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40화 (589/1,000)

00640  66. 백화제방  =========================================================================

북미 지역 물가와 임금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해결방안을 제시했던 대학생을 왕궁으로 초청했다. 김수공이라는 왕립대학교 경제학과 학생은 미래가 촉망되는 인재이므로 건의사항을 정책에 반영하지 않게 되더라도 크게 격려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알현실에 들어온 사람은 예상하던 모습과 크게 달랐다.

“자넨 외국인 유학생인가? 신문 기고란에 김수공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조선 출신인 줄 알았는데.”

“작년에 고산국에 귀화하면서 이름을 고쳤습니다, 전하. 수공은 수요와 공급을 줄인 말입니다.”

“그건 수급이지만, 하여튼 이름을 잘 지었네.”

이름을 보고 속았는데 이 대학생은 프랑스 출신이라고 했다. 파나마 운하 건설 전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선장들에게 유럽의 학자와 대학생들을 초빙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왔던 유학생들 중 하나였다.

“저는 고산국 덕택에 후원자 없이도 대학 공부를 하고, 농노였던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가족들을 아예 북미 새원산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저도 졸업하면 북미에서 살면서 작은 무역회사를 경영할 생각입니다.”

“훌륭하군. 그런데 아직 학생이라면서 돈을 어떻게 벌었나? 고산국에서 일을 하더라도 유럽에 비하면 수입 자체는 적을 텐데.”

유럽 귀족이나 상인 등 시민은 고산국에 이민을 올 유인이 떨어졌다. 물가와 임금이 모두 높은 유럽에 비해 북미에서는 명목 소득이 확연히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농민이라면 원래 신분이 자작농이나 소작농, 농노를 불문하고 북미에서 훨씬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지만 취업을 하면 기본 소득을 포함해 한 달에 은 넉 냥 이하였다. 유럽에서는 생활하기 버거운 수입 수준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북미 물가 수준이 유럽의 10분의 1 이하라서 충분히 여유 있게 살 수 있었다.

“일은 전혀 안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고산국의 우편제도를 이용해서 향신료를 르아브르에 보내 판매했습니다.”

“아하! 그런 빈틈이 있었군. 하하하!”

고산국에서 후추 등 향신료를 싸게 산 다음 우편봉투에 넣어서 프랑스 항구에 보내면 가족이 받아서 파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후추 같은 가루를 잘 포장하면 서류뭉치와 구별하기 어렵다.

“죄송합니다. 불법이라면 벌을 받겠습니다.”

“아! 겁내지 말게. 형법에 규정된 외에는 범죄로 취급하지 않아. 마침 고산국에는 몇몇 품목 빼고는 밀수입과 밀수출에 대한 제재가 아직 없네. 그런 것도 특정한 상황에서는 선택할 만한 정책이지.”

“의도적으로 밀수를 용인하다니, 전하께서는 정말 특이하십니다.”

고산국에서 유학생 생활을 하면서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가족들을 부자로 만든 김수공이 더 대단한 사람 같았다. 이런 사람은 조건만 받쳐준다면 나라 하나 세우는 것쯤은 문제도 안 될 것 같았다.

“자네는 혼자서도 잘 살 것 같군. 전공이 뭔가?”

“원래 법학을 배우다가 고산국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습니다. 시장에 대한 국왕전하의 특이한 시각에 놀랐습니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가격에서 균형이 맞춰진다는 단순한 논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과학이란 단순화가 필요한 거지.”

아주 예전에 대충 훑어봤던 경제원론 책의 그래프 몇 개를 기억에서 짜낸 다음 그려서 진짜 경제학자한테 넘겼다. 대부분 이론은 그 교수가 보충하고 이민호와 공저자 형태로 경제학 책을 냈다.

“학교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고산국의 건국 과정을 살펴봤습니다. 그 전까지는 금과 은 가격 차이를 이용한 재정거래를 하고 싶어도 수송하기 위험해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윤선과 수심 측량으로 해운의 위험을 극복하셨더군요.”

