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59 69. 성지 순례 =========================================================================
“와! 교황 성하가 악령이 들린 자들에게 강복을 내리셨어요. 신성력이란 게 정말로 있는 걸까요?”
“무슨 소설 봤니? 신앙심으로 신의 힘을 빌려 쓰는 거야. 신부나 다른 종교의 사제들도 가능할 걸? 지속적인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탄하는 민영에게 이민호가 핀잔을 주었다. 모든 종교에서 악령 쫓기는 사제의 임무 중 하나였고, 엑소시즘을 미신이라며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빙의 현상을 현대 의학에서는 정신병의 일종으로 이해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았다.
가톨릭에서는 공식적인 장엄구마(莊嚴驅魔) 전례서가 있고, 2008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구마 전문 사제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에 악령에게 빙의된 남자 두 명이 몸부림치자 손을 들어 강복해서 구마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 의학의 발전에 따라 대부분 의학에 맡기면서 예전에 비해 구마 의식을 극히 제한적으로 실시했다.
비슷한 의식을 개신교에서는 축사(逐邪)라 하고, 유대교에는 희생제물을 바쳐서 악령을 쫓았다. 불교는 구병시식(救病施食)으로 귀신을 불교에 귀의시키는 방식이며, 무속에서는 굿을 하거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처한다.
“주인님은 매사에 합리적인 분이라서 이런 쪽은 전혀 안 믿을 사람 같았는데요.”
“이해하기 어려우면 그냥 받아들여야지 어쩔 거야? 모르면 그냥 외우라고 하잖아.”
물론 정교회의 ‘거룩한 불’이 경건한 사기라는 비판은 지난 천 년 동안 숱하게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 9세는 1238년 이 행사를 사기로 판단하고 수도사들의 참여를 금지했다.
“그래도 믿기 어려운 걸요?”
“예루살렘은 여러 종교의 성지야. 게다가 부활절이야. 기적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은 없어. 안 믿어도 상관없고.”
정교회의 부활절 날 하늘에서 내리는 거룩한 불, 성화는 이민호가 한국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로마가톨릭이 가장 우세하고 주변에 온통 무슬림들이 득시글거리는 레반트 한 가운데가 예루살렘이었다. 성화는 정교회 신도들이 개종하지 않고 신앙심을 유지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주인님이 견습 수녀들에게 잘해주는 이유가 뭔가요? 후궁을 삼으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은 저도 알아요. 그 분들이 성녀가 되길 원하시는 것도 아니죠?”
이민호 입장에서는 수녀를 후궁으로 만들기보다는 후궁이 수녀가 되겠다고 왕실에서 나가길 은근히 바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후궁이 너무 많았다.
견습 수녀들이 나중에 죽어서 성인의 반열에 오르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특정 종교의 신자가 늘어나면 그 종교를 국교로 삼으라는 압력만 커질 뿐이었다. 예멘이나 오만에서 보듯이 왕이나 백성이 아닌 종교지도자가 권력을 휘두르는 꼴을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음. 뭐랄까. 종교나 왕도 마찬가진데, 인간은 뭔가 초월적인 존재에 의존하고 싶어 해. 그리고 자기는 죄를 지으면서도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수라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안심하는 그런 심리랄까? 사제나 신도들에게 말하면 안 돼.”
“네. 쉬잇~”
“나중에 수녀들이 운영하는 병원을 세울 거야. 그리고 큰 전쟁이 벌어지면 의사 수녀와 간호사 수녀들 중에서 지원자를 받아 전쟁터에 파견할 거야.”
신심이 깊다는 줄리아를 보고 이민호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테레사 수녀가 아니라 나이팅게일이었다. 물론 나이팅게일은 수녀가 아니었지만, 수녀 38명과 함께 전쟁터에서 일한 간호사였다.
또한 이민호가 어린이 위인전에서 봤던 삽화와 달리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직접 부상병들을 간호하기보다는 후방 병원에서 행정가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병원 관리 규칙을 세워 환자의 사망률을 뚝 떨어뜨리는 공헌을 했다. 백의의 천사라는 별명에 충분히 어울렸다.
