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58 69. 성지 순례 =========================================================================
“최 중위! 흥분하지 말고 자세히 말해봐.”
“말로는 제대로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그 두려움과 북받쳐 오르는 환희! 영광! 전하께서도 내년에 꼭 보십시오. 두 번 보십시오.”
줄리아와 견습 수녀들은 오들오들 떨며 아무 말도 못한 채 불이 붙은 양초를 꼭 붙잡고 있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화를 내려 받았다고 들어서 그런지 어린 수녀들이 진짜 성녀들 같았다.
“전하! 제가 봤어요. 그렸어요! 진짜 기적이 일어났어요!”
“오오! 마하레트! 잘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과장한 것 아니야?”
네덜란드 여류화가가 그린 스케치는 비현실적인 추상화 같았다. 성묘 교회 앞 작은 광장이 온통 불타는 듯했고,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몸에서 빠져 나온 죄 지은 영혼들이 불에 타며 괴로워하는 듯했다. 그 사이에서 촛불을 든 견습 수녀들이 무릎을 꿇고 강렬한 빛이 수직으로 내리 쬐는 하늘을 우러르며 눈물을 흘렸다.
성화를 그리지 않는 개신교도 화가인 마하레트는 새벽에 성묘 교회 앞에서 본 그대로를 그렸다고 주장했다. 마하레트와 동행한 네덜란드 화가 두 명도 비슷하게 그렸다. 두 사람은 성화가 아닌 기록화라고 우겼지만, 직접 기적을 본 다음부터는 개신교도로서의 신앙심이 몹시 흔들리는 듯했다.
“정교회에서 항의하면 어떡하지?”
부활절 성화 사건은 이민호에게도 꽤나 충격적이었다. 뭐든지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을 해야 할 국왕인데도 당장 다른 종파의 항의부터 걱정했다. 그런데 안 좋은 예감은 항상 이루지이기 마련이었다.
“도련님! 정교회 총대주교와 사제들이 시어소(時御所)에 난입했습니다! 호위병들이 기다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정문을 힘으로 돌파하고 방금 막 1층 현관을 지났습니다.”
견습 수녀들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여진족 호위 장교가 급히 보고했다. 고산국 임시 왕궁으로 사용하는 건물에 정교회의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사제들을 이끌고 쳐들어왔다는 내용이었다.
그 동안 부활의 성화는 성지 예루살렘에 관구를 둔 여러 기독교 종파들 중에서 오직 정교회만이 누려온 기적이었다. 그래서 사제와 신도들은 정교회만이 참된 신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정교회의 교리나 전례가 초기 교회에 가장 가까운 것은 다른 종파에서도 인정했다.
그런데 이번 부활절에서는 일반 신도도 아닌 가톨릭 견습 수녀들이 성화를 받았다. 다른 종파에서 부활의 성화를 가로챈 셈이니 항의하러 온 것이 틀림없다고 이민호는 판단했다.
소란스러움이 점점 가까이 오는 동안 이민호가 줄리아에게 급히 물었다. 아직도 덜덜 떨고 있어서 애처로워 보였으나 상황이 급했다.
“불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줬느냐? 불을 옮겨 붙여줬냐고!”
“예, 전하. 온 예루살렘이 우리들이 나눠준 불로 가득해요. 포르투갈에서 온 순례자들이 가장 먼저 제 양초에서 불을 받아갔어요. 그들이 나눈 불이 순례자들 사이에 끝없이 퍼져갔어요.”
“잘했다!”
이때 알현실의 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며 총대주교와 사제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남자 여진족 호위들이 막으려 했으나 사제 한 명이 팔을 들어 소매를 휘두르자 서너 명이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것도 기적인가?”
지금까지 힘에서 결코 밀리는 법이 없던 여진족 호위들이었다. 그들이 말라빠진 사제의 손길에 한꺼번에 나동그라지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보고 이민호가 놀랐다. 신앙의 힘이 이 정도라면 광신을 의심해봐야 했다.
정교회 사제들이 몰려오자 민영을 비롯한 호위들이 일제히 움직여 이민호를 감쌌다. 총대주교와 사제들의 기세가 너무나 흉흉해서 호위들의 손이 자연스럽게 권총집으로 향했다.
