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26화 (575/1,000)

00626  65. 뻐꾸기시계  =========================================================================

로마가톨릭에서 시성 과정의 첫 번째 단계에서 받는 칭호가 ‘신의 종’이었다. 이민호는 단순히 훌륭한 성직자를 지칭했으나 마테오 리치는 자긴 아직 안 죽었다며 펄쩍 뛰었다.

“존경하는 분을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인사를 받으십시오.”

“과례이옵니다, 전하.”

이민호가 옥좌에서 내려와 허리를 숙여 성직자겸 학자에게 존경을 표했다. 마테오 리치도 얼른 다시 허리를 숙였다. 마테오 리치뿐만 아니라 궁궐을 방문한 고위 성직자나 유명한 학자에게는 이렇게 국왕이 직접 존경을 표하는 것이 관례였다.

마테로 리치는 이제 겨우 40대 후반에 불과한데 허연 수염 때문에 선풍도골의 70대 신선 같은 모습이었다. 연장자를 우대하는 명나라에서 활동하기에 아주 유리한 인상이었다.

“모처럼 이렇게 오셨으니 푹 쉬다 가시길 바라겠소. 부르는 곳이 많아 바쁘시지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입조하라는 어명을 두 번 받았을 때는 마침 난징과 난창에서 와병 중이었습니다. 전하께서 그 동안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리옵니다.”

유창한 중국어로 말하는 이탈리아인 선교사를 보게 된 주상아 공주가 무척이나 기뻐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고전을 인용해가며 명나라 학자들과 유교 교리에 관한 토론을 할 정도로 유교에도 소양이 깊었다. 중국어와 유학에 대한 깊은 지식 덕에 명나라 개혁파 학자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고 일부는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었다.

“성원이요? 아! 그거 내가 보낸 게 아니라 태서유사가 저술한 책에 대한 저작권료요. 저자 인세라고 보시면 되겠소. 책이 나오기 전에 번역 출간 계약서에 서명했지요?”

“출판사 관계자가 난창까지 직접 찾아와 제게서 서명을 받아갔습니다. 저자에 대한 고산국의 보호제도가 놀랍습니다. 마침 자금이 부족했던 때라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몹시 기뻐했습니다.”

왕립출판사와 여러 민간 출판사에서 마테오 리치가 낸 책을 번역해서 출간한 적이 있었다. <교우론>. <서양기법> 등을 번역해서 냈고 특히 <천주실의>는 명나라와 조선처럼 고산국에서도 인기가 좋은 책이었다.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은 아직 저술하지 않았으나 유클리드 기하학 자체가 이미 고산국에 소개됐었다.

정식 알현이 끝나고 탁자에 둘러앉아서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했다. 혜영과 주상아 공주, 그리고 비올레타까지 와서 고명한 학자가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마테오 리치에게서 들은 말은 높은 학문이나 고고한 신앙심이 절절히 묻어나오는 고상한 설교가 아니었다.

“흐음. 베이징에서 쫓겨나셨다고요?”

“민망하지만 그러하옵니다, 전하. 다시 가려 하는데 교우들이 하는 말이 뭔가 특이한 것을 황제폐하께 진상하는 편이 좋겠다고 해서 전하께 여쭙습니다. 자명종 시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해서 고민이 많습니다.”

예수회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하는 선교 방식을 선호했다. 아래에서 시작해 위로 향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방식과 정반대였다.

그래서 예수회는 왕이나 귀족들에 대한 선교를 우선했다. 황제를 알현하는 것은 예수회에서 명나라 선교의 성패 여부를 판가름 짓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추시계나 자명종은 이미 황제폐하께서 갖고 계시오. 신기한 것이라면 만 리 밖에서까지 구하고야 마는 성품이시라 다른 것도 대부분 갖고 계실 것이오. 황상께서는 유럽의 기물을 더 이상 신기해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오.”

“최근 스위스에서 용수철을 이용해 작게 만들었다는 휴대용 시계를 구해야겠습니다.”

“아! 휴대용 시계가 얼마 전에 스위스에서 발명됐지요.”

진상품으로 유독 시계에 집착하는 것은 황제에게 가장 어울리는 선물이기 때문이었다. 고대 이래로 연호와 달력을 결정하는 것은 황제의 고유한 업무였다. 명나라 황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예수회가 로마교황청에 요청한 천문과 역법의 전문가가 아담 샬이었다.

“기계적 장치로 움직이는 시계 종류가 신기하긴 하겠지요. 신기한 거라면 거대한 시계 피아노에 장식된 조각처럼 장식품이 움직이는 게 좋겠소. 맞다! 뻐꾹 시계를 진상해보시오.”

뻐꾸기시계는 16세기부터 시계 제작을 시작한 독일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지역에서 19세기에 처음으로 생산했다. 프라이부르크 등에서는 이 지역 특성에 맞춰 나뭇잎과 사슴 등 숲과 사냥에 관련된 조각을 장식했는데 스위스로 넘어가 다양한 장식을 붙이게 되었다.

