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27 65. 뻐꾸기시계 =========================================================================
“라면은 어떻게 돼 가고 있소?”
“면을 뽑아서 기름에 튀기고 건조시키는 방식은 완성됐습니다. 밀봉된 종이 포장에 넣고 습기 안 드는 곳에 보관하면 보존기간이 최소 두세 달이 넘어갑니다.”
이민호가 종이 포장을 뜯었다. 대학 다니던 시절에 익히 봤던 꼬불꼬불한 면발이 두툼하고 둥그렇게 말려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보존기간이 짧아서 불만이었다.
“이탈리아 파스타는 종류에 따라 2년 동안 보관할 수 있다고 들었소. 이탈리아에 기술 자문을 요청하는 편이 낫지 않겠소?”
“저희도 건조 파스타를 만드는 듀럼밀로 생산하면 1년 넘게 보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재료 밀의 품종을 바꿀까요?”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서 국수를 들여왔다고 흔히 잘못 알기 쉬웠으나 파스타는 그 전부터 유럽에 있었다. 현대의 듀럼밀로 만든 파스타는 처음에 아랍에서 만들어 유럽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 전에도 이탈리아에 비슷한 식품이 있었다는 설도 있었다.
보존기간을 늘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면발에 식품용 방부제를 첨가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았다. 양철에 주석 도금한 깡통도 극구 안 쓰려는 마당에 안전하다고 확인된 식품용 방부제도 쓰기 꺼려졌다.
“아니오. 우리는 파스타가 아니라 튀겨 말린 국수를 만들고 있소. 면에 소금 양을 더 추가해보시오. 다른 문제는 있나요?”
“국물을 만드는 분말을 가격 한도 내에서 여러 가지로 조합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현재 고산국에서는 남아도는 밀과 쌀 등 곡물을 이용해 장기간 보존 가능한 다양한 식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유럽 선원들이 망치로 두들겨 깨서 먹는 건빵보다 훨씬 바삭하고 맛있는 한국식 건빵도 완성됐다.
빵과 비스킷 종류의 과자도 다양하게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식을 넘어 주식 대용으로 먹을 만한 라면 개발은 자꾸 늦춰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인스턴트식품 주제에 생산 비용이 웬만한 주식 한 끼의 가격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건조한 야채 외에 소금과 고춧가루, 후춧가루 등 비싼 재료가 많이 들었군요.”
“전하께서 판매가격을 쌀 한 말 이하로 책정하셔서 단가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추와 후추를 줄이면 맛이 떨어집니다.”
한때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후추를 넣을 생각을 했으니 생산단가가 떨어질 수가 없었다.
“분말재료에서 소금을 아예 빼서 면에 넣으시오. 고추를 반으로 줄이고 후추는 아예 뺍시다. 고객에게 취향에 따라 첨가해서 먹으라고 포장지에 인쇄하면 어떻겠소? 다시마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멸치가루도 넣어보시오.”
“그렇게 하면 재료비를 적게 들이고도 제법 국물 맛이 나겠습니다. 시험해보겠습니다.”
고산국 사람들 입맛에는 다소 밍밍했으나 아직 짜고 맵게 먹는 시기가 아니라서, 이민호 외에는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고 평가했다. 뜻밖에 유럽인 입맛에는 잘 맞을 것 같았다. 유럽은 물가가 전반적으로 비싼 지역이라 쌀 한 말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팔 수도 있었다.
“전하! 조립형 장난감이나 라면 외에도 정부 연구소에서 발명한 독특한 생산품이 많습니다. 이런 상품에 특허권을 설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공개입찰을 통해 제작사를 선정해서 일정 금액을 받아내 국고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외국에는 특허제도가 없소. 국내 업자들은 같은 제품을 못 만들고 외국에서는 마음대로 만든다면 우리 회사들이 역차별을 받아 오히려 손해요. 조립형 장난감은 누구나 만들도록 하시오.”
특허권 제도가 성문화된 것은 1623년 영국의 독점법이 최초였다. 그리고 특허제도를 시행했을 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특허권을 보호하려면 동시에 특허기술을 공개해야 하는데 지금 단계에서는 우리에게 손해요. 베낄 능력이 있다면 베끼라고 하고, 지금은 기술을 보호하는 게 낫겠소.”
“대신 국내에는 기술을 공개하겠다는 뜻이옵니까?”
“개인이라면 특허권을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국가의 일을 하고 있지 않소? 이것을 기반으로 여러 회사들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제작기술을 국내 회사에 한해 무료로 공개합시다. 그럼 품질 좋고 싼 제품이 살아남겠지요. 기준에 못 미치는 불량품은 식품허가를 내주지 마시오.”