“돈을 벌려면 위험을 감수해야지. 그래서 나는 멀리 동양까지 항해해 온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인들을 좋아한다네.”

“그 사람들은 돈에 눈이 멀어 작은 범선으로 바다에 뛰어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체계적으로 장애물을 넘어 쉽게 큰일을 이루셨으니 차원이 다릅니다.”

“아부는 할 필요가 없고, 북미의 상품 가격과 임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보게.”

총리 혜영과 호조 판서, 공조 판서가 배석해 김수공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잘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역시나 다른 시장 참가자들이 문제였다.

지역 간에 가격 차이가 생기면 상인이 움직이기 마련이었다. 그 상인들 중에는 고산국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도 있었다.

“농민들을 비롯해 본토의 주민들을 북미 동해안으로 이주시킬 아주 좋은 묘안입니다. 그러나 유구국까지는 괜찮지만 괜히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좋은 일을 시켜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은 겨우 열 배의 이익을 위해 범선을 바다에 띄우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시간과 비용, 위험을 감안하면 최소 40배 차이는 넘어야 합니다. 향신료 무역은 판매가가 구입가의 최소 100배는 됩니다.”

“그렇다면 괜히 열 배로 고민했군요. 수에즈 운하 개통 전에 포르투갈 범선들이 인도양과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하는 비용과, 에스파냐 범선들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는 비용을 계산해 봅시다.”

혜영과 판서들이 아주 잠시 대화하더니 순식간에 결론을 내렸다. 이민호는 판서들이 의외로 인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서양 무역이 유지될 수준으로 북미의 물가와 임금을 평균 6배 정도 올리기로 해요. 다만 곡물 가격은 동결해도 돼요.”

“북미 농민들이 불만을 품지 않을까?”

“농민들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뿐이에요.”

본래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었지만, 북미에 거주하는 농민들도 다른 직업에 비해 자기들의 수입이 과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지역별로 가격과 임금 차이를 두는 정책을 실시하기로 했다.

현재 기준으로 북미에서는 올해 안에 3배, 내년 말까지 6배로 올리기로 했다. 고산국 본토에서도 가격과 임금을 올해 안에 1.5배, 내년 말까지 2배 수준으로 단계적으로 올리기로 했다. 본토의 임금이 북미의 2배였다가 3분의 2로 차이가 줄어들게 될 뿐만 아니라 역전되는 셈이었다. 이로써 본토 주민들의 북미 이주를 촉진할 수 있게 됐다.

“말로는 쉽지만 임금과 가격 수준을 원하는 대로 높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오.”

“국영기업의 임금과 가격은 바로 올려줄 수 있습니다, 전하. 민영 기업들도 이익이 많이 남고, 조만간 두 배 가격으로 판매하게 되므로 임금 상승 여력은 충분합니다.”

“본토의 농민들이 불만이겠구려. 북미로 이주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본토 농민들의 경작 면적도 늘어나서 수입이 보전될 것이오. 농기계가 충분히 보급된 시점이라 다행이오.”

이민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겨우 한 고비 넘겼다. 이제 금본위제를 도입하되 유럽 국가들에게 금과 은을 약탈당하지만 않으면 된다.

“김수급, 아니 김수공 학생.”

“예, 전하.”

“국가를 위해 일을 해줘야겠어.”

“국가에 봉사할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그런데 외국 출신이라도 상관없겠습니까? 아니, 저는 겨우 대학생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고산국 백성이니 전혀 상관없네. 일을 하게.”

호조 밑에 경제기획청을 두고 물가와 임금 관리, 차후에 있을 화폐개혁을 맡기기로 했다. 청장은 아르바이트 대학생 김수공을 임명했다.

이민호는 김수공이 학교에 계속 다니면서 공강 시간이나 하교 후 시간을 이용해 일을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김수공은 알아서 직장인을 위한 야간대학으로 옮기고 하루 종일 일했다.

