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45화 (59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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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아라비아

함대가 남쪽으로 갈수록 더워져서 3월 초순인데도 장병들이 벌써 하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민호는 국왕좌승함의 함교에서 주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수상비행기가 177도, 거리 125km에서 명나라 소형 범선을 발견했습니다.”

“비단 장수 왕 서방이겠지. 한 척 단위로 움직이는 배는 신경 쓸 것 없네, 전대장.”

광동이나 복건에서 비단과 도자기를 싣고 필리핀 마닐라로 향하는 명나라 배들이 꽤 많았다. 수상비행기는 하늘에서 범선을 발견한 다음 함대로 배의 특성과 위치를 통보했다.

전파탐지기가 제대로 작동한다 해도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직접 탐지 범위는 30km 정도였다. 전파 파장에 따라 더 넓은 지역을 탐지할 수도 있었으나 전파가 직접 닿지 않는 물체는 탐지의 정확성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함대 주변에서 움직이는 배들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수상비행기의 조종사가 눈으로 직접 정찰하는 것이 가장 정확했다.

“떼로 다니는 해적선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좋지만, 해적이 생기는 대로 꾸준히 없애주는 게 좋네.”

동아시아의 바다에 해적선이 사라져서 민간 선박들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게 된다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원정 나온 병사들은 승전 수당을 받거나 전리품 분배를 받을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작년 하반기에 병사들의 봉급이 크게 인상됐으나 예전부터 적은 금액이라도 승전 수당을 받으면 병사들이 훨씬 더 좋아했다. 금액의 다소는 중요하지 않고, 적과 싸워서 얻은 승리를 국왕이 인정해줬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었다.

- 바아앙~

기체 하부와 양쪽 날개 밑에 뭉툭한 플로트를 단 수상비행기 한 대가 바다에 내려앉았다. 착륙을 마친 수상비행기의 프로펠러가 맹렬히 돌아가면서 순양함에 접근했다.

순양함 고물에 위치한 기중기가 돌아가면서 쇠줄을 내렸다. 기중기 조작자가 수상비행기의 날개에 고리를 제대로 건 다음 순양함 후갑판으로 끌어 올렸다. 함대 진행 방향 상공에 수상비행기 한두 대를 띄우는 것만으로도 초계 임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다.

함대는 순항 속도로 천천히 항해해서 사흘째에 브루나이 세리아에 도착했다. 유전과 채소밭만 덩그러니 있던 세리아는 지금은 경작지도 넓어지고 건물이 들어서서 어느덧 작은 도시로 변했다.

함선들이 연료와 청수를 공급받는 동안 이민호는 호위대와 함께 도시를 살폈다. 까무잡잡한 말레이계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가난해도 항상 밝고 긍정적인 것은 말레이계 주민들의 천성인 것 같았다.

“주인님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세요?”

“응. 내가 어렸을 때 못 놀아서 그런가봐. 민영이는 어땠어?”

“저야 어려서 일만 했었죠. 어머니와 어른들을 따라다니면서 일하면 일과 놀이가 구별되지 않았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이들이 웃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울면 그 아이의 부모가 아니더라도 안절부절못하게 돼 있었다. 물론 극소수는 주변에 다른 어른이 없으면, 혹은 있더라도 건방지다는 등의 핑계를 대면서 아이를 두들겨 패거나 모욕한다.

인간 사회 내부에 일정 비율로 존재하는 반사회적 성향의 인간들 때문에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자꾸 떨어졌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이라도 자그마한 권력이 쥐어지는 순간부터 공감능력이 뚝뚝 떨어지게 돼 있었다. 일반 백성이 흉악한 범죄자가 되는 것보다 정치가나 관리가 잔인해지는 것이 사회에 훨씬 나쁜 영향을 미쳤다.

“이번에 동해국에 갔을 때 어머니는 만나봤어?”

“예. 그 동안 재혼하셔서 아이 둘을 가지셨어요. 행복하게 잘 사시는 것 같아요. 은을 좀 드린 외에는 딱히 도와드릴 것이 없었어요.”

십 년 넘게 기회가 생길 때마다 민영이 사람을 보내 어머니를 찾게 했고 이민호도 많이 도왔다. 혹시 토벌 이후 포로가 된 다음 조선에서 관비가 되지 않았나 싶어 알아봤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그래서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민영의 어머니는 함경도와 동해국 사이를 떠돌다 동해국에서 여진족 홀아비를 만나 재혼했다고 한다.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완전히 멸망한 시전 부락이었지만 이렇게 생존자는 꽤 많았다.

이민호가 세리아에서 장갑차를 타고 3분 만에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유전이었다. 탐사전대나 탐사전단과 달리 유전을 발견해 시추하는 정부 조직인 유전 탐사단 책임자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세계 곳곳에서 자주 보는 것 같소. 새로운 유정(油井)을 발견했다고요?”