라면이나 건빵, 크래커 같은 경우 식료품이지만 공산품에 속했다. 국가의 허가권이 미치는 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품목 기준에 미달하면 판매할 수 없었다. 고산국에서는 얼마 전부터 식품기준법이 시행 중이었다.
“표준 유리병 제작은 끝났소?”
“이것입니다, 전하. 1리터와 1.5리터, 그리고 200밀리리터 유리병입니다.”
“병목에 선을 그어 정확한 용량을 표시했구려. 잘했소.”
내용물은 과일 탄산음료였다. 고산국에서는 군함과 상선, 어선을 불문하고 배에서 장기 근무하는 선원들에게 비타민을 보충해주기 위해 과일을 적재했다.
그러나 과일은 장기간 보관이 어려워 병조림을 생산했다가, 보관하기에 더 유리한 과일 음료를 개발했다. 비싼 설탕 대신 값싼 꿀을 사용해 싸구려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인공감미료를 만들 필요성은 아직 느끼지 못했다.
내용물에 대한 평가는 상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넘어가고 유리병만 집중적으로 평가했다. 기존의 갈색 와인 병과 달리 무색투명했고 대량생산을 통해 단가를 낮추기 위해 아무런 장식도 붙이지 않았다. 생산회사는 이 병에 내용물을 담고 마개로 밀봉해서 판매하면 된다.
유리그릇이나 놋쇠그릇을 대용할 만한 값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생산자들이 많아 이렇게 대량 생산에 적합한 단순한 유리병을 생산하게 됐다. 소비자에게도 병은 유용했다. 음료를 마시고 나서 병에 간장이나 참기름을 보관하든 물병으로 쓰든 상관없었다.
“이런 식이면 뚜껑을 처음 개봉할 때 버리게 되지 않소? 입구를 천으로 막으면 안 좋소. 그렇다고 양철로 마개를 만들 수도 없을 것 같소.”
“천연고무나 코르크를 이용한 마개를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병을 눕혀서 보관하더라도 내용물인 액체가 병마개 철 부분과 접촉하지 않게 하시오.”
“주석 도금을 하면 일 년 정도는 상관없습니다만.”
주석 깡통도 안 쓰려고 하는 마당에 녹스는 병마개를 달 수는 없었다. 주석이 녹아서 인체에 섭취돼도 크게 건강에 이상이 없다지만 좋은 것도 아니었다. 주석이 녹은 다음에는 철 성분이 액체에 녹아든다.
“그 이상이면 녹아내릴 것이오. 주석은 식품 보관 용기에 안 쓰는 게 좋겠소.”
플라스틱으로 만들면 모든 게 해결되겠지만 이민호는 플라스틱의 대중화를 가급적 늦추고 싶었다. 현재 플라스틱 같은 석유 합성물이 사용되는 곳은 수도관이나 비닐하우스 등 극히 일부에 국한됐고 제작기술도 공개하지 않았다.
북미를 매입하고 호주를 개발한 이후 태평양은 고산국의 내해였다. 플라스틱 쓰레기로 바다를 메우고 싶지 않았다.
“규정은 만든다 치고, 문제는 생산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는가 하는 문제요. 국민 건강에 관련된 일이오. 공조에서는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전하! 그 동안 길이나 닦고 대포나 만들던 공조에서 상인들의 부정을 감시하는 일은 참으로 감당하기 버겁습니다. 호조에서 회사의 회계자료를 검사하는 것 같던데 생산규정 준수여부 조사도 같이 맡기면 안 되겠습니까?”
보통 부처 이기주의라고 하면 업무영역을 넓히는 쪽으로 발현됐다. 그러나 갖가지 일에 치이는 현재 고산국 행정기관에서는 가급적 일을 떠맡지 않으려 했다.
“뭔가 만드는 일은 공조의 책임 아니오? 호조에서는 물건을 어떻게 만드는지 이해도 못하고 관심도 없소. 새로 생긴 그 많은 회사들을 공조가 모두 관리해야 하니 인원이 부족하면 충원하시오.”
“퇴근 시간에 육조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눈 밑이 시꺼먼 자들은 호조 아니면 공조 관리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격무에 시달려서 장기간 근무하려는 관리가 드뭅니다. 젊은 관리들이 민간 회사로 못 옮기는 것은 이력서 쓸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육조 거리에 가끔 팬더처럼 눈 밑이 시커먼 사람들이 돌아다녀서 궁금해 하던 참에 의문이 해소됐다.
