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55 69. 성지 순례 =========================================================================
스파게티도 좋고 미트볼도 좋았지만 FSM이라는 종교가 진짜로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FSM교가 사실은 치킨과 맥주,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치맥교라고 교황을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
“부끄럽지만 특정 종교를 믿으라는 압력에 버티기 위해 다른 종교를 믿는 척했습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고산국에 여러 종교 신도들이 서로 싸울까봐 중립을 지키려 하셨겠지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와 비슷하게 고민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다른 교황이나 성직자들 같았으면 배교자나 이단이라고 비난하거나 전쟁을 걸었겠지만, 교황 클레멘스 8세는 달랐다. 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에도 교황이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고, 결국 강요하지 않고도 앙리 4세를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1595년 리투아니아에서 종교집회를 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교황이 개신교를 믿는 자들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 루터파 신도들 다수를 로마가톨릭으로 다시 개종시키기도 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다양한 인종 및 종교로 구성돼 있어 현실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권력을 유지하고 백성들을 지배하기 위해 어느 종교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양심에 걸렸습니다.”
“종교를 이용할 생각이셨다면 처음 건국하셨을 때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시면서 개종하셨겠지요. 가톨릭을 그렇게 많이 도와주시고도 끝내 국교를 정하지 않으시는 것을 알고 감탄했습니다.”
“이슬람이나 다른 종교도 똑같이 도와줬으니까요.”
“국왕폐하께서 이슬람을 꾸준히 도와준 덕택에 이번에 예루살렘에 갈 수 있게 됐습니다. 폐하께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안식을 얻고 싶으실 때는 가능하면 가톨릭으로 오십시오.”
개신교가 분리해 나간 이후 이 시기의 가톨릭은 뼈저린 반성을 통해 개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다시 부패한 교황과 성직자들이 교황청을 장악하게 된다. 가톨릭이야 망하든 말든 권력을 누리고 자기 배만 채우면 된다는 식이었다.
“저는 로마가톨릭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장점이 많다고 보고 있습니다. 종교를 갖더라도 로마가톨릭을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국왕폐하께서 선택하신 종교는 아마도 훌륭한 종교일 것입니다.”
이민호가 놀라서 잠시 눈을 크게 떴다. 클레멘스 8세는 교황이면서도 다른 종교에 무척이나 관대했다. 이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클레멘스 8세만의 장점이었다.
“그리고 저는 종교가 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국왕이 종교를 선택하면 아부하기 좋아하는 신하들에 의해 그 종교를 국교로 만들려고 시도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를 믿는 백성들과 반드시 충돌하게 됩니다. 프랑스나 몽골제국처럼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확실히 생각이 다르시군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 재위 당시에 로마교황청은 에스파냐의 보호 아래에서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로 클레멘스 8세는 에스파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교황이 프랑스 국왕에게 접근한 것도 정책 변경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로마교황청을 지켜주는 우산이 없었다.
교황이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에 성지 순례가 끝나면 폐하께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드리려 했습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살아생전 그토록 원했던 칭호였지요. 결국 자칭하고 말았습니다만,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지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저야 기독교도가 아니니까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희가 부정하고 있습니다만, 기독교의 수호자는 오스만 제국 황제가 가진 여러 칭호들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칭호 수여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교황청에서 수여하는 기독교의 수호자란 칭호는 단순한 명예를 넘어 제국을 칭할 자격이 될 수도 있었다. 로마 후기의 콘스탄티누스는 대제라는 칭호와 함께,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로마교회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를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했을 뿐,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인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별로 없었다.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은 것은 그때까지 지은 현세의 죄를 씻기 위한 관행이라고도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서야 간신히 기독교에 귀의한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기독교의 수호자는 명예로운 칭호이긴 하지만 지금은 고산국이 제국을 칭할 입장이 되지도 못합니다.”
“밍 제국과의 관계 때문이군요.”
“형식적으로 고산국은 밍 제국의 부마국입니다.”