그러나 뭐든지 이미지가 결정적이었다. 죽음 직전의 병사를 돌보는 천사 같은 간호사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전쟁에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될 것이다. 또한 간호사 지원자들을 늘릴 수 있어 의료 발전이나 위생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다.
“네에? 수녀들을 끔찍한 전쟁터로 보낸다고요?”
“그런 전쟁터에는 아주 잠깐, 기록화를 남길 때만 가면 돼. 안전한 후방 병원에 있다가 병사들이 부상병을 후송해오면 그때부터 간호를 맡아야겠지. 의사는 수술과 치료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부상병들을 위로하고 삶에 희망을 갖게 조언해주는 역할을 간호사가 맡아야 할 거야.”
물론 현실적으로는 의사와 마찬가지로 간호사들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겠지만, 부상병들이 의사가 아닌 간호사에게 의존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의사를 육성하려면 예과와 의과 합해서 6년만으로 부족한 반면 간호사는 의사보다 더 짧은 기간에 양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수녀와 간호사, 학교 선생님과 보육원 교사로 시작해서 앞으로 여자들이 활동할 공간을 점점 넓혀나갈 거야.”
“저처럼 호위도 있어요.”
“그래. 나쁘게 보면 국가에서 여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거야. 가사와 육아 부담은 그대로니까 더 힘들겠지. 그런데 좋게 보면 여자들도 직업을 갖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야.”
“아주 옛날부터 여자들도 일을 해왔어요. 그래도 고정된 직업이 있으면 더 좋겠죠. 하고 싶은 일이 직업이라면 일하면서도 즐거울 거여요.”
네덜란드 화가 마하레트는 고산국에 온 이후 살이 쪽 빠졌다. 그림 그리는 일 외에도 사전 편찬 사업과 네덜란드어 강의 등 하는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하레트는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즐거워했다. 이민호가 바라는 바람직한 인간상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민호가 선택한다면 하루에 딱 여덟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노는 그런 생활이었다. 식량이 과잉 공급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제는 농민들도 쉬엄쉬엄 일할 분위기를 만들어줄 예정이었다. 공업과 서비스업에 취업하면 일은 고되더라도 근무시간만큼은 확실히 지킬 수 있었다.
부활절 미사가 끝나고도 감동과 고산국 병사들은 교황 경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화려한 예복을 입고 서 있거나 커다란 페르가나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암살시도 자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교황을 경호하는 임무를 받은 병사들이 신도들 사이를 돌아다님으로 해서, 혹시나 암살자가 암살 시도를 하더라도 일반 신도들이 제지하러 나설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바로 이것이 가장 큰 효과였다.
리드완 왕조의 병사들은 다수가 무슬림이었지만 기독교도들의 부활절 축일을 최선을 다해 지원했다. 지난 세월 성지 수복이라는 명분을 내건 십자군의 침공을 받았던 무슬림 병사들은 이 지역의 주인으로서 멀리서 오신 손님 접대에 소홀함이 없었다.
무슬림들은 꾸란에 기록된 대로 예수를 두 번째로 높은 선지자, 또는 하느님의 말씀이란 뜻인 ‘칼라마트 알라’로 인정하지만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바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견습 수녀들이나 최 중위는 주인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 충성하는 종교인들이에요. 이들을 어떻게 대하실 건가요? 형식적으로라도 주인님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아야 하지 않나요?”
“왜? 건국 초기부터 신부나 스님들이 있었어. 국가나 나에 대한 충성을 강요당하면 순교할 기회라고 오히려 기뻐할 걸? 반역하지 않는 이상은 그냥 내버려 둬.”
국왕이나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곧 반역자라는 논리는 결코 성립할 수 없었다. 국왕은 전제군주를 표방하더라도 국가 안의 다양한 세력들, 특히 국왕에게 충성하지 않는 세력도 끌어안아야 했다.
“종교인들은 주인님의 백성이 아닌 다만 협력자인가요?”
“일반 백성들도 국가와 계약한 협력자들이지. 국초부터 고산국이 좋으면 오고, 싫으면 가고 그랬잖아? 바로 이것이 조선이나 명나라와 가장 큰 차이야.”