자동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오르골이나 움직이는 인형이 부착된 것은 시계 제작 역사에서 오래된 일이었고, 이 시기 유럽의 기술로 제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제작과 유행은 시간이 꽤 지나서야 찾아왔다.

“시간에 맞춰 뻐꾸기가 튀어 나와 소리를 지르는 시계입니까? 그런 자명종이라면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나 어울리겠습니다만.”

“황제폐하께서는 이미 자명종을 갖고 계시오. 시간을 알리면서 나무로 만든 동물이 직접 움직이고 소리까지 낸다면, 누구라도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겠소? 물론 처음 볼 때로 제한되겠지만 말이오. 황제폐하께 훌륭한 진상품이 될 것이오.”

명나라와 조선 학자들이 자명종을 신기하게 여긴 것은 시계가 정확한 시간을 표시하는 기계장치여서가 아니었다. 이 시기에는 하루에 30분씩 틀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명종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시간에 맞춰 소리를 내는 기계장치이기 때문이었다. 시계는 이 시대 정밀공업의 꽃이었지만 고산국에서 이미 시계와 자명종을 대량 생산하고 있어서 더 이상 신기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마카오에도 뻐꾹 시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유럽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일단 고산국에서 만들고, 서양에서 만든 것이라고 하시오. 그런 것은 서양에서 만들려면 언제든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오.”

유럽에는 아직 뻐꾸기시계가 없었다. 한 번 보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는 대단히 인상적인 물건이 뻐꾸기시계였다.

정해진 시간에 울린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자명종과 기능은 같더라도 인상은 완전히 달랐다. 이런 것을 유럽에 수출해봤자 유럽에서 금방 베껴서 만들어낼 수 있었다.

“황제폐하께 진상할 뻐꾹 시계 모양을 대충 그려볼까요? 세계에서 하나뿐인 시계가 될 것이오.”

황제 진상용 뻐꾸기시계는 일반적인 나무 재질로 만든 괘종시계와 아예 다른 형식으로 만들기로 했다. 괘종시계 위쪽 창에서 작은 뻐꾸기가 나와서 소리를 내는 것은 나중에 고산국이나 유럽에서 쉽게 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는 서양에 흔한 풍차나 물레방아가 신기해 보일 거여요.”

“그것도 좋겠소. 풍차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물레방아로 합시다.”

비올레타와 다른 사람들이 낸 의견을 반영해가며 이민호가 종이에 연필로 쓱쓱 설계도를 그렸다. 서양식 지붕이 큰 집 밑에 물레방아를 달고 그 반대쪽에 시계를 배치했다. 중간에 강아지와 아이 인형을 그렸다.

뻐꾸기는 창문 두 개 중에서 하나에서 나오게 했다. 다른 창문에서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용, 특히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이 튀어나오게 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뻐꾸기시계가 아니라 황룡 시계로 이름이 붙게 될 것 같았다. 물론 일반 백성들은 무엄하게 황룡시계를 사용할 수 없었다. 어쨌든 황제 진상용이니 온갖 곳에 금박을 입히고 보석을 박아 화려하게 만들기로 했다.

시간을 표시하는 숫자는 일부러 로마자를 새기고 한자를 부기했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부품인 나무 뻐꾸기와 도자기 황룡의 모양은 고산국 최고 장인들이 만들기로 했다. 음량조절 장치도 달기로 했으나, 기본은 일단 최대로 맞춰놓기로 했다.

기계장치인 태엽통은 많이 감을 필요 없이 시계가 하루 반만 움직이면 충분했다. 명나라 황실에서는 당연히 뻐꾸기시계의 태엽 담당 환관을 둘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품에 단순히 기능만 넣는 시대가 아니게 됐군요.”

“뻐꾸기시계처럼 앞으로 고산국의 산업도 새~ 시대, 새~ 나라가 될 것이오.”

지금까지 고산국에서 생산한 것과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머리 좋은 후궁들이 깨달았다. 어쩌면 비단이나 양탄자의 문양을 결정할 때처럼 디자인과 아이디어가 기술보다 더 중요했다.

“특이한 시계가 만들어지겠군요. 선교를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전하.”

마테오 리치가 곰곰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가 완성되면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부딪쳐볼 계획이었다.

“다른 종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고 있소. 나를 이단이라고 욕하지나 마시오.”

“하하! 설마요. 교황 성하께서 예루살렘을 순례하시는데 전하께서 큰일을 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해적들을 잡다 보니 일이 굉장히 커져버렸소.”

베네치아 시녀들이 새강릉 별궁에 머무르며 지중해 무역을 주도하지 못하고 왕도에 온 것은 교황의 예루살렘 순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문제로 교황청 추기경들이 고산국 배를 타고 숱하게 왕도에 들락거렸다.