유전 경비대가 주변을 정찰하던 중 큰 공을 세웠다. 개울물에서 기름 냄새가 나기에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원유가 조금씩 침출하는 곳을 발견했다고 한다. 마침 조차지 안쪽이라서 브루나이 술탄과 추가로 협상할 필요가 없었다.

첫 유전은 시커먼 원유가 샘처럼 솟아나 검은 늪지대를 형성한 곳에서 쉽게 채굴했었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유전은 발견은 쉽게 했으나 실제 원유를 채굴하기 위해서는 땅속 깊숙이 굴착해야 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지질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지하에 덮개 구조가 있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297미터를 굴착하고 나서 원유가 솟아났습니다. 유전의 압력과 구성 성분을 비교해봤을 때 거리는 가까워도 다른 유전이 틀림없습니다.”

“아주 잘했소. 얼마나 뽑아낼지 모르겠지만 유정이 두 개라서 안심이 되오.”

시추할 당시에는 몰랐지만 세리아에서 새로 발견된 유전은 원유 매장량이 굉장히 많았다. 실제 역사에서 1929년에 시추하고 100년 동안 원유를 채굴하고도 생산이 계속된 유전이었다.

“거리가 약간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유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하.”

“지하에서 배사 구조를 찾으면 시추를 해보시오. 그런데 혹시 해저에서 유전이 발견될 경우 시추나 채굴을 할 수 있겠소?”

“얕은 바다에서 유전을 시추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해상구조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이민호는 바다 위에 우뚝 솟은 것 같은 거대한 해상구조물을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대형 시추선을 만들 여력이 없었고, 원유도 당장 더 필요하지도 않았다.

“선박 설계자와 협의해서 시추선을 설계해보시오. 먼저 3천 톤 이하의 시추선을 만들어서 시추장비를 시험해보는 게 좋겠소. 그 후에 제대로 된 대형 시추선을 만듭시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원유 수송비용이 채굴 비용보다 높으니까 가급적 여러 곳에서 유전이 발견되면 좋겠소.”

현재 북미 북동부와 남서부, 브루나이, 아부다비, 알제르에서 석유가 발견됐다. 아쉽게도 고산국 본토에서는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는 곳이 예전에 일본인 표류민들을 발견해 추방했던 무인도였다. 현대의 센카쿠 열도, 중국 명으로 댜오위다오 열서(钓鱼台列嶼)의 본섬 주변이었다. 시추선은 그곳과 이곳 브루나이 앞바다에서 필요했다.

함대는 다음 날 오전 다시 출항했다. 말래카에서 포르투갈인 성지 순례자들을 몇 십 명 더 태우고, 아체 술탄국을 지나쳤다.

말래카 해협 출구에서 활동하는 아체 해군 범선들이 고산국 함대를 알아보고 열렬히 환호를 보냈다. 고산국 함대에서도 선원과 병사들이 갑판에 올라 환호를 보내줬다.

“전대장! 요즘 함선끼리 지나칠 때 대함경례를 한다며?”

“예, 전하! 아국의 해군이나 해안경비대 함선들이 지나칠 때 수병들이 갑판에 일렬로 늘어서서 대함경례를 합니다. 유럽 상선들은 유럽에서 하는 식으로 돛을 내리거나, 국기를 내리고 우리 함선이 국기를 내렸다 올리면 유럽 상선에서 국기를 다시 올리는 식으로 예의를 표합니다.”

수병들이 갑판에 올라 거수경례를 하는 것도 함장의 계급에 따라 누가 먼저 경례하는지 정해져 있었다. 고산국 함선들끼리는 그나마 동등하게 대하는 편인데 반해 유럽 상선이나 군함이 돛을 내리는 것은 항복이나 복종의 표시였다.

말래카 해협에서 빠져 나온 다음 다시 6일 동안 항해해서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이곳은 열대 기후에 속했다.

그러나 선실마다 냉방기가 있어서 더위를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부다비에서 두 달 동안 기다렸다는 페르시아 사신이 알현을 청했다.

“광활한 북미 대륙의 주인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큰 바다를 지배하는 대양의 군주이시며 아프리카와 여러 유럽 국가들의 후원자이신 고산국 국왕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말은 잘 받았소. 훌륭한 말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샤한샤께 전해주시오.”

이민호는 맨입으로, 라는 말을 생략했다. 그러나 대가를 받을 생각이 없던 사신은 말 값 문제는 넘어가고 이민호가 관심을 가질 만한 여러 가지를 제안했다.

“폐하! 페르시아에서 생산한 양탄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고급품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말래카 해협 이동 지역의 독점 판매권을 고산국에 제의하는 바입니다.”

“양탄자라. 훌륭한 물건이지요. 그런데 샤한샤가 내게 원하는 것은 뭐요?”

“지난번 실수를 폐하께서 잊어주시는 것입니다.”