동양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은 얼마 전까지 명나라를 단순히 키타이라고 부르던 것보다는 훨씬 진전됐다. 에스파냐 등의 동방무역이 활성화된 탓에 아시아의 사정이 간추려서나마 유럽에 전해진 덕택이었다.
“유럽에 고산국이 위치했다면 제가 대관식을 해드려서 황제 칭호를 쓰실 수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명칭은 어느 것을 쓰든 상관이 없습니다.”
고산국의 백성과 재산을 해중국으로 넘기고 제국을 칭할 수도 있었다. 고산국 본토만, 혹은 해중국을 명나라의 명목상 속국으로 남겨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국 명칭을 사용하기 위해 그런 꼼수를 부릴 이유가 없었다. 고산국의 힘은 로마교황청이라는 종교집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언제든 제국을 선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황 성하의 고민을 알겠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요청하신다면 고산국은 로마교황청을 지켜줄 의향이 있습니다. 적이 합스부르크든, 오스만이든 로마의 영역을 침략할 때 방어에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오! 주여! 그게 정말입니까?”
“대신 병력을 고정적으로 로마에 주둔하지는 않겠습니다. 필요할 때 부르시면 즉시 원정군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다만 방어전쟁에 한합니다.”
“로마를 지켜주면서도 로마의 후견인으로서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에스파냐처럼 로마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교황이나 성직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이민호는 로마교황청이 원하는 것을 알아챘다.
“로마는 로마입니다. 저희들은 그저 로마를 도와줄 뿐이니 로마의 일은 로마 스스로 결정하십시오.”
“과연 국왕폐하는 기독교의 수호자이십니다.”
교황이 기뻐했고, 추기경들이 일제히 성호를 그렸다. 교황과 로마교황청은 원하던 것을 얻었고, 이민호는 주둔 부담이 없는 선에서 방어 전쟁에 한해 도와주기로 했다. 교황을 통해 고산국이 유럽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고 봐도 좋았다.
이민호와 민영은 사막 고양이가 눈길을 보낸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멀리 어둠 속에서 덤불이 아주 잠시 움직였고, 사막 고양이가 신경을 끈 채 민영의 무릎에 앉아 다시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잠에 빠졌다.
“북서쪽 덤불을 확인하라.”
민영이 딱 한 마디만 남기고 통신기 수화기를 내렸다. 구르카 용병들과 기병 연대가 밤새도록 추격했으나 암살자를 잡지는 못했다.
다음 날 오전, 농민들이 사용하는 허름한 마차에 교황이 타고 순례자들이 걷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이동했다. 전 날에 비해 속도가 훨씬 빨라졌으나, 오늘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움직이는 도중에도 교황이 병자들에게 축복을 해주느라 숱하게 정지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교황님! 역시 교황님은 하느님의 대리인이십니다.”
교황이 축복을 내려준다 해서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기적을 연출하지는 못했다. 그런 기적은 지하철 종점에서나 이뤄졌다.
이민호가 보기에는 교황이 축복하더라도 달라질 게 하나도 없이 단순히 위로해준 것에 불과했다. 진정한 정치가라면 의학을 발달시키고 장애인에 대한 보호조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시기에는 교황의 위로가 병자와 장애인들에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고산국에는 장애인에 대한 법적인 보호 장치가 전혀 없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아마 없지.”
순례자들이 힘들면 수레의 빈자리에 올라탈 수도 있었다. 교황도 빈자리에 앉은뱅이와 장님 순례자 몇 명을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라도 허락 없이 군용 장갑차에 타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차체가 높은 장갑차에 자기 힘만으로 올라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갑차에 동승한 통역관들 중에서 한 사람이 기계적으로 통역해주었지만, 후방 보병 탑승구에서 고개를 내민 통역관은 하필 아랍어 통역관이었다. 장갑차에 올라탄 자는 기독교 순례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국왕폐하께서는 장애인에게 잔혹하시군요.”