심지어 여진족 마을의 추장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고산국의 학교 교과서에는 함께 사는 터전인 나라와 이웃을 위하라는 말만 있고 국왕과 왕실을 위해 충성하고 희생하라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많이 다르네요. 백성들이 주인님을 무시하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그래서 잘해주고 있잖아. 만약 잘해줄수록 나를 무시한다면 그건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야. 범죄자들이 일하는 탄광에서는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성심이 아주 높다더군.”
“강한 힘에만 굴복하다니, 노예 같은 사람들이네요.”
“그런 인간들이 꽤 흔하지.”
민영이 사막 고양이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보고 이민호가 민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영이 나비처럼 눈을 감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교황을 며칠 경호해보니까 신경 쓸 게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 그 동안 민영이를 비롯한 호위들이 날 지켜주느라 고생했어.”
“헤헤! 알아주시니 고마워요.”
사명감이나 지키려는 대상에 대한 충성심이 없으면 경호나 호위는 정말 말도 못하게 힘든 일이었다. 당직 사령들이 교대로 지휘했지만 최고 지휘관인 감동 역시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
정오에 교황이 성묘 교회로 이동했다. 성직자들과 수많은 순례자들이 교황을 뒤따랐고, 그 사이 고산국과 리드완 왕조의 병력이 혼란을 통제했다. 순례자들은 통제에 잘 따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기독교도 순례자들과 달리 이들을 통제하는 병사들은 비기독교도가 대부분이었다. 유대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할 안식일에 비유대인을 고용해 촛불을 끄고 키듯이, 기독교도의 중요한 축일에 비기독교도 병력이 호위를 하는 것에 대해 순례자들이 거부감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예루살렘이 현재 이슬람 지배 하에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일 년 만에 다시 본 성묘 교회는 그 전과 같이 허름한 벽돌 건물 그대로였다. 그리고 성묘 교회 앞에 교황 직할 성묘 수호 기사단이 완전 무장을 한 채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 뒤로는 정교회의 성묘 형제단 수도사들이 서 있었다. 두 종파에서 조직해 제각각 성묘를 수호하던 단체들이 이번 부활절에는 교황의 성묘 순례를 위해 협력하고 있었다.
“잘하면 로마가톨릭과 정교회가 서로를 인정하겠어.”
“설마 두 종파가 합쳐지지는 않겠죠?”
“그럴 리는 없지. 그 사이에 교리나 전례 등에서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거든.”
크게 신경 쓰지는 않겠지만 두 종파가 합쳐진다면 국왕 입장에서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종교가 오래 되면 교리와 전례, 중요한 지위, 경제적 이익 등을 두고 의견 대립하다가 끝내 분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다. 이미 달라진 종파를 억지로 하나로 엮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교황께서 성묘에 입장했어요.”
“한시름 놨다. 경호 대상이 실내에 있는 편이 훨씬 안전해.”
교황과 다른 종파의 총대주교들이 성묘 교회로 입장했다. 며칠 일찍 예루살렘에 도착한 기병 연대 선발대가 성묘 교회를 샅샅이 수색했고,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있었다. 막대한 양의 화약을 한꺼번에 터뜨려 교황을 폭사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비좁은 광장을 가득 메운 순례자들은 교황 일행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예루살렘까지 왔으니 성묘 교회 순례를 빠뜨릴 수 없었다.
“폐하! 내 사랑!”
“오! 헤드비히 공주! 여기는 웬 일이시오?”
중세 판금갑옷을 입은 여기사가 이민호의 품 안에 뛰어들었다. 덴마크 공주 헤드비히가 예루살렘에 있었다.
예전처럼 범선을 타면 덴마크에서 예루살렘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몰랐다. 그러나 덴마크에서 고산국 배를 타고 북미 동해안에 갔다가 지중해를 왕복하는 배로 바꿔 타는 식으로 빠르면 보름 이내에 도착할 수 있게 됐다.
“저도 성묘 기사단의 일원이잖아요.”
“혹시 근무 시간은 아니오?”
“기사들이 교대로 휴식하고 있어요. 아무리 성묘 기사단이라지만 신앙심만으로 며칠 계속 꼬박 서 있을 수는 없잖아요?”
벌써 며칠 동안 하루에 열두 시간씩 근무를 서고 있다고 했다. 귀하게 자란 공주로서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드비히 공주는 성묘 기사단의 기사로서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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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