“퇴근 시간이라도 지키면 다행이오. 국방연구소 직원들은 퇴근하는 날이 별로 없다오. 앞으로 일이 더 많아질 테니 인원 충원과 교육을 철저히 하시오.”
판서 외에 참판이나 참의, 정랑 등 각 부서의 핵심 간부들이 북미나 호주에 시장으로 나간 것도 악영향을 끼쳤다. 시장들이 육조 직책을 겸하게 하고 새로 간부들을 뽑았지만 인재란 금방 길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공조 판서가 언급했듯이 도로나 철도 건설, 조선의 군기시처럼 무기를 생산하던 공조에서 식품 생산 공정을 감독하게 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공조 판서가 탄식하기에 이민호의 마음이 흔들렸다.
“정 관리하기 어려우면 식품관리청을 만들어 전담시키시오.”
“그게 좋겠습니다, 전하!”
철도청에 이어 식품관리청이 독립된 부서가 됐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나 둘 다 공조 관할이 맞았다. 주택건설은 물론 수도와 전기 공급도 공조가 맡아서 부서 전체가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다.
철도청 본청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북미 횡단 철도를 계획하느라 아우성이었다. 문제는 탐사가 완전히 이루어지기 전에 철도부터 놓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철도공사를 하다가 넓은 절벽 지형이나 거대한 호수에 막힐 수도 있었다. 철도 노선은 탐사단이 작성한 지도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해서 철도 건설 현장에서 어느 정도 수정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공조에서 관할하는 여러 가지 생산품들을 점검했다. 식품이 다수를 점했으나 새로운 농기구와 공구, 그 공구를 제작하는 선반 같은 공작기계도 그 사이 꽤나 발전이 있었다.
함선용이나 영업장용 대형 냉동고 외에 가정용 냉장냉동고가 처음으로 그럴 듯하게 작동했다. 그 동안 냉장기능밖에 없었던 냉장고가 날개를 달았다. 저녁에 왕궁에 돌아가서 신형 냉장고의 성능을 확인했다.
혜진이 냉동고에서 초코아이스 바를 꺼내서 이민호에게 바쳤다. 이민호가 이것을 먹으며 옛날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렸다. 이민호가 다시 손을 내밀자 혜진이 이번에는 딸기아이스크림을 바쳤다.
“한꺼번에 많이 드시면 배탈 나요, 주인님.”
“부모님이 나를 낳으셨지만 내 몸을 만든 사람은 혜진이야. 혜진이 덕택에 내 입맛이 너무 까다로워져서 걱정이야.”
“찬사인가요?”
“물론이지. 맛있어.”
혜진이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서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음식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민호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혜진이 그 음식을 개발해 조리법을 표준화했다. 그 덕택에 이민호는 물론 백성들이 맛있는 음식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었다.
혜진이 공개한 표준 조리법 이상으로 음식 맛을 내려면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하거나, 엄청난 노력과 투자가 필요했다. 가끔 식당가를 돌아다니면서 혜진이 맛을 인증해주면 그 식당은 단기간에 고급식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가격은 기본으로 두 배 이상 뛰었다.
“새로운 음식만 만들고 싶은데 요즘 하는 일이 너무 많아요.”
“고생한다. 새원산에 새로 개점한 백화점에 가봤어. 대단하더군.”
“백화점 명품관에 채워 넣을 상품을 구하느라 혼났어요.”
고급 상품 전시관인 명품관은 수출상품 전시관이기도 했다. 보석과 비단, 도자기 같은 전통적인 사치품 외에 모피의류와 양탄자 등의 비싼 상품이 진열됐다.
호주 장영실 시에서 생산한 악어가죽 가방을 구색 맞추기 용으로 들이밀었는데 그것도 잘 팔렸다. 상품에 브랜드 제도를 도입해 품질 보증을 해주는 대신 평균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책정했다.
“별 게 다 있던데?”
“5층 중에서 겨우 반 층을 사용하는데 판매액은 백화점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이던데요? 이익 대부분이 명품관에서 나와요.”
“백성들이 요즘 들어서 경제적 여유가 생겼으니까. 돈을 쓸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야.”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돈이 남으면 경작지를 사두겠지만 고산국에서는 왕토사상 때문에 토지의 개인 소유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남는 돈은 소비나 생산으로 바로 투입됐다.
이것은 경기활성화에 큰 보탬이 됐지만 부동산 담보 대출이 불가능해 사업자금을 모을 때 소규모 주식공개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고산국에서는 네덜란드를 본 받아 증권거래소 개설을 준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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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어질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