“백성들이 누구든지 한 달에 은 넉 냥, 5온스 넘게 받으면 장애인 보호책 같은 건 없어도 되거든.”
“아하! 과연 국왕폐하께서는 위대하십니다. 그러나.”
- 타앙!
암살자가 독침을 쏘는 것보다 민영의 권총이 더 빨랐다. 이민호도 대화중에 이미 권총을 뽑아들고 있었다. 암살자는 뭔가 말하려다 못하고 장갑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암살자는 장갑차에 탄 다음 시간을 너무 길게 끈 것이 실패 요인이었다. 제 딴에는 완벽한 기회를 잡고 있다고 여겼겠지만, 최소 20명이 암살자에게 총구를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현재 교황에 대한 암살 시도가 5건, 주인님에 대한 암살 시도가 2건이에요.”
“방금 말고 또 있었나?”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민영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하루 동안 교황과 이민호를 암살하기 위해 암살자 집단이 장애인은 물론 할머니와 어린 아이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물론 암살자들은 암살 대상에 접근하는 도중 제거됐다. 하얀 법복을 입고 병자들에게 축복을 내리면서 평화로워 보이는 교황 주위에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카가 와 있지? 정보국에 암살자를 사주한 자를 파악하라고 해.”
“암살단은 아사신이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자금이 베이루트에서 흘러들었다고 의심하고 있어요. 시간을 좀 더 주시면 미카님이 곧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해요.”
“베이루트라면 드루즈파인가?”
베이루트를 비롯한 레바논은 드루즈파의 영지였다. 반독립국을 운영 중인 파흐르 앗 딘이라면 정치적 야망이 클 수도 있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그러나 민영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말이 나왔다.
“미카님은 기독교 지파인 마론파를 의심하고 있어요.”
“마룬 파이브? 아니. 마론파 기독교가 왜?”
“드루즈파로 위장해 교황이나 주인님을 암살해서 드루즈파를 제거하기 위해서인 것 같대요. 현재 레바논을 장악한 드루즈파가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어요.”
이슬람 드루즈파와 기독교 마론파는 지금은 서로 협력하는 봉건연합의 시기라고 들었는데, 예전이나 앞으로나 서로 피 흘려 싸운 적이 더 많았다. 레바논을 구성하는 이질적인 17개 종교집단들은 공개적으로는 협력하되 뒤에서는 각종 음모와 모략을 꾸미고 있었다.
레바논 산악지대는 오랫동안 소수 종파 또는 소수 민족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제는 종파의 종류가 너무 많아져서 서로 협력하기가 쉽지 않았고 자기 집단의 생존을 모색하게 됐다.
“아슈도드나 텔아비브 건설을 레바논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할 수도 있겠어. 성지 순례가 계속되면 베이루트의 상권이 죽는다고 상인들을 설득했겠지.”
시원하게 함포 사격만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누군가를 죽여 두 집단이 싸우게 해서 어부지리를 노리려는 시도는 정말 꾸준히 진행되는 것 같았다. 증거가 드러나도 필사적으로 잡아떼겠지만 한 번 제대로 족칠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계속해서 암살을 시도할 거여요. 암살자들을 고용한 마론파를 공격하겠다고 공언하는 게 어떨까요?”
“오호! 그거 좋다. 증거가 있다고 해야지.”
“성지 순례가 끝나기 전에 미카님이 증거를 만들어낼 거여요.”
“그래?”
증거를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낸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으나, 암살이나 증거 조작이나 마찬가지로 저열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방심하는 순간 교황이나 이민호가 죽는다.
“그런데 기독교도라는 마론파는 유럽인의 후예인가요?”
“아니. 아랍인이야.”
현재 드루즈파는 베이루트에서 유럽과 교역을 하고 있으며, 마론파는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의 일원으로 싸운 적이 있었다. 로마보다 빨리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에티오피아의 흑인 기사들도 십자군 편에 서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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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될 조건 대부분을 갖췄습니다.
명나라 문제만 해결되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