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57화 (606/1,000)

00657  69. 성지 순례  =========================================================================

음침한 분위기 때문에 암살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암살자도 아니고 수도사도 아니었다. 펑퍼짐한 수도사 복장 속에 늙었지만 탄탄한 몸을 숨긴 자는 뭔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전사, 즉 군인이나 종교단체 소속 기사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기사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음침했다.

“성묘를 지키는 기사인가? 그렇다고 성묘 기사단 소속은 아니겠군. 그들에게는 자부심이 있었으니까.”

“저는 로마교황 직속의 성묘 기사단과 다른 성묘 수호 형제단 소속 수도사입니다.”

형제단(brotherhood)은 단체나 협회로 흔히 번역될 수 있었다. 동업자 집단을 칭하는 수도 있었지만 비밀 조직에도 흔히 사용되는 명칭이었다. 비슷한 명칭을 들어본 적이 있어서 이민호가 물어봤다.

“혹시 그리스 정교의 성묘 형제단과 관계가 있나?”

“고산국 국왕폐하께 다시 여쭙겠습니다. 만약 교황이 암살을 당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답을 회피하는 것을 보니 성묘 형제단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성묘 형제단은 서기 313년부터 성지 예루살렘의 여러 성소들을 지켜온 그리스 정교회의 예루살렘 수도회였다. 326년 성 헬레나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이 조직의 이름이 기록됐다.

“어떻게 하긴!”

이민호가 탁자에 놓인 지도를 형제단 소속 수도사라 칭하는 자에게 집어던졌다. 지도에는 남쪽 가자에서 북쪽 라타키아까지 해안선을 따라서, 그 동쪽으로 100km 정도가 빗금으로 표시돼 있었다. 수도사가 지도를 펼치며 정밀함에 감탄하는 사이 이민호가 이를 갈면서 경고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길 경우, 따로 암살자 집단을 찾지 않겠다. 고산국 본토에서 전 병력을 동원하고, 비행기 12대 모두를 투입해서 지도에서 빗금 친 지역을 차단할 것이다. 교황 암살로 인해 이익을 얻을 자들, 그리고 암살자의 고객은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차단한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요량이십니까?”

“알면서 뭘 묻나? 다 죽여 버려야지. 교황의 암살로 인해 그 누구도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만들겠다!”

“순례자들을 고향에 돌려보낸 다음에 말씀이십니까?”

“암살자가 순례자에 섞여서 도망칠 우려가 있잖나?”

대답을 들은 수도사가 완전히 얼이 빠졌다. 그러나 이민호는 굳은 표정으로 수도사를 노려보았다. 한참 지나서 이민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교황이 암살당한다면 교황 한 사람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쟁을 일으켜 남들을 비탄에 빠뜨리려는 자들에게 처절한 응징을 가하겠다. 그 과정에서 죄 없는 자들에게는 안 됐지만, 교황이 죽으면 어차피 전쟁에 휘말려 대부분 죽을 자들이다. 십자군 전쟁 때도 이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가 됐었지.”

“듣던 것과 전혀 다르시군요. 폐하께서 그 동안 쌓아올린 평판을 잃는 게 두렵지 않습니까?”

“전혀! 어차피 교황이 암살당하면 나도 유럽과의 관계를 돌이키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교황의 성지 순례에 내 모든 것을 걸었다.”

수도사는 이민호를 미친놈 보듯 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동안 민영이 옆에 초조하게 서 있었다.

“저희 성묘 수호 형제단은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때도 유대인이나 아랍인으로 위장해서 신분을 숨겨왔기에 지금도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고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성묘 수호 형제단의 일원이지만 동시에 유대 랍비이기도 합니다.”

성묘 형제단은 독신에 금욕주의를 기본으로 했다. 오래 됐다 해도 혈통이 이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외곽 단체인 성묘 수호 형제단은 다른 원칙이 적용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교황은 수호 대상이 아니었지만, 지금부터 성지 순례 기간 동안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교황의 목숨을 지키겠습니다.”

“밀착 경호는 스위스 용병이, 근접 및 외곽 경호는 우리가 맡고 있어. 당신들이 할 일은 별로 없을 거야. 암살자 집단에 대한 정보나 넘겨.”