중요한 정책 변경이라 한 달 동안 백성들에게 충분히 알린 다음 국영, 또는 왕립 기업들부터 임금과 상품 가격을 올렸다. 군인과 공무원들도 임금 상승의 혜택을 가장 먼저 맛 본 집단이 됐다.

곡물을 제외한 모든 가격이 본토에서 1.5배, 북미에서 3배로 올라 농민 외에는 손해 본 집단이 없었다. 다른 직업을 가진 자들은 곡물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탓에 조금 이익이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본토 농민들의 북미 이주가 붐을 이루었다.

이때 경제기획청에서 배급제까지 고려했지만 사재기 문제는 거의 없었다. 날만 새면 새로운 제품이 쏟아지는 고산국에서 상품 사재기를 잘못 했다가는 크게 손해를 보게 되는 탓도 있었다. 기업들은 원자재 대부분을 수입하고 가격 변동이 없으므로 사재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 초조했다. 이런 짓을 내년에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거지? 미치겠군.”

“금과 은이 충분히 준비돼서 다행이에요.”

혜영에게 보고를 받은 다음 이민호가 소파에 늘어졌다. 걱정하던 것과 달리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시아 다른 나라에서는 큰 충격이 없었다. 고산국의 수출 상품 가격이 약간 오른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다. 원료 가격과 인건비 상승 때문에 고산국 수출기업의 채산성이 떨어졌으나 그 동안 약탈에 가깝게 이익을 거둔 탓에 우는 소리도 못 냈다. 그 동안 흥청망청 사업을 벌이던 민영 기업들이 비용 절감에 조금 더 신경 쓰게 됐다. 덕택에 몇 가지 기술발전도 이뤄졌다.

유럽 국가들도 아직은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북미 내수 가격과 수출 가격이 이중 가격 구조였기 때문이다. 다만 유럽 어민들이 북미 관청의 양해 아래 밀수입하던 상품에서 이익이 줄었을 뿐이었다. 내수 가격과 수출 가격의 차이가 줄어들자 임시로 그 차액을 받아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던 새원산과 새강릉, 새동래의 발전 계획에 약간 차질이 생겼다.

국가의 천년대계를 세울 국가체계에 대한 의견을 묻는 교지에 답한 고산국 백성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신문사들도 조용했고, 다만 외국인 교수들과 유학생들이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몇 가지 제안은 정부에 수용됐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아주 난리가 났다. 조선의 양반 관료와 선비들에 의해 건국 초기의 국가에 적합한 온갖 권력구조와 정치제도, 정부 정책이 고산국 정부에 제안됐다. 엄청난 양의 책문이 고산국 왕궁에 쌓였고, 이민호와 정보국 직원들이 정리할 엄두를 못 내는 동안 조선 안에서 남의 나라 고산국의 국가체계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고산국 신문들이 조선에서 벌어지는 열띤 토론회를 고산국 독자들에게 열심히 전달했다. 그러나 신문 독자들은 시큰둥했고, 차라리 유럽인 학자들이 정리한 유럽 정치사 연재기사에 관심을 돌렸다.

독자들에게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정, 민주정에 대한 기사가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공화정이 왕정으로 복귀되면서 인기도 시들었다. 폴란드의 의회를 다룬 기사는 국왕에게 무도하다 해서 기자가 독자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백성들의 의식이 이래서 공화정은 물론 쉽사리 입헌 군주제로 바꾸기도 어렵게 됐다.

어느덧 10월이 됐고, 총리 혜영과 판서들이 국왕자문기관 및 지방의회의 명칭과 조직, 의원 선출방법 등을 결정한 다음 혜영이 따로 보고했다. 여러 사람들, 특히 에스파냐 교수가 건의한 내용이 많이 반영했다. 그런데 나중에 의회로 발전할 수도 있는 기관의 특이한 명칭에 이민호는 조금 놀랐다.

“추밀원이라. 중추원이 낫지 않소, 총리?”

“조선의 중추부와 혼동되지 않도록 바꿨어요, 주...... 상전하. 원나라의 추밀원은 아는 사람이 적을 거여요.”

