하?”

“모략과 거짓 선동에는 벌써 이골이 났소. 그러나 정교회도 필요하니 받아들이기로 했소. 병사들에게는 이미 본국을 출발할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국교를 정해 특정 종교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소.”

헤드비히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부활절 성화의 기적을 안 믿으시나 보군요. 예전에 교황청에서 가짜라고 선언했는데도 심지어 성묘 기사단에서도 믿는 기사들이 있어요.”

“믿어요. 믿소. 기적이야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소. 그러나 고산국의 종교정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오. 공주는 산타클로스를 믿소?”

“네! 지금도 성탄 전야에 양말을 준비해요. 그리고 아침이 되면 선물이 들어있어요.”

이민호는 헤드비히 공주에게 산타클로스가 전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줄 때 이동하는 속도를 설명했다. 성탄 전야에 서쪽으로 썰매를 끌어 34시간을 번다 해도 1초에 260km의 속도, 음속의 750배로 달려야 한다. 이 시대 세계 인구가 5억, 어린이를 2억, 어린이가 있는 집을 6,300만으로 잡았을 때 이야기였다.

“산타클로스가 굴뚝에 들어가 선물을 양말에 집어넣고 아이가 준비한 우유와 과자를 먹는 시간은 뺐소.”

“깔깔깔! 다 먹으려면 배가 터지겠어요. 이것도 기적이니까 산타클로스의 배가 터지지는 않겠어요.”

4세기 터키의 주교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이 노르만인들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산타클로스 전설이 퍼졌다고 알려졌다. 산타클로스가 인기를 끌면서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자기 나라에 진짜 산타클로스 마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사이에 성묘에서 교황이 나왔다. 교황은 성묘 앞에 몰린 순례자들 앞에서 짧게 미사를 집전했다. 성묘 앞 작은 광장에 들어오지 못한 순례자들도 확성기를 통해 교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병 연대 선발대가 그 동안 준비를 많이 했다.

“꺄악!”

“저걸 어째!”

미사 마지막 순서로 교황 양 옆에 선 어린이 두 명이 평화의 비둘기를 하늘 높이 날린 직후 순례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나타난 까마귀와 갈매기가 각각 비둘기 한 마리씩을 공격한 것이다. 2014년 1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미사 직후의 상황과 똑같았다.

“어떻게 해요? 비둘기가 육식 조류에게 공격받는 일은 흔하지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불길한 징조라며 온갖 나쁜 소문을 퍼뜨릴 거여요.”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보시오!”

비둘기를 부리로 쪼거나 발로 잡으려는 갈매기와 까마귀가, 이민호가 손을 뻗는 순간에 맥없이 추락했다.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난 비둘기 두 마리는 하늘 높이 날아갔고, 순례자들이 환호성을 지르거나 성호를 그었다.

“추락하기 직전에 육식 새들의 몸에서 피가 났어요. 혹시 폐하의 병사들이 총을 쐈나요? 하지만 총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어요.”

“총을 쏜 것은 맞소. 그러나 총소리가 나지 않게 내가 기적을 행했소.”

헤드비히가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가 이민호의 허리를 꼬집었다.

“거짓말 마세요.”

“총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기적, 아니 기술이 있다오. 소음총이라고 하오.”

헤드비히가 노려보자 얼른 말을 바꿨다. 사실 소음총도 아니고 소음기를 총열에 부착시킨 것에 불과했다. 하마터면 새 때문에 역사적인 성지 순례의 마지막 순간을 망칠 뻔한 사건이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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