암살 시도를 잊으면 당연히 안 된다. 이민호를 제거함으로써 고산국과 오스만 제국에 싸움을 붙일 생각을 했던 페르시아의 아바스 1세는 매우 위험한 자였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는 타국의 암살시도를 막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암살이나 전쟁을 외교 및 정치 수단으로 동원하다면 고산국만큼 강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복은 하지 않았다.

“흐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말이 더 필요한 것 같소. 말 값은 원가만 보상해주겠소.”

“그렇다면 3천 마리가 더 가능하다고 합니다.”

“올해 말까지 아부다비에 가져오시오. 선금은 없소.”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상당히 가혹한 조건일 텐데도 페르시아에서 가볍게 받아들였다. 이것저것 널린 일만 아니었다면 페르시아에 응징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쪽에 오스만 제국, 동쪽에 무굴 제국이 위치한 페르시아를 점령해봤자 남는 것이 없었다.

“주인님. 여기서 그치면 안 돼요. 주인님의 목숨을 노리다니, 매우 괘씸한 자들이에요.”

“어휴. 알았다. 통역! 왕족 하나를 인질로 바치라고 해라. 고산국 왕립대학에서 공부를 시켜준다고 해.”

민영이 화를 내는 바람에 조건 하나를 더 내세웠으나 사신이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그전에 이민호는 여자가 아닌 남자 왕족이라고 아예 못을 박았다. 더 이상 여자가 왕실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님은 공주 수집에서 왕자 수집으로 취미를 바꾸신 거여요?”

“무슨 소리! 공주들은 그 나라에서 알아서 보낸 거야.”

이민호는 침전에서 민영의 무릎을 베고 편안히 누워 대추야자를 씹었다. 지수와 지영이 이민호의 다리 하나씩을 맡아 안마를 해주었다.

“그럼 어째서 왕자를 인질로 요구하셨어요?”

“왕족을 인질로 받는 것은 일반적으로 나라 사이의 서열을 확인하고 다른 나라들에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야. 하지만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함으로써 문화 교류의 기회가 되기도 해. 페르시아하고 싸울 마음도 없으니 왕자가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귀국시킬 거야.”

“왕자보다는 왕자가 데려올 사람들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곡예단도 좋고, 학자들이면 더 좋고.”

손을 뻗어 지수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지수가 몸을 비비꼬며 묘한 신음소리를 냈다.

“스무 살이 된 소감이 어때?”

“남들처럼 열넷에 결혼해서 열여섯에 첫 아이를 낳을 줄 알았어요. 이게 뭐여요. 칫! 이상하고 부끄러운 것만 시키고. 흥!”

님을 봐야 별을 딸 텐데 둘에게는 아직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 소득 없이 일 년을 보냈는데 설상가상 이번 해 졸업생이 몇 명 더 합류했다. 경쟁자만 늘어난 셈이었다.

“좀 더 기다려. 이번 원정 기간 안에 기회가 있을 거야.”

“정말요?”

지수와 지영이 이민호의 몸 위로 안겨왔다. 몇 십 년 후에 입헌군주제를 시행할지도 모른다고 후궁들에게 발표했는데도 이들은 자기 자식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생각했는지 개의치 않았다.

혜영은 개똥이가 후계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눈치였다. 몇몇 후궁들이 자식 교육에 힘쓰는 동안에도 혜영은 개똥이를 거의 방목하다시피 키웠다. 취학 전에 왕자와 공주들에게 흔히 붙이는 개인교사 하나 두지 않았다.

“제 눈치 보지 말고 얼른 다 안으세요, 주인님. 이 아이들의 애달픈 마음을 가엽게 여겨 주세요.”

“내가 언제 민영이 눈치 봤다고 그래?”

“풋!”

다른 주요 후궁들은 하나씩 낳았는데 민영은 아직 소식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민영의 체력 훈련을 줄여보기도 했으나, 적은 기회가 가장 큰 이유라고 아줌마 어의가 판단했다.

그래서 원정 기간 중에 남는 시간에는 민영과 시간을 자주 보내려고 노력했다. 민영도 이민호의 마음을 고맙게 여겼으나, 그래서 더욱 절망하게 됐다. 지금은 아예 포기했는지 차분히 가라앉았다.

“괜히 제가 주인님과 다른 호위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요. 더 이상 저를 신경 쓰지 마세요. 주인님께는 항상 고마워요.”

“160명 중에서 자식을 30명밖에 못 봤다면 내가 더 문제가 아닐까? 우리 더 열심히 노력해보자.”

어의가 준비해준 특제 보약을 눈을 질끈 감고 마셨다. 입안에 남은 쓴 맛을 없애기 위해 꿀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신 다음 민영의 손을 잡았다.

보약이 몸에 잘 받아 불끈불끈했고, 민영도 몹시 기뻐하며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그 전에 지수와 지영이 옷을 훌렁 벗고 옆에서 도와주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자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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