고려의 추밀원은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했고, 조선에 들어서서 중추원 또는 중추부로 바뀌며 왕명 출납 기능은 승정원에, 군사 기능은 삼군부로 이관됐다. 그리고 중추부는 아무런 기능 없이 전관을 예우하는 기관으로 변모했다.

원나라의 추밀원은 군사 통할 기구였다. 영국의 추밀원은 국왕 자문 기관이었다가 의회의 힘이 강해지고 국왕의 정치적 책임이 사라지면서 정치적 기능을 상실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문예와 과학기술 진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요. 이름보다는 실제가 중요하겠지요. 추밀원과 지방의회 의원 선출 방법이 꽤 복잡하군요. 선거관리위원회는 어떻게 구성하나요?”

“학교 선생님들이 중심이며 법원과 관료에 더해 민간이 참여하도록 했어요, 전하. 호선에 의해 선출된 상임 관리위원이 사무장 역할을 맡아요.”

“어쩌면 선거관리위원회가 가장 중요한 기관이겠소.”

“독립성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치에 거리를 두는 공정한 사람들만으로 선발할 테니까요.”

선거관리위원회를 올해 말까지 설치하고, 내년 초에 후보자 등록을 받아 내년 하반기에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아직 건국 초기라서 각 지방의 경계선도 모호한 상황에서 인구와 지역 면적에 따라 적당히 분할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후보를 검증하면 추밀원 의원 후보는 완전히 벌거벗게 될 것 같소.”

“그 동안 형사나 경제 범죄를 저질렀을지 모르니 아주 탈탈 털어야죠. 선거에 나서고 싶으면 평생 성인군자로 살아야 할 거여요.”

예비 후보로 등록되면 검증 기간을 6개월이나 두고 경찰과 국세청이 면밀히 조사할 뿐만 아니라 무기명 투서까지 받아 조사하기로 했다. 이 과정을 통과한 사람만이 후보로서 선거 운동에 나설 수 있었다.

“아무도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요?”

“권한 외에 특권 몇 가지를 줬어요. 미끼로 훌륭하지 않아요?”

지방의회에는 그 지역의 예의범절에 관한 조례를 만들 권한을 줬다. 혜영은 지방의회에서 백성들이 의원을 만나면 땅바닥에서 절을 해야 하는 조례를 만들 것으로 예상했다. 이민호는 설마 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혜영이 내민 것은 누런 모자였다. 이민호는 그 재질을 알고 경악했다. 누런 비단 바탕에 금박을 붙인 갓이었기 때문이다.

“황금으로 만든 갓이라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촌스런 것을 쓰려 하겠소? 조롱한다고 화내지 않을까 겁이 나오.”

“두고 보세요, 전하. 오직 이것을 쓰려고 의원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대거 입후보할 거여요.”

“설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의원에 선출되더라도 안 쓸 것이고, 권위를 중시하는 사람은 쓰고도 남을 것이다. 이민호는 한국 국회의원들을 떠올렸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좋소. 이 계획대로 추밀원과 지방의회 의원들을 선거를 통해 동시에 뽑읍시다. 백성들이 정치에 관심을 안 두고 내 마음대로 하라고 맡긴 모양인데, 그러면 피곤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오.

“괜히 추밀원과 지방의회를 구성해서 백성들을 못 살게 구는 것 같아요.”

“의원들을 잘못 뽑고 나서 백성들이 혼이 나야 그 다음부터는 신중하게 선택할 것이오.”

의원 선출 과정이 범죄자 색출 작업과 비슷했지만 건국 초기라서 이렇게 특이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초반에는 국가도 백성도 배우는 과정에 불과해 추밀원과 지방의회에 큰 권한을 줄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적당히 선량한 사람들이 의원에 당선되면 천천히 권한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 작품 후기 ============================

백화제방을 묘사하려 했는데 공부가 먼저겠습니다.

괜히 쓸데없이 조선에서만 실컷 떠들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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