“시간이 없으므로 저희들이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암살하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을 지키는 것은 문제를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밤새 예루살렘에서 집단살인 사건이나 화재가 여러 번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수도사가 고개를 숙인 다음 임시 알현실에서 나갔다. 수도사가 알현 전에 보관했던 무기와 소지품을 챙기는 과정에서 고성이 잠깐 오갔다. 통역에 따르면 뭔가 양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잠시 후 민정이 수도사의 몸수색 결과를 보고했다.

“그 사람 특이하게 여러 종류의 약품을 가지고 다녀요. 이 목록 좀 보세요. 연금술사가 도와주고 있나 봐요.”

“이게 뭐야? 이 정도 양이라면 넓은 방에 가득 찬 사람들을 중독 시키는 것은 문제도 아닐 거야.”

가죽 주머니나 유리병에 밀봉한 독극물이 여섯 가지였는데 그 중에 한 가지는 호위대에서 파악을 못해서 샘플을 약간 채취했다고 보고했다. 성묘 수호 형제단의 수도사가 약품을 되돌려 받을 때 항의한 이유였다.

밝혀진 중에 한 가지는 조악하긴 해도 분명히 겨자 가스 발생장치였다. 연회장 같은 밀폐된 공간에 뿌리면 사람들을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의 극독이었다.

“이런 약품을 밀폐된 공간에 뿌리면 대량 살상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을 일일이 몸수색하지 않거든요.”

“그게 문제지. 누군가를 암살할 필요가 없도록 이 지역 정세가 안정돼야 하는데 말이야.”

“만약 교황께 문제가 생기면 정말로 순례자들까지 다 죽여 버리실 건가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민영이 물었다. 수도사의 말을 전했던 통역들은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니? 순례자들 사이에 숨은 암살자를 찾아내겠다고. 오해하도록 일부러 그렇게 말했지 뭐하러 사람들을 죽이겠어? 교황이 죽으면 다 포기하고 집에 돌아가야지 뭐 어쩌겠어.”

“이 지도에 빗금 친 것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레바논 아닌가요? 다 죽인다고 사기를 쳤을 때 정말 믿던데요?”

“날 살인마로 봤나봐.”

흔히 권력자들이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흔해서 수도사가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그리고 이민호에게는 그럴 만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나라들을 정말 독립시킬 거여요?”

“섞여 살면서 매일 같이 싸우느니 분리해서 가끔 싸우는 게 낫겠지.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강성한 동안에는 독립하지 못할 거야.”

이민호는 예루살렘 성벽 내부가 인종 혹은 종교별로 거주구역이 나뉜 것을 참조해 레반트 지역을 분리시킬 구상을 했다. 예루살렘을 국제도시로 하고, 인종 또는 종교에 따라 레반트를 여러 구역으로 분리하면 싸움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에서 반대하면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리드완 왕조나 레바논의 드루즈파처럼 준독립 자치정부를 세우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고 봤다.

20세기와 달리 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다른 인종들에게 주눅 들어서 함부로 인종청소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오히려 인종청소를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괴한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여진족 남자 호위들이 그 수도사를 추적하러 갔다가 금방 돌아왔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미행했으나 수도사가 갑자기 담을 넘었고, 뒤쫓아가보니까 사라진 다음이라고 했다. 한참 뒤에 벽에 잘 위장된 문을 발견했으나 이미 늦었다.

“아니야. 뒤쫓지 않으면 우리가 교황 경호에 관심이 없는 줄로 오해할까봐 일부러 너희들을 보낸 거야. 내가 딱 5분만 추적하라고 했잖아? 의욕이 넘치는 건 좋은데, 내가 말을 하면 속뜻을 제발 좀 알아들어라.”

“잘못했습니다. 오랜만에 뛰어난 자를 만나서 지나치게 몰입했나 봅니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아마도 그리스 정교회 소속 성묘 형제단의 외곽 조직일 거야. 예루살렘 토박이들이라니까 암살자들의 정체나 위치를 대충 파악하고 있을지도 몰라. 제법 큰소리치고 나갔으니까 암살자를 다만 몇 명이라도 잡아주며 좋겠어.”