“쏘지 마! 저 사람들은 우리가 있는 줄도 몰라.”
이민호가 얼른 호위들을 제지했다. 총대주교 일행이 이민호를 못 본 것은 아니었고, 다만 신경을 안 쓴다는 말이 맞았다. 그만큼 이번 일은 부활절을 성탄절보다 큰 축일로 여기는 정교회에 중요한 문제였다.
“동방에서 온 어린 수녀들이여. 이 미천한 종은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를 맡고 있다네.”
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정식 칭호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강 너머 갈릴리의 가나와 거룩한 시온의 총대주교’였다. 로마가톨릭의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정교회의 orthodox에도 일반, 정통의 의미가 포함돼 있기에 총대주교가 자칭할 때 정교회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신도 수가 적은 자그마한 교구에 불과했으나 어느 기독교 종파에게나 가장 중요한 성지였다. 그리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등과 동등한 초대 다섯 총대주교구의 하나라서 정교회에서도 총대주교급을 유지했다.
총대주교와 사제들의 관심은 온통 견습 수녀들에게 쏠려 있었기에 이민호에게는 단 한 순간도 눈길을 던지지 않았다. 총대주교가 견습 수녀들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혀 인사한 다음 사제들에게 선언했다.
“우리 교회 외에도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 지상에 있도다! 우리에게 성화가 내려오지 않은 오늘 사건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없는지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교회의 사제와 신도들의 신앙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정교회의 예루살렘 총대주교 예하와 사제, 신도들이 기도를 드린 성묘 교회에 성스러운 빛과 불이 강림한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나이다.”
줄리아가 오들오들 떨면서 대답했다. 총대주교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어났으나, 거대한 체구에서 내지르는 큰소리에 견습 수녀들은 더욱 겁에 질렸다. 이민호에게는 근육으로 똘똘 뭉친 지름신의 강림을 보는 것 같았다.
“고맙다, 동방에서 온 어린 수녀들이여! 그런데 무엇이 두려우냐? 그대들은 주님의 사랑이 무서우냐?”
“두렵지 않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잠시 감당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럼 밖으로 나와라! 참된 신앙을 지닌 그대들을 앞세우고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부활의 행진을 하겠노라!”
줄리아가 살짝 고개를 들어서 물었다.
“저희들의 신앙은 정교회와 약간 다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종파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사소한 문제들로 인해 분열된 교회를 화합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릴 나무라셨는지도 모르겠다.”
“나무라시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올해는 그대들이 유일하게 부활의 성화를 받은 자들이다. 마땅히 부활의 행진 대열에 앞장서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온 세상에 선포해라!”
“예! 기꺼이 앞서겠습니다.”
견습 수녀들이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수녀들에게 길을 비켜준 총대주교가 천장을 향해 부르짖자 사제들이 큰소리로 호응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진실로 그분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견습 수녀들과 총대주교, 그리고 정교회 사제들까지 알현실에서 나간 다음 이민호가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그런데 총대주교가 조선말을 했나?”
“정신이 없었지만 통역관이 통역했겠죠?”
민영이 자신 없이 대답했다.
이민호는 서둘러 감동에게 연락해서 정교회에서 주관하는 부활의 행진을 호위하도록 지시했다. 부족한 병력을 더 쪼개야 해서 병사들이 휴식 시간을 갖기도 어려웠으나, 추가 수당이 용병들의 근무 의욕을 자극했다.
흰 예복을 입고 총마저 희게 칠한 구르카 용병들이 행진 대열 좌우에서 신도들을 보호했다. 부활의 성화를 받은 세 견습 수녀들도 예루살렘 총대주교에 버금가는 높은 호위 대상이 되었다.
사제가 줄에 매달아 흔드는 커다란 향로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견습 수녀 세 명이 앞서 걸었다. 바로 뒤에 화려한 법복을 입은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고위 사제들이 뒤따랐고, 신도들이 따라붙었다. 성 금요일 이후 악기 사용이 금지되므로 행진은 엄숙하게 진행됐다.
“전하!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중위?”