“전 유럽과 중동이 이번 일에 휘말리게 됐지만, 평화를 위해 한 걸음 힘차게 내딛은 것 아니겠습니까?”

“사고가 안 나면 좋겠지만, 누군가는 그 기회를 노리고 음흉한 시도를 할 것이 분명하오.”

문제는 성직자들은 순교할 기회를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가 예루살렘에서 암살이라도 당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교황 호위작전에 어쩔 수 없이 고산국도 참가하기로 했다.

주상아 공주가 할 말이 있는 듯해서 주목했다. 성숙하고 아름다운 공주님은 잠시 부끄러워하다가 용기를 냈다.

“전하! 제가 황상께 태서유사의 소개편지를 써드리면 어떻겠어요?”

“오! 주상아 공주의 편지라면 진상품도 필요 없이 바로 해결되겠소.”

“고맙습니다, 공주마마. 진작 고산국 왕실에 부탁드릴 것을 그랬습니다.”

노인처럼 보이는 중년 성직자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명나라에서 훌륭한 학자로 존경 받는 마테오 리치지만 선교사로서 순수한 신앙심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표정 같았다.

그래서 이민호는 마테오 리치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마테오 리치가 평생 동정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병원에서 검진을 좀 받으셔야 되겠소.”

“감사하오나 저는 건강한 편입니다만.”

“선교라는 일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된 일이오. 작은 병이라도 치료할 수 있다면 선생이 조금이라도 편해지실 것 아니오? 병원 침대에서 한 이틀 푹 쉬다가 간다고 생각하시오. 진상품 제작에도 며칠 걸릴 것이오.”

“그렇다면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전하. 조선식으로 표현해보겠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큭큭! 됐소.”

마테오 리치가 나이에 비해 너무 늙어보여서 병원에 꼭 데려가고 싶었다. 기생충 외에 몇 가지 병을 몸에 달고 사는 것 같았다.

마테오 리치를 왕립병원 특실에 입원시킨 다음 개인 기업 창업자들을 지원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공조판서가 지원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업종은 창업자들에게 거의 맡겨놓고 있었다. 창업자들의 지식이 제한돼서 그런지 아니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는지 식품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판서! 뻐꾸기시계 제작을 이대로 부탁하오. 황실 진상품이니만큼 이 설계도를 참고해서 최대한 고급스럽게 만들어보시오.”

“진상품과 따로, 도안을 간략화해서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내가 설계한 것이니 얼마든지 만드시오. 그 외에 오르골이나 여러 가지 장치 또는 장식을 부착한 시계를 다양하게 만들라고 하시오.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곳이나 아이들 장난감으로 좋을 것이오.”

“장난감을 무시하는 어른들이 많은데, 자기들이 어렸을 때 뭘 갖고 놀았는지 기억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장난감으로 크게 성공한 기업들이 생기도록 지원해보겠습니다, 전하.”

장난감이라는 말에 용기를 낸 이민호가 탁자 밑에서 상자 하나를 집어올렸다. 길거나 짧은 나뭇조각에 두 줄로 동그란 연결점을 만들어 서로 결합시켜 뭔가 형상을 만들어내는 장난감, 레고였다. 이민호가 2세인 어린 왕자, 공주들과 함께 완성시킨 마차와 오두막도 있었다.

“이건 조립형 장난감이라는 건데. 참 단순하지 않소?”

“굉장히 유치하군요!”

“뭐, 유치하지요.”

“하오나 어린이들에게는 이렇게 단순한 것이 좋습니다. 높은 제작기술이 필요 없어서 새로 창업한 목공회사에서도 쉽게 만들어낼 것입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인기는 내가 보장하겠소.”

여섯, 일곱 살 정도인 왕자와 공주들에게는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갖고 놀 정도라면 비슷한 정신 연령인 너덧 살 아이들에게 아주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그 이하 아이들은 입에 무조건 집어넣으려 해서 금지시켰다.

“요즘 식품회사가 많이 생겼으나 대부분 건어물이나 건포도 같은 건조식품 위주입니다. 종이 포장이 훌륭하긴 해도 쉽게 상하는 식품이 많아 생각보다 교역할 품목이 적습니다.”

“알루미늄으로 통조림 깡통을 준비하고는 있는데, 양산품 제작에는 아직 시간이 좀 걸릴 것이오.”

그 사이 장인들이 제작한 알루미늄 깡통은 안전 따개와 함께 훌륭하게 완성됐다. 그러나 알루미늄을 제련할 때 전기를 어마어마하게 잡아먹어서 깡통 제작비용이 웬만한 내용물보다 최소 100배는 비쌌다.

이 시대 다른 지역, 특히 유럽에서 만든다면 같은 무게의 금값 몇 배가 소요됐다. 은 합금으로 만드는 게 훨씬 싸게 먹힐 정도였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에 나오겠지만 라면 개발도 쉽지 않은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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