잠시 후 자정이 넘어 부활절이 되었다. 이번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날의 시작이었고, 성지 순례의 절정인 날이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예루살렘 이곳저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아침에 예루살렘의 상인, 순례자, 리드완 왕조의 병사 등 꽤 많은 자들이 시체로 발견됐다. 죽고도 발견되지 않은 자들은 더 많을 것으로 예상했다.

“도련님! 화재로 불에 탄 시체들을 조사했습니다. 화재 전에 이미 독극물에 중독되거나 날붙이 무기에 의해 죽은 것이 확실했습니다. 화재는 단순한 위장에 불과합니다.”

“암살에 독극물을 사용하는 자들이라. 암살자도 아니고 자칭 성묘를 지키는 자들이야. 그런 자들이 지키는 성묘에 들어갈 교황의 안위가 걱정되는군.”

“로마가톨릭은 예루살렘에서 아예 물러선 기간이 길었으니 도련님 말씀대로 그들의 정체가 정교회 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정교회라도 정통적인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교,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등 여러 종파가 있었다. 현재 성묘 교회에는 그리스 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좌가 있으므로 성묘 수호 형제단이라는 단체는 아마도 그리스 정교회 소속일 것으로 추론했다.

성묘 교회는 로마가톨릭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또는 정교회에서 번갈아 관리했다. 그러나 이번 해에는 로마 교황의 성지 순례가 있기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관리했다. 관리 주체가 바뀐다는 뜻이지 성묘 교회는 여전히 예루살렘 총대주교좌가 위치한 성당이었다.

“도련님! 혹시 모르니 성묘 같은 밀폐된 공간에는 들어가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요, 주인님.”

남자 호위들에 이어 여자 호위들도 이민호에게 건의했다. 독가스에 대한 대비책이 없어서 호위들의 건의를 들어주기로 했다.

“으음! 알았다. 우리는 성묘 교회 바깥에서 경호를 하자.”

구경하러 갔다가 괜히 날벼락을 맞을 필요는 없었다. 교황이 암살당할 경우 선거로 새로 뽑으면 되지만, 이민호가 죽으면 후계구도가 확립되지 않은 고산국은 몇 년 안에 공중 분해될 가능성이 있었다.

부활절 당일에는 새벽부터 다들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중요한 행사는 물론 교황의 성묘 방문이었다.

그런데 그에 앞서 해 뜨기 전 새벽에 그리스 정교회의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사제, 신도들에 의한 부활의 성화, 즉 거룩한 불 채화 행사가 있었다. 총대주교와 신도들이 성묘 교회 안에서 기도를 올리면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불로 바뀌면서 참석자들이 들고 있는 초와 등잔에 저절로 불이 옮겨 붙는 기적을 직접 볼 수 있는 행사였다.

1547년에는 그리스 정교회 사제와 신도들을 성묘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투르크 병사들이 지키는 가운데 아르메니아인들이 성화를 받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성묘 교회 안에서는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회 사제와 신도들이 성묘 교회 바깥에서 낙심한 채 기다리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교회의 기둥이 갈라지면서 그 틈새로 불길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이후에도 그리스 정교 외의 다른 종파 신도들은 정교회 신도들에게서 성화를 옮겨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줄리아! 너 왜 그러니?”

성화를 나눠 받기 위해 새벽에 성묘 교회에 갔던 줄리아와 견습 수녀들이 거의 넋이 나간 채 돌아왔다. 그리고 호위 장교 최명희 중위도 몹시 상기된 채 돌아왔다.

“왜 대답을 못해? 최 중위! 무슨 일인가?”

“전하! 전하! 오, 세상에!”

“무슨 일이냐니까!”

“성화가 우리 수녀님들에게 내렸습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미사를 올리는 동안 저희들은 성묘 교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려오더니 성스러운 불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우리 수녀님 세 분에게만 거룩한 불이 내렸습니다!”

예전 기록들에 따르면 성묘가 열린 다음 하늘과 성묘에서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빛이 밝아져 성묘 교회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되면서 정교회 신도들이 들고 있는 양초와 등잔에 불이 붙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1547년처럼 이번에도 성묘 교회 안쪽이 아니라 바깥에 성화가 내려왔다. 그것도 정교회 사제나 신도가 아닌 로마가톨릭의 견습 수녀들이 든 양초에 성화가 피어올랐다.

============================ 작품 후기 ============================

이어질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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