같은 장갑차에 타고 부활의 행진을 따라가던 최명희 중위가 용기를 내서 이민호에게 말했다.
“오늘은 신도라고 해도 신앙심이 확고하지 못했던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성스러운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수녀님들을 따라서 수녀가 되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종교의 자유는 있어. 하지만 저 수녀들을 보호하는 것이 귀관의 소명이라는 생각은 못 해봤나?”
“아!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수녀가 되는 것이 희생이 아니라, 수녀가 되지 않은 것이 희생이 될 수 있겠습니다.”
수녀들의 호위를 맡은 장교의 신앙심이 굳건해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러나 국가나 왕에게 충성하지 않고, 예비 성직자인 수녀들 개인에게 충성하는 장교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이민호는 골치가 아파졌다.
“현재 여러 종교의 신도들이 고산국의 군인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고 있다. 이들의 종교적 요구를 충족시켜줄 사제 직급의 군종 장교들이 필요해.”
“예. 조만간 군종 병과를 창설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세 수녀는 아직 어리고 특정 종교에 속하지만 뛰어난 인재로서 국가적으로 보호해줄 필요가 있다. 귀관처럼 사제들을 위해 일하는 장교도 군종 병과로 옮겨주겠다. 중위는 앞으로도 사제가 아닌 평신도 자격으로 저들을 보호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군인으로서 세 수녀님들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신도로서의 소명이며 장교로서의 책무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고민도 없이 너무 간단히 결정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앞으로 최명희 중위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합당한 결론을 내릴 것으로 믿고, 일단 수녀들의 호위로서 직무에 충실하도록 지시했다.
오전에 이민호는 로마 교황이 예루살렘의 광장에서 집전하는 부활절 미사에 참가했다. 토요일 저녁부터 밤새도록 미사를 집전한 교황은 목소리가 갈라지고 매우 피곤한 모습이었으나, 수백 년 만에 성지에서 하는 특별한 미사라서 몹시 행복해 보였다.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연단에 방탄유리를 세 방향에 세워 저격에 대비케 했다. 그리고 확성기를 광장 곳곳에 설치해 신도들에게 교황이 메시지를 직접 전달할 수 있게 했다. 미사는 당연히 라틴어로 진행됐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함께 온 개신교 순례자들을 위해 자국어로 통역해주었다.
교황 경호 작전은 순조롭게 수행되고 있었다. 교황 주변에는 기사들과 스위스 근위대밖에 없었으나, 주변 건물들을 모두 장악해 병력을 배치한 쪽은 고산국이었다. 그리고 아군 저격수들이 교차 사격할 수 있도록 교묘하게 배치해 빈틈이 없도록 했다.
이 자리에는 부활 행진을 마친 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온 안티오크 총대주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예루살렘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총대주교,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 등이 참가했다.
일부는 로마 교황이 임명한 성직자였고, 나머지는 형식상 로마 교황과 동등한 지위였다. 뒤로 길게 늘어뜨린 사각형 모자나 화려한 법복 등 구경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세계 총대주교는 이 시기에 앞가림하기도 벅차서 순례에 참가하지 않았다. 다만 콘스탄티노플의 정교회 사제들이나 그리스 대교구 사제들 다수가 개인 자격으로 순례에 참가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교황이 미사의 끝을 알렸다. 이로써 역사적인 예루살렘에서의 부활절 미사가 끝났다. 유럽과 소아시아, 그리고 아랍 지역에서 온 순례자들은 감동에 젖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고산국에서 온 순례자 2천여 명도 소원을 이뤄 행복한 모습들이었다.
“교황 성하! 이들은 악마가 들린 자들이옵니다!”
정교회의 수도사가 연단 앞으로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중년과 청년을 끌고 왔다. 신자들에게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교황이 성직자로서 엑소시즘 능력이 신자들이 기대한 만큼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교황과 눈이 마주친 즉시 바닥에 쓰러져 부들부들 떨었다. 교황이 어부의 반지가 끼어져 있는 오른 손을 저었다. 그 순간 경련이 뚝 그쳤고, 두 남자가 일어나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수도사가 멍하게 서 있는 동안 교황이 연단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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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잘 몰라서 자